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민기자로 살아온 10개월
노광준 전 경기방송 피디, ‘방송이 사라지던 날’ 저자, 농화학 88
어느 날 갑자기 지옥불에 떨어졌다. 20년간 공중파 방송국 PD로 평탄하게 살아온 나는, 일본의 부당한 경제압력에 맞서 온 국민이 들불처럼 일어났던 불매운동의 열기 속에 방송국 최고위 인사의 친일막말을 폭로했다는 이유로 끔찍한 일을 겪게됐다. 그때 그 일 이후 나는 가끔 악몽에 시달렸다. 이를테면 이런 꿈이다.
그날도 방송국 스튜디오 주변에 이런저런 사람이 몰려들어 시끌벅적 어수선했다. 참다못한 내가 ‘지금 생방송 중이잖아요’ 한마디 하며 주변정리를 하려고 다가섰는데 누군가 내 등을 획 떠민다. 떠밀려서 창문 밖으로 떨어진 뒤 정신 차려보니 한 번도 보지 못한 음산한 동네에 와있었다. 하늘은 핏빛이었고, 회색의 낡은 집들이 빽빽해 도무지 방송국으로 돌아가는 길을 찾을 수 없었다. 저 아래편 공터에는 끔찍하게 생긴 악귀들이 으르렁대고 있었는데, 그 숫자가 너무 많아 피해야겠다는 생각밖에 없었다. 허나 아무도 문을 열어주지 않았다. 그 사이 악귀 한 마리가 시퍼렇게 날이 선 장검을 들고 저 앞에 길가던 여인을 두 동강 낸다. 헉, 너무 끔찍한 광경에 나도 모르게 소리를 냈고 악귀가 나를 본다. 다가온다. 피가 뚝뚝 떨어지는 칼을 들고서. 난 한 발자국도 떼지 못한 채 벌벌 떨고만 있는데…. 그때 누군가 휙하며 내 뒤를 낚아채 작은 다락방 안에 숨겨줬다.
이러다 깼다. 후, 하고 한숨 쉬며 눈을 뜬 새벽은 여전히 어두웠다. 겨울에 해고됐기 때문이다. 부당해고 판정을 받아 복귀했지만 방송국을 아예 폐업시키는 통에 또 잘렸다. 이겨도 이겨도 끝이 나지 않는 줄소송이 계속됐고 등 돌린 직장동료들이 나를 더 아프게 했다. 나이 50이 됐는데 가족들에 대한 한없는 미안함으로 고개 숙인 가장이 됐다. 하지만 내 주변에는, 작은 은신처를 내주어 내가 상처 입은 몸과 마음을 치유할 수 있도록 도와준 고마운 분들이 있었다.
여주
나는 여주행 경강선 열차를 타고 다니며 한겨울 새벽을 열었다. 아침이 밝아오던 여주에는 생전 처음 해보는 낯선 일들과 낯설지만 정의롭고 따뜻한 많은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우리는 함께 호흡을 맞춰 기적을 준비했다. 실제로 여주에서는 그동안 없었던 사건들을 여럿 만들어냈다. 그러나 오로지 결과만이 유의미한 작업의 특성상, 꽃피는 4월이 되자 나는 다시 원점으로 되돌아와야 했다. 집에 오는 경강선 열차 안에서 뜬금없는 검색을 해봤다.
‘되는 일이 하나도 없을 때 어떻게 할까’
뜻밖에 다양한 답들이 찾아졌다. 복권을 산다, 알바를 뛴다, 하루 5km씩 걷는다 등, 그러나 하나도 눈에 안 들어왔다. 그러던 중 이런 문장이 확 들어왔다.
‘되는 일이 하나도 없는 것은 아닐 듯, 너무 자신을 몰아세우지 말고 여유를 갖고, 내가 평소에 하고 싶었던 일부터.’
공감이 갔다. 마음이 편해졌다. 그리고 고개 들어 내가 하고 싶은 일이 무엇인지 곰곰이 생각해봤다. 떠오르는 게 있었다. 시민기자. 방송국 시절 나는 몇 사람에게 이런 속마음을 건넨적 있다.
“난 60세 정년 꽉 채운 다음에 시민기자가 될 거야. 논두렁 밭두렁 다니면서 현장을 취재하는 농업전문 피디(혹은 기자).”
강남
7월부터 시민기자로 일할만한 물적 토대가 만들어졌다. 예전에 교육프로그램을 함께 했던 입시전문가 한 분이 일자리를 준거다. 그분은 굴지의 교육기업 중역인데 내 소식을 듣고는 직접 우리 동네까지 찾아와서 이런 말씀을 하셨다.
“내가 당신을 도와주는 게 아니라, 당신이 우리를 도와주는 겁니다.”
그렇게 해서 나는 서울 강남을 오가며 교육 관련 유튜브 영상을 기획 제작하는 유튜브 피디가 됐다. 내 사정을 누구보다 잘 알고 계시기에 매일 출근하지 않으면서도 실업급여를 탈출할 수 있을 만큼 충분한 급여를 주셨다. 이 코로나 위기국면에서도 1년 넘게 꾸준히. 그런 배려의 깊이가 어느 정도인지 알기에 나는 최선을 다해 일했다. 채널 구독자수가 처음 시작할 때보다 30배 넘게 늘어난 16,500명이지만 나는 책상 위 캘린더에 ‘구독자 2만명을 향하여’라고 써놓고 프리미어 영상편집을 하고 있다.
첫 취재
시민기자로서의 첫 취재는 작년 9월부터 시작됐다. 의사파업, 특히 젊은 의사들의 목소리를 들으면서 나는 한 가지 궁금한 대목이 있었고, 그 부분을 현직 의사와의 인터뷰 자리에서 질문으로 던졌다.
“의사도 공공재 아닌가요?”
그러자 뜻밖의 대답이 돌아왔다.
“맞아요. 의사는 공공재죠. 간호사나 소방관, 경찰…. 모두 공공성을 부여하잖아요. 그런데 왜 의료에는 공공성을 안 붙이죠? 사유화, 독점화되면 사회적인 문제가 발생하는 분야를 ‘공공재’라고 합니다.”
그는 아주대 병원 정신과 전문의 시절 나와 안면이 있던, 지금은 국립정신보건의료원장으로 재직하고 있는 이영문 원장이었다. 평소 환자들을 격의없이 대하고 공공의료를 소신으로 모두가 부러워하는 대학병원 교수직을 박차고 나온 그는 의사는 공공재가 맞고 따라서 이들이 자본에 휘둘리지 않도록 우리 사회가 보다 지속적인 투자를 해야 한다는 취지로 말했다. 인터뷰를 기록하고 의료원 이곳저곳을 다니며 사진을 찍고 보강취재를 마친 뒤 돌아와서 난생 처음으로 ‘기사’를 썼다. 잘 안 써졌다. 어떻게 써야 할지 감이 안 잡혔다. 고민 고민 끝에 결국 피디로서 늘 써온 방송원고와 기자들이 쓰고 있는 기사체의 중간지점에서 절충점을 잡아 현장인터뷰 기사를 썼다. 헌데, 시국이 시국이었는지 오마이뉴스 데스크에서는 내 기사를 첫화면 맨위에서 두 번째에 배열했다. 첫 기사가 톱기사가 된 셈이다. 반응도 엄청났다. 조회수 1만7천여건에 공유횟수 358회. 좋아요 75개…. 익명의 독자들로부터 응원글과 함께 후원금을 받기도 했다.
“기사 내용도 좋고 직접 취재하신 노력이 느껴지네요. 앞으로도 좋은 기사 부탁드립니다.” (5만 원 후원)
“공공의료뿐만 아니라 공공재에 대한 좋은 기사 부탁해요.” (1만 원 후원)
그 후 나는 10개월간 27건의 취재기사를 쓰며 오마이뉴스가 시민기자에게 주는 상을 받기도 했다. 헌데 상이름도 오마이다웠다.
‘2021년 2월 이달의 뉴스게릴라 상’
농민 과학자
좋은 취재 아이템은 어느날 갑자기 찾아온다는 말의 의미도 깨닫게 됐다. 지난 4월 농업분야 탄소중립 관련 국회토론회를 취재할 때였다. 코로나19 때문에 모든 토론회가 비대면 온라인 중계를 했는데, 그게 나같은 시민기자에게는 흙속의 진주를 건질 수 있는 기회가 됐다. 3시간이 넘는 토론회 전 과정을 유튜브 다시보기를 통해 몇 번이든 돌려볼 수 있기 때문이다.
기자들이 토론회를 끝까지 경청하는 일은 드물다. 그 많은 전문가들의 다양한 발언을 다 담을수 없거니와 마감시간에 쫓겨 주요 내외빈이나 기조발제 요약 정도 하고 나머지는 ‘이 밖에도 누구누구 누구가 열띤 토론을 벌였다’는 식으로 현장에서 배포된 자료집 요약으로 마무리한다. 보도자료 복붙도 비일비재하다. 나도 웬만하면 주요 토론자의 발언을 요약해 기사를 쓰려했는데, 이상하게 토론회가 끝날 무렵 객석에 있다가 갑자기 툭 튀어나와 발언을 시작한 어떤 분의 모습이 궁금해졌다. 그분은 짧게 하시라는 제지를 받으면서도 한마디라도 더하려고 장황하게 말을 이어갔는데 보아하니 현장 농민같았다. 뭐가 저렇게 간절하실까, 싶어 영상을 돌려봤는데 뜻밖에도 그는 연구직 공무원 시절부터 밭을 갈지 않고도 농사를 짓는 ‘무경운 농법’을 연구해왔고 퇴직 후 직접 무경운 농사를 지으며 후속 연구를 하고 있는 농민 과학자 양승구 박사였다. 농업분야 탄소중립 토론회를 한다는 소식을 듣고 자비를 들여 서울 여의도까지 찾아온 그는 토양 내 탄소배출을 줄이고 고령화된 농민들의 일손 부담을 덜기 위해 ‘무경운’이 얼마나 효율적인 농법이고 그 생산량 또한 뒤떨어지지 않음을 실증적 데이터를 들어가며 역설했다. 인상적이었다. 무경운에 대해 찾아봤더니 해외에서는 사례가 꽤 있었다. 그들 역시 농사는 밭을 갈아야만 한다는 고정관념에 맞서 외롭게 데이터를 축적해온 농민 과학자였다. 이들의 사례를 묶어 기사를 썼다. 내 기사를 살펴본 오마이뉴스 데스크는 이런 제목을 붙여 평일 톱기사로 게재했다.
‘농민 과학자는 봄이 와도 밭을 갈지 않는다.’
오마이 사이트에서만 조회수 만9천건이 넘었고 275회나 공유되며 SNS상으로 퍼졌다. 농업 기사는 농민도 안 본다는 푸념이 무색할 만큼 이 기사는 주말에 텃밭을 운영하거나 귀농을 꿈꾸는 도시민에게도 관심을 끈 모양이다. 언젠가 ‘잘 쓴 농업기사 연예기사 안 부럽다’ 는 속설도 나오지 않을까.
최근에는 무경운을 직접 실천한 농민을 취재했다. 바로 김상진 기념사업회 단톡방에 올라온 한 장의 사진 덕분이다. 원예학과 71학번으로 40여 년 유기농으로 농사지어오신 김현인 선배님은 또 한 분의 농민 과학자였다. 그와의 인터뷰 파일을 다섯 시간 동안 타이핑하며 코로나19와 같은 팬데믹을 막고 무너진 생태계를 복원하려는 현장 농민의 깊은 고뇌와 철학을 느낄 수 있었다. 무경운에 맞는 적정기술 농기계를 개발하기 위해 이리 뛰고 저리 뛰는 70세 열정앞에 고개가 숙여졌다. 기사가 나온 날 아침 댓글이 이어졌다.
“좋은 기사 감사드립니다. 이곳 괴산에서도 가장 어렵다는 고추 무경운 유기농법에 도전하고 있습니다.”
“매우 흥미로운 기사입니다. 농민들은 수확량만 현저히 떨어지지 않는다면 누가 시키지 않아도 무경운 이앙법에 동참할 것입니다. 가을에 후속보도 기대합니다.”
그리고 김상진 기녕사업회 여러 선배님께서 의견을 남겨주셨다. 무경운 이앙기 개발을 위한 ‘김현인 펀드’를 만들자고. 정부기관에 몸담은 선배님은 직접 곡성으로 찾아가 보겠다며 연락처를 묻기도 했다.
일생일대의 취재
방송국 시절 20년간 좀처럼 겪기 힘든 감동의 순간들을 10개월이라는 단기간에 만끽하고 있다. 최대 수혜자는 나 자신이다. 많은 분들을 만나고 자료 조사하며 많은 것을 배웠고, 그런 과정에 시야도 커지고 마음의 여유도 찾았다. 등 돌렸던 옛 동료들에게 내가 먼저 전화를 걸어 안부를 묻는다. 예전 같으면 상상도 할 수 없던 일이다. 그러나 이게 끝이 아니다. 연말에는 내가 지금까지 경험해보지 못한 일생일대의 취재를 계획하고 있다. 어떤 언론사에도 속하지 않고 자유인으로 살고 있는 바로 지금이 그 취재의 적기라는 판단에서다.
어떤 미래가 찾아오든, 그때가 되어 지금의 나를 되돌아볼 때 ‘후회없이 딱 그 때 해야할일을 했군’이란 말이 절로 나올만큼 충실하게 살아가고싶은, 나는 시민기자 노징구(별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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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광준_ 농화학과 토양학 실험실에서 흙을 파던중 BBC같은 농업전문방송을 꿈꾸며 방송에 입문, KBS TV 구성작가와 경기방송 PD를 거쳐 유튜브 기획제작자로 일하고 있다. 경기방송 PD로 재직당시 ‘현장의정포커스 – 쌍용자동차 사태 이후 대책편’으로 제38회 한국방송대상 지역시사보도제작(라디오) 부문 작품상 수상했다.(pdnkj@naver.com)
Last modified: 2022-10-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