임은경 선구자 편집주간, 농학 95
올해 2월 14일 소위 ‘구미 유학생 간첩단’ 사건에 대한 재심에서 법원의 무죄 판결이 나왔다. 이날 서울 서초동 서울중앙지법에서 무죄 판결을 받은 이들 중에는 『야생초 편지』의 저자로 이름이 알려진 황대권 (사)생명평화마을 대표도 있었다. 2002년에 발간된 책 『야생초 편지』는 황 대표가 1985년에서 1998년까지 13년 2개월간 수감생활을 하면서 야생초와 더불어 사색하고 성찰한 이야기를 편지글 형식으로 엮은 책이다.
황 대표는 대학 졸업 후 미국 유학을 떠났다가 방학을 맞아 잠시 귀국한 1985년 여름에 영문도 모르고 안기부에 끌려갔다. 두 달간 남산 안기부 지하실에서 고문 수사를 받고난 후 국가보안법과 반공법을 위반했다며 간첩 혐의로 기소되었고, 무기징역형을 받았다. 하지만 안기부가 거짓으로 꾸민 조서에 대해 그는 아는 바도, 실제로 한 일도 없었다. 미국에서 알고 지냈던 지인이 비밀리에 북한을 방문했다는 한 가지 사실이 빌미가 되어 돌이킬 수 없는 누명을 썼을 뿐.
그로부터 34년의 세월이 흐른 지난해 12월, 검찰이 무죄를 구형했던 결심 공판에서 그는 끝내 눈물을 흘리고야 말았다. “이제야 편히 잠을 자겠다”는 말도 했다. 부당한 국가 폭력의 희생자로 살았던 누명을 35년 만에 완전히, 그것도 국가에 의해 공식적으로 벗게 된 것이다.
“이번 무죄판결은 정치‧사회적으로 ‘반공독재 시대의 종언’을 공식적으로 확인하는 결정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개인적으로는 한 사람의 생애가 외력에 의해 왜곡된 것을 바로잡았다는 의미가 있겠죠. 그걸 바로잡는 데 거의 한 생애가 걸렸는데, 만약 억울함을 밝히는 것에 초점을 맞추었다면 실패한 인생이 되었을 겁니다. 왜곡된 삶을 받아들이고, 그 상태에서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삶을 살려고 노력했어요. 지금 돌아보니 역시 삶은 과정이 중요하다는 것을 절감합니다.”
서른 살, 푸른 청춘의 한 복판에서 어느 날 갑자기 들이닥친 운명은 모든 것을 바꿔놓았다. 서른에서 마흔 넷까지 인생의 가장 황금 같은 시절에 그는 남들은 경험은커녕 상상도 못해볼 시간을 보냈다. 하지만 그의 책 『야생초 편지』에는 자신이 처한 상황에 대한 분노나 원한을 찾아볼 수 없다. 오히려 야생초를 모아 자신만의 화단을 가꾸고, 재배한 풀로 나물을 만들어 수감자들과 나누는 등 수감생활을 즐기는 모습마저 보인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느냐는 질문에 그는 다음과 같이 답했다.
“분노가 없었다면 사람이 아니겠지요. 수감되어 처음 5년 동안은 그야말로 충격과 분노, 허탈과 절망 속에서 지냈어요. 그 5년 동안 내 안에 있던 모든 억하심정과 미몽을 남김없이 소진하고 나서야 새로운 길이 홀연히 열리기 시작했습니다. 야생초를 통해서 말이지요. 운명을 극복했다기보다는, 주어진 운명을 열심히 살아냈다고 할까요. 병에 걸렸을 때 병을 이기려고 하기보다 ‘잘 앓는 것’이 최선의 치료인 것처럼, 내 운명을 받아들이자 비로소 마음의 평화가 찾아왔던 거지요.”
무죄판결의 의미는 ‘반공독재 시대의 종언’
마침내 김대중 정부가 들어선 후인 1998년, 13년 2개월 만에 그는 감옥을 벗어났다. 석방은 정부가 했지만, 양심수 석방을 응원한 수많은 시민과 단체들의 노력이야말로 무시할 수 없는 원동력이었다. 그중에 가장 큰 역할을 한 것이 <민가협>과 <엠네스티>였다. 국제 펜클럽에서도 그를 명예회원으로 등록하고 지원해주었다.
황 대표는 특히 유럽의 엠네스티 지부들과 연결이 되어 수감 기간 동안 수많은 편지를 주고받고 지원을 받았다. 출소 후 이들의 초청으로 영국, 프랑스, 네덜란드, 노르웨이 등지를 방문해 후원했던 사람들을 만났고, 이 여행의 기록은 2003년 출간된 『꽃보다 아름다운 사람들』(두레출판사)에 자세히 나와 있다.
유럽 방문 후에는 영국에 유학해 농업생태학 등을 공부하고 돌아와 생태학, 인문학적 철학과 사유를 담은 여러 권의 책을 펴냈고, 전남 영광군 태청산 자락에 생명평화마을을 일구며 작가로, 생명평화운동가로 치열한 삶을 살아왔다. 영광탈핵공동행동 대표, 전국생태마을공동체네트워크 공동대표, <녹색평론> 편집위원 등으로 바쁘게 살며 수많은 사회적 활동을 해왔지만, 국가 권력이 그에게 붙인 ‘간첩’이라는 딱지는 언제나 그를 따라다녔다. 2017년 9월, ‘구미 유학생 간첩단’ 사건에 대한 재심 청구가 시작되기 전까지.
“1986년 판결 이후 30여년의 세월이 흘러서야 재심 청구를 하게 됐지요. 그동안 민주화운동 보상법(민주화운동관련자명예회복및보상등에관한법률, 2000년 제정)이 만들어져 많은 사람들이 명예회복을 하고 보상도 받았는데, 우리만 거기서 빠져있었어요. 똑같은 민주화운동을 했어도 유독 북과 연결된 부분(국가보안법, 반공법)만은 문을 열어주지 않는 것이 그동안의 사회 분위기였거든요. 하지만 이제는 시간이 충분히 흘렸고, 잘못된 것은 바로잡아야 된다는 생각으로 재심을 청구하게 된 것이죠.”
무죄 판결 이후 황 대표는 국가를 상대로 민‧형사 손해보상 청구소송을 진행 중이다. 형사는 수감일수에 대한 보상, 민사는 가족의 피해에 대한 보상이다. 그동안 민주화가 진전됨에 따라 잘못된 과거사를 바로잡으려는 노력이 이어져왔지만, 특히 최근 들어 이와 관련한 법원의 재심 및 무죄 판결이 잇따르고 있다. 작년과 올해 사이에 독재 정부 시절 국가보안법과 반공법 위반 혐의로 수감됐던 피해자나 불법 체포‧감금 피해자, 여순사건 민간인 희생자, 부산 미문화원 방화사건 관련자 등이 잇따라 재심에서 무죄 판결을 받고 있다.
안기부 지하실에서 겪은 이야기, 『60일』(가제) 집필 중
“유신과 긴급조치 상황에서 대학을 다닌 나는 학창시절 내내 유신반대 데모에 참여했어요. 74학번이니까 1975년 김상진 열사의 의거도 지켜봤고, 1980년 광주항쟁 때는 학내 활동 관계로 수배되어 4,5개월을 도망다니다 결국 잡혀서 유치장 생활을 하기도 했죠. 농대 학생회가 아니라 주로 서울에서 소그룹 언더 써클 활동을 했어요.”
군 전역 후 부전공으로 정치학을 공부하고, 1982년에 졸업한 뒤 그해 여름에 미국 유학을 떠났다. 언론이 통제되고 자료가 부족한 한국 사회에서, 사회과학을 공부하고 후배들을 양성하는 데 그는 물리적인 한계를 느꼈다. 국내외 정세를 이해하기 위해서 정치학을 보다 깊이 공부할 필요가 절실했고, 유학을 결심하게 됐다. 아이러니하게도 그가 미국 유학을 갈 수 있었던 것은 그를 감옥에 잡아넣은 전두환 정권 덕분이었다.
“1981년에 정부가 해외유학자유화 조치를 내리더라고요. 갑자기 유학을 가게 되니까 토플점수 없이 갈 수 있는 대학을 찾았고, 그게 미국 뉴욕에 있는 사회과학대학원(NEW SCHOOL FOR SOCIAL RESEARCH)이었죠. 가보니까 작은 주립대학인데 한국 학생들이 수백 명이 와 있어요. 갑작스런 유학자유화 조치 덕분에 공부하러 온, 나와 비슷한 상황의 학생들이었죠. 거기서 운명의 그 친구들을 만난 거죠.”
인터뷰 당시 황 대표는 1985년 여름 안기부 지하실에서 보낸 60일간의 이야기를 담은 책의 집필을 마무리하는 중이었다. 이번 무죄판결에 대해 그가 ‘반공독재 시대의 종언’이라고 말한 것처럼, 바로 그 시대를 증언하고 새로운 미래를 향해 나가자는 내용을 담은 책이다.
책 제목은 두 가지를 놓고 고민 중이라고 했다. 하나는 『60일』, 또 하나는 『빨갱이도 국민이다』이다. 60일은 그가 안기부 지하실에서 수사 받던 기간이다. 두 번째 것은 너무 ‘센’ 느낌이라 주변의 반대가 많단다. ‘빨갱이도 국민이다’는 책 속의 한 챕터의 제목이자, 책을 통해 그가 말하고 싶은 메시지이기도 하다. 남북 분단 이후 국가는 수많은 가짜 빨갱이를 만들어냈고, 그들을 비국민으로 취급했기 때문이다.
“개인적으로는 고문에 의한 트라우마를 치유하고자 하는 의도도 있어요. 치유의 첫 단계는 내 안에 응어리진 이야기를 털어놓는 것이거든요. 그러나 단순히 고문을 폭로하는 작업은 이미 많은 이들이 했죠. 나는 나의 경험을 바탕으로 우리사회가 어떻게 이념대결을 이용해 인권을 탄압하고 잘못된 정치문화를 만들었는지를 밝히고, 굴곡진 한국현대사를 되돌아보고 싶었어요. 반공콤플렉스는 누구나 아는 얘기지만 두려움으로 인해 함부로 얘기하지 못하는 주제잖아요. 하지만 나는 이미 ‘버린 몸’이라 마음 놓고 얘기하는 겁니다. ‘더 이상 이런 짓을 그만 두고 정의로운 새 사회를 만들자’는 의미로요.”
코로나 세계지도는 ‘면역력 세계지도’
단순‧소박한 대안적 삶 선택해야
사실 이번 인터뷰에서 황 대표에게 던진 질문은 크게 두 가지였다. 하나는 35년 만에 다시 받은 무죄판결의 의미, 또 하나는 현재 한국사회와 전 세계의 가장 큰 이슈, 코로나19 사태를 바라보는 시각. 오랜 기간 생태공동체 운동을 해온 활동가이자 인문학과 철학에 조예가 깊은 그는 새겨 들을만한 의견을 들려주리라 생각되었고, 그 예상은 틀리지 않았다.
“우리는 지금 코로나 정국을 통해 많은 것을 배우고 있어요. 그동안 인간은 자신이 ‘만물의 영장’입네 하고 다른 생물종을 함부로 죽이고 자연을 착취, 파괴하며 살아왔죠. 하지만 이번 사태는 인간이 슈퍼 생명이 아니라 다른 생물들과 같은 생명의 하나임을 깨우쳐주고 있어요. 생태계 먹이사슬의 최상위 포식자는 인간이 아니라 바이러스에요. 지금의 상황은 인간에게 지난 일을 반성하고 겸손하게 다른 생명들과 공존하며 살라는 경고입니다.”
황 대표는 최근 언론에 보도된, 인도 뉴델리에서 160km 떨어진 히말라야 산꼭대기에 눈이 덮인 모습이 선명하게 보이는 사진을 언급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대기오염 때문에 볼 수 없었던 광경이라고 했다. 경제활동을 중지하니 하늘과 강이 맑아지는 것이다. 그것도 전 세계적으로. 공장이 멈추고 차량 통행도 크게 줄었으니 당연한 일이다. 우리나라 역시 올 봄에는 황사나 미세먼지 이슈가 거의 없다. 미세먼지 수치가 크게 줄어든 것은 물론, 당장 창문을 열고 숨을 쉴 때 공기가 분명히 달라졌다.
“나는 이번 일을 계기로 자연친화적이고 단순‧소박한 삶, 대안적인 삶을 선택하는 사람들이 늘어날 거라고 봐요. 국내외적인 환경도 대안적인 삶을 유리하게 만드는 쪽으로 바뀔 거고요. ‘세계화’에 제동이 걸리고 국제 간 교역이 줄어들기 때문에, 그 대안으로 지역 간 연대나 마을의 부활, 자립 농업 등이 주목받을 수밖에 없지요.”
서구 선진국에 대한 환상이 깨어지고 있는 점도 황 대표는 지적했다. 서구가 선진국이 된 것은 사실 우월한 무기체제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제 거대 무기체제와 글로벌 경제체제에 의지해 자국의 국민을 행복하게 해주겠다는 이데올로기가 허구로 드러나고 있다. 코로나 사태 이후로는 미국과 일본 등 일부 국가의 제국주의적 행태가 현저히 약화될 것이며, 무력이 아니라 ‘자연력’이 선진국의 지표가 될 것이라고 그는 말했다.
“코로나 세계지도는 바로 ‘면역력 세계지도’에요. 색깔이 옅은 지역은 미생물과 바이러스에 면역력이 높은 지역인 것이죠. 우리 시선으로는 후진국이라고 하는 나라들이지만, 자연 친화적인 삶을 사는 곳들입니다. 따라서 면역력을 높이려면 자신의 몸을 조금 더 자연에 개방하는 태도로 살아야 하며, 인구가 집중된 대도시보다는 지방소도시나 시골에 살아야한다는 것을 알 수 있지요.”
‘코로나 바이러스 막았다’ 자만하면 큰 코 다칠 것
코로나 바이러스는 사실 위기에 빠진 인류문명에게 ‘구원의 메시지’나 다름없다고 황 대표는 말했다. 이번 일이 없었다면, 이대로 가다가는 (그는 영어의 관용구 ‘business as usual’을 인용했다) 지구는 앞으로 몇 십 년도 채 버티지 못했을 거라는 것이다. 과학자나 환경운동가들이 기후 위기 등의 경고를 계속 던졌지만, ‘목구멍이 포도청’이라는 속담처럼 한번 굴러가기 시작한 자본주의 체제의 수레바퀴는 아무도 멈추지 못했다.
그러니 자연이 바이러스를 던져주었다는 것이다. ‘이래도 정신 안 차릴래?’ 하고. 이 정도의 충격이 아니면 사람들은 바뀌지 않을 테니까. 치사율로 보면 코로나는 아주 가벼운 충격에 속한다. 에볼라 바이러스처럼 치사율 7,80% 이상 되는 것이 왔다면 온 세계가 엄청난 패닉에 빠졌을 테니 말이다. 말하자면 인류 문명이 일종의 백신을 맞은 셈이다.
“그런데 이 기회를 엉뚱하게 읽고 방역체계 강화를 위해 전체주의적 통제의 길을 간다면 도리어 멸망을 앞당길 뿐이겠지요. 개인의 선택의 여지가 없는 강제 방역은 자연스런 면역력을 오히려 떨어뜨리니까요. 지금 사람들의 삶이 도시에 밀집해서 사니까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이는 거지요. 이곳 전라도는 확진자가 20명밖에 안 되고, 서울 갈 때 말고는 마스크도 별로 안 쓰고 다녀요. 시골 사람들은 면역력이 더 좋아지고, 서울 사람들은 면역력이 더 약해지고 있죠.”
그의 말에 따르면, 우리나라는 지구상에서 가장 통제가 심한 나라에 속한다. 남북과 좌우 이념 대립으로 70년 동안 통제 사회를 유지해왔고, 이것이 지금의 방역 체계에도 그대로 반영되고 있다. 아예 확진자가 없다고 하는 북한은 모두가 아는 통제국가이지만, 자유주의의 탈만 쓰고 있는 남한도 사실은 그에 못지않다. 그런데 이 시스템의 문제는 통제만 하면 다 되는 줄 알고 사람들이 면역력을 기를 기회를 안 준다는 것이다. 장기적으로 보면 오히려 더 위험할 지도 모른다. 코로나는 막았을지 몰라도, 앞으로 훨씬 심한 변종이나 치사율이 높은 바이러스가 나타날 경우 속수무책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장기적으로 보면 통제를 하는 한편으로 어떻게 사람들이 면역력을 기를 것인가를 정책적으로 고려해야 해요. 인구 분산, 시골 생활, 생태적인 삶, 자연과의 지속적인 접촉이 그 해답이죠. 이런 것들을 정부가 적극 권장하고 정책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도시에다 몰아넣고 철통같이 방어하는 방법으로는 앞으로 다가올 더 독한 변종 바이러스를 당해낼 수 없어요. 한번 뚫리면 속수무책일 거예요. 마치 단작농업을 하다가 예상치 못한 병에 걸리면 다 죽어버리는 것처럼 말이죠. 지금 코로나 바이러스 막았다고 해서 자만하면 절대 안 됩니다.”
그는 현재 한국인들의 주거 형태 역시 위험 요소가 높다고 지적했다. 세계적으로 유례가 없을 정도로 아파트 거주 비율이 높은 한국. 철저하게 외부와 차단된 공간인 아파트에서는 면역력을 기를 곳이 없다. 대규모 공장식 축산업의 가축들과 다를 바가 없다. 옴짝달싹할 수 없는 공간에서 사육당하는 동물들은 병을 견딜 능력이 없으니까 항생제와 소독약을 대량 투여해 억지로 병을 막는다.
“마침 올해 안에 쓸 예정인 다음 책의 주제가 ‘문명의 새판짜기’예요. 생태문명으로 변화해야 하는데 어떻게 새판을 짜야 할지를 고민하며 쓴 글들을 다듬고 있어요. 지금 한국이 방역을 잘 한다고 외국에서 칭찬하니까 일부 우쭐한 기분에 취한 사람들이 있더군요. 하지만 방역 잘한다는 것이 자랑이 아니에요. 케이지 속 닭처럼 갇혀서 사는 이 시스템을 고쳐야 합니다.”
함께 농사짓고 사는 생태공동체 꿈꾸는 ‘다른세상연구소’
황 대표의 인터뷰를 준비하면서, 그가 『선구자』와 매우 오랜 인연을 갖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1999년 12월, 영국 런던’이라고 되어 있는 기고문은 그가 출소 후 엠네스티의 초청으로 유럽을 방문한 경험을 담고 있었고, 런던 유학에서 돌아온 뒤에는 선구자와 인터뷰한 기사도 있었다. 그 뒤에도 그는 여러 차례 선구자 기고 요청 때마다 귀한 글들을 보내 화답해주었다.
예전 선구자 인터뷰 기사에서 눈에 들어오는 부분이 있었다. 향후 계획을 묻는 질문에 “농업을 기반으로 한 생태공동체를 만들고 싶다”고 답한 대목이다. 거의 20년 전에 했던 말인데, 실제로 황 대표는 지금까지 그 말을 실천하며 살아왔다. 영광 태청산 자락에 생명평화마을을 조성하고 생태공동체를 만들기 위해 노력해왔고, 작년부터는 <바우 다른세상연구소 (Bau Institute)>를 만들어 새로운 돌파구를 모색하고 있다.
“나는 철 든 이래로 野人으로서 우리 사회의 행복과 발전을 위해 한 줌의 흙이 되겠다는 꿈을 품고 있었고, 그 꿈을 한시도 잊은 적이 없어요. 시대상황에 따라 혁명가가 되기도 했고, 작가가 되기도 했고, 농사꾼이 되기도 했고, 반핵운동가가 되기도 했을 뿐. 대학 신입생 시절 접했던 함석헌 선생의 사상에 영향 받은 바가 컸지요. 그분이 늘 이야기했던 것이 ‘들사람 얼’인데, 나도 저분처럼 들사람으로 살아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황 대표의 생태공동체 실험은 여전히 진행 중이다. 사람들의 의식주준과 사회제도가 생태공동체를 이해하고 실천하기에는 시간이 더 필요할 것 같다는 판단이다. 향후 몇 년간은 기본적인 시설과 젊은이들을 위한 경제 대책 등 시스템을 보완해 ‘다른세상연구소’의 실험을 지속할 계획이라고 했다. ‘꿈이 있는 사람의 얼굴보다 빛나는 것은 없다’는 말이 자꾸 생각나는 것은 왜일까. 어떤 상황이 되든, 어떤 일이 닥치든, 그의 의지는 뚜벅뚜벅 제 길을 걸어 꿈꾸던 곳에 도달하지 않을까.
마지막으로 김상진기념사업회 회원들에게 한 말씀을 부탁드렸다.
“우선 지금 닥친 바이러스 정국을 슬기롭게 이겨내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김상진 학형이 죽음으로써 전한 ‘박정희 독재’를 완전히 끝장내고, 서구 선진국들이 부러워할만한 새로운 생태적 민주주의 국가를 만드는 일에 앞장서 주시기 바랍니다.”
임은경 _ 대학 졸업 후 인터넷 신문 ‘민중의소리’ 기자로 일했다. 남보다 조금 더 잘하고 가장 즐겁게 하는 일이 글쓰기여서, 아무래도 이것이 평생의 업이 되지 싶다. 저마다 다양한 사연을 안고 다양한 모습으로 살아가는 인간들의 이야기에 깊은 관심이 있다. 김상진기념사업회에서는 선구자 편집주간을 맡고 있다.
(atree12fly@daum.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