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ritten by 9:53 오전 123호(2021.01)

살아가는 이야기
26년 만에 찾은 나의 새로운 직업

2021년에 누비고 다닐 고흥군 행정지도

지난 선구자 122호에 게재한 저의 “두 가지 알바 이야기”의 서두를 “석달 반 동안의 무직자에서 9월 15일부터 농촌경제연구원 농업관측본부장인 국승용 회원의 도움으로 농촌경제연구원 농업관측본부 산지조사팀의 (고흥군)산지조사위원으로 일하게 되었습니다. 또 얼마나 지속할지 모르지만 일단은 나의 성정에 맞는 일인 것 같아 매우 만족한 삶을 살고 있습니다. 새로운 직업에 대한 이야기는 나중에 하도록 하고 이번에는 무직자로 지내던 중에 아내와 아이들이 예전에 했던 알바를 소개해주어 하게 된 알바 이야기를 하려 합니다”라고 시작하였더군요.

이번에는 어떤 이야기를 할까 고민하면서 지난 글들을 보다가 현재의 일을 하기까지 내가 어찌어찌하여 지금의 일을 하게 되었는지를 정리하고 싶었습니다.

1. 첫 연구사 발령까지

87년 12월에 입대하여 90년 4월에 제대를 하고 그해 가을 2학년 2학기로 복학을 하였습니다. 복학 후에 공부는 뒷전에 두고 깜냥에 후배들과 잘 어울려야 한다는 생각에 잘 놀았습니다. 농학과 후배들의 강요에 의하여 상록사 사생대표에 입후보를 하고, 같이 입후보했던 임산과 87이었던 후배의 ‘선배를 위한 입후보 철회’로 무투표로 사생대표도 되어 보았습니다. 3학년 1학기에는 수학여행을 추진해야 하니까 형이 대표를 하라는 강요에 떠밀려 대표가 되어 제주도로의 여행을 추진하는 등 주로 노는 일에 매진했습니다.

4학년이 되어서 선배들도 동기들도 후배들도 모두 도서관에 모여 있어서 커피를 마시기 위하여, 팩 차기를 하기 위하여 어쩔 수 없이 저도 도서관에서(아니 도서관 앞에서) 많은 시간을 보냈습니다. 그러면서 남들이 농협 시험을 보니까 저도 농협 시험을 보았으나 낙방하고, 남들이 농촌진흥청 연구사 시험을 보니까 저도 보려고 하였으나 접수기간이 지나서 볼 수가 없었습니다. 그것이 92년 봄이었는데, 다행히 가을에 또 시험이 있어서 봉사 문고리 잡듯 운 좋게 합격하였습니다.

시험은 합격하였으나 언제 발령이 날지도 모르고, 연구사가 되면 당연히 대학원에 진학하는 분위기였던 탓에 전혀 생각하고 있지 않았던 대학원에 진학하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대학원 생활을 하면서 93년 3월에 결혼을 하고 94년 7월 27일에 갑작스럽게 전남농업기술원으로 발령을 받게 되었습니다. 다행히 대학원 석사과정 전공과 가장 가까운 작물연구과 답작계에 배치되는 행운도 얻었습니다.

2. 1차 명퇴까지

결혼하면서 아내가 500만 원 처제가 500만 원을 마련하여 아주대학교 앞의 반지하방에서 살다가 전남농업기술원 내에 있는 넓은 관사에 살게 되니 천국이 따로 없는 즐겁고 평탄한 삶을 살면서 세 아이를 키우며 오순도순 잘 살았습니다.

그런데 97년도에 갑자기 벼를 연구하던 일에서 그 자리를 다른 사람에게 빼앗겼는지 아니면 다른 자리를 땜빵하기 위해서였는지 모르지만 보리를 연구하는 일을 맡게 되고 그다음은 지초(진도에서 홍주를 만드는 약초)를 연구하다가 참깨 지역적응시험을 하다가 콩 연구를 하다가 녹두 육종연구를 하게 되었습니다. 어느 순간 땜빵 전문가가 되어 있는 느낌이었습니다. 그런 와중에 저는 제 적성이 연구에 맞지 않고 차라리 농촌지도사가 내 성격에는 더 맞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생각을 하기도 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2001년 추석을 얼마 앞둔 어느 날 작물연구과장이라는 분이 갑자기 콩의 이소플라본이 사람에게 그렇게 좋다고 하니까 쥐에게 급여 시험을 해보라는 지시를 하였습니다. 저에게 지시를 내린 이유는 두 가지. 첫째 ‘그 당시 전남대의 한 교수님이 쥐에게 콩을 먹였더니 좋았다더라, 그러니 우리도 한번 해보자’는 생각이었고, 둘째는 ‘너는 서울대를 나왔고 4주짜리 영어교육을 다녀왔는데 2등을 할 정도로 영어를 잘하니 외국 논문을 리뷰해서 네가 해라’라는 것이었습니다. 제가 “동물실험은 그렇게 간단하지 않고, 전문적인 시설과 경험이 필요합니다. 저는 힘들겠습니다”라고 하였더니 추석 연휴가 4일이니 2일만 쉬고 2일간 준비해서 자기에게 보고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그리하지 않았고, 명령을 거부한 놈이 되어서 조금 시달리다가 2002년에 그분이 연구개발국장으로 승진하면서 더 시달리게 되었습니다.

그해 3월에 어머니와 아내를 설득하여 직장을 그만두기로 하였습니다. 한 선배님께서 붕어빵 기계를 사 주신다는 말씀을 믿고 사표를 내었는데, 직장을 그만둔다는 것이 그렇게 힘들 줄은 몰랐습니다. 이분 저분이 말리고 협박하고 해서 일단은 다른 곳으로 갔다가 1년 후에도 같은 생각이면 그때 그만두라는 협박과 회유에다가, 간신히 설득했던 어머니와 아내가 울고불고 다시 말리는 바람에 2020년 4월에 고흥군에 있는 유자 시험장으로 가게 되었습니다. 그것이 그로부터 20년째 고흥에 살게 된 연유입니다.

그렇게 고흥에서 생활하다 보니 또 천국이 따로 없었습니다. 예전에 하던 일은 봄에 벼를 파종하여 이앙하고 뙤약볕에서 조사하고 가을에 수확하는 것을 반복하고, 가을에 보리를 파종하고 봄에 수확하고 부랴부랴 그 밭을 갈아서 콩을 파종하고 수확하고 또 부랴부랴 그 밭을 갈아 보리를 파종하는 등 매년 정신없이 살았는데, 유자는 8년 전에 누군가 심어놓은 덕에 저는 그냥 농약을 서너 번 주고, 가끔 비료 주면 가을에 황금색 과일을 딸 수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만 두려다가 고흥에 오게 된 것도 잊고 잘 살았습니다. 아내와 함께 배드민턴 동호회 활동도 하면서 매우 즐겁게 잘 살았습니다.

그리 마냥 좋을 줄 알았는데, 2010년에 유자 시험장 땅을 고흥군에서 집요하게 도청에 매각을 요구하여 새로운 농업기술센터 부지로 매각되면서 유자 시험장의 업무를 완도 시험장으로 이관하게 되었습니다. 이때 다시 퇴직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다만 당장 그만두는 것이 아니라 2012년 1월 1일까지 버티고 2일에 명퇴를 하기로 작정을 하였습니다. 법적으로 2012년 1월 2일에 명예퇴직 자격이 주어지고 명예퇴직을 하면 명예퇴직금이 1억 정도 지급이 되면서 공무원연금 수령이 가능하다고 하니 버텨보자는 것이었습니다.

2011년 1월 2일부터 1년을 버티기로 하고, 고흥에서 완도 시험장까지 153km의 거리를 매일 출퇴근을 하였습니다. 유난히도 그해 1월에는 눈도 많이 왔는데, 그 먼 길을 매일 출퇴근을 하니 미친놈이라고 난리가 났습니다. 완도 시험장에도 관사가 있어서 굳이 출퇴근을 할 필요는 없었는데, 완도에 정을 붙이기 싫었던 것 같습니다.

그렇게 한 달 가까이 출퇴근하였더니 고흥에서 50km 정도 거리에 있는 보성녹차연구소로 발령을 내주시더군요. 또 다른 천국에 잠시나마 명예퇴직을 할 생각을 잠깐 잊어버리기도 하였습니다. 논에서 밭으로, 밭에서 과수원으로, 과수원에서 산으로 올라와서 보니 왠지 신선이 된 듯 마음이 편안해졌고 2003년부터 먹던 당뇨약을 먹지 않아도 좋을 만큼 건강도 좋아졌습니다.

고흥에서 아침 다섯 시에 잠이 깨면 그냥 그 시간에 출발해서 보성녹차연구소로 출근해서 여기저기 녹차밭을 둘러보면 이보다 더 좋은 운동이 없었고, 그렇게 둘러보고 식사를 하고 사우나를 하고 사무실에 출근하면 그렇게 상쾌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한동안은 2012년 1월 2일을 생각하지 않고 살았습니다. 그런데 2011년 가을부터 많은 것이 달라졌습니다. 대부분의 시간을 녹차밭이 아닌 사무실에서 보내다 보니 근육량은 줄어들고 당뇨 수치는 높아지기 시작하였습니다. 2012년 1월 2일을 잊고 살던 1월의 어느 날 치질 수술을 받으면서 당뇨가 500 이상까지 오른 것을 확인하고 화들짝 정신이 들면서 다시 명퇴를 준비하여 1월 31일 자로 명퇴원을 제출하였더니 전남도청 담당자의 실수로 3월 31일까지 연기되어 2012년 3월 31일 자로 명예퇴직을 하면서 9,700만 원의 명퇴수당을 받고 1차 명퇴를 하게 되었습니다.

3. 다시 공무원이 되어 2차 명퇴까지

2012년 명퇴를 한 시점에 큰아들은 고3, 둘째 아들은 고1, 막내딸은 중2였습니다. 한창 민감할 시기에 아빠는 백수가 되어 있었습니다. 하지만 워낙 자립심이 다들 강해서 크게 걱정은 하지 않았지만 저에게도 많은 부담은 있었습니다.

울릉도에 가서 마냥 걷기도 하고, 남해안을 따라 걷기도 하고, 큰아들과 제주도에 가서 1주일간 걷기도 하고 좌우지간 원 없이 걸어 보았습니다. 동해안을 걷다가 고흥으로 태풍이 연달아 2개나 온다고 하여 급히 돌아오기도 하면서 걷는 것에 대한 한을 다 풀고 나서는 친구의 비료 만드는 회사에서 일도 해보았습니다. 그러면서 나는 엉덩이를 붙이고 하는 일보다는 엉덩이를 떼고서 움직이고 돌아다니는 일이 맞을 것 같다는 막연한 생각을 했던 것 같습니다.

그렇게 6개월 정도 쉬니까 슬슬 먹고사는 것이 걱정이 되었습니다. 배운 게 도둑질이라고, 딱히 가진 밑천도 없으니 월급쟁이를 해야 했고, 월급쟁이라면 또 공무원이 좋을 듯하여 농촌지도사 시험을 준비하게 되었습니다. 2년 정도 준비하던 중에 다행히 고흥군에서 농촌지도사 4명을 뽑는다고 하여 2014년에 시험을 보아 2015년부터 고흥군농업기술센터에서 농촌지도사 생활을 시작하였습니다.

1년 동안은 제가 하고 싶은 대로 하면서 재미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1년 만에 돈을 쓰는 서류를 만들고, 사무실에 앉아 있어야 하는 일이 늘면서 평소에 66kg을 유지하던 체중이 57kg으로 줄면서 주변 사람들의 걱정을 한 몸에 받고 있었습니다. 이건 아니지 라는 생각에 쪽 팔리고 자존심 상하는 일이었지만 다시 퇴직 의사를 밝혔더니 부서를 옮겨 주어서 유자나무를 관리하고 아열대과수를 관리하는 일을 맡게 되었습니다. 다시 재미있고 보람 있게 생활을 하던 중에 2017년과 2018년 사이 고흥의 겨울이 혹독하게 추웠습니다. 2017년 12월, 2018년 1월, 2월의 평균기온이 평년에 비하여 각각 5.5도, 5.3도, 4.7도나 낮았습니다. 그래서 고흥의 유자나무는 많은 동해 피해를 보았고 제가 관리하던 나무는 지리적 영향 탓인지 유독 피해가 커서 거의 모든 나무를 잘라 내고 다시 심어야 하는 일이 생겼습니다.

그런 과정에 어깨를 들 수 없을 만큼 건강이 나빠지고, 유자 밭에 오만정이 다 떨어져서 2018년 12월 31일 자로 2차 명퇴를 신청하였고 이번에는 큰 저항 없이 쉽게 성공하게 되었습니다.

4. 본 직업을 갖기 전까지

2019년 1월 1일부터 여기저기를 기웃거리던 중에 고흥에서 농사를 지으면서 마을기업인 동시에 사회적기업인 와포햇살영농조합을 운영하는 신경남 회원이 전문인력 자리를 제안하여 4월 1일부터 근무하게 되었습니다. 급여는 따복 따복 받으면서 하는 일이 별로 없어 매일 두부나 배달하는 것이 염치도 없고 자존감도 없어져서 6개월 만에 그만두게 되었습니다.

그 뒤에 새로운 것을 찾다가 취나물, 부지깽이나물, 방풍나물 등의 장아찌를 담아 판매하는 담우라는 사회적기업에 판매 및 홍보 위주의 일을 출근과 상관없이 외근 위주로 하기로 하고 근무를 시작하였습니다. 근무를 시작한 것이 하필 2020년 2월 1일이었습니다. 설날 전부터 코로나19 문제가 약간 대두되는 정도였으나 그리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는데, 외부 판매와 홍보를 다음 주부터, 다음 주부터, 다음 주부터. 이렇게 미루는 사이 코로나가 진정되기는커녕 오히려 심각해져서 더 돌아다닐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눈치가 슬슬 보이던 5월 중순쯤 어느 날 국승용 회원의 본 직업에 대한 제안을 하였고, 며칠 뒤에는 담우 대표님의 사직 권고가 있었습니다. 수많은 퇴직 시도와 실제 퇴직이 있었지만 권고퇴직은 처음이어서 기분이 약간 묘하긴 하였습니다. 사실은 권고퇴직이었으나 회사의 행정적인 불이익을 방지하기 위하여 자진사퇴로 마무리해 주었습니다. 그래서 실업수당도 받지 못하고 푹 쉬었습니다.

5. 본 직업 후의 생활

지난 2020년 9월 15일부터 산지조사위원이라는 일을 하면서 가장 마음에 드는 것은 논으로 밭으로 또는 숲으로 원하는 대로 농촌 구석구석을 누비고 다닌다는 것입니다. 지금은 주로 마늘, 양파, 배추를 찾아다닙니다. 나중에는 고추밭도 누비고 다닐 겁니다.

타고 다니는 차는 티코, 다마스, 옵티마 리갈로 커지다가 액센트, 모닝으로 다시 작아졌습니다. 가장 큰 이유는 경제적인 것이겠지만 그보다는 제가 느끼는 삶의 무게가 가벼워진 만큼 차가 작아진 경향도 있는 것 같습니다. 그전에 차가 커질 때에는 어머니를 모셔야 하니까, 아이들이 커지니까 공간이 관건이었으나 이번에는 좁은 길도 마음껏 다닐 수 있느냐는 기동력이 관건이었습니다.

나중에 60대가 되기 전까지의 최종 목표는 고흥의 특산물을 고흥분들이 잘 생산할 수 있도록 도와드리고, 그렇게 생산된 뛰어난 고흥의 특산물을 널리 알리고 판매하는 일을 하는 것입니다. 산지조사위원 일을 하면서는 최종적인 일을 준비하는 일을 병행할 수 있다는 것도 큰 장점입니다. 20년 전보다, 10년 전보다, 작년보다 지금이 훨씬 낫다는 생각을 합니다. 아울러 내년은 당연히 올해보다 더 나을 것을 믿습니다. 그렇게 좋아지는 과정에 저보다는 다른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는 삶을 살고자 오늘도 준비하고 있답니다.

그러한 삶을 살고자 하는 첫해인 올해에는 16개 읍면, 515개 마을, 해안선의 길이가 744.66km에 달하는 고흥군 곳곳을 돌아다니면서 고흥을 더욱 잘 알아보고, 또 더욱 많이 알리는 일을 하려 합니다. 다만 올해까지도 코로나의 영향으로 사람을 직접 만나는 일은 많이 못하고 마을회관을 지나는 수준으로 눈과 발로 살펴볼 예정입니다.

이정양_ 두 차례의 공무원 생활을 그만두고 지난해 와포햇살영농조합법인에서 연구부장으로 근무하였고 중학교 텃밭교육 및 귀농인과 청년농업인 컨설팅을 했다. 종자기술사, 농화학기술사, 시설원예기술사 자격증과 천문지도사 자격증을 가지고 있다. 2020년 9월 15일부터는 한국농촌경제연구원 농업관측본부 산지조사위원으로 일하고 있다. (ljycby@daum.net)

Last modified: 2021-08-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