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ritten by 10:50 오전 122호(2020.10)

나 이렇게 산다
사람은 성장하는 동안은 늙지 않는다.

박애란 전 평택여고 교사, 후원회원

“신이 내린 목소리”

지휘하는 모습 자체가 예술인, 그러면서도 카리스마 넘치는 명지휘자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은 세계적인 소프라노 조수미 씨를 이렇게 극찬했다. 조수미 씨의 자서전 <노래에 살고, 사랑에 살고>에서 그녀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나는 내 환경에 정말 감사한다. 내가 아무리 좋은 재능을 타고났어도 강원도 오지에 태어나서 재능이 발굴되지 못했다면 아무 소용없었을 것이다. 나는 다행히 부모님이 알아보시고 마음으로나 재정적으로나 적극적으로 지원을 해주셨기에 오늘날의 내가 있을 수 있는 것이다”

그녀의 말대로 사람의 성장을 절대적으로 지배하는 게 어렸을 때의 환경이다. 서둔야학 시절 야학생들은 마치 ‘누가 더 가난한가?’ 시합하고 있었다. 야학생들은 참으로 아까운 인재들이 많았다. 공부를 탁월하게 잘하는 아이들이 꽤 여러 명 있었는가 하면 가창력이 뛰어나서 선생님들로부터 오페라 가수로서도 손색이 없다는 칭찬을 듣는 아이들도 있었다. 그 재능들이 가난으로 인해서 피지 못하고 묻혀버리는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었다. 개인적으로 더 나아가 국가적으로도 크나큰 손실이 아닐 수 없었다.

집안 형편이 어려워서 초등학교 이후로는 주간 학교를 다닐 수가 없었다. 주경야독을 해야 했기에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학업도 중학과정은 야학으로 마쳐야 했으며 고입자격 검정고시를 열아홉 살에 봤기에 스무 살에 고등학교를 갈 수 있었다. 요즘 트렌드는 ‘실패를 많이 해야 한다. 그래야 그것을 바탕으로 더 탄탄히 성공할 수 있다’라고 한다. 허나 소심하고 상처 받기 쉬운 나는 실패를 엄청 두려워했다. 떨어지면 다시 보면 되는데 그게 용납이 안된 나는 시험 보는 걸 두려워하다가 그 나이가 돼서야 겨우 본 것이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함과 동시에 방송대 농학과에 입학을 했다.

1973년도 농학과 입학을 시작으로 1985년도에는 국어국문학과에 입학을 했었다. 2007년도에는 가정학과 3학년에 편입학을 했으며 2016년도에는 문화교양학과 3학년에 편입학을 했었다.

‘사람이 살아가는 뿌리는 교육과 먹거리이다.’ 생존의 한줄기인 먹거리를 생산해 내는 농학에 대해서 기초지식을 갖고 싶었던 것이고 국어국문학은 ‘서둔야학 스토리’를 체계적으로 잘 쓰고 싶은 열망 때문이었는데 엄청 맛있는 게 국문학 강의였다. 가정학과는 의상 전공을 하여 패션디자인을 제대로 배우고 싶었기에 선택했으며 문화교양학과는 내가 좋아하는 음악, 미술, 철학, 문학 등 인문학 공부를 다채롭게 할 수 있을 거라는 기대 때문이었다.

살아있는 한 공부는 내 지상과제였다. 배움의 끈을 놓지 않고자 하다 보니 방송대에 늘 학적을 두고 틈틈이 공부를 해왔던 것이다.

18세의 나는 활자에 굶주려있었다.

수원의 작은 백화점에서 아침 10시부터 밤 10시까지 근무를 하다 보니 책을 들여다볼 수가 없었는데 활자에 대한 갈급함이 엄청났었다. 그 기간의 배움에 대한 갈증이 평생 가는 듯싶다.

나 같은 경우에는 한국방송통신대가 있으므로 해서 계속 학업을 이을 수 있었다. 다른 대학의 1/10인 교재 대금까지 하여 50만 원 안팎의 학비로 언제 어디서나 학업을 이어갈 수 있다는 점에서 어느 대학보다도 국민들에게 배움터로서 큰 역할을 하고 있는 곳이 방송대라고 생각한다. 나같이 배움을 이어가고자 하는 사람들의 배움에 대한 열망을 제대로 채워주는 곳이 방송대인 것이다. 방송대 강의를 듣다 보면 자연스럽게 드는 생각이 있다.

‘우리나라 좋은 나라이다’

하고 싶은 공부를 마음껏 할 수 있도록 국가에서 방송대를 설립했기에 그런 것이다.

KT 통신사 가입자인 나는 집에 있을 때는 방송대 채널인 160번에 TV 채널을 고정시켜 놓는다. 국문학, 세계사, 서유럽 문화기행, 대중영화의 이해 등의 교양과목 등이 얼마나 흥미진진한지 모른다. 눈을 반짝이고 귀를 쫑긋해서 듣는 것이 방송대 강의들이었다. 어느 때는 방송대 강의가 얼마나 맛있는지 외출 준비를 다 마치고 있다가 외출을 포기하기도 한다. 방송대 강의를 계속 듣고 싶어서였다.

올 3월에 한국방송통신대학교 미디어영상학과 3학년에 편입학하였다. 이로써 꼭 다섯 번째 방송대에 발을 들여놓게 되었다.

‘내가 미디어다’

그동안은 맛보기로 공부를 했다면 이번에는 제대로 공부하여 ‘1인 미디어 시대의 총아’가 되고자 한다.

공부의 ‘정도’는 우선 많은 시간을 투자하는 것이다. 살아가는 내내 늘 공부 마인드로 무장하는 게 필요하다. 마지못해 하는 것이 아니라 공부 자체를 즐겨야 한다.

‘좋아하는 자는 즐기는 자를 이기지 못한다’고 한다.

‘공부가 가장 쉬웠어요’의 저자인 장승수 씨는 구두닦이, 중국집 배달원, 건축공사장의 인부를 하는 등 힘겹게 살다가 결국은 공부로 승부하여 서울대 법대를 수석으로 들어간 후 사법고시에 합격했다. 남들과 출발선이 다르기에 고생을 엄청했지만 자신의 의지로 운명을 뛰어넘은 ‘인간 승리’의 표본이 된 것이다.

방송대 미디어영상학과 3학년 2학기 과목은 취미와 예술, 대중영화의 이해, 스피치 커뮤니케이션, 멀티미디어 기획 제작, 방송 기획 제작의 기초, 미디어 혁신과 뉴스 스토리텔링 등의 수업이 진행된다. ‘1인 영상시대’인 요즘 트렌드에 잘 맞는 학과가 바로 한국방송통신대 미디어영상학과이다. 구성된 학과목이 꽤 재미있고 흥미진진하여 다른 시니어 분들께도 공부하기를 권장하고 싶은 학과이다.

미디어영상학 공부를 하기 위해서 이어폰을 핸드백에 넣고 다니며 전철에서 강의를 듣고 다닌다. 또한 설거지할 때도 방송대 강의를 들으며 하고 있다. 수돗물 소리에 놓치는 부분은 리플레이로 다시 들으면 되니까 문제 될 게 없다.

스마트폰에 유노 플러스 앱을 다운 받아서 깔아놓았기에 언제 어디서나 공부할 수 있는 시스템이 정말 편리하다는 생각이 든다. 잠자리 옆에는 교과서와 워크북을 놓고서 잠들기 전까지 교과서를 들여다보는 습관을 들여놓았다.

방송대 교과서는 집필진들의 전문성과 성실성이 돋보이는 수준 높은 교재들이다.

“이 학비에 어디 가서 이렇게 수준 높은 강의를 들을 수 있겠어요? 입학해서 강의를 듣고 보니 ‘정말 내가 잘했다’는 생각이 들어요.”

같은 기관에서 시니어 기자로 더불어 활동하고 있는 미디어영상학과 학우는 활짝 웃으며 방송대를 만난 것이 행운이라고까지 한다. 국어국문학을 공부하고 있는 내 친구도 교재가 좋다고 칭찬이 늘어진다. 시 창작과 수필 쓰기를 즐기는 이 친구는 방송대 교재에 글쓰기 노하우가 다 들어 있어서 결정적으로 도움이 되고 있다고 했다.

어려운 환경에서 자신이 원하는 신분을 갖기 위해 고전하는 나를 결정적으로 구원해준 것은 우리나라의 좋은 제도였다. 꿈을 가지고 배움의 끈을 놓지 않으니까 점핑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 것이다. 내 인생의 터닝 포인트가 되어준 두 번의 시험은 19세 때 고입 자격검정고시와 29세 때의 교사자격시험이었다.

1970년대의 20대 때는 서울대 농대에서 일반직으로 근무를 했었다. 교사 자격증을 취득한 1979년부터 2012년까지 안일여고, 평택여고 등에서 33년을 교사로 근무했었다.

간절한 바람으로 갖게 된 교사자격증을 손에 쥐고 얼마나 울었는지 모른다. 감격에 겨워서 그야말로 눈물이 강물이 되도록 울고 또 울었다. 교사가 되어 갖게 된 교육철학은 ‘어떻게 해야 제자들의 마음밭을 곱게 가꿔줄 수 있는가?’였다. 10여년 전 서둔야학 선생님들이 야학생들에게 그러했듯이 말이다.

“집안 형편이 어려우면 꼭 주간대학을 가려고 애쓸 필요 없어요. 직장생활을 하며 학업을 병행할 수 있는 한국방송통신대학교에 가면 돼요.”

재직 시에 제자들에게 늘 하던 말이었는데 30여 년 후에 제자들을 만나보니 꽤 여러 명의 제자들이 방송대를 장학생으로 졸업했다는 말에 얼마나 장하고 뿌듯했는지 몰랐다. 무사히 졸업만 해도 고마운데 장학생까지 됐으니 말이다. 자랑스러운 내제자인 그들에게 말했다.

“나는 방송대를 졸업 못했는데 그 힘든 과정을 이겨내고 방송대를 졸업한 사람은 무조건 존경해요.”

그만큼 입학 문은 넓으나 졸업 문은 좁디좁은 방송대를 졸업했다는 것에 큰 의미를 둔다는 얘기이다.

퇴직을 한 지금은 여유를 갖고 공부 자체를 즐기고 있다. 할 수만 있다면 ‘1인 영상미디어’ 시대인 지금 유튜버로서의 활기찬 삶을 기대해본다.

100세 시대인 지금은 퇴직 후의 삶에 대한 개념 정리부터 제대로 해야 한다. 퇴직 전의 삶은 전반생, 퇴직 후의 삶은 여생이 아니라 후반생으로. 지금 나는 브라보 마이 라이프, 한국 시니어블로거협회, 강남 시니어플라자 해피미디어단 등에서 시니어 기자로 활동하고 있다. 세상에서 글쓰기가 가장 즐거운데 쓰고 싶은 글을 마음껏 쓰면서 살고 있으며 책 읽기와 공부하기가 일상화되어있는 지금이 내 인생 최고의 황금기이다. 흥미, 재미, 의미를 추구하며 살고 있는 후반생이 즐겁고 행복하다.

브라보 마이 라이프!

“배움이 이어지면 기회도 이어진다”

방송대 캐치플레이즈에 전적으로 공감한다.

박애란 _ 선생은 서둔 야학 시절 야학생과 교사로서 맺은 인연을 누구보다도 소중히 여기며 본회에 각별한 애정을 가지고 있다. 평택에서 어릴 적 꿈이었던 교사로 학생들을 가르치다 은퇴하였다. 2019년 서둔 야학 이야기를 엮은 책 『사랑 하나 그리움 둘』을 출간하였고 유튜브 ‘사랑 하나 박애란 TV’ 채널에 서둔 야학 이야기를 연속 제작해서 올릴 예정이다.

Last modified: 2021-11-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