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광준 전 경기방송 피디, ‘방송이 사라지던 날’ 저자, 농화학 88
끝도 없이 펼쳐진 사막 한가운데, 찬란하게 빛나는 왕의 궁전이 있었고, 그곳에 ‘셰이크 라시드 빈 사이드 알 막툼’이 계셨다. 가난한 유목 부족을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산유국으로 이끌어온 이 사막의 절대군주는 어느 날, 앞으로 왕국을 이끌어나갈 미래 지도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예언하셨다.
“나의 할아버지는 낙타를 탔고
나의 아버지도 낙타를 탔고
나는 메르세데스를 몰고
나의 아들은 랜드로버를 굴리고
그의 아들도 랜드로버를 굴릴 것이지만,
그다음 세대의 아들은 낙타를 탈 것이다.”
석유 이후를 준비하라, 알 막툼의 후예들은 소리 없이 답을 찾아 나섰다. 재생에너지에 투자했고 농업 인프라를 깔았으며 관광문화 ICT 개발을 위해 세계 석학들의 손을 잡았다. 그러나 옥스퍼드 출신의 젊은 지도자는 그 이상의 답을 추구했다. 그것은 의료혁명이었다. 의사와 약물 대신 세포가 세포를 치료하는 재생의료의 미래를 본 왕국의 지도자는 지구 상 모든 바이오 기술의 연구현황을 보고받기 시작했고, 그러던 어느 날 지구 반대편에 위치한 한국이라는 작은 나라 과학자의 근황에 주목했다. 영상에서 과학자는 절규하고 있었다.
“모든 걸 뒤로 하고 떠나갑니다. 그러나…. 환자맞춤형 줄기세포는 우리 대한민국의 기술임을 반드시, 반드시 확인하게 되실 겁니다.”
지도자는 과학 보좌관을 불러 이 과학자에 대한 빠짐없는 모니터링을 지시했다. 인간의 본질은 역경 속에 발현된다고 하는 디오니소스의 문구를 인용하면서….
이 이야기는 실화이며, 전 세계를 뒤흔든 줄기세포 사건, 이후에 펼쳐진 사실관계에 주목하였다.
제1화, 새벽 4시 30분
2007년 1월,
경기도 용인의 산등성이 외딴 방.
강한우는 오늘도 ‘사기횡령’ 악몽에 소스라치게 놀라 잠을 깼다. 그때 그 일 이후 거의 매일 이런 악몽에 시달린다. 오늘은 여동생의 울부짖던 소리까지 들려왔다.
“우리 오빠 그런 사람 아니라니까요….”
꿈의 내용은 대략 이러했다. 대검찰청 지하 취조실에서 조사를 받고 있을 무렵 젊은 검사가 갑자기 문을 살짝 연다. 그러자 옆방 취조실에서 조사받고 있는 누군가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누군지 너무나 서럽게 통곡하고 있어서 가만히 들어보니 그의 여동생이었다.
“아니라니까요. 검사님. 몇 번을 말씀드려요. 우리 오빠 연구비 횡령할 사람도 아니고요. 저, 돈세탁할 만큼 많이 배우지 못했어요. 제발 믿어주세요. 제발….”
여동생은 제 가슴을 텅텅 치며 통곡하는 듯 했다. 그 소리를 듣고 있는 한우는 가슴이 미어졌다. 눈물이 뚝뚝 떨어져 펼쳐진 신문조서를 적신다. 다리를 꼬고 앉아있던 젊은 검사는 딱하다는 표정으로 넌지시 입을 연다. 수사를 하다 보면 A를 조사하려고 계좌를 열어봤더니 뜻밖에 B나 C에 대한 문제가 나오더라는. 그러면 그 사람은 A가 아니라 B나 C에 걸려 인생 종 치더라는, 고품격의 협박이었다. 한우는 ‘차라리 날 죽여라. 개자식아’ 욕을 하고 싶었지만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사자 앞에 잡힌 양처럼 그저 눈물만 흘릴 뿐이었다. 검사는 좀 더 직설적으로 협박했다.
“10년간의 연구비 계좌를 쭉 봤더니 교수님하고 10번 이상 계좌 거래한 사람이 대략 56명이더라고요. 다 불러서 조사하래요. 위에서. 싹 다…. 교수님, 이게 무슨 뜻인지 아시죠?”
“…….”
“저희도 뭐 위에서 지시 내려오는 대로 움직이고 있습니다만, 아니 막말로 가족이 무슨 죄입니까? 또 농민들은 왜 이렇게 많아. 농민들이 무슨 죄인지 참….”
한우는 하고 싶은 말이 너무 많았지만 몸이 말을 안 듣고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한참을 버둥거리다가 있는 힘을 다해서 이렇게 외쳤다.
“저도 알고 있습니다. 저와 저희 모든 연구원들의 눈을 속이고 바꿔치기 조작을 한 진범이 검찰 조사 첫날에 모든 걸 다 자백했다는 사실을. 그럼에도 이렇게 저를 매일 조사하고 10년 치 연구비까지 탈탈 터는 이유는 터는 이유는….”
그 대목에서 이상하게 말문이 막혔다. 자꾸 했던 말만 되풀이한다. 그러자 검사가 할 얘기 다했냐는 표정으로 빙글빙글 웃으며 다가왔다.
“사기횡령이란 결론부터 내놓고 수사 짜 맞추는 거 아니냐…. 이 말씀이 하고 싶은 거죠?”
검사는 손에 서류뭉치를 쥐고 흔들었다. 논문이었다. 문제의 사이언스 논문 두 편.
“아직도 상황 파악이 안된 것 같은데…. 팩트만 볼게요. 이거 알죠? 2004년에 발표된 사이언스 논문. 조작으로 밝혀짐. 사이언스 직권 취소.”
“하아”
한우는 숨을 몰아쉬며 고개를 돌렸지만 매의 눈을 뜬 검사는 또 다른 논문을 쥐고 흔들었다.
“이것도 알죠? 다음 해인 2005년에 발표된 사이언스 논문. 이것도 조작. 두 논문 다 대표저자는 한국대 강한우 석좌교수, 바로 당신!”
“하아 하아”
“사이언스 윤리강령에 따르면 대표저자는 논문에 무한책임을 진다. 즉, 이유가 어떻든 논문이 조작됐다면 대표저자는 조작을 주도한 사기 과학자라는 것이고, 그런데 거기에 수십억 원의 정부 연구비가 들어갔네. 다시 말해 실체 없는 사기 연구에 거액의 정부 돈을 꿀꺽한, 이런 걸 바로 사기횡령이라고 하는 겁니다. 특정경제범죄가중처벌법상 사기 및 횡령…. 도대체 몇 번이나 말해야 알아들어?”
한우는 숨이 막혀왔다. 온몸이 바들바들 떨렸다. 당장이라도 벌떡 일어나 대적하고 싶었지만 꼼짝도 할 수 없는, 무력함에 눈물만 주르륵주르륵 흘러나왔다. 젊은 검사는 이제 먹잇감을 제압할 때가 됐다는 듯 의기양양하게 양손에 논문을 쥐고 흔들어대며 말했다.
“이건 사기, 그리고 이건 횡령…. 아니지 이게 사기, 이건 횡령…. 특정경제가중처벌법상 사기 및 횡령, 줄여서 사기횡령….”
“그만, 제발 그만….”
허억, 그러다 눈을 떴다. 하아하아, 컴컴한 방안이었다. 더듬더듬 시계를 찾았다. 새벽 4시반. 후우…. 도대체 이런 악몽에서 언제쯤 벗어날 수 있으려나. 걱정이 엄습했다. 벌컥벌컥. 물부터 마셨다. 찬물이 들어가자 두근대던 심장박동은 조금은 진정됐다. 후우…. 저절로 긴 한숨이 나온다. 그리고 ‘흡’하고 숨을 들이쉬었다. 배에 힘이 들어가며 허리가 곧추선다. 그 자세에서 가부좌를 틀었다. 그리고 단전호흡, ‘흡’하며 배로 숨을 쉬다 보면 어느새 마음이 편안해지고 정신이 맑아진다.
가부좌와 단전호흡은 젊은 시절 교수 부임 직후 간암으로 연구실에서 쓰러져 세 번의 대수술 끝에 간의 2/3를 떼어냈던 그 암울한 상황 속에서, 강화도 암자에서 만난 어느 스님께서 알려주신 생존의 비법이다. 당시 한우는 불공을 드리며 빌고 또 빌었다.
‘더도 말고 딱 5년만, 5년만 더 살게 해 주십시오. 그러면 우리 두 아이들이 적어도 초등학교 다닐 동안에는 아빠 없는 아이라는 소리를 듣지 않아도 되니까요.’
한우는 초등학교 시절 몸서리치게 들었던 ‘아빠 없는 아이’란 말을 아이들에게 대물림하고 싶지 않았기에, 그 쇠약해진 몸으로 108배를 계속 드렸다. 보다 못한 주지스님께서 안채로 데리고 들어가기 전까지 계속. 거기서 가부좌를 배우고 단전호흡을 배웠다. 그 간절한 기도가 통하였는지 한우는 5년을 넘어 지금까지 명을 유지하고 있다. 월화수목금금금을 계속 연구하면서도 계속, 한 번도 쓰러지지 않고.
‘그리도 질긴 게 사람 목숨인 것을 왜 그땐….’
눈을 감자 저절로 그때 그 일이 생각났다. 대검찰청 1206호 조사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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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광준_ 농화학과 토양학 실험실에서 흙을 파던중 BBC같은 농업전문방송을 꿈꾸며 방송에 입문, KBS TV 구성작가와 경기방송 PD를 거쳐 유튜브 기획제작자로 일하고 있다. 경기방송 PD로 재직당시 ‘현장의정포커스 – 쌍용자동차 사태 이후 대책편’으로 제38회 한국방송대상 지역시사보도제작(라디오) 부문 작품상 수상했다.(pdnkj@naver.com)
Last modified: 2022-10-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