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ritten by 5:29 오후 120호(2020.04)

살아가는 이야기
“당뇨야 고맙다”

이정양 (담우 연구홍보부장, 농학 86)

1. 당뇨를 판정받다.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중학교에 입학하면서 배정받은 번호는 59번이었다. 담임선생님께서 학생들을 키순으로 세우시고 그 순서가 바로 번호가 된 것이다. 멀대라고 불린 순딩이 친구가 마지막으로 67번이었다. 중학교 1학년 때 친구들은 생각나는 이름이 거의 없는데, 지금 글을 쓰다 보니 그 친구 이름이 조규승이었음이 생각난다. 그만큼 그 때는 키가 중요한 특징이었다.

서울대 농학과 86학번으로 입학하여 가나다 순으로 학번을 부여받기 전까지 번호는 약간은 자존심이기도 하였다. 중학교 2학년에 57로 빨라진 번호는 43번 등을 거쳐 고등학교 3학년 때는 39번까지 빨라졌다. 사실은 29번 정도가 적당하였을 것이지만 나의 자존심과 친구들의 예우에 의하여 그 정도까지는 유지되었다. 키는 그렇게 고정이 되었다.

나의 체중을 처음으로 기억하는 것은 57kg이다. 분명 해마다 신체검사를 하였을 것인데 특별히 무겁거나 가볍지 않아서 따로 기억하지는 못하고 대학에 입학하면서 목욕탕에서 본 것이 처음으로 기억된 것 같다. 그렇게 기억된 체중이 군에 입대하여서는 59kg을 꾸준히 유지하다가 제대 말년에는 생애 처음으로 60kg을 돌파하여 61kg을 기록하고 제대하여 복학 후에는 결혼 전까지 꾸준히 57kg에서 59kg 정도를 유지한 것 같다.

첫 번째 체중의 극적인 변화는 결혼 후에 맞이하였다. 초반에는 잘 몰랐으나 몸이 좀 무거워진 듯하더니 어느새 66kg을 유지하고 있었다. 학생시절과 같은 과음과 폭주는 줄어든 대신에 정기적이고 꾸준한 식사가 체중을 불린 것 같다. 그래도 2002년 전까지는 그럭저럭 그 정도를 유지하였다. 잘 먹는 것에 비하여 논에서 3년, 밭에서 5년간은 부지런히 일한 덕분일 것이다.

두 번째 변화는 2002년에 고흥으로 내려오면서부터였다. 그전까지는 나주에서 매년 파종하고, 심고, 풀을 뽑고, 가꾸고, 조사하고, 수확하느라 제법 몸을 많이 써서 딱히 더 이상 체중이 늘지 않았다. 하지만 고흥에 와보니 유자나무가 이미 크게 자라고 있어서 특별히 할 것이 없었다. 가끔 조사하다가 1년에 4번 정도 농약을 살포하고, 가을에 조금 바쁘게 수확하면 끝이었다. 2002년 겨울을 지내고 2003년 봄쯤에는 내가 기억하는 최고치인 73kg을 기록하였다. 직접 발톱을 깎기가 약간 힘들 지경이었다. 그리고 그해 건강검진에서 당뇨가 의심된다고 하여 2차 검진 끝에 최종적으로 당뇨 판정을 받았다.

그렇게 당뇨를 판정 받았지만 고혈압도 아니고, 고지혈증도 없고 다른 문제가 없어서 진단학과의 베테랑 의사는 당뇨약을 복용할 것을 강요하지는 않았으나 자주 가는 젊은 내과 전문의는 볼 때마다 눈이 멀 거라고, 발을 자르게 될 거라고 협박을 해대는 바람에 서너 달 후부터는 약을 복용하면서 공식적인 당뇨환자의 길을 걷게 되었다.

2. 당뇨 덕에 할 수 있어서 고마운 것들

1) 배드민턴

사실 배드민턴을 먼저 시작하였는지, 당뇨를 먼저 알았는지 확실하지는 않다. 그렇지만 분명한 것은 배드민턴이 당뇨에는 많은 도움이 되기도 하고 부담을 주기도 하였다. 아내와 함께 저녁을 먹고 아이들이 다니는 초등학교 체육관에서 2시간에 걸쳐 즐겁게 땀을 흘리는 것은 분명 커다란 도움을 주었지만 격렬한 운동을 하고 나서 배가 고파서 참지 못하고 먹는 야식은 분명 독이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득이 실보다는 훨씬 많았다는 생각이다. 나름대로 함께 운동하면서 부부간의 소통에도 커다란 도움이 되었다. 그전에도 그러기 위해 노력은 하였지만 확실히 그때부터는 더더욱 아이들 중심이 아닌 부부 중심의 삶을 산 것 같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과 어울리며 나는 나대로 아내는 아내대로 재미있게 산 것 같다. 이렇게 재미있는 운동을 2010년 1월에 완도로 발령받아 매일 왕복 310km의 거리를 출퇴근 하면서 접게 되었다. 아쉬움이 있었지만 거기까지가 좋았다면 좋았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살짝 무릎에 부담을 느끼기 시작할 때였기 때문이다.

2) 등산

특별히 미치도록 운동을 좋아하지도 않았고 특별히 잘 하는 운동이 있지도 않았다. 전경으로 복무한 덕에 족구는 남들보다 조금 잘 한다고 생각하지만 사람들과 어울리는 수준이고, 배드민턴, 당구, 볼링, 축구도 사람들과 어울리는 정도로 했다. 전남농업기술원 시절 산악회에 가입하여 10여명의 직원들과 1년에 서너 번 정도 등산을 다닌 것도 특별히 좋아해서가 아니라 그저 사람들과 어울리기 위한 수단 정도였다.

2011년 1월부터 2월까지 고흥에서 완도까지 매일 310km를 출퇴근을 하다 보니 나에게는 운전하는 것이 배드민턴을 대신한 새로운 운동이 되었다. 7년 넘게 근무하는 사무실에서 5분 거리가 되지 않는 관사에서 생활하다보니 장거리 출퇴근이 나의 버킷리스트 중의 하나이기도 하였으니 즐겁기까지 하였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의 생각은 달랐다. 미친놈 취급을 하더니 급기야 직장에서는 고흥과 완도시험장 중간에 위치한 보성녹차연구소로 발령을 내주었다.

2011년 3월과 4월에는 새로운 부서에 적응하느라 정신이 없었으나, 2시간씩 걸리던 출근과 퇴근 시간이 30분 정도로 줄어들자 그 남는 시간이 무료해기 시작했다. 완도에 출근하듯이 집에서 6시에 나서서 사무실에 6시 30분에 도착하면 연구소 안의 곳곳을 걷다가, 조금 지나서는 연구소 주변을 돌다가, 급기야 가깝고 낮은 산을 다니기 시작하였다.

그때부터 산에 미치기 시작하였나 보다. 일출시간이 빨라짐에 따라 나의 출근시간도 빨라져 5시에 나서서 보성군 관내에 있는 제법 멀고도 높은 산을 오르기 시작하였다. 웅치면 일림산과 제암산, 겸백면의 초암산, 벌교읍의 제석산 등 보성군에서 제법 이름 있는 산은 거의 모두 올라봤다. 조금 지나서는 억지로 4시에 나서서 더 높은 곳으로, 더 긴 코스로 산을 타곤 하였다.

여기에 종아리에 힘이 생기면서 더 미치기 시작하였다. 주중에는 이렇게 체력을 길러서 주말에는 지리산을 종주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지리산 종주는 대부분 전남 구례군 성삼재에서 시작하여 천왕봉을 지나 경남 산청군 중산리로 하산하는 2박3일 또는 1박2일 코스였다. 그러자면 텐트, 배낭, 요리도구 등이 필요해서 알아보던 중에 당일종주, 왕복종주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세 번의 실패 후 네 번째 도전 만에 지리산 왕복종주를 해냈다. 지리산 산꾼들에게는 지리산 3대 종주를 하는 것이 꿈인데 당일 왕복종주, 화대종주, 태극종주가 그것이다. 그 후 화대종주도 해냈지만 태극종주는 포기하고 자칭 등산인의 길은 치질 수술과 함께 접게 되었다. 내 인생에서 무엇에 가장 열정적이었던 때는 그때 지리산 3대 종주에 미쳤을 때인 것 같다. 지리산 종주기는 나중에 다시 정리해보고자 한다.

3) 두 번의 공무원 명퇴

첫 번째 명퇴는 당뇨병이 근본적인 원인이지만 2012년 1월에 갑자기 받게 된 치칠 수술이 결정적으로 작용했다. 꾸준한 운동과 정기적인 등산으로 당뇨약을 먹지 않아도 좋을 정도로 당뇨가 관리되었는데, 옻닭을 먹고 이상해진 항문 쪽에 문제가 생겨서 치질 수술을 받고 운동을 거의 하지 못하니까 손발이 부을 정도로 당뇨가 악화되었다. 거기에 업무 특성상 겨울에는 야외활동을 거의 하지 못하면서 혈당치가 500을 상회했고, 명퇴를 결심하게 되었다. 우여곡절 끝에 한 첫 번째 명퇴로 인하여 무엇이 소중한지, 어떻게 살아야하는지를 많이 생각하고 느끼고 깨달았다.

하지만 셋이나 되는 자식은 키워야 하고 먹고는 살아야 했으므로 특별히 물려받은 재산도 없고, 특별한 능력도 없고, 든든한 빽도 없는 상황에서 여러 일들을 하다가 다시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고 3년 후에 다시 고흥군농업기술센터에 농촌지도사로 발령받았다. 하지만 운명적으로 역마살이 낀 탓인지, 아니면 기질적으로 노마드적인 성향 때문인지 4년을 근무하다가 2018년 12월 31일자로 두 번째 명퇴를 하였다.

첫 명퇴 때에는 처음에 대자유인이 된 것 같았다가 꼬질꼬질한 생활인으로 다시 입사하였지만, 지금은 딱히 대자유인이 된 것 같지도 않고 그렇다고 불안하고 꼬질꼬질한 상태도 아니다. 그저 그냥 이렇게 나답게 사는 것도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다. 참기름도 팔고, 무화과도 팔고, 나물장아찌도 팔고, 석류즙도 팔고, 유자밭에 컨설팅도 나가고, 고추밭에 배우러도 가고, 설거지도 하고, 밥도 하고, 가끔은 새벽에 별 보러 가기도 한다. 두 번째 명퇴 후는 이렇게 보내고 있다.

4) 보너스로 받은 것 같은 기술사 자격증 3

자격증에 대한 관심은 워드와 컴활에만 조금 있었다. 직장생활 중에 자꾸 따라고 해서 그랬다. 종자기사, 식물보호기사, 유기농업기사, 시설원예기사 등이 있다는 것도 알지 못하고 깜냥에 농업전문가인 척하면서 살다가 명퇴까지 한 것이다.

명퇴 후 1년을 하고 싶은 것 하다가 다시 공무원시험을 준비하다 보니 종자기사 등 전문 자격증을 취득하면 가산점을 5점이나 준다는 사실을 알았다. 준비를 하였는데 자격증을 취득하지 못하고 시험에 합격하여 발령을 받게 되어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였다. 그런데 다시 입사하고 났더니 기사 자격증이 있으면 3만원, 기술사 자격증이 있으면 5만원씩 다달이 기술수당을 준다는 것이었다. 2015년 1월에 입사하여 5월에 종자 기사를 취득하여 수당을 받게 되었다.

그때부터 공부에 재미가 생기고 목표가 생겼다. 농업인들이 상담을 하면 나뿐만 아니라 사무실의 어느 누구도 명쾌한 답변을 하지 못하는 것을 보고 답답하고 창피해져서 더더욱 공부를 하기 위한 방편으로 계속 자격증에 도전을 했다. 차례대로 식물보호기사, 유기농업기사를 2016년에 취득하였다. 병행하여 준비하던 기술사도 2016년 11월에 농화학기술사, 2017년 4월에 종자기술사, 2018년 9월에 시설원예기술사를 취득하게 되었다. 기술사자격증 3개를 땄다고 해서 뭐가 특별히 좋아진 것은 없으나 자신감이 조금 생겼다. 더 중요한 것은 내가 모르는 것이 너무 많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그래서 항상 다른 사람의 의견을 먼저 듣고, 배우고, 또 배우는 자세를 견지하게 되었다.

5) 달라진 삶의 태도

당뇨병 덕분에 얻은 가장 큰 선물은 살아가는 태도인 것 같다. 당뇨병을 알기 전까지는 나 스스로를 조금은 옭죄는 삶을 살았다. 아내와 아이들에게도 같은 방식을 강요하면서. 하지만 남이 나에게 하는 소리는 무척 싫어했다. 하지만 당뇨병을 안 뒤라서 그런지 저절로 나이를 먹으면서 그렇게 되었는지는 모르겠으나, 내가 남의 강요를 받고 싶지 않은 것처럼 남에게 강요하지 않는 자세, 어지간한 것에는 만족하는 자세, 이 또한 지나가리라 하는 여유로운 자세를 가지게 되었다.

아내와 세 아이는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지만 내가 생각하는 아내와의 관계, 세 아이와의 관계는 그 이후로는 그리 나쁘지 않은 것 같다. 이 정도로 만족하는 내가 좋다. 그래도 조금은 더 부지런히 다른 사람을 돕고, 때로 내가 힘들면 도움도 받으면서 그렇게 살고 싶다. 무엇인가에 또 미치고 싶고, 힘들면 포기해도 되는 그런 삶을 살고 싶다.

PS : 지리산 3대종주인 화대종주, 왕복종주, 태극종주는 관심 있는 회원분들만 자료를 찾아보시도록 하기 위하여 알려드리지 않으려 하였으나 편의를 위하여 정보를 제공합니다. 저는 왕복종주를 먼저 하고, 화대종주를 하고, 태극종주는 포기하였답니다.

1. 지리산 화대종주 : 화엄사 – 대원사 (46Km). 평균 16시간 30분.

2. 지리산 왕복종주 : 성삼재 – 천왕봉 – 성삼재 (57Km), 평균 17시간.

3. 지리산 태극종주 : 동부 능선 – 주능선 – 서북 능선 (90.5Km), 평균 40시간.

이정양_ 두 차례의 공무원 생활을 그만두고 지난해 와포햇살영농조합법인에서 연구부장으로 근무하며 중학교 텃밭교육 및 귀농인과 청년농업인 컨설팅을 했습니다. 종자기술사, 농화학기술사, 시설원예기술사 자격증과 천문지도사 자격증을 가지고 있습니다. 올해부터는 장아찌와 건나물을 판매하는 사회적기업 담우에서 전문인력으로 일합니다. (ljycby@daum.net)

Last modified: 2022-02-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