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ritten by 5:25 오후 120호(2020.04)

실화소설 ‘과학자’ 7
슈퍼맨의 전화, 그리고 연구 중단

노광준 (전 경기방송 편성제작팀장, 농화학 88)

*** 이 이야기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과 과학은 실재하며, 8년간의 법정공방 끝에 확증된 사실관계들에 충실하였습니다.

#17. 스타 탄생

2004년 2월 12일 아침, 미국 뉴욕. 슈퍼맨 크리스토퍼 리브는 집안에 설치한 실내 수영장에서 재활훈련을 하고 있었다.

“헉헉…….”

“그렇지, 아빠. 잘하고 있어. 한 걸음, 다시 한 걸음…….”

백 킬로그램이 넘는 슈퍼맨의 몸을 물속에서 부축해주는 가족들. 수영복 차림의 세 아이가 앞, 뒤, 옆으로 달라붙어 슈퍼맨의 몸을 지탱해줬다.

“천천히……. 아빠, 잘하고 있어. 천천히……. 헉헉.”

특히 큰 딸은 목에 힘이 없어 자꾸 앞으로 고꾸라지는 아빠의 머리를 낑낑대며 바로 세워준다, 슈퍼맨은 죽을힘을 다해 한 걸음 한 걸음 물속에서 발을 떼어 가는데……. 아주 느린 속도지만, 물속에서 그는 걷고 있었다. 그 때,

“크리스, 얘들아, 잠시만!”

“왜요?”

아내 다나가 황급히 달려와 놀라운 소식을 전했다.

“지금 뉴스에서 놀라운 소식이 나오고 있어. 아빠가 그렇게 기다려왔던 어메이징 뉴스가!”

“정말요?”

다나가 리모컨을 누르자, 수영장 정면에 설치된 대형 TV에 CNN 뉴스가 나왔다. 화면 하단에는 큼지막한 글씨로 ‘Breaking News'(속보)라는 자막이 흐른다.

“한국 과학자들이 세계 최초로 인간 배아를 복제해 줄기세포를 추출했다고 발표했습니다.”

뉴스를 보는 슈퍼맨의 눈빛이 흔들린다.

“이 줄기세포를 몸의 각종 장기 세포로 분화시켜 난치병 환자에게 이식하면 면역거부반응 없이 치료가 가능할 것으로 보입니다…….”

“예(Yeah)!” “Gee!”

아이들은 물장구를 치며 좋아한다. 쉿, 슈퍼맨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모니터를 주목한다. 아내 다나는 볼륨을 더 크게 키운다.

“<사이언스>와 미국과학발전협회가 공동으로 마련한 이곳 시애틀 그랜드하얏트 호텔 기자회견장에는 2백여 명의 취재진이 들어차 발 디딜 틈이 없습니다. 그동안 치료용 세포복제가 불가능하다는 입장이던 다른 과학자들도 일제히 놀라움을 표시하고 있습니다.”

“(조나단 도슨 피츠버그대 교수) 기절초풍할 만한 일입니다.”

“(로리 졸리스 노스웨스턴대 교수) 연구자들이 소질 있어 보였고 과학적 기술력은 매우 인상적입니다.”

슈퍼맨은 아내에게 물었다.

“한국, 한국이라고 했지?”

아내 다나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뉴스에는 이날의 주인공들의 기자회견 인터뷰가 흐르고 있었다.

“(강한우) 영장류에서는 불가능했다고 알려져 있었는데 이 벽을 몇 개 기술을 동원해서 뛰어넘은 겁니다. 그러나 아직 실용화까지는 10년 이상의 임상시험이 남아있습니다.”

“(문신용 서울대 의대교수) 우리는 이 연구가 상업적으로 이용되는 걸 반대합니다. 인간복제에도 반대합니다.”

CNN의 의학전문기자는 이 연구에 대한 윤리 논란도 만만치 않다고 전하며 이런 말로 끝을 맺었다.

“한국 과학자들은 부인하지만, 인간 복제에 한걸음 다가선 것입니다.”

슈퍼맨은 꿈을 꾸는 듯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내가 저들을 만나볼 수는 없겠지?”

다나는 말없이 휴대폰을 꺼내 누군가의 연락처를 찾기 시작했다.

#18. 시애틀의 잠 못 이루는 밤

그날 밤, 시애틀 그랜드하얏트 호텔 연회장. 강한우 교수 일행이 21명의 석학들과 환영 만찬을 하고 있다. 도슨 교수가 와인 잔을 들고 한우 일행에게 석학들을 소개시켜준다.

“이쪽은 캐임브리지에 있는 내 친구 로저 페터슨이요. 부시 독트린 이후 줄기세포 규제를 피해 영국으로 도망가 있지.^^”

“망명이라고 해주면 고맙겠네, 친구.^^”

로저 페터슨은 빙긋 웃으며 한우에게 손을 내밀었다.

“놀라운 발표 잘 들었소.”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페터슨 교수님.”

인사를 나눈 강한우와 문신용 교수 앞에서 로저 페터슨은 깜짝 놀랄만한 말을 건넸다.

“오늘 당신들의 발표를 보면서 이런 생각이 들었소. 18세기 영국에서 산업혁명이 일어나고 20세기 미국에서 정보통신혁명이 일어났다면, 21세기 바이오 혁명의 불씨는 한국에서 시작되었다.”

“이럴 수가……. 몸 둘 바 모르겠습니다.”

로저 페터슨의 한 마디에 모두가 감동했다. 박수소리도 터져 나왔다.

“자네처럼 자존심 센 친구가 이런 말을 할 줄은 몰랐네.”

“도슨, 진심이네. 프로페서 강, 가능하다면 나도 돕고 싶소. 인삿말이 아닌 진지한 제안이오.”

“영광입니다.”

한우는 페터슨의 손을 꽉 잡았다. 도슨은 또 다른 석학을 소개한다.

“이쪽은 독일 막스플랑크 연구소의 한스 숼러 박사라네.”

“우리도 함께 하고 싶군요. 자리가 있다면…….”

“무슨 말씀……. 언제나 영광입니다.”

그 때 한우의 휴대폰이 울린다. 번호를 보더니 잠시 자리를 피해 전화를 받는 강한우는 다정하게 말했다.

“아들, 그래. 아빠 미국 왔다.”

미국에 유학 온 큰 아들의 전화였다. 수화기 너머로 우렁우렁 흥분한 목소리가 들려온다.

“아빠 완전 떴어.^^ 여기 LA에서도 사람들이 뉴스보고 다 아빠 얘기 해.”

“하이고, 여기 시애틀도 난리다. <사이언스> 편집진부터 내로라하는 석학들이 다 모여서……. 아빠 일생에 정말 오늘 같은 밤이 또 있을까?”

“ㅋㅋ 정말 시애틀의 잠 못 이루는 밤이네……. 아빠, 근데 잠은 어디서 주무셔?”

“어디긴……. 아빠 출장 오면 자는데 있잖아.”

“모텔? 하룻밤 30달러짜리?”

“아빠는 없이 자라서 그런지 호텔보다 모텔이 편하더라. 비행기도 일반석 할인티켓이 편하고.”

“아이고, 좀 좋은 데서 주무셔. 이제 월드스타인데 격에 맞춰야지.”

“이눔아 잘 나갈 때 잘해야지. 늘 겸손하고 검소해야 하는 겨.”

“아구 또 그이야기. 아무튼 축하드려요, 굿나잇.”

전화를 끊고 빙긋 웃는 강한우. 그런데 다시 전화벨이 울린다. 한우는 무심코 전화를 받고는 말했다.

“아직 못한 말 있는 겨?”

그런데, 아들의 전화가 아니었다.

“Hello?”

강한우는 뜻밖의 목소리에 당황했다.

“강한우 교수 맞죠?”

“예, 그렇습니다만…….”

“여긴 뉴욕이고 나는 크리스토퍼 리브라고 합니다.”

슈퍼맨, 크리스토퍼 리브의 전화였다.

“리브? 크리스토퍼 리브?”

“반갑습니다. 오늘 당신의 발표를 봤습니다. 당신을 꼭 만나고 싶었는데, 알다시피 몸이 좀 느려서…….”

한우는 너무 놀라서 천천히 말을 이을 수밖에 없었다.

“리브 씨, 당신을 만나본 적은 없지만, 늘 당신을 생각하며 연구했습니다.”

그 말에 리브는 옅은 미소를 지었다.

“이거 정말 우연이군요. 난 당신 같은 과학자들을 진심으로 존경해왔는데…….”

“존경이라뇨……. 아직 갈 길이 멉니다.”

“아뇨, 당신은 존경받을 자격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당신의 연구는 나 같은 사람들에게 삶의 각도를 바꿔줬기 때문입니다.”

리브는 호흡을 가다듬은 뒤 계속 말을 이어나갔다. 언젠가 누군가에게 꼭 하고 싶은 말이었다.

“터널 저 끝에 그냥 어둠만 있는 게 아니다. 빛이 보인다, 희망이 있다. 이건, 나 같은 사람에겐 엄청난 차이죠. 그걸 당신이 보여준 겁니다.”

한우는 밀려오는 감동에 목이 메었다.

“더 열심히 연구하겠습니다. 그래서…….”

“꼭 한번 당신을 만나고 싶습니다. 그래서 당신의 연구를 돕고 싶습니다.”

“말씀만으로도 큰 힘이 됩니다.”

“프로페서 강. 살다보면 늘 좋은 일만 있는 건 아니죠. 말 위에 올라타 달리다가도 말에서 떨어질 때도 있을 겁니다. 하지만 잊지 마세요. 나 같은 사람 최소 수백만 명이 말없이 당신의 연구를 응원하고 있다는 것을……. 나는 각오가 되어있습니다. 당신의 연구를 돕는 일이라면 그곳이 한국이든 어디든 날아갈 준비가 되어있습니다.”

한우의 눈에서 주르륵 눈물이 흘렀다. 그는 전화기를 귀에 대고 조용히, 숨죽여, 눈물을 닦고 있었다. 모두들 떠들썩하게 술잔을 부딪치는 연회장 한 구석에서 그는 입가에 미소를 지은 채 눈물을 흘렸다. 호텔 창밖으로 시애틀의 잠 못 이루는 밤은 깊어가고 있었다.

#19. 연구 중단

일주일 뒤인 2월 19일, 한국으로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는 강한우와 문신용 교수가 수심 가득한 얼굴로 영자 신문들을 보고 있었다. 하나같이 이들의 성과를 둘러싼 윤리 논쟁을 헤드라인으로 뽑고 있었다.

“치료용 복제를 둘러싼 의학적, 윤리적 논쟁의 먹구름이 일고 있다.” (뉴욕타임즈)

“한국 과학자들, 복제를 말하다.” (워싱턴포스트)

“새로운 복제 논란의 등장” (뉴스위크)

강한우는 학계의 대선배이자 영문에 능통한 문신용 교수(서울대 의대, 국내 최초 시험관아기 성공)에게 물었다,

“어떻습니까? 선배님 보시기에…….”

그러자 문 교수는 어두운 표정으로 말했다.

“심각하네, 예상은 했지만 이 정도로 파장이 클 줄은…….”

그 때 함께 동행한 국가정보원 요원이 입을 열었다.

“분위기가 심상치 않습니다. 사이언스 기자회견이 전 세계로 나간 뒤 로마교황청에서 회의를 소집했고, 백악관에서는 치료 목적의 세포복제까지도 금지시키는 법안을 미국 내에서 뿐 아니라 UN 총회를 통해 밀어붙이는 쪽의 의견이 우세하다고 합니다.”

“UN 총회까지…….”

강한우는 고개를 저었다. 만에 하나 UN 총회에서 복제 금지안이 통과되면, 한국을 비롯해 전 세계 어디에서도 이 연구를 할 수 없는 상황에 처하기 때문이다.

“뭔가 돌파구가 필요한 것 같아.”

문 교수 등은 한우의 얼굴을 주시했고, 강한우는 결국 결정을 내린 듯 입술을 앙 다물었다.

2시간 뒤 인천공항 귀빈실. 수십 명의 기자들과 방송용 카메라가 들어찬 가운데 강한우 일행은 귀국 기자회견을 가졌다.

“과학계 평가와는 달리 윤리적 반발이 거센데, 어떻게 대응하실 겁니까?”

기자의 질문에 강한우가 답했다.

“잘 알고계신 것처럼 저희는 난치병 치료를 위한 학문적인 열정에서 연구를 진행해 큰 성과를 거뒀습니다. 하지만 인간 복제의 가능성과 생명윤리의 문제는 항상 마음에 걸려 왔습니다.”

강한우는 잠시 말을 멈추고 물을 몇 모금 마셨다. 찰칵, 찰칵. 촤르르르. 카메라 셔터 소리가 진동했다.

“고심 끝에 저희는 이 문제에 대한 국민적인 합의가 이루어지기 전까지는 여성의 난자를 대상으로 한 연구를 잠정 중단하겠습니다.”

응, 연구를 중단한다고? 곳곳에서 탄성이 터져 나왔고 카메라가 불을 뿜었다. 추가질문을 하려는 기자들 십여 명이 손을 들었지만, 강한우 일행은 정중히 인사를 하고 회견장을 빠져나갔다. 사회자는 마이크를 들고 상황을 수습하려 했다.

“이상 기자회견을 마치겠습니다, 추가 질문은 이메일로 주시면…….”

“공론화는 어떻게 진행하실 겁니까?”

“강 교수님, 언제까지 중단하실 예정입니까?”

“지금 심정 한 말씀만 해주십쇼.”

난리통에 한우는 힘겹게 회견장을 빠져나갔다.

노광준_ 별명 ‘노진구’. 도라에몽에게 늘 민폐만 끼쳐 만화사상 최악의 캐릭터로 손꼽힐 만큼 띨띨하고 존재감 없던 어린 시절을 보낸 뒤, 우연히 라디오 피디가 되어 20년간 일했음. FM 99.9MHz 경기방송 전 편성제작팀장. 지난해 회사 임원에 대한 공익제보 후 해고되어 현재 복직 투쟁 중. (pdnkj@naver.com)

Last modified: 2022-02-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