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어머니 이야기
이정양(한국농촌경제연구원 농업관측본부 산지조사팀 산지조사위원, 농학 86)
지난 2019년 “더부살이”라는 글에서 살짝 이야기한 적이 있는 것 같습니다. 저는 생모를 기억하지 못하고 여섯 살부터 저를 길러주신 어머니를 만났다는 것을 말입니다.
어머니께서 말씀해 주셔서 아는 것이지만 아마도 여섯 살에 어머니를 처음 만난 것 같습니다. 그 여섯 살 이전의 기억도 약간씩 있기는 하지만 어머니를 만나기 전날의 기억은 제법 또렷한 것 같습니다. 개울에서 형들과 물장구치던 기억, 달밤에 형들이 홍시라고 속여서 쥐를 씹던 기억, 갑작스럽게 소나기가 내리면 처마 밑에 미꾸라지가 나뒹굴던 기억 등등 몇 되지 않는 여섯 살 이전의 기억 중에서도 그날의 기억은 제법 또렷했던 것 같습니다.
어두워지는 저녁에 평소에 먹지 못하던 것을, 그것도 양껏 먹었고, 할머니며 큰어머니며 여러 어른들께서 쌈짓돈을 쥐어 주신 것 같습니다. 제가 돈을 알았는지도 잘 모르지만 어쨌든 그렇게 그날 밤에 제법 챙겨 주신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날 밤에 떠났는지, 다음날 떠났는지 모르지만 다음날 낯선 곳에서 낯선 분들 앞에 섰는데, 한분은 아버지요 한분은 어머니였습니다. 저를 데려다주신 분은 둘째이신 아버지의 바로 아랫 동생인 셋째 작은아버지셨습니다.
그렇게 저는 전남 장흥군 대덕면 연지리에서 전북 군산시 소룡동으로 가서 “이용배”를 아버지로 “안순애”를 어머니로 알고 살게 되었답니다.
몇 년 후에 초등학교에 들어가야 하는데, 제가 호적에 없었답니다. 그래서 그 해에는 학교에 들어가지 못하고, 그 해에 부랴부랴 호적에 올려서 다음 해에 초등학교에 입학하게 되었답니다. 벌금을 물어야 해서 그랬는지 어째서 그랬는지는 모르지만 말띠가 양띠로 올려졌다는 얘기도 어머님으로부터 들어서 그냥 그렇게 알고 있습니다. 사실 저의 나이와 생일은 그 해에 그냥 그렇게 정해진 것 같습니다.
어머니의 고집과 유연함
제가 초등학교를 다닐 때 어머니가 참으로 답답하다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쌀이 넉넉하지 못하여 밀가루로 손수제비를 만들어 먹을 때가 많았는데, 점심이나 저녁이면 큰 문제가 없는데, 이른 아침에 아버님께서 목재소로 일을 나가야 하는데, 빠득빠득 새로 수제비를 쑤어서 뜨끈뜨끈한 상태로 상을 차리셨습니다. 그러면 항상 아버님은 뜨겁다며 화를 내셨는데, 이에 아랑곳하지 않으시고 꼭 뜨끈뜨끈하게 상을 차리셨습니다. 아침 첫끼는 무조건 따뜻해야 한다는 것이 어머니의 고집스런 생각이었습니다. 뜨겁다고 아버님께서 화를 내시면 저는 바가지에 물을 받아 수제비 그릇을 넣고 저어가면서 식혀 드리곤 하였는데, 매번 반복되는 일이었습니다. 어머님은 그렇게 고집스러운 면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또 아들에게 맞춰주시는 유연함도 있었습니다. 제가 초등학교에 들어가기 전, 아주 어렸을 때에는 어머니께서 저를 데리고 성당에도 자주 다니셨습니다. 초등학교 1학년 중에는 성당과 조금 먼 곳으로 이사를 하고, 초등학교 4학년이 되면서는 성당과 더 먼 곳으로 이사를 하고 밭일을 하시게 되면서는 성당에 가신 적이 없었습니다. 그렇게 저렇게 살다가 제가 중학교 3학년 때부터 집에서 가까운 절에 다니게 되었습니다. 그런 저에게 절에 다닌다고 한 번도 뭐라고 하신 적이 없이, 일요일 아침이면 절에 가라고 아침을 일찍 챙겨주시곤 하셨습니다.
형편이 넉넉지 않았던 우리 집은 아버님께서 따로 개를 한 마리씩을 키워서 여름에 몸보신을 하곤 하였습니다. 어느 해 여름의 어느 토요일에 아버님께서 개를 잡아서 보신탕을 끓여서 잘 먹고, 일요일인 다음날에도 아침에 당연히 보신탕을 먹으려는데, 아버님과 형님에게만 주시고 저에게는 주시지 않아서 나는 왜 주지 않느냐고 여쭈었더니, 절에 가는 날에 어떻게 보신탕을 먹느냐고 하셨습니다. 제가 그건 다 마음의 문제이니 그냥 먹고 가겠다고 했더니 흔쾌히 국을 떠 주시면서 오히려 잘 먹으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성모마리아님이나 부처님보다 가족의 건강을 먼저 생각하시는 듯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또, 당신은 성당에 다니시지 못하셨어도 아들이 고3이 되어 대입시험을 보러 간 날에는 제가 다니던 절에 찾아가셔서 기도를 드렸다는 말을 나중에 누님으로부터 들었습니다. 어머님께는 종교보다도 마음으로 키우는 자식의 앞날이 더 중요했던 것 같습니다.
이러한 어머님의 보살핌에 대한 보답의 마음으로 아버님께서 돌아가시고 나주에서 같이 사시게 된 이후부터는 제가 어머님을 매주 일요일 아침에 성당에 모셔다 드리기는 했지만, 어머님의 정성만 하겠습니까? 나주에서 2년 정도를 그렇게 성당에 모셔다 드리다가, 고흥으로 가서 6년 정도를 더 모셔다 드렸습니다.
2000년도에 아버님께서 돌아가시기 전에 꼭 화장을 해달라는 유언에 따라 화장을 해 드리려 할 때 많이 반대하셨던 어머니께서 결국은 고인 뜻대로 하라고 허락해 주시더니, 당신께서도 돌아가시기 몇 해 전부터는 화장을 부탁하셔서 그렇게 해 드렸습니다.
당신이 힘드신 것은 그냥 고집스럽게 하신 면이 많지만, 자식의 입장에서 힘들 것 같은 것은 많이 양보해주시는 유연함도 있으셨던 것 같습니다.
어머니의 유산
어머니께서는 2007년 4월에 갑작스럽게 유방암 수술을 받으시고 2008년 3월에 돌아가셨습니다. 그 1년 가까운 기간에 형님과 누님을 포함한 저희 3남매는 어머님으로부터 큰 유산을 받은 듯합니다.
누구에게 싫은 소리 한번 안 하시고, 퍼 주시려고만 하셨던 분이라 그 1년간 우리도 그분을 위하여 많은 것을 하면서 자연스럽게 정신적인 인연의 유산을 받은 것 같습니다. 수술을 하시고 화순의 전남대학교병원에서 치료를 하시다가 퇴원하셨는데, 상황이 악화되어 순천의 성가롤로병원에 입원해 계실 때의 일입니다. 환자가 여자이다 보니, 큰 이모님, 막내 이모님, 형수님, 누님, 그리고 저의 아내까지 다섯 분이 1주일씩 돌아가면서 간호를 하면서 서로에 대한 고마움과 정이 많이 쌓였습니다. 그래서 지금까지도 이모님들을 찾아 뵙고, 3남매 내외가 생일 때마다 만나서 좋은 시간을 갖게 된 것 같다고 이구동성으로 이야기합니다.
병간호를 하던 그때조차도 아홉 살이 더 많은 형님은 결혼식도 올리지 못하고 형수님과 살고 계셨는데, 그 편찮으신 중에도 형의 결혼이 가장 마음에 걸리셨던 것 같습니다. 항상 걱정하시기에 제가 조금 서둘러서 조촐하지만 두 분의 결혼식 비슷한 피로연을 2007년 12월에 해 드렸더니 세상 편안한 미소를 지으셨습니다. 평생의 짐을 대신 풀어 주었다며 다음 해 돌아가시는 날까지 저에게 치하를 하셨습니다.
사실 제가 1993년도에 결혼을 하려 할 때 어머니께서 형이 결혼할 수 있도록 기다렸다 하면 안 되겠냐고 하셨는데, 제가 처갓집에서 기다리기가 쉽지 않다며 결혼을 강행한 원죄가 있어서 저도 어머님과 형님에게 많이 미안했었습니다.
어머니의 과거
어머니께서 허리 수술을 하시면서 장애인 판정을 받아서 제가 장애인용 차량을 구입하여 사용하였습니다. 당연히 어머니와 공동명의로 구입을 하였습니다. 어머니께서 돌아가시고 나서 면사무소에 가서 장애인 등록을 해제하려 했더니, 안된다는 것이었습니다. 어머니에게 저 말고 다른 상속인이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청천벽력과도 같은 말이었습니다. 그래도 어쨌든 차량을 처리해야 하므로 그 상속인을 찾으려 하였으나 개인정보보호법에 따라 알 수가 없었습니다. 관공서에 가면 재판을 해야 하네 어쩌네 하는 말만 되풀이하는 거였습니다. 어쩌다가 법무사에서 알아낸 방법이 저는 아버님의 재적증명서를 뗄 수 있고, 그것을 가지고 아버님의 아내인 어머님의 재적증명서를 뗄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떼어보니 불행인지 다행인지 그 상속인이 이 세상 사람이 아니어서 쉽게는 해결이 되었습니다.
모든 일을 처리하고, 이모님들과 누님에게 들은 어머니의 과거는 많이 참담했습니다. 먼저 결혼한 사람은 주정뱅이에 놀음으로 가정을 돌보지 않았고, 아이가 하나 있는 상태에서 둘째를 임신하여 사경을 헤맬 때에도 돌보지 않아서 자궁이 썩어서 아이는 사산하고 자궁을 들어내고 간신히 살았으나, 그 남편이 다른 여자와 살게 됨에 따라 이혼을 하고 아버님을 만났다는 것이었습니다.
어머님께서는 아버님에게 아이가 셋이 있다는 얘기를 듣고, 그 세아이를 함께 키우고자 아버님과 결혼을 하셨답니다. 그래서 가장 먼저 형을 데려오고, 그다음에 저를 데려오고, 마지막으로 제 손을 끌고 가서 서울에서 식모살이를 하던 누님을 데려와서 함께 살게 되었답니다.
어머니에 대한 우리 가족의 회상
어제 갑자기 생각이 나서 아내에게 시어머니는 어떤 분이셨는지, 아이들에게는 할머니가 어떤 분이셨는지를 물어보았습니다. 그리고 저도 어머니에 대한 생각을 정리해 보았습니다.
저는 어머니만 생각하면 그냥 무엇이든 남에게 퍼 주는 것만 생각납니다. 마음이고 물건이고 있는 대로 다 퍼 주시는 어머니. 그냥 그런 생각이 듭니다. 그리고 미안함입니다. 제가 미안한 것이 아니라 사회의 인식에 대한 미안함입니다. 어렸을 때에 콩쥐팥쥐, 백설공주, 신데렐라 같은 동화나 기타 소설, 드라마 등을 보면 왜 그렇게 친엄마가 아니고 키워준 엄마를 모두 나쁘게 묘사하는지! 그 인식과 시각에 대한 미안함입니다. 나의 어머니는 이렇게 헌신적이신데, 도대체 왜 그러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고, 가끔 같이 그런 드라마를 보면 살짝 도망 나오곤 한 것 같습니다. 어머니의 일찍 가심에 대한 회한은 없습니다. 차라리 많이 아프시지 않고 적당히 가족의 보살핌을 받고 가실 수 있는 시간이 있었음에 감사하고, 3남매가 우애를 쌓을 수 있는 기회를 주셨음을 감사하며 살고 있습니다.
아내는 1993년에 결혼하여 명절 때에나 가끔 뵙던 어머님을 2000년 가을부터 모시고 살게 되면서 처음에는 많은 부담을 느꼈답니다. 그런데, 어머님께서 그 해부터 세아이를 돌보아주시면서 처음으로 직장생활을 하게 되면서 친정엄마보다 친해졌다고 합니다. 18세 이후부터는 수원에서 직장생활을 하느라 집을 떠나서 가끔 명절 때에나 뵙게 되는 친정엄마보다 8년간 함께 사신 시어머님이 요즈음에도 더 생각이 난다고 합니다. 자기가 아이들에게 챙겨주지 못한 것을 아무런 걱정하지 않도록 잘 챙겨주셔서 아이들도 큰 문제없이 자란 것 같다며 고마워하고 있답니다.
그리고 6, 4, 2세부터 같이 살다가 14, 12, 10세에 할머님을 떠나보낸 세 아이들은 가장 먼저 할머니께서 챙겨 주신 간식이 생각난답니다. 가게도 없는 시골에 살면서도 방과 후에는 할머니께서 항상 먹을 것을 만들어 주신 것을 가장 기억에 남는 답니다. 그리고 아빠와 엄마가 여행이나 일 때문에 없어도 할머니가 계셔서 무서움 없이 든든하였답니다. 둘째 아이는 엄한 아빠에게 혼날 일도 할머니께서는 보살펴 주시고 비밀도 지켜주셔서 고마웠답니다. 막내딸은 할머니와 함께 자서 어렸을 때는 무서운 것이 없었는데, 할머니께서 돌아가시고 혼자 잘 때에는 무서워서 불을 켜고 자는 버릇이 생겼다고 합니다.
종합적으로 어머니는 우리 남은 다섯 가족에게 경제적으로도 큰 도움을 주셨지만, 평생을 함께 공유할 수 있는 추억을 만들어 주신 분이 분명한 것 같습니다. 앞으로도 우리 가족은 어머니, 할머니 이야기를 하면서 화목하게 살 것 같습니다.
※ 어머니의 사진을 모아 보았는데, 어머니께서는 사진 찍는 것을 많이 쑥스러워하셔서 사진이 많지 않습니다. 그리고 대부분의 사진에서 정면을 보시지 않고 시선을 돌리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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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양_ 두 차례의 공무원 생활을 그만두고 지난해 와포햇살영농조합법인에서 연구부장으로 근무하였고 중학교 텃밭교육 및 귀농인과 청년농업인 컨설팅을 했다. 종자기술사, 농화학기술사, 시설원예기술사 자격증과 천문지도사 자격증을 가지고 있다. 2020년 9월 15일부터는 한국농촌경제연구원 농업관측본부 산지조사위원으로 일하고있다. (ljycby@daum.net)
Last modified: 2022-10-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