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ritten by 5:42 오후 126호(2021.10)

선구자 인터뷰
최성호 아시아산림협력기구 프로젝트 매니저 (산림자원 92)

우리나라 식물 이름은 일본 식민지의 잔재라는 오명을 벗어나는 디딤돌이 되기를…

『한국 식물 이름의 유래 『조선식물향명집』 주해서』

저자 최성호 아시아산림협력기구 프로젝트 매니저 (산림자원 92)

임세진 선구자 편집위원

발문 : 지난 9월 14일, 텔레그램 선구자 편집회의 방에 최성호 회원이 신간을 출간했다는 소식이 올라왔다. 126호 인터뷰이(Interviewee)를 고민하던 중, 자연스럽게 최성호 회원을 인터뷰 해보자고 의견이 모아졌다. 인터뷰 일정을 잡고 인터뷰를 준비하기 위해 책을 찾아보다가 깜짝 놀랐다. 128,000원이라는 책값에 놀라 책 정보를 찾아보니 무려 1,928쪽에 두께가 8Cm나 됐다. 더 특이한 것은 발행일이 2021년 8월 15일이었다. 통상적으로 출판사에서는 휴무일을 출간일로 잡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굳이 광복절에 출간을 한 것이다. 공동저자들의 면면은 더 특이했다. 경영학과를 졸업한 금융 및 M&A 전문 변호사(조민재), 물리학과를 졸업한 가전·전기전자 제품 유통사 대표(최동기), 부동산정책을 전공한 시민정원사(심미영), 조경학과를 졸업한 조경업계 종사자(지용주) 등 대부분이 비전공자들이었다. 전공자는 산림자원학과를 졸업한 이웅 씨와 최성호 회원 두 명이었다. 그러나 전공자인 최성호 회원도 현재 아시아산림협력기구에서 국제협력사업 담당 전문관으로 일하고 있다. 그나마 식물분류학을 전공하고 식생과 식물상 조사자인 이웅 씨가 산림자원학과에서 식물분류학을 전공하고 식생 및 식물상을 조사하는 작업을 수행하고 있다. 책 집필 기간은 무려 십년이 걸렸다고 한다. 책 소개를 살필수록 『한국 식물 이름의 유래-조선식물향명집 주해서』(심플라이프 출간) 책이 궁금해졌고, 그 작업 과정이 궁금해졌다.

“처음에 이 책 낸다고 했을 때 다들 미쳤다고 했어요. 친한 동기는 책을 보고 ‘이 또라이!’ 그러더라구요. 어떻게 이런 책을 쓸 생각을 했냐고…. 다들 처음에 이 책의 책값을 봤을 때는 놀라고 책을 받아보고 난 후에는 얘들이 얼마나 미친 짓을 했는지 아는 거죠. 정말 미친 거죠. 저희도 이렇게 될줄을 몰랐어요. 다들 아마추어니까 이렇게 쓴 거지. 아마 아는 사람을 못할 거예요.”

2.5Kg의 책을 탁자에 올려놓고 ‘처음 책을 받아본 순간, 대단하다는 말밖에 안 나왔다’는 필자의 말에 최성호 회원이 건넨 책에 관한 첫마디이다.

일본 잔재라는 오명을 벗기 위해 일 년만 하자며 시작한 작업

서울대학교 산림자원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산림환경을 전공한 최성호 회원은 식물 동호회 ‘야생화를 사랑하는 사람들’을 만들었다. 우리나라 야생식물에 대한 올바른 정보를 제공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동호회에서 『조선식물향명집朝鮮植物鄕名集』을 한번쯤은 제대로 읽어보자는 이야기가 오갔다. 그렇게 얘기만 삼 년 정도 하고 있었다.

“처음에 이 책을 쓰게 된 게, 2015년에 이윤옥씨가 『창씨개명된 우리 풀꽃』에서 ‘우리나라의 모든 식물 이름은 일본에서 베낀 거다. 식물 이름은 일본 식민지의 잔재다.’ 이런 식으로 강조를 했었어요. 그게 네이버 백과사전에까지 걸렸어요. 근데 실제로 보면, 저희가 봤을 때는 그게 아니거든요. 모든 초등학생들이 다 네이버를 보는데…. 심지어 제 아들도 수행과제 때 네이버를 보는데, 그런 사고방식이 갖춰지는 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든 거죠. 그걸 바탕으로 여섯 명이 의기투합한 거죠. 근데 그때 다들 그랬어요. 야, 우리 딱 일 년만 하자.”

“저희도 집필 삼 년 차쯤에 그만두려고 했어요. 해도 해도 끝이 없는거예요. ‘이제 다 됐다.’하고 끝맺었는데 또 새로운 사실이 알려져서 또다시 연구하고, 또다시 연구하고, 어문이란 어문은 다 뒤지고, 국어사전 다 뒤지고, 고문 다 뒤지고, 심지어 북한 문헌도 다 뒤졌어요. 우리나라는 북한 문헌을 체계적으로 정리한 게 없어요. 그래서 북한문헌을 어떻게 하면 잘 찾을까 생각하다가 국립중앙도서관 2층에 북한자료센터에 가서 다 뒤졌어요. 북한은 『조선식물집』이 있고 2011년인가에 『식물분류명사전』을 내면서 집대성해놓은 게 있어요. 그걸 다 담았어요. 그리고 지방명, 방언이라고 하잖아요. 그 방언을 다 담았어요. 국어학자적 출판자료들요. 2017년인가 국립수목원에서 우리나라 방언자료 조사해놓은 게 있어요. 민속자료집 조사해놓은 것도 다 담았죠. 그거 다 담고, 그다음에 유래 다 추적하고…. 유래 추적하면서 일본명하고 중국명까지 다 뒤진 거죠. 일제 강점기 때 편찬된 한글명이 들어간 문서를 다 뒤진 거죠.”

강산이 변한다는 10년의 세월 동안 그 많은 자료들을 조사하며 책을 집필한다는 것이 결코 쉽지 않았을 것 같다는 필자의 말에 포기하려고 하고 싶은 마음과 건강을 헤치는 시간들이 있었다고 이야기한다.

“8년 차쯤에 또 포기하려 했거든요. ‘도저히 안되겠다, 포기하자.’ 그랬는데 사람들이 다들 그러는 거예요. ‘그동안 들인 시간이 너무 아깝다.’ 그래서 끝까지 했죠. 책을 쓸 때는 딱 퇴근하고부터는 주말도 없이 책 편찬 일에만 몰두했어요. 저는 미얀마에서도 이 작업을 했어요. 평일에는 일하고 주말에는 책 편찬일하고. 거의 6년간은 주말생활이 없었어요. 자료찾고, 분석하고, 자료찾고 분석하고…. 그때는 그냥 하나의 목표만 추구했던 거 같아요. ‘끝내야겠다’는 생각이요. 집사람한테 왜 이걸 시작해서 힘들게 사냐는 구박도 많이 받았죠. 어떤 사람은 건강도 해치고…. 저도 해외출장 다니면서 하다보니 2018년에 크게 아팠었거든요. 그 후유증이 아직도 남아있어요.”

조선명으로 된 식물도감의 첫걸음마 조선식물향명집(朝鮮植物鄕名集)

일반인들에게 생소한 책 『조선식물향명집(朝鮮植物鄕名集)』이 어떤 책이길래, 『한국 식물 이름의 유래』 저자들이 몇 년씩 읽고 해석을 했을까? 책에 소개된 글을 인용하면, 『조선식물향명집(朝鮮植物鄕名集)』은 일제강점기인 1937년 조선인 식물학자 4명(정태현(鄭台鉉), 도봉섭(都逢涉), 이덕봉(李德鳳), 이휘재(李徽載))이 조선박물연구회에서 발간한 책으로 한반도에 분포하는 143과 684속 1,944종의 식물 이름을 기록한 식물분류명집이다. 조선인들이 조선명으로 된 식물도감을 만들기 위해 시작한 첫걸음마였다. 명실공히 우리 학자가, 우리 땅에 있는 식물을 근대 학문 체계에 맞춰 분류한 뒤, 우리말 이름을 적어 펴낸 사상 최초의 책이다. 여기에는 우리 땅에서 자라는 식물 1,944종의 학명, 일본 국명, 조선 국명이 실려있다. 학명에 근거해 식물명을 모아 기록했기에 본문은 라틴어 학명과 이에 대해 부여된 일본명, 실제 사용하는 조선명을 알파벳과 한글로 표기했다. 한국 식물 이름의 유래의 근간이 되는 책인 것이다.

“『조선식물향명집』을 보면 그렇게 돼 있어요. 위에 학명 적혀있고, 밑에 일본어 적혀있고, 옆에 한글명 적혀있고. 그냥 식물 명집이예요. 향명집(鄕名集). 원래는 정식 명칭을 보면 『조선식물국명집』 이렇게 나와요. 근데 향명이라고 적을수밖에 없었던게 일제 강점기 잖아요. 향명집을 네명의 저자가 썼죠. 정태현, 도봉섭, 이덕봉, 이휘재라는 네분이 있었는데 조선박물연구회에서 시작을 해서 일본인한테 이걸 낸다고 하니까 반대를 했어요. 왜 조선명을 넣느냐, 넣지 말아라, 반대를 했는데 아니다, 이거는 일본어를 잘 모르는 조선인들 이들을 교육하기 위해 일본어를 번역하는 것이니 이해해달라, 그렇게 설득을 시켰던 거죠.”

일제 강점기에 1,944종의 식물을 조사한다는 게 얼마나 어려웠을지 짐작조차 하기 어렵다. 아울러 조선명을 넣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었을 텐데 그것을 이루어 낸 사실도 놀랍다. 이러한 사정(事情)을 고려하지 않고 무조건 일제 잔재라고 치부하는 주장은 잘못된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미친 거죠. 그 사람들도 미쳤던 거고 그걸 6년 넘게 연구한 우리도 미친 거죠. 그 당시는 전국을 다 조사하고 손으로 쓰고…. 그분들이 더 열정을 가지고 있었겠죠. 대단했던 거죠. 이걸 쓰는 거 자체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뭐든지 일제 잔재라고 치부해 버리는 게 이 작업을 시작하게 된 배경이예요. ‘『조선식물향명집』 저자들은 일본에 꿈을 판 나쁜 사람들이다. 일제 식민잔재를 그대로 이어받았다.’ 지금 우리나라 식물 분류학자들이 다 그렇게 생각을 가지고 있어요.”

“『조선식물향명집』 서문에 사정요지가 나와있어요. 사정(査定)이라는게 조사해서 정한다는 거거든요. 그 사람들이 분명히 밝혀놨어요. 어떻게 정했는지. 예를 들면 동의보감에서 따왔다, 참고로 해서 조선사람들이 흔히 쓰는 이름을 부여한다, 그리고 없는 것은 우리가 ‘신칭(新稱)’한다. 그렇게 밝혔놓았는데 사람들은 서문도 안 읽어보거나 뭉뚱그려 놓은 거죠. 지금도 그런 경우가 많아요. 출판된 책들 중에 너무 엉뚱한 논리를 펼치고 근거도 없는 문헌을 갖다 놓은 경우가 너무 많아요. 그런 것은 저희들이 다 각주를 달아놨죠.”

한국의 식물을 제대로 알고 싶었던 욕구들

“일본 같은 경우 1940년대부터 도감이 편찬됐어요. 한국은 서울대 교수였던 이덕봉 교수가 국화과 쪽만 정리해놨어요. 1937년 1월에 발표한 [조선산 식물의 조선명고]라는 논문이 있어요. 『조선식물향명집』이 1937년 3월 25일에 나왔는데, 그전에 국화과 식물만 새롭게 이름을 신칭했는지, 아니면 이걸 어디서 따왔는지 기록을 해놨어요. 나머지는 정리가 안됐죠.

한국은 식물분류체계가 좀 늦게 들어온 거죠. 일본이 1910년대에 들어오면서 식물분류체계를 심어줬는데 우리가 그걸 발전시킨 거죠. 일본은 그런면 에서 우리나라에 굉장히 큰 도움을 준거예요. 과학적인 체계를 발전시켰으니까. 1910년도에 한일합방 되기 전에 나온 화한한명대조표(和韓漢名對照表)라는게 있거든요. 일본이 한일합방하기 전에 그걸 공표를 해요. 이게 일본명하고 조선명이니, 이것만 써라. 통일시켜놨어요. 1910년도에 화한한명대조표 나오고, 1912년도에 조선한미수목분류명칭도가 탄생하고, 28년도에 야외식물지 나오고, 22년도에 조선식물명휘라는 책이 나오고 그렇게 쭉 연결이 돼요. 흐름이. 당시에 그걸 발간을 했을 때는 조선총독부에 기여하는 것도 있었지만 한국의 식물을 제대로 알고 싶었던 그런 욕구가 컸어요. 정태연 박사가 없었으면 향명집도 탄생하지 못했고 식물분류도 안됐던 거죠.”

고문서를 다 뒤쳐 찾아낸 문화와 전통이 살아있는 옛이름들

“먼저 『조선식물향명집』에 나온 원문을 그대로 실었어요. 오타가 있어도 일부러 그대로 실었어요. 그 밑에 현재 쓰는 학명 나와있고, 그 밑에 국명의 유래 나와있고, 그 밑에 다른이름 나와있고, 그 밑에 옛이름 나와있고, 그 밑에 중국/일본명 나와있고, 그다음에 지방명, 참고 나와있고, 그담에 각주 달아놓고. 특히 다른이름같은 경우에는 기존에 공식적으로 출판된 출판물은 다 담았어요. 옛이름도 마찬가지로요. 고문서를 다 뒤진 거죠. 심지어 삼국사기까지 뒤졌어요. 그 비싼 책을 사서 다 뒤졌죠. 저는 그렇게 비싼 책은 못샀구요.(웃음) 경제적으로 여유가 되는 공동저자들이 한 권에 몇 백만원씩 하는 책들을 샀어요. 그분들이 이 책 값을 다하면 벤츠 하나 산다고 얘기해요.(웃음) 다른이름은 우리나라 현재 산림청에 있는 국가표준식물목록에 한해서 거기 출처명을 적용해서 국명으로 하고 그 외는 다 이명(異名), 즉 다른이름으로 정리한 거죠. 시작은 1937년도에 나온 조선식물향명집이 기준이지만 그전에 나온 것도 정리해놨습니다. 1910년대 화한한명대조표(和韓漢名對照表), 조선주요삼림수목명칭표(朝鮮主要森林樹木名稱表), 1917년 조선한방약료식물조사서 쭉 나와요. 다 정리했어요. 거기에 보면 한글명이 있거든요. 일본인이 집필했지만 한글이름을 달아놨어요. 거기보면 우리나라 식물명이 어떻게 정해져 왔는지 충분한 사료가 되기 때문에 다 참고했죠.”

식물 이름의 유래라는 제목을 보고 식물 사진이 많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과 달리 책에는 사진이 많지 않았다. 사진이 없는 식물도 많았다. 사진도 흑백에 크기도 작았다(4Cm*5.5Cm)

“이 사진이 굉장히 희귀본이예요. 사람들이 다들 왜 칼라로 안 실었냐고 그러는데요. 우리나라 식물표본이 없고, 식물동정한 표본 즉 학명이 부여된 표본이 일본 동경대학에 가 있어요. 그걸 이우철 박사가 가서 다 찍어 온거예요. 그 사진을 실은 거예요. 식물표본 진짜 사진. 기준이 된 표본사진이예요. 이건 구할 수 없는 거죠. 저희도 간신히 얻었어요.”

사진을 구하게 된 에피소드와 더불어 다른 에피소드는 없는지 물었다.

“식물 이름의 유래를 각종 문헌과 고전으로 찾다 보니 언어 변천도 함께 보여 재미있었어요. 아래아가 떨어져 나가고 ㅅ, ㅎ 떨어져 나가는 것 등이 쭉 보여요. 그리고 식물명을 읽다 보면은 역사공부도 많이 돼요. 일본인들이 한국을 어떻게 바라봤는지도 알 수 있죠. 학명에 다케시마가 붙어 있는 것들을 보면 울릉도의 특산식물을 가리키는 거예요. 독도를 가리키는 게 아니고 울릉도를 가리키는 거였죠. 그게 역사적으로 남아있어요. 일본의 식물학자들은 다케시마를 붙일 때 울릉도라고 붙였지 독도를 언급 안 했거든요. 근데 일본은 그런 얘기를 안 하죠.”

“옛날에는 ‘보라’는 ‘자지’라고 썼어요. ‘자주’가 아니라 ‘자지’였어요. 우리도 ‘이게 뭐야?’하며 서로 웃거든요. 그런 것도 재밌습니다. 우리가 지금은 부끄럽게 생각하는 것들 있잖아요. 성기를 표현하고 그런 것들을 옛날에는 자연스럽게 썼어요. 그게 당시의 그 사람들의 문화였던 거죠. 닭의장풀을 보면 ‘닭의밑씿개’가 있거든요. 옛날 문헌에 보면 흔히 말하는 쌍욕이나 성기를 지칭하던 식물도 많아요. 민간에서는 그런 게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진 거 같아요. 현대에서는 개불알꽃도 이름이 혐오스럽다고 바꿨잖아요. 우리가 쓰던 옛이름은 사람들이 그렇게 봤기 때문에 그렇게 썼던 거잖아요. 그대로 살려놨으면 좋겠어요. 그게 더 친숙하고, 전통이고 문화라고 생각해요.”

찾을수록 방대해지는 조사량

기억에 남는 문헌이나 식물이 있는지 물었다.

“1949년도에 박만규 씨가 <우리나라 식물 명감>이라는 책을 출간했거든요. 근데 그 책을 아무리 봐도 못 구하겠다며 저한테 도움 요청이 온거예요. 찾아보니 그 책이 교원대학교에 한 권, 국립중앙도서관에 한 권이 있었어요. 근데 이게 희귀 문서로 되다보니까 복사를 안 해주는 거예요. 그래서 여기서 찔끔, 저기서 찔끔 그렇게 복사해서 결국 한 권을 채웠어요. 그렇게 웃긴 사례들도 많아요. 그렇게 해서 이 책을 만들었어요.(웃음)”

“식물은 복수초가 가장 기억에 남아요. 복수초도 일본, 중국, 한국 삼국이 다 똑같이 써요. 일본에서 만든 게 중국으로 넘어간 게 아닌가 생각했었죠. 그런데 “1661년 함경도 삼수에 유배 중이던 윤선도(尹善道, 1587~1671)는 초봄에 빙설 속에서 노란색으로 핀 꽃을 발견하고 그에 대해 관찰 기록과 시를 남겼는데, 그 내용에 비추어 해당 식물은 복수초로 추정된다. (중략) 이에 비추어보면 얼음새출, 얼음꽃 또는 얼음새기꽃은 복수초를 일컫는 우리말로 최근에 생겨난 것이 아니라 실제 민간에서 불렸던 것으로 보인다.”(본문 651쪽) 이걸 발견했을 때 사람들이 유레카를 외쳤어요. 다들 일본에서 유래했다고 봤는데 실제 우리나라에 이름이 있던 거였어요. 그리고 며느리밑씻개도 일제 잔재라고 하는데 그렇지 않아요.

또 한 가지 기억에 남는 게 ‘윤노리나무’ 어원을 못 찾았었어요. 한참을 어원을 조사하던 중 춘향가 판소리에 그런 대목이 나오는 걸 알게 됐죠. 그게 기준이 돼서 그다음부터 판소리, 민요까지 다 찾았어요. 실제로 판소리에 실렸다는 건 그 당시에 썼다는 거잖아요. 제가 춘향가 판소리에서 찾으니까 ‘그러면 조선구술민요집을 찾아보자’고 해서 또 다 뒤지고 그랬어요. 제가 화두를 던지면 공동 저자들이 다 뒤졌죠. 책 같은 경우도 『한국생약용집』인가 하는 책이 있는데 그건 한의학 쪽에서 약명을 정리해놓은 건데 너무 비싸요. 몇백만 원짜리인데 그걸 또 구입해서 보셨어요. 한의학 쪽에서 어떻게 정리해놨는지 살펴봐야 하니까.”

우여곡절 끝에 찾은 출판사에서 만난 소중한 인연, 그리고 소리 소문없이 퍼지는 입소문

“책을 출판하려는데 출판사에서 다 안 하겠다고 하더라구요. 출판사를 못 구해서 전전긍긍하던 중 여기에 관심 있는 PD님의 동생이 출판사를 한다고 해서 그분을 찾아가서 열심히 설득을 했죠. 처음엔 안 해준다고 했어요. 설득에 설득을 거듭해서 겨우 했어요. 편집만 3년이 걸렸어요. 편집 디자인하고 교정했던 분들 손목이 다 나갔어요. 교정도 서너 번을 보면서 목이 빠지는 줄 알았어요.(웃음) 안 보여요.(웃음) 어떨 때는 돋보기로 보거나 휴대폰으로 접사를 해서 봐야 했죠. 교정 작업도 함부로 못하는 게 용어를 다 알아야 하거든요. 그런데 거기 교정하신 이교혜 선생님이 정말 대단하신 분이세요. 그 교정자가 알고 보니까 서울대학교 식물분류학계 대가인 이창복 교수님과 같이 작업을 하신 분이셨어요. 나이가 육십대이신데. 그분과 작업을 할 수 있었던 걸 굉장히 영광으로 생각하고 있어요. 저희는 정말 운이 좋았던 게 출판사 대표도 잘 만났지만 교정자도 정말 잘 만난 거죠.”

인터뷰를 준비하며 책값이 너무 비싸서 책을 빌려보려고 경기도 성남, 분당권 근처 도서관을 다 뒤졌는데 책이 없었다. 심지어 국회도서관에도 없었다. 가까이 지내는 대학생들에게 수소문해봤으나 대학교 도서관에도 없다고 했다. 어디에서도 빌려볼 수가 없었다고 필자가 이야기하자 또 관련 에피소드를 들려준다.

“출판사 사장도 ‘이 책이 과연 팔릴까?’라는 의구심을 갖고 있었어요. 그러면서도 손해를 각오하고 내 준거죠. 저희도 그런 얘기를 했어요. 그래서 초판은 300부만 찍자고 얘기했었죠. 그러면서 전략을 짰어요. 전국에 도서관이 4만 개 정도 되요. 도서관 하나에 한권 씩만 넣어도 좋겠다는 생각에 신청을 했거든요. 그런데 5만 원 이상은 고가 도서라서 구입이 안된대요. 그래서 전략을 바꿨어요. 알고 있는 대학교수님들에게 대학도서관에 신청해달라고 얘기를 했죠. 교수들이 신청하는 건 다 받아주니까요. 그런데 한겨레 신문을 비롯, 각종 언론에 보도가 되고 어느새 입소문이 났나 봐요. 1쇄는 전부 다 나가고 2쇄 준비하는 걸로 알고 있어요.”

비전공자들이 그야말로 집대성한 책이 어느새 소리 소문없이 팔리고 있다. 책을 발간한 지 두 달여만에 2쇄를 준비하고 있는 것이다. 비전공자가 만든 백과사전 형식의 식물학 책은 뜨거운 감자가 될지도 모른다. 그렇기에 말을 순화시키고 문헌에 검증된 자료만 실었다. 논문에 나온 것, 학계에 나온 것만 실었다. 사람들이 높이 사는 건 아마추어들이 했다는 것, 즉, 그만큼 공부를 많이 했다는 것이다. 역으로 보면 진짜 프로들이 앞으로 더 열심히 노력해야 한다는 것이다.

허탈함, 홀가분함, 허전함. 그리고 기쁨과 자부심.

“책을 내고 난 후 소감은 허탈했죠. 큰 짐을 하나 덜었다는 생각에 마음이 홀가분했어요. 지금 생각하면 허전해요. 어떻게 했는지 모르겠어요. 다들 그렇게 얘기해요. 그렇게 바쁜데 어떻게 했는지 모르겠다. 후련하다는 느낌. 자부심보다 기쁨이 있는 거 같아요. 누군가에게 올바른 정보를 줄 수 있다는…. 그런데 이걸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시각도 있어요. 그건 인정해요.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우리나라의 식물 이름의 유래를 한 번은 집대성 해야겠다는 생각이었어요. 그것만큼은 자부심이 있어요. 하나의 큰 줄기를 만들었다는…. 이걸 바탕으로 더 연구가 되어 나가야죠. 연구가 필요한 부분은 다 달아놨어요. 이 책이 작은 디딤돌, 마중물이 되기를 바래요. 이 책을 토대로 더 나은 책이 나왔으면 좋겠어요. 그게 제 바램이예요.”

금강초롱, 식물분류학자들의 과제

“사람들이 금강초롱에 관심이 많잖아요. 금강초롱 학명이 Hanabusaya asiatica인데요. 하나부야사야가 일본의 초대 공사인데 연구했던 사람이 그 사람을 기리기 위해 이름을 붙여준 것이죠. 얼마전에 청와대에 청원이 올라갔어요. ‘하나부사야 아시아티카가 일제 잔재다. 학명을 바꿔야 된다.’ 박승천이라는 조선일보 전(前) 기자가 쓴 글이죠. 그런데 학명이라는 건 못봐꿔요. 왜냐하면 국제명명규약이라는게 있거든요. 거기에 보면 최초에 부여했던 사람이 학명을 짓게돼있어요. 학명은 전세계적으로 통용되는 인터내셔널 코드예요. 국명이나 추천명은 합의만 되면 바꿀 수 있지만 학명은 바꿀 수가 없어요. 북한에서는 그래서 이름을 다 뗏어요. 그래서 국제적으로 문제가 되고 있어요.

금강초롱의 유래는 초롱같이 생겼는데 금강산에서 발견됐다고 해서 금강초롱이라는 이름이 붙여진 거죠. 당시에 금강초롱은 신칭했던거 같아요. 이 책을 읽어보면서 알겠지만 약재로 쓰인 식물 외에는 이름이 없었어요. 금강초롱은 높은 데서 자라는 그냥 풀이었던 거예요. 사람들이 먹고살기 바빠 그런 풀들은 이름이 없었던 거죠. 그런데 금강초롱은 과학적으로 분석해보면 우리나라 딱 한속이예요. 특산식물이죠. 학명을 하나 바꾸려면은 식물분류학자들이 노력을 많이 해야 돼요. 식물분류학자들이 외국 사람들을 만나서 설득시키고 동의를 얻어야 하거든요. 하나부사야는 없애자, 일본 잔재라는 말은 맞아요. 그런데 학명을 바꾸려면 만장일치로 동의를 얻어내야 바꿀 수 있어요. 상대방이 인정하도록 설득을 시켜야 하는 거죠. 일본 잔재를 없애려면 우리가 노력을 엄청나게 해야 돼요. 맨날 일본 잔재다 말만하지 말고 실제 행동할 수 있는 걸 해야죠. 국가차원이던, 식물학계 전체 차원이던, 비판만 하지 말고 행동하는 실천가가 되어야죠.”

“문제는, 얼마 전에 산림과학회 회장님을 만났는데, 우리나라에 식물분류학을 전공하는 사람이 없다고 해요. 기초과학을 아무도 안 하는 거죠. 힘들거든요. 분류학을 안 한다는 건 근간이 흔들리는 거죠. 현재는 그런 상황입니다. 제가 재학할 당시 서울대 산림자원학과에서도 식물분류학 연구실은 1등을 해야 갈 수 있었어요. 가장 뛰어난 학생이 갔거든요. 그런데 지금 명맥이 끊겼다고 해요. 그게 가장 안타깝죠. 요즘 너무 쉬운 것만 찾으니…. 이게 우리가 처한 현실이예요. 다른 대학들도 마찬가지예요. 기초과학을 너무 안 한다는 거. 그러니까 저희 같은 사람들이 이런 걸 하는 계기가 되고 그런 거죠. 저는 가끔 아들에게 이야기합니다. 식물분류학을 전공하라고. 무궁무진하게 할 게 많다고요. 근데 너무 힘드니까….(웃음)

열심히 공부하고 불의를 참지 못하던 학창 시절

“학창 시절엔 그냥 조용하게 지내는 평범한 학생이었어요. 공부 열심히 하는 학생. 불의를 보면 못 참는….(웃음) 공부하다가 이건 정말 해야 되겠다 싶은 건 같이 가서 데모도 하고, 합창단에서 노래도 부르고 했죠. 사람들이 저한테 약간 고지식하다고 해요. 그런데 저는 그게 좋다고 봐요. 그걸 바꿀 생각은 없어요. 제가 그걸 바꾸는 순간 이상한 사람이 돼요.(웃음) 저희 아버님도 그런 얘기를 하세요. ‘믿음이 가는 사람이 돼라. 신뢰가 있는 사람이 돼라.’ 저도 아들한테 그렇게 가르칩니다. 그래야지 좀 더 세상을 잘 살지 않겠어요?”

다양한 꿈들, 그 끝에 있는 농부의 꿈

농부가 꿈이었던 최성호 회원은 대학원 졸업 후 다니던 제지회사를 그만두고 농업 전선에 뛰어들었으나 동업자들과 뜻이 맞지 않아 농사를 그만두고 마음의 상처를 안고 은둔생활을 하던 중 김기사 회원인 친구의 권유로 페이스북에 식물 관련 그룹을 만들고, 김기사 회원들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고 한다. 그 인연으로 6월 김기사 모임에서 서울 농대 캠퍼스의 식물 해설을 진행하게 됐고, 선구자에 ‘우리 들꽃이야기’를 연재하게 됐다. 현재는 한국이 설립을 주도한 국제기구 아시아산림협력기구(AFoCO·아포코)에서 해외사업 총괄팀장으로 일하고 있다. 아포코는 우리나라가 기후변화와 개발도상국 산림파괴, 동아시아 지역 사막화, 산림 황폐화로 말미암은 피해에 대응하고자 주도적으로 설립한 산림분야 정부 간 국제기구다. 한국이 2009년 한·아세안 특별정상회의에서 설립을 제안하고 2012년 기구 설립을 위한 한·아세안 산림협력협정이 체결된 뒤 2018년 4월 27일 아시아산림협력기구 설립 협정이 발효된 아포코는 2020년 12월 유엔총회 옵서버 지위를 취득했다. 2012년부터 활동을 시작해 국제협력 분야에서 다양한 활동을 하고 있는 최성호 회원은 관심분야도 다양해지고 있다.

“국제협력을 하다 보니까, 영역을 좀 확대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요. 산림을 전공했는데 사회에 나와서는 전혀 엉뚱한 일을 하고 있으니까요. 제가 아포코에 들어와서 처음 맡은 게 프로젝트 매니저였는데, 4개 프로젝트를 관리했거든요. 프로젝트 총괄로 건축, 교육, 장학사업, 산림보건 사업, 홍보를 진행했어요. 건축의 ‘건’자도 모르는 사람이 그걸 다 했어요. 지금은 더 잘 알아요. 건축 설계 다 했고, 관리하고, 제가 가서 미얀마에 지어놓은 건물에 제가 센터장까지 하고 왔어요. 그러다보니 지금은 산림쪽 보다는 전반적인 것을 하고 싶은거죠.”

“앞으로 계획은 우선은 아포코에서 좀 더 경험을 쌓고 싶어요. 그래서 회원국에 레프리젠터팀 대표로 나가는 게 목표고 기회가 되면 박사과정도 하고 싶고요. 나중에 종자를 좀 정리하고 싶어요. 우리나라 종자가 다 팔렸잖아요. 그런 것들을 다시 찾아왔으면 좋겠어요. 후배가 그런 쪽으로 연구소를 하고 있는데요, ‘선배가 와서 이거 좀 해줘 봐.’라고 하는데, 추후에 거기 합류할까도 고민 중입니다. 그런데 아직까지는 아포코에서 배울게 더 많아요. 후배들도 양성하고 싶고…. 꿈일지 모르겠는데 나중에 은퇴하게 되면 예전에 하고 싶었던 농부로 돌아가고 싶어요. 자연에서 자연의 소중함을 느끼면서, 먹거리를 생산하며 살고 싶어요. 먹거리의 소중함도 알고…. 농사라는게 그렇더라구요. 하는만큼 주니까….”

아포코 창립도, 책 발간도 10여 년이라는 세월 동안 변함없이 묵묵히 지키고 해내는 최성호 회원을 보며 그가 있는 분야는 어디든 든든한 버팀목이 있어 걱정 없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최성호 회원 덕분에 좋은 책을 읽고, 식물학의 전통을 배울 수 있었음에 감사하게 되는 소중한 경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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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세진 _ 숭의여전 문창과에 입학, 문예창작보다 학보사 기사를 더 열심히 쓰고, 졸업 후 전국연합 기관지 ‘민’, 건강사회를 위한 치과의사회 신문 ‘건치신문’ 만드는 일을 하였다. 이후 성공회대 사회학과에서 공부하고 KOIKA 봉사단을 다녀온 후 현재 제천에서 사회복지사로 일하고 있다. (sejin3025@hanmail.net)

Last modified: 2022-10-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