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존경하는 세분 이야기
이정양(사단법인 농업조사전문가협회장)
지난 1년 사이에 저의 삶에 큰 변화가 또 한 번 있었습니다. 농촌진흥청에서 사단법인 설립을 허가받아 공증을 받고 등기소에 등기를 한 후에 세무서에 사업자등록을 마쳤습니다. 무슨 일을 할지, 무슨 일을 할 수 있을지 아직 명확히는 알지 못하지만, 일단은 한국농촌경제연구원의 “농업관측” 월보를 만드는 일에 약간 도움이 되는 일을 할 것 같습니다.
자세한 이야기는 다음 기회에 하도록 하겠습니다. 아무튼 쉽지 않은 법인 설립을 마치고 최근에 차분하게 저의 지난 삶을 돌이켜 보던 중에 임세진님으로부터 “선구자”에 내야 하는 원고를 부탁하는 문자를 받았습니다. 자연스럽게 지난 삶을 돌이켜 보는 것 중에서 이야깃거리를 찾게 되었습니다.
‘나는 참 행복한 놈이다. 왜? 존경하는 분이 많다. 누구? 아버지? 김대중? 노무현? 교수님? 기타 등등?’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가 결론은 아버지, 마지막 은사님, 직장에서의 선배님 한분으로 압축이 되었습니다. 평소에도 나의 삶과 3이라는 숫자를 많이 생각하여왔는데, 이번에 쓰는 글은 내가 존경하는 세분으로 해서 쓰기로 하였습니다.
1. 아버지
가. 입양
저의 아버지께서는 1931년도에 전남 장흥군 대덕읍에서 태어나셔서 2000년도에 전북 군산시 대야면에서 돌아가셨습니다. 3형제 중에서 맏이셨던 할아버지께서는 아들 다섯을 낳으시고, 둘째 할아버지께서는 딸만 넷을 낳으시고, 마지막 셋째 할아버지께서는 징용에 끌려가셔서 생사를 알지 못하였습니다.
할아버지께서 딸만 넷을 낳은 둘째 작은할아버지의 대를 잇게 하시려고 둘째로 태어나신 저의 아버지를 입양을 보냈답니다. 예전에는 그런 일이 비일비재하던 때라 아무런 반항 없이 둘째 할아버지 댁으로 가셨답니다. 그런데, 몇 년 후에 둘째 할아버지께서 득남을 하셨답니다. 그래도 혹시 몰라 둘째 할아버지 댁에서 살고 있었는데, 곧이어 또 득남을 하신 후로 파양 되어 다시 돌아오셨답니다. 자세한 이야기를 듣지는 못하였으나 예민한 성장기에 많은 영향을 주었나 봅니다.
3남매를 기르시던 당신께서 넉넉하지 못한 형편에서도 8남매를 둔 큰집에서, 6남매를 둔 넷째 작은아버지 집에서 아이 하나씩을 데려와 돌봐 주셨는데, 그때는 이런 사정을 몰라서 아버지를 많이 원망하였습니다. 우리도 춥고 배고픈데, 큰집과 작은집의 아이를 걷어 먹이는 것이 이해가 되지 않았던 것입니다. 하지만 나중에 이런저런 얘기를 형과 누나에게 듣고는 뭔지 모를 연민을 느끼며 이해할 듯 말 듯하였습니다.
나. 군생활
아버지 나이 20세에 6.25가 발발하였습니다. 갑작스레 입대하여 제주도 모슬포 근처 어디에서인지 훈련을 받으시고 대부분의 군생활을 백마부대에서 하신 듯합니다. 아버지께서 술을 많이 드신 때면 당시의 군생활을 자장가로 들으면서 잠들곤 하였습니다.
어렸을 때에 잔병치레를 많이 하셔서 할머니께서 특별히 보약 등으로 관리를 해 주셔서 덩치가 5형제 중에서 가장 좋으셨던 아버지께서는 군생활 중에 미군과도 대등하게 권투를 하셨던 이야기를 가장 많이 하셨던 것 같습니다.
아버지께서는 전투 중에 머리에 파편이 박히는 중상을 입고 병원생활도 하시고 퇴역하셨는데, 상이병으로 등록을 억지로 하지 않으셨답니다. 일을 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상이용사’라는 이유로 구걸하고 행패를 부리는 일부 몰지각한 사람들이 창피하여서 그랬답니다.
농약을 뿌리시다가 사고로 돌아가시던 2000년도에 당뇨와 두통으로 병원에 다니시면서 머리에 있는 파편 때문에 두통이 심하다는 것을 아시고 부상자 등록을 하시려 했던 것 같습니다. 그때는 별로 신경을 쓰지 않았는데, 2012년에 명퇴를 했다가 2013년부터 2014년까지 다시 공무원 시험을 보면서는 왜 ‘국가유공자’로 등록을 하지 않았을까? 하는 후회를 제법 하였습니다. 가산점이 많이 아쉬웠거든요. 그래도 당당하게 세상을 사시다가 가신 아버님이 자랑스럽습니다.
다. 노동
할아버지께서는 장흥군 대덕읍에서 제법 큰 땅을 소유하고 사셨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큰아버지께서 여기저기에 장사를 다니시다가 많이 탕진하시고 전북 군산의 구시장이라는 곳에서 건어물 장사를 하시게 되었답니다.
아버지께서는 제가 태어나고 몇 해 만에 어머니를 잃으시고 저를 막내 작은아버지에게 맡겨두고 큰아버지께서 자리를 잡은 군산으로 가셔서 지금은 ‘페이퍼코리아’로 바뀐 당시의 ‘세대 제지’라는 곳에서 일을 하시다가 ‘신일 목재’라는 목재소에서 일을 하셨습니다. 그 당시에 새어머니를 만나서 여섯 살 먹은 저를 전남 장흥에서 전북 군산으로 데려오셨습니다.
초등학교 입학 전인지 후인지 모르겠지만 한 2년쯤 뒤에는 ‘신일 목재’라는 목재소 내에 있는 조그마한 집에서 지내게 되었습니다. 이 시기에 아버지에게 가장 많이 혼난 것 같습니다. 말레이시아인지 인도네시아인지 모르지만 좌우지간에 동남아에서 수입되는 지름이 1미터가 넘는 통나무가 가득한 공장 마당에서 저는 많이 맞고 혼났습니다.
원목을 수입할 때에는 쇠줄로 나무를 서로 엮어서 끌고 왔는데, 그 쇠줄을 연결하는 U자 모양의 고정핀이 있는데, 쇠줄은 어쩔 수 없어도, 나무 사이에 떨어져 있는 고정핀을 엿장수에게 가져가면 많은 엿을 먹을 수 있었습니다. 저는 위험한 원목과 원목 사이로 기어들어가 고정핀을 찾아다니고, 위험천만한 짓거리를 하는 저를 쫓아내기 위하여 아버지는 보이는 대로 혼내신 거죠. 그렇게 쫓고 쫓기는 과정 중에 제가 자라서인지 저의 초등학교 때의 별명이 ‘날다람쥐’가 되기도 했습니다.
라. 소통
아버지 5형제 중에서 자식이 가장 작은 집은 우리 집으로 3남매가 다 였습니다. 큰집이 8남매, 셋째가 6남매, 넷째가 6남매, 다섯째가 4남매를 두셨습니다. 다른 분들보다 유별나게 조카들을 잘 챙기셨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명절 때에는 사촌 형들이 우리 집에서 더 많은 시간을 보낸 것 같습니다.
그럴 수밖에 없었던 에피소드가 몇가지 있습니다. 예전에는 어른들 앞에서는 술을 함부로 먹지 못하였는데, 우리 집에 오면 아버지께서 사촌 형들에게 직접 술상을 차려 주시고, 고스톱판도 직접 깔아 주셨습니다.
어느 해에는 고스톱을 치면서 놀다가 실실 한 사람씩 사라지는 것이 담배 때문이라는 것을 아시고는 맞담배도 허락을 하셨습니다. 이유는 담배도 입으로 들어가는 것이니 담배도 음식을 먹듯, 술을 먹듯 같이 해도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음식이 부족하면 설날이든 추석이든 상관없이 개든 토끼든 닭이든 닥치는 대로 잡아먹게 하셨습니다. 그러니 사촌 형들도 우리 집이 가장 편하여 자주 오고 많이 머물렀던 것 같습니다. 저도 그 느낌이 좋아서 그런지 누구를 불러서 어울리는 것을 좋아하였는데, 요즘은 워낙 개인적으로 사는 상황이라 그러지는 못하고 삽니다.
라. 교육
‘애비’, 저는 이 말이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말이었습니다. 새어머니가 제가 무엇을 잘 못하면 ‘애비 온다’라고 하시거나, 제가 위험한 물건이나 더러운 것을 만지면 그냥 ‘애비’라고 소리 지르곤 하셨습니다.
어렸을 때에는 그 뜻을 알지도 못하면서 울다가도, 짜증을 부리다가도 어머니께서 ‘애비 온다’라고 외치면 멈칫하곤 했습니다. 고등학생이 되었을 쯤에 ‘애비’라는 말이 ‘아버지’를 뜻하는 것을 알고 수긍하였습니다.
중학생 때까지, 아니 평생 세상에서 가장 무섭고 두려운 존재가 아버지셨던 것은 맞는 것 같습니다. 아버지에게 맞다가 잠들어 오줌도 싸고, ‘애비’ 소리만 들려도 멈칫하고, 아버지가 무섭고 미워 칼을 들어 배를 그으면 아버지의 표정이 어떨까 하는 상상도 할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철이 들면서 어느새 두려움이 듬직함으로 변해있었습니다. 그리고 장가를 가서 아이들을 셋이나 키우면서는 그 미움이 사랑이었음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아버지께서는 저의 두려움과 미움에 대하여 사과를 하시지는 않으셨지만 잘 사는 것에 대하여 고마워는 하셨습니다.
저는 당연히 우리 아이들이 가졌을 나에 대한 두려움과 미움에 대해 먼저 사과를 하였습니다. 그리고 고마움은 기회가 있을 때마다 표현하면서 살고 있습니다. 아버지 덕에 저는 나름대로 아이들과 잘 지내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2. 이변우 교수님
대학교 4학년이 되면서 취업을 생각해야 할 때 나는 당연히 내 직업에 ‘農’자가 들어가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가장 먼저 생각한 것이 ‘농협’이었습니다. 하지만 아무런 준비 없이 본 시험에서 고배를 마시고 다음에 생각한 것이 ‘농촌진흥청’. 그 중에 ‘농업연구사’. 그렇게 많이 준비를 한 것은 아닌데 덜컥 되어 버렸습니다.
그 차이는 시험과목에 있었던 것 같습니다. ‘농학과’에 다녔음에도 전공 공부는 거의 하지 않았는데, 농협은 영어와 재배학, 단 두 과목만 보았으니 재배학에서 타격이 컸나 봅니다. 대신 농업연구사 시험은 국어, 영어, 한국사, 생물, 통계학, 작물생리, 재배학 등 고등학교에서 배웠던 과목의 비중이 커서 그때까지 머리에 남아 있던 지식으로 합격이 된 것 같습니다.
농업연구사 시험에 합격을 하고 보니 그쪽으로 가신 선배님들은 대부분 대학원에 진학하여 석사, 박사 과정을 밟으시기에 자연스럽게 당연히 대학원에 진학을 하였습니다.
문제는 전공 실험실을 선택하는 것이었습니다. 아무 생각없이 진학한 터라 저는 친구가 수도작연구실로 간다기에 저도 교수님들과의 면접에서 수도작연구실에 간다고 하였습니다. 그때는 미리 학생들을 교수님들께서 배정을 한 것을 몰랐습니다. 세 사람 얘기만 하면, 선배와 친구는 수도작실, 저는 생리실로 배정이 되었는데, 그것을 모르는 제가 갑자기 수도작실을 지원하니 선배가 생리실로 가게 되었습니다.
나중에 안 것을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저와 친구는 생리실에서 학사 졸업보고서를 작성하여서 당연히 생리실로 가야 하는데, 그해에는 한 사람만 받을 수밖에 없어서 저에게는 당연히 생리실로 갈 거니 따로 얘기하지 않고, 친구에게 두 명이 필요한 수도작실로 가라고 하였답니다. 선배는 원래 수도작실로 가기로 되어 있었답니다. 그런데 아무것도 모르는 제가 친구가 수도작실에 간다고 하여, 저도 수도작실에 간다고 하니 원래 수도작실에 가고 싶어 했던 선배가 파트타임으로 다녀야 하기 때문에 생리실로 밀려갔다는군요. 인생 어찌 될지 아무도 모르는 일입니다.
그렇게 저의 은사님이 되신 분이 이변우 교수님이랍니다. 사실, 대학원에 가기 전까지는 그저 ‘군대 가기 전에는 수도작은 이은웅 교수님이셨는데, 바뀌셨나 보다’라는 생각만 한 정도였습니다.
교수님으로부터 배우기 전까지는 아버지 덕분에 바른 생각을 갖고 살게 되었다면, 교수님으로부터 배운 후로는 바른 자세를 갖고 살게 된 것 같습니다. 생각만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바른 자세, 자격도 중요하다는 것을 깨닫고 준비하고 갖추게 된 것 같습니다.
그런 과정에서 강하게 밀어붙이거나 꾸지람이 컸더라면 오히려 견디지 못하거나 반항심에 어디로 튀었을지도 모르겠는데, 항상 온화하게 품어 주신 것이 그래도 이나마 제가 이렇게 살게 되었나 봅니다.
3. 박태동 장장님
직장 생활을 하면서도 저에게는 은인이 있었습니다.
대부분 좋은 분들이셨는데, 나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세 사람 정도가 있습니다. 한 사람은 나랏돈이 지돈인줄 아는 사람이었는데, 제가 처음이자 딱 한번 결재판을 집어던지게 한 사람입니다. 한 사람은 부하 직원의 형편과 사정은 무시하고 업무지시를 한 사람인데, 대학교수가 콩을 쥐에게 먹여 이소플라본의 효과를 선전하니 저에게도 해보라 하여서 2002년에 퇴직을 결심하게 하여 고흥으로 피난을 오게 한 인간입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저는 그때 고흥에 온 것이 천행이었습니다. 이곳 고흥에서 어머님을 모시고 아내와 세 아이와 행복하게 살았으니까요. 그리고 또 한 인간은 자기의 머릿속은 텅 비어 있는데, 자신의 출세를 위하여 아랫사람의 능력과 공을 가로채고 이용한 사람인데, 그 사람은 아직까지 잘먹고 잘살고 있답니다.
그런데, 박태동 장장님은 저뿐만 아니라 항상 부하직원의 편에서 생각하시고 배려해 주신 분입니다. 말년에는 후배에게 밀려 해남으로 좌천되시고서도 ‘허허’ 웃으시면서 편한 일자리로 왔다고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이셨습니다. 그것이 저에게는 큰 행운이 되었습니다.
제가 2002년도에 그만두겠다고 사표까지 제출한 상황에서 해남 시험장의 분소인 고흥 시험지에서 1년만 더 다니다가 그때에도 아니다 싶으면 그때 그만두라고 만류하셔서 고흥에 내려와 행복하게 살다가 10년을 더 다니고 명퇴를 할 수 있었습니다.
제가 사표를 내게 한 악연도 있었지만 제가 다시 10년을 더 근무할 수 있게 한 선연이 있어서 또 이렇게 살아오지 않았나 싶습니다. 제가 퇴직 후에도 몇 번 찾아뵈었는데, 최근에는 못 뵌 것 같아 조만간에 찾아뵙고 싶습니다.
저는 세 분 말고도 존경하는 분이 더 많아서 많이 많이 행복합니다. 저도 누군가에게 행복을 주는 사람이 되고자 노력하겠습니다. – 고흥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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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양_ 두 차례의 공무원 생활을 그만두고 지난해 와포햇살영농조합법인에서 연구부장으로 근무하였고 중학교 텃밭교육 및 귀농인과 청년농업인 컨설팅을 했다. 종자기술사, 농화학기술사, 시설원예기술사 자격증과 천문지도사 자격증을 가지고 있다. 2020년 9월 15일부터는 한국농촌경제연구원 농업관측본부 산지조사위원으로 일하고있다. (ljycby@daum.net)
Last modified: 2022-10-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