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선아 서울대 환경대학원 박사과정, 농경제 08
저는 일을 매일매일 벌리는 편입니다. 스스로 여러 가지 정체성을 가지고 있습니다만, 그중에서 특기할만한 점을 꼽으라면 두 가지를 듭니다. 첫 번째는 퍼실리테이터 활동을 오랫동안 해왔다는 점, 둘째는 환경-사회 문제를 다루는 연구자라는 점입니다. 아마 지금까지 선구자에서도 관련한 다양한 이야기를 소개했던 것 같은데, 오늘은 저 스스로를 돌아보는 기분으로 소개하려고 합니다.
2011년, 지금은 대중화된 시민참여 원탁회의가 우리나라에 처음 도입되었을 때부터 퍼실리테이터라는 일을 시작했습니다. 지금 보면 대단한 행운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그 해에 학내에서 반값등록금과 법인화에 관한 원탁회의를 진행했었는데, 그것이 벌써 10년이 되었네요. 저는 그때는 ‘토론’하는 사람보다는 ‘투쟁’하는 사람에 가까웠습니다. 토론은 중요하고 놀라운 것임에는 동의하나, 근본적으로는 ‘‘계급 투쟁’과 같은 심각한 갈등이 토론으로서 해결될 수 있는 것일까’하는 의문은 완벽히 해결하지는 못했습니다.
2020년 현재, 저는 서울대에서 환경정책과 환경사회학을 연구하는 연구자이기도 합니다. 활동과 휴학으로 인해 학부를 7.5년만에, 석사를 3년만에 졸업하고 이번 학기에 박사과정 수료를 했습니다(짝짝짝). 학부 때에는 노동, 복지, 정치와 같이 당면한 사회 문제에 목소리를 내면 되었지만, 이제는 비-인간, 미래 세대, 개발도상국 등 기후변화와 생태에 대한 모든 문제를 다루려니 늘 고민이 됩니다. 사람들 사이의 갈등도 조정이 쉽지 않은데 과연 환경과 사회의 조화는 가능할까? 하루하루 당장의 삶이 가장 중요한 한국 사회에서 먼 미래를 준비하는 생태 전환이 과연 가능할까?
저의 이런 두 갈래 고민을 정부나 공공기관들도 꽤나 오랫동안 해왔다는 것을 최근에 알고 놀랐습니다. 이미 2000년대 중반부터 ‘갈등관리 매뉴얼’이 부처별로 제작되었고, 지금은 많은 지자체들이 조례로 제정했더군요. 2007년에 만들어진 환경부 갈등관리 매뉴얼도 지금도 읽어보면 꽤나 잘 만들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2020년 지금, 여전히 토론보다는 투쟁과 갈등이 많은 우리나라에서 그간의 이런 노력들은 우리 사회에 무엇을 남겼을까, 곰곰이 곱씹어보게 되는 요즘입니다.
‘갈등관리’라는 블랙박스를 열면, 사실 갈등관리라는 말조차도 쓰기가 조심스럽습니다. 길거리에서 투쟁하는 사람들을 과연 정부가 “관리”할 수 있을까? 공익과 사익이 충돌할 때 그것을 조율한다는 것이 가능한가, 그리고 공익과 공익이 충돌한다면? 동식물과 같은 비-인간의 입장과 아직 태어나지 않은 미래세대는 누가 대변할 수 있는가? 교육을 많이 받지 못한 계층의 ‘세련되지 않은 말’을 잘 들을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인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갈등관리 제도는 최악을 방지할 수 있다는 점에서 대단한 진보라는 생각이 듭니다. 밀양 송전탑, 용산 참사, 4대강을 떠올려보면 이러한 브레이크 장치가 얼마나 다행스러운지요. 요즘 아무리 작은 지자체라 하더라도 최소 형식적으로라도 공청회는 열곤 하며, 알리지 않은 채 사업을 진행했을 때 주민들이 다시 되돌릴 수 있을 만큼 국민들의 권한이 커졌습니다. 미래에 올지 모를 ‘더 나쁜’ 정부의 횡포를 막기 위해 정부가 스스로를 불리한 규칙으로써 제약할 수 있다는 것이 새삼 놀랍습니다. 부족하나마 역사적 교훈을 수용함으로써 우리가 과거로 돌아가지 못하게 합니다.
이렇게 역사적으로 돌아볼 때에야 우리는 스스로의 위치를 알 수 있는 것 같습니다. 앞으로 어떤 길을 갈지 나는 겨우 한 치 앞만 볼 뿐이지만, 앞서간 사람들의 발자국들을 만나면 최소한 내가 혼자는 아니구나, 많은 사람들이 고민하지만 걸음을 쉬지 않았겠구나, 하는 작은 안도감이 생기는 듯합니다.
사실 이제 글의 끝자락에서야 밝히지만 올 7월 중 국책연구기관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하는 일이 환경보존과 기후변화 대응에서 발생하는 주민갈등을 해결하는 연구라 얼떨떨합니다. 계획했던 일은 아니었지만 길이 열리기에 한 번 가보려고 합니다. 가서 박사논문도 구상하고 결혼도 하고 인생 2막을 준비해야지요. 선구자 기고는 2014년 세월호 이후 이번이 22번째 글로, 서울대에 붙어있던 12.5년 중 7년을 선구자와 함께 했네요. 이렇게 저는 생활인으로 나아가는지라 저와는 또 다른 현장 활동가 동문 청년을 슬며시 소개하고 저도 독자회원으로 남게 되었습니다. 저도 다른 선구자의 독자들처럼 제 자리에서 새로운 길을 만들어 나가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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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선아 _ 농생대 농경제사회학부 지역정보전공 08학번. 길었던 학부생활을 지나 지금은 서울대 환경대학원에서 환경, 농촌, 지역과 사람 간의 관계를 연구하는 박사과정생입니다. (2468nice@gmail.com)
Last modified: 2021-11-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