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병권 (이야기농업연구소장, 농생물 79)
안병권 이야기농업연구소장이 영화 <1975. 김상진>을 제작하고 있다. 독립영화관에서 상영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100분 분량의 다큐와 극을 결합한 영화이다. ‘최종 산출물도 중요하지만 제작 과정 또한 영상의 시대에 더할 나위 없는 콘텐츠라고 생각한다’는 안 소장은 페이스북과 크라우드펀딩 ‘오마이컴퍼니’ 홈페이지를 통해 지금까지 40여 건의 제작 소식을 올리며 대중과 호흡하고 있다. SNS에 올린 그의 이야기를 갈무리해 독자들과 김상진 영화 제작 소식을 나누고자 한다. (편집자 주)
2020년 1월 15일
[제작일기] 기록과 영화, 두 바퀴로 굴러가기
외부로부터의 빛, 내부 환경을 고려해서 인터뷰 대상자 자리를 정한다. 카메라 3대로 세 가지 시점을 확보한다. 장 감독이 큐 사인을 주면 자리에 앉는다. 내 역할은 인터뷰 할 사람이 최대한 편안하게 이야기하도록 도움을 주는 것이다. 질문과 웃음, 공감, 끄덕끄덕…….
김상진 열사의 큰형님 김상운 님과 열사의 한해 선배로 써클(한얼)도 같이하고 생활도 같이 나눈 조봉환 선배 인터뷰를 마쳤다. 분당과 용인, 두 분 댁에서 모처럼 즐겁고 유쾌하게 이야기를 나누었다.
“큰 형님의 인생입니다.”
“선배님의 인생입니다.”
내가 던진 첫마디다. 상진형의 삶은 결국 가족이나 가까운 선배의 삶으로 직결되어 녹아들었기 때문이다. 두 분의 지금 모습은 각자가 살아낸 몫이겠지만, 각각의 연결고리에 촘촘히 박혀있을 회한은 김상진의 서사에서 매우 중요하다.
인터뷰와 이후 진행될 촬영현장에서 건져낸 이야기와 장면들은 사진과 글, 영상으로 재구성 할 예정이다. 인터뷰 Book, 제작일기, 영상인물사전 같은 콘셉트로 묶을 생각이다. 생생하게 재구성해서 후원하신 분들과 관객들에게 나눠드릴 것은 나눠드리고 역사의 기록으로 남길 것은 누군가 쓰기 편한 자료의 형태로 매듭지을 것이다.
영화는 영화고 기록은 기록이다. 기록과 영화(이야기)라는 두 바퀴로 굴러가기. 그렇게 ‘김상진의 의미’를 영원히 살려내는 것. 훗날 또 누군가가 지금 우리가 작업한 결과를 가지고 ‘김상진의 의미’를 더 풍부하게 해석해서 재구성할지 모르는 일이다.
45년 전. 스물여섯, ‘짧지만 영원히 사는 길’을 택한 한 청년의 삶에 징검다리가 되는 것.
2020년 1월 16일
[제작일기] ‘너무 고되게 살았어’ – 인터뷰
“한 삶을 살면서 뭐가 제일 즐거웠어?”
“뭐가 제일 행복했지?”
“남편이 묻는데 그런 장면이 떠오르지 않는 거야.”
“다시 살면 어떡할 꺼야?”
“나 다시 살기 싫은데.”
60대 중반의 김창순 선배가 울컥 눈물을 훔치면서 이야기를 한다. 이병호(농대75), 김창순(농대75) 선배의 인터뷰를 진행했다. 병호 형 집무실(aT센터 사장실)에서 대화형 인터뷰였다. 내가 묻고 두 분이 답하고 서로 이야기 나누고.
1975년 신입생, 대학에 입학한지 한 달 남짓. 4월 11일, 농대 교정에서 벌어진 김상진 열사의 할복의거는 그 자리에 있던 두 사람에게 파란만장의 시작이었다. 방금 전까지 고3 수험생, 이제 막 시작한 대학 새내기. 그 경계점에서 의도치 않게 맞닥뜨린 김상진의 죽음은 어떤 의미였을까?
병호 형이 당시 현장 상황을 자세히 볼펜으로 그려가며 설명했다. 각자의 삶에서 꺼낸 이야기 보따리로 시대의 질곡과 역사의 뒤안길을 어루만졌다. 전형적인 서울내기 창순 선배의 치열한 삶의 여정은 제작진의 눈시울을 붉게 만들었다. 그녀의 트라우마의 근원은 ‘죽음’이었다.
새내기 눈앞에서 벌어진 상진형의 죽음, 가슴에 담고 보낸 대학생활, 묵직한 부채의식, 견딜 수 없는 어떤 자책감……. 학보사 수습기자로 당시 경찰 둘에 의해 집에서 연행되어 김상진 유서 소지 여부로 취조 받았다. 집안은 발칵 뒤집어졌다. 삶의 궤적은 전혀 다른 방향으로 창순을 이끌었다. 상진형의 의로운 죽음에 무언가 동행해야 했다. 농촌현장으로 내려가 활동한다. 호남광주 가톨릭농민회에서 활동하면서 서서히 트라우마를 벗어나나 싶었는데 5월 광주항쟁이 눈앞에서 벌어졌다. 우리 정치현실의 모순점이 미국에 있다는 사실을 깨달으며 다시 ‘죽음’의 실재가 겹겹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나이를 먹어가고 아픔이 옅어지나 싶을 때마다 분신, 투신, 고문사, 의문사 등이 이어지고. 60살 무렵에는 3백여 명의 학생들이 진도앞바다에서 죽어나가는 세월호 사건이 터진다. 이 일련의 궤적을 이야기하면서 창순 선배는 눈물을 흘렸다. 상진형의 죽음에서 시작된 여정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그녀는 지금 세월호 특별조사위원회 자문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끝으로 이 영화를 보게 될 관객들에게 한마디 했다.
“각자가 처한 조건에서 최선을 다하는 것은 중요하지만 즐겁고 신나게 재미있게 문제를 풀어가면 좋겠어요. 죽지 말고, 촛불처럼이요.”
상진 형을 보내고 난 이후 치열하고 진지하게 고된 삶을 살아낸 두 분에게 경의를 표합니다.
전날 15일 저녁에는 조봉환 선배(67)와 신경준(76), 이범권(75), 이병호(75)와 제작진이 함께 한얼 번개 미팅 겸 단체 인터뷰 촬영을 했다. 대학생활 내내 서클 ‘한얼’은 ‘김상진 생각’의 서식처로 작동한다. 영화에서도 중요하게 다뤄진다. 한얼 노래악보와 여러 가지 자료, 상황들을 얻었다.
2020년 2월 7일
[제작일기] ‘기록’이 새삼스러워지는 요즘
“1970년대는 어떤 의미이고 어떻게 살아내셨나요?”
김상진 영화는 현실적이며, 실재하는 의미로 1970년대를 ‘우리들의 생활’ 곁으로 품어 올리는 마중물로 준비되고 있다. 지금을 살아가는 민주공화국 시민들의 평화와 통일, 행복의 길라잡이로 역할을 할 수 있으면 좋겠다. 시선은 김상진을 따라가지만 ‘1970년대’라는 시·공간과 ‘2020년 지금’이 앞서거니 뒷서거니 혹은 나란히 걸어가면서 맞장구친다.
1970년대 마지막 학번인 내게 김상진과 그해의 오둘둘은 전설이었다. 김상진 의거를 막무가내로 수습하고 박정희 유신정권은 1975년 5월 13일, 긴급조치 9호까지 발동시켰다. 내심 “이 정도면 더 이상 까불거나 대드는 놈들은 없을 거야” 생각했으리라.
하지만 그 무렵 동숭동 마로니에공원에서는 김상진 장례식을 위한 모임이 점조직으로 준비되고 있었으니. 마침내 5월 22일, 이제 막 관악으로 캠퍼스를 옮긴 서울대에서 어느 누구도 예상치 못한 대규모 학생시위가 벌어진다. 이른바 오둘둘 사건, 김상진 장례식이었다.
양평에서 유영표 선배(인류학과68, 양평경실련 대표) 인터뷰를 진행했다. 1970년대를 오롯이 살아낸 심정을 첫 질문으로 많은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오둘둘의 OB팀. 김근태, 신동수, 유영표, 채광석, 채만수, 최규성, 유상덕, 이호웅. 메모지에 이름을 적어주셨다. 이들 중 김근태, 채광석, 유상덕 님은 이미 고인이 되셨다.
이 땅의 민주화를 위해 헌신하셨던 선배님들의 고단한 삶에 경의를 표한다. 유영표 님의 인생역정을 들으면서 이렇게 한 세상, 한시대가 흘러가는구나 싶었다. 앞모습, 옆모습에서, 먼저 가신 동지들을 향한 안타까움에서, 이만큼 살아지게 된 즐거움을 표하는 모습에서 1970년대가 보였다. 김상진이 보였고, 같이했던 선후배들이 묻어났다. 모쪼록 건강, 건강 하시기를 바라면서.
제작진은 인터뷰를 비롯해 영화제작 과정의 자료들을 또 다른 콘텐츠로 만들 생각이다. 영화로 뽑아 쓸 부분들은 영화에 쓰고, 남은 부분들은 차근차근 전후좌우, 맥락 있게 정리해서 생생한 영상기록과 출력 기록물로 재구성해서 후세대에 남길 생각이다.
내 나이도 벌써 60이다. 선배들의 연배도 점점 높아져간다. 지금이야말로 1970년대와 온몸으로 맞장 뜬 기개와 생생한 삶을 명징한 기억 속에서 건져낼 절호의 기회다. 여기저기에 묻혀있는 파편의 역사를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지는 역사’로 건져 올리는 것이 내 임무라면 임무다. 영화 <1975. 김상진>은 그래서 두 마리의 토끼, 아니 세 마리의 토끼를 동시에 모는 중이다. ‘기록’이 새삼스러워지는 요즘이다.
2020년 2월 12일
[제작일기] 조사(弔辭), 조시(弔詩)
“원본을 가지고 있습니다.”
오둘둘 회원 장광서 선배님이 단톡방에 사진 한 장을 올려주셨다. 1975년 5월 22일, 김상진 열사 장례식에서 낭독하고 애도한 조사와 조시였다. 내일 원본을 가지고 인터뷰 모임에 참석한다 하니 파일에 녹아든 45년 전 이야기를 들을 수 있을 터. 영화 제작진으로서는 중요한 사료를 얻었다. 고마운 인사를 표했다.
기회다 싶었다. 비가 추적추적 내리기에 한 번 두 번, 번갈아가며 읽고 또 읽었다. 김상진 형의 양심선언문과 대통령에게 드리는 공개장도 마음으로 그렸다. 울컥울컥. 1970년대 초중반 선배들은 하나같이 글을 어찌 이리 잘 쓴 거지? 명문 중의 명문이로다.
조사(弔辭)
동지(同志)여!
그토록 어렵게, 그토록 숨 막히게 죽음으로 그대는 사랑을 완성했다. 척박한 이 터전을 붉디붉은 한 점 피로써 그대는 사랑하는 법을 가르치고, 드디어는 그대 東學年 곰나루에서 비롯된 민중사의 현 단계를 혼신(渾身)의 힘으로 뛰어 넘었다. 그렇다 동지여! 너의 죽음은 형편없는 슬픔이 아니라 우리에게 화려한 소식이 되었다. (이하 생략)
四月 鎭魂歌
– 故 김상진兄 弔詩
(생략)
四月, 오 노란 개나리 겁 없이 피던 날
친구여, 네가 버린 것은 生命이 아니다
굶주림에 떨며 연명해 가던 끈질긴 목숨이 아니다.
어린 回想의 하늘에 서슬 푸른 칼을 갈며
비가 내리면, 흐느낌처럼 비가 내리면
친구여! 내가 우는 것은 이제 텅 비인 설움이 아니다
(이하 생략)
1975년 5월 22일
故 김상진 烈士 장례식 推進委員會
2020년 2월 13일
[제작일기] 떳떳한 1970년대, 김상진과 오둘둘
2월 13일 (목), 관악캠퍼스에서 박원순 서울시장과 김상진 장례식 시위의 주역인 오둘둘 선배님들을 모시고 인터뷰 및 스케치 촬영을 했다. 스탭들과 나는 11시 미팅룸에 모여 사전에 동선을 파악하고 촬영 콘셉트를 이야기했다. 12시 반 자하연 식당에서 선배들과 점심을 하고 촬영 시작.
중앙도서관 앞 아크로폴리스 광장을 선배들이 걸어온다. 떳떳한 1970년대가 보무당당하게 내 앞을 지나간다. 암울했던 ‘박정희 1970년대’의 심장을 향해 찔러간 그 ‘떳떳함’ 말이다.
차담회, 박원순 시장 1:1 대담 인터뷰, 김상진 추모비로 옮겨가 묵념 및 회상, 중앙도서관 옥상에서 박 시장 스케치 촬영. 교문에서 1975년 5월 22일 그날의 대치상황 및 각자의 역할, 남부경찰서 구치소에서의 일화 등을 끝으로 현장 촬영을 마쳤다. 박 시장은 시청으로 돌아가고 선배님들과 미팅룸에서 회상 장면을 개인별 기록으로 찍었다. 김상진기념사업회 정근우 회장이 밥을 사서 스탭들과 저녁을 먹고 김제에 도착하니 10시였다.
김상진 추모사와 조시 원본을 대학 화장실 라디에이터 뒤에 숨겼다가 감옥살이 1년을 마치고 나와 찾았다. 45년간을 간직하고 있다가 가지고 나온 장광서 선배의 스토리는 그 자체로 드라마였다. 선배는 그 자료를 김상진기념사업회에 맡겼다.
연성수 선배는 김상진의 죽음이 어떻게 사람들의 운명을 변화시켰는지 그 과정을 찾아가는 시선이 영화 전개에 매우 의미로울 것이라 했다. 연 선배의 말씀을 ‘세 아들과 세 어머니’ 이야기를 통해 숙연·통쾌하게 들었다. 가난한 홀어머니, 품팔이로 자식을 공부시켜 서울대에 보냈다. 착한 아들은 군대를 가면 어머니 생계가 걱정 되어서 ROTC에 자원했다. 장교 월급으로 어머니를 봉양하기 위함이었다.
그렇게 RT 학생이던 아들이 어느 날 덜컥 감옥에 가고, 학교에서 쫓겨났다. 아들은 감옥 안에서 우리 엄마 얼마나 마음 아프실까 걱정했는데 한 달여 만에 면회장에 나타난 엄마는 환하게 웃으셨다. “아들! 에미 걱정마라”, “어이쿠 우리아들 쓰담쓰담!” 그런 엄마를 보고 감방으로 돌아오는 내내 더할 나위 없이 편하고 담대해졌다. 처음에는 당혹했지만 재판 따라다니고 사람들 만나고, 아들 옥바라지 하면서 내 아들이 가난하고 어려운 이들을 위해서 한 일이구나 판단이 드셨던 어머니. 그 이후 어머니 세 분은 평생을 같이 활동하시고 뜻을 새기셨다.
박원순 시장의 부모님도 마찬가지. “결국은 자식 편이셨어요.” 경남 창녕, 학교 문턱도 못가보신 농사짓는 엄마, 아버지셨다. 서울대에 들어간 아들이 자랑스러웠다. 그런데 입학한지 두 달 반 만에 잡혀가고, 학교에서 제명당했다. 얼마나 황망하였을까? 그 상황을 감당하고 아들을 품었던 어머니였다.
김상진의 죽음은 많은 사람들의 운명을 바꿨다. 자식들을 변화시켰고, 자식들은 어머니들께 영향을 끼치고, 어머니들은 다시 그 주변의 사람들에게 선한 기운을 퍼뜨리셨다. 그 열망은 퍼지고 퍼져 결국 나라를 이나마 민주화시키는 원동력이 되었다.
이런 사례를 찾아 추가 인터뷰하기로 마음먹었다. 이른바 김상진이 변화시킨 사람들을 찾아가는 여정이 추가되는 것이다. 이런 일들은 꼭 이번 영화작업이 아니어도 누군가는, 어디선가는 해내야 할 일 아닌가 하고 70년대 막내학번으로 곱씹어본다.
선배들의 인터뷰 과정에서 김상진 영화는 점점 깊어간다. 추가로 얻는 자료와 정보, 인물들의 삶이 서사를 풍성하게 만든다. 거기에 제작진이 생각하지 못한 에피소드와 미루어 짐작해야 할 것들이 보태지기 때문이다. 일거리들이 늘어난다. 함께 한 김상진기념사업회 정근우 회장과 이주한 사무국장과 스탭들에게 고마움 마음을 전한다.
2020년 3월 2일
[제작일기] 인터뷰 프리뷰 도착하다
프리뷰(Preview)는 영화를 개봉하기 전에 관계자를 초빙하여 미리 보게 하는 일이다. 제작자나 감독은 이를 통하여 관객의 반응을 살피고 결과를 최종 편집에 반영한다. 인터뷰에도 프리뷰 작업이 있다. 오늘 그 결과물이 도착했다. A4로 140여 페이지 분량이다. 이른바 인터뷰 프리뷰다. 12월부터 금년 2월까지 6팀(14명)의 인터뷰를 마쳤다.
안종건 전 회장님, 김상운 큰형님, 이병호, 김창순 선배, 유영표 선배님, 조봉환 선배님, 박원순 시장님, 오둘둘 이호웅, 정병문, 연성수, 장원관, 정광서, 황선진, 배기호 님.
인터뷰 프리뷰. 촬영 카메라별 인터뷰 내용을 토씨 하나 안 빼고 텍스트자료화 한 것이다. 인터뷰를 진행하면서 제작진은 여러 가지 자료, 단서, 모티브, 사실 확인 등 소중한 성과를 얻었다. “아하!” 하는 깨달음도 있었고, “음~ 요런 부분은 확실히 부족했네.” 느끼기도 했다.
이 자료는 세 측면으로 유용하게 쓴다. 1차로 영화 시나리오에 반영한다. 2주 정도 제작진이 나눠 보고 구성 토론을 진행한다. 시나리오 업그레이드 작업이다. 영화 <1975.김상진>은 촬영 진행과 동시에 초기 대본을 상당 부분 수정할 계획이다.
2차로 편집 팀에서 영상자료 구분, 정리, 이어붙이기, 자르기 등을 할 때 내비게이션 역할을 한다. 필요한 내용이 어떤 카메라, 어떤 촬영본, 어디쯤에 있는지 알려주기 때문이다. 3차로는 인터뷰 내용을 정밀하게 정리하고, 제작일기 같은 추가 글 재료와 사진자료들을 모아서 ‘한권의 책’으로 출간할 수 있다. 김상진 영화의 전체 과정을 스크린 이외에 책으로도 맛보는 여백이다. 작업해준 이주희 프리뷰 이 대표에게 고마움을 전한다.
2020년 4월 7일
[제작일기] 김상진 열사 제45주기
열사들이 몸 바쳐 이루고자 했던 조국의 민주주의가 4월 하늘에 펄럭입니다.
김상진 열사 제45주기 추모식 잘 마쳤습니다. 열사가 계신 곳의 정황도 중요한 씬이라 장영철 감독과 함께 참석하여 이천민주화운동기념공원을 스케치 촬영했습니다.
이번 주 토요일, 4월 11일. 열사가 가신 그날에는 수원상상캠퍼스(구 서울농대)를 촬영할 계획입니다. 코로나19가 조심스럽기는 하지만 철저하게 준비해서 기본 촬영 작업은 해나갈 생각입니다. 모두 건강 건강, 건승을 빕니다. ^^
안병권_인문학적 상상력을 바탕으로 농민들의 이야기를 스토리텔링으로 엮어 세상에 홍보하는 것을 돕는 ‘이야기연구소’를 운영하고 있다. 2007년 『도시와 통하는 농촌 쇼핑몰 만들기』, 2011년 『이야기 농업』, 2015년 『스토리두잉』 등 세 권의 책을 펴냈다. (ecenter@naver.com)
Last modified: 2022-02-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