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ritten by 9:43 오후 121호(2020.07)

교육의 딜레마
여름 휴가 추천 도서

황종섭 지역시스템공학 03, 전 서울특별시 정책비서관

할말은 많지만 하지 않는 게 미덕인 세상입니다. 낄 땐 끼고 빠질 땐 빠질 줄 알아야 합니다. 서울시교육청 정무보좌관에서 서울시 정책비서관으로 자리를 옮긴 지 3달이 채 되지 않아 면직되었습니다. 보고 느끼는 바가 왜 없었겠냐만, 이번 글에서는 다른 얘기를 하는 게 나을 것 같습니다.

가고 싶은 곳이 있어도 갈 수 없는 세상입니다. 코로나 바이러스가 우리 모두를 불청객으로 만들었습니다. 1년간 고된 노동을 버티게 했던 국외 여름 휴가가 불가능해졌습니다. 365일이 비수기입니다.

비행기는 못 타지만 충전 시간은 필요합니다. 오히려 어딘가 가야 한다는 강박이 없어지면, 더 여유로운 휴가를 즐길 수도 있습니다. 이번 기회에 책 읽는 휴가를 보내는 것은 어떨까 싶습니다. 몇 권 추천하겠습니다. 제 기준으로 기존 관념을 흔드는 책을 선정했습니다.

강유원, 책과 세계, 살림, 2004.

얇고 쌉니다. 부담 없이 손에 잡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내용은 심오합니다. 인간과 삶에 대한 근본 문제를 다룹니다. 인간은 죽음을 피할 수 있을까? 없다면, 유한한 삶의 목적은 무엇일까? 아니, 삶에 목적이라는 게 존재하긴 할까? 역사가 시작된 이래 멈춘 적 없는 질문입니다. 인류는 답을 찾기 위해 고군분투해왔고, 결과물을 텍스트로 남겼습니다. 강유원 박사는 텍스트의 바다에서 핵심들만 끄집어 올렸습니다. 고갱이 중 고갱이만 건져 올렸습니다. 결론만 옮깁니다.

“먼 옛날의 서사시들은 세계에 대한 과학적 인식 없이도 세계가 쓸쓸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런데 수많은 세월이 지난 다음에도 또다시 같은 것을 알아차리는 건 너무 허망하다. 쓰라린 것이다.”

마키아벨리, 니콜로 마키아벨리 군주론, 박상훈 옮김, 후마니타스, 2014.

너무도 유명한 이 책의 미덕은 비단 정치 지도자가 어떤 사람이어야 하는가를 밝혀내는 데 그치지 않습니다. 더욱 중요한 것은 마키아벨리가 가진 인간관과 세계관입니다. 이는 세계를 대하는 태도의 문제이고, 문제를 정확히 인식하기 위한 방법론이기도 합니다.

“인간이란 은혜를 모르고, 변덕스럽고, 위선적이고, 가식적이며, 위험은 감수하려 하지 않으면서 이익에는 밝다. / 인간이란 두려움을 갖게 하는 사람보다 사랑받고자 하는 사람을 해치는 일에 덜 주저한다. / 인간이란 아버지의 죽음은 쉽게 잊어도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유산을 빼앗기는 일은 좀처럼 잊지 못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마키아벨리는 인간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말하지 않습니다. 실제 인간이 어떤 존재인지를 말합니다. 당위가 아닌 실재를 분석하는 방법론, 그것이 마키아벨리를 특별하게 만들었고, 이후 홉스를 비롯한 수많은 정치철학자에게 전수됩니다.

“나는 사변적 상상보다는 사물에 [실체적 영향을 미치는] 실효적 진실을 추구하는 것이 훨씬 적절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 인간이 실제로 어떻게 살고 있는가의 문제와 인간이 어떻게 살아야만 하는가의 문제는 너무도 다르다. 그렇기에 무엇을 행해야만 하는가의 문제에 매달려 무엇이 실제로 행해지고 있는가의 문제를 소홀히 하는 사람은 자신을 지키기보다는 파멸로 이끌리기 쉽다. 어떤 상황에서도 착하게 행동할 것을 고집하는 사람이 착하지 않은 많은 사람들 속에 있으면 반드시 파멸하게 되기 때문이다.”

브랑코 밀라노비치, 왜 우리는 불평등해졌는가, 서정아 옮김, 21세기북스, 2017.

남녀노소와 여야를 불문하고 불평등이 한국 사회의 중요한 문제라는 점은 모두 동의하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왜 불평등해졌는가, 물으면 서로 다른 답을 내놓습니다. 누구는 대기업의 약탈적 경영 때문이라고 하고, 누구는 소위 ‘86세대’의 사다리 걷어차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과연 누구 말이 맞을까요?

브랑코 밀라노비치 교수는 지구인 전체를 놓고 불평등 문제를 다룹니다. 지구에서 가장 못 사는 사람부터 가장 잘 사는 사람까지 줄을 세워놓고, 이들의 부가 어떻게 달라졌는지 추적합니다. 그리고 놀라운 결론을 내놓습니다. 세계적으로 국가 간 불평등은 오히려 축소되었다는 것입니다. 반면 국가 내 불평등, 특히 선진국 노동자들 간의 불평등은 커졌습니다. 이는 세계화와 기술 발전의 결과입니다. 일국적 자본주의만 봐서는 보이지 않는 원인입니다.

“우리는 불평등의 변화 양상을 결정짓는 세 가지 힘으로 기술(Technology), 개방(또는 세계화; Openness), 정책(또는 정치; Policy)을 든다. 영어 앞글자를 따서 TOP로 부르는 이 세 가지 요인은 서로 연관성을 맺으며 변화했다. 이는 정책은 내생적으로 결정되는 경향이 있음을 시사한다. 다시 말해 경제 변화를 주도하는 힘에 좌우되는 것이다. 이처럼 경제적 힘과 정치적 힘이 비슷한 변화 양상을 보였기 때문에 소득 불평등도 비슷한 과정으로 변화한 것이다.”

우리는 ‘나쁜 놈 찾기’에 너무 익숙합니다. 불평등을 만든 주범이 있을 거라 확신합니다. 마키아벨리의 방법론이 필요한 이유입니다. 현실을 있는 그대로 봐야 대책도 내놓을 수 있습니다. 세계화와 기술 발전은 막을 수 없는 힘입니다. 이것을 인정하는 가운데 대책을 내야 합니다. 이는 대기업과 86세대를 탓한다고 이뤄낼 수 없는 것입니다.

데이지 크리스토둘루, 아무도 의심하지 않는 일곱 가지 교육 미신, 김승호 옮김, 페이퍼로드, 2018.

교육 불평등도 문제라고 합니다. 맞습니다. 부모의 부와 지위에 따라 자식들의 교육 격차가 갈수록 벌어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대안이 엉뚱합니다. 학교에서 공부를 더 시키면 안 된답니다. 시험도 없애고, 경쟁도 줄이고, 숙제도 없애야 한답니다. 그래야 ‘진보적인’ 교육이랍니다. 진짜일까요?

학교에서 공부를 안 시키면 학원 다니는 학생들만 유리해집니다. 학원 보낼 자원이 있는 집안의 자식들만 좋은 교육을 받습니다. 평가도 없고 경쟁도 없는 학교에서 학생들은 어떠한 역량도 기를 수 없습니다. 이건 너무나 상식적인 일입니다.

데이지 크리스토둘루 선생은 영국에서 중학교 교사로 근무했던 분입니다. 이 책은 위에 언급한 교육 불평등을 다룬 책은 아니지만, 우리가 막연하게 믿고 있는 미신과 대결합니다. 특히 21세기에는 지식 교육보다 창의력과 문제 해결력이 중요하다는 주장에 대해 다음과 같이 일갈합니다.

“창의력과 문제 해결력이 중요하다고 말하는 것 자체는 진부한 주장에 지나지 않는다. 이러한 역량들이 21세기에 새롭게 필요한 특성들이라는 것은 틀린 말이고 위험한 발상이다. 21세기 역량들을 학습하기 위한 방안을 따로 마련한다는 것도 실제적인 면에서 해로운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 (…) 21세기 역량을 강조하는 것은 교육과정에서 지식을 제외하려는 것을 완곡하게 표현한 것과 같다. 그러나 교육과정에서 지식을 제외하게 되면 학생들이 21세기 역량을 학습할 수 없게 된다는 것도 너무나 당연하다.”

오늘 추천드린 책을 관통하는 주제의식이 명확해집니다. 현실을 당위가 아닌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인식과 실천의 출발점은 늘 그래야 합니다.

황종섭 _ 2006년 농대 학생회장을 지냈고, 2011년부터 진보정치에 몸담았다. 정의당 기획조정실과 대표비서실을 거쳐, 2017년 심상정 캠프 전략팀과 TV토론팀에서 일했다. 이후 2018년 9월까지 정치발전소 기획실장으로 일했다. (no1enem2@gmail.com)

Last modified: 2021-11-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