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ritten by 10:11 오후 121호(2020.07)

초보 마케터 일기
‘우리’는 새로운 시대정신을 맞이할 준비가 되었는가?

김현수 서울시교육청 대변인실 주무관, 환경재료과학 08

박원순 서울시장의 죽음이 지난 한 주를 흔들었다. 고인의 명복을 빈다.

많은 ‘우리’가 그를 추모하고, 애도하며, 감쌌다. 사회 유력인사들이 앞다투어 그의 생애를 재조명했다. 40년 지기 동지는 100조를 줘도 되살리지 못할 인재의 떠남을 아쉬워했고, 또 다른 40년 지기 동지는 그마저도 넘지 못한 인간의 모순에 안타까워했다.

하지만 ‘우리’의 그런 추도에는 더 이상 울림이 없다. 오히려 ‘우리’의 추도가 피해자의 목소리를 그림자 너머로 지워내고 있다. ‘우리’는 자기 연민으로 무장한 채 성찰에 전혀 직면하지 못하고 있다. ‘진보’적 지식인들의 자의식으로 피해자의 목소리를 지우는데 혈안이 되어있다. 고인의 명복을 온전히 빌 수 없는 이유를 ‘우리’가 만들어내고 있다.

사건이 알려진 뒤 일주일이 지났다. 지난 수십 년간 시민운동을 함께해온 동지들에게는 요 며칠이 황망하고 경황없는 시간이었을 것이다. 그렇다고 해도, 그 황망함이 피해자가 겪은 지난 수년의 고통을 묻을 명분이 될 수는 없다. 당연히 모든 생명은 소중하고, 그래서 모든 죽음은 안타깝고 애도되어야 마땅하다. 하지만 그 잣대가 늘 바른 곳을 향했다고 ‘우리’는 스스로 떳떳할 수 있는가? ‘우리’의 애도는 마치 “정의와 법 위에 친교와 의리가 있다”고 항변하고 있는 것처럼 들린다.

위계에 의한 성폭력 피해자가 또 발생했다. 이미 안희정이 있었고, 오거돈이 있었다. 수많은 알려지지 않은 사례가 산재함은 모두 짐작해 알고 있는 사실이다. 미투운동이라는 이름으로 이름 없는 많은 이들의 목소리가 잠시나마 수면 위로 올라오기도 했다. 수년간 지속된 흐름 속에 ‘우리’는 아직 아무것도 배우지 못한 것 같다.

‘우리’인 민주화세대는 경제적 주류를 넘어 정치사회적 주류로 우뚝 섰다. 그들이 원하면 못해낼 일이 없다. 그렇기에 더더욱 지금 사건에서 보여주는 ‘우리’의 모습이 부끄럽다. 왜 젊은 세대가 화를 내는지조차 이해하지 못하는 감성으로는 결코 시대정신에 대해 논할 수 없다. ‘우리’가 아직도 ‘진보’로 자리매김할 수 있는지 되새겨봐야 한다.

조선일보와 중앙일보는 신나 보인다. 연일 자극적인 표제로 고인의 마지막을 깎아내리고 있다. 오늘도 피해자의 증언이라는 핑계로 각종 연예 찌라시가 자행하는듯한 선정적인 기사를 쏟아내고 있다. 그들은 전력을 다해 ‘우리’와 투쟁하고 있다. 동시에 그들은 전력을 다해 피해자를 묻어버리고 있다. 그들이 원하는 것은 결코 피해자의 규명이 아니다. 그저 ‘우리’의 파멸을 원할 뿐이고, 모두 그 사실을 알고 있다.

하지만 이를 방어해야 할 ‘우리’에게는 온전한 명분이 없다. 사건 직후 ‘우리’가 보여준 모습이 ‘우리’ 스스로를 갉아먹어버렸다. 결국 해법은 단순하며 멀고 어렵다. ‘우리’가 젊은 세대의 분노를 이해하고 시대정신에 맞게 다시 학습되는 길 밖에 없다. 시대정신은 결코 후퇴하지 않는다. ‘우리’가 시대정신을 좇아 와야만 한다.

천동설을 믿던 서구인이 지동설을 믿게 된 원인에 대해 여러 이유를 든다. 하지만 그 이유는 너무나 명징하다. 갈릴레이가 주장했기 때문에, 코페르니쿠스가 주장했기 때문에 하루아침에 인식이 바뀐 것이 아니다. 그들의 주장과 무수한 관측 결과가 시대정신을 옮겨냈고, 천동설을 믿던 구시대의 인류가 죽어서 퇴장했기 때문에 지동설이 주류 학설로 자리매김할 수 있었다.

‘우리’는 선택해야만 한다. 천동설을 믿는 구시대로 남아 쓸쓸히 퇴장할 것인가? 지동설을 받아들여 새로운 시대정신과 연대할 것인가?

김현수_ 농대 학회 ‘농학’에서 활동했으며 농대 부회장을 역임했다. 학부 졸업 후 교육학과 대학원에
진학하여 석사 과정을 마쳤다. 교육협동조합 아카데미쿱을 설립하여 활동하다가 현재는 서울시교육청
대변인실 공보팀에서 일하고 있다. (edukhs1@gmail.com)

Last modified: 2021-11-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