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ritten by 6:32 오후 124호(2021.05)

[살아가는 이야기]
애인이 생겼어요

이정양(농촌경제연구원 농업관측본부 산지조사팀 산지조사위원, 농학 86)

저는 요즘 매주 화요일 저녁 일곱 시를 눈이 빠지도록 애타게 기다린답니다. 늦바람 난 것처럼 설레이기도 합니다.

고흥에서 남원에 있는 국립민속국악원까지는 거의 120km로 300리에 가깝습니다. 제법 먼 거리이지만 전혀 멀게 느껴지지 않습니다. 다시 돌아오는 길도 지루하지 않습니다.

고흥요양병원에 근무하는 아내가 야간근무를 하는 날이면 오후 네시 반에 아내를 출근시켜주고 남원으로 항하고, 아내가 야간근무가 아닌 날에는 점심을 먹고 조금 쉬었다가 세시면 남원으로 출발합니다. 춘향이의 고장, 판소리의 고장 남원에 조금이라도 빨리 가고 싶어서입니다.

이런 난리 부루스를 하게 된 것은 대학교 동아리 후배인 조수황 군으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페이스북에서 조수황 군이 남원에 있는 국립민속국악원에서 공연을 한다고 보러 오시라는 글을 남겼길래 자세히 찾아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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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랬더니 2020년 11월 20일에 그곳에서 조수황 군이 신영희 명창으로부터 전수받은 만정제 흥보가를 처음으로 완창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평소에 사물놀이나 마당극 등의 흥겨운 공연은 몇 번 본 적이 있으나 판소리는 왠지 지루하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는데, 단지 후배를 응원하는 차원에서 아내와 함께 남원으로 나들이 간다는 마음으로 처음으로 판소리 공연을 접하게 되었습니다.

일단 예약을 할 때에는 흔쾌히 가겠다던 아내가 다른 약속이 있다며 혼자 다녀오라기에 약간 삐진 척을 하였더니, 아내가 우쭈쭈 달래는 차원에서 따라나섰습니다. 만약 그때 아내가 끝내 따라가 주지 않았으면 제 삶이 어떻게 되었을지 아찔합니다.

우여곡절 끝에 박수도 치다가, 졸기도 하다가 보던 중에 흥보가 놀부 마누라에게 주걱으로 뺨을 얻어맞으면서도 다른 쪽 뺨도 때려달라고 하는 대목에서는 옆에 있는 아내가 꺼이꺼이 울기도 하고, 놀부가 제비 후리러 나가는 대목에서는 통쾌해하고 웃기도 하면서 두어 시간이 어찌 갔는지 모르게 빠져 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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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에 가끔 국립민속국악원 홈페이지에 들어가서 좋은 공연이 있으면 가끔 아내와 또는 아는 형님과 보러 다니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던 중에 올해 “청출어람”이라는 일반인 국악강좌 공고를 보게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단순히 판소리를 재미있게 잘 듣기 위하여 고법(판소리 북을 치는 방법) 과목을 신청하여서 이론에만 관심을 가지려 하였는데, 지금은 단가(판소리를 하기 전에 목을 풀려고 짧게 불러 보는 노래) 중의 하나인 “사철가”에 빠져서 헤어 나오질 못하고 있답니다.

아래 그림은 가사를 적은 엑셀 파일인데, 이것은 가사이면서 악보이기도 합니다. 출력해서 아침저녁으로 운동하면서, 운전하면서, TV를 보면서도 부지런히 외우고 따라 부르고 있습니다.

매주 두 시간씩 한 소절 한 소절 배워가는 과정이 아내와 연애할 때 손을 잡고 싶어 설레던 마음과 비슷할 만큼 설레입니다.

이글을 정리하는 오늘은 4월 10일인데, 지난 4월 7일에는 새벽 다섯 시에 일어나 전주로, 8일에는 전주에서 새벽 다섯 시에 강릉으로, 9일에는 새벽 한 시 반에 고흥으로 운전하고 오는데, 잠깐씩 졸리면 자기는 하였으나 딱히 피곤하거나 지루하지 않았습니다. 무한반복으로 “사철가”를 듣다가 가끔 라디오를 듣다가 하면서 운전을 하고 오다 보니 지루하고 심심할 틈이 없었습니다. 아마 내일 11일에 이천으로 김상진열사님 추모식에 갈 때에도 새벽부터 사철가를 따라 부르며 갈 것 같습니다.

새로 시작한 농업관측 업무가 익숙해지면서 약간 일상이 무료해지려는 시기에 만난 소리북과 사철가는 지금 저에게 엄청난 활력소가 되고 있습니다. 소리북과 사철가가 저에게는 애인과 같은 존재가 된 것 같습니다.

넉 달간 18주간 2시간씩 받는 교습의 교육비는 꼴랑 76,000원 밖에 되지 않으니 거져나 마찬가지입니다. 그것은 곧 정부의 보조가 있다는 얘기입니다. 예전에는 이렇게 보조를 하더라도 아무런 일이 없었는데, 몇 년 전부터는 나라에서 보조를 하는 교육은 평가회 비슷한 것을 하여야 하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이번 “고법” 수강생들은 교육이 모두 끝나면 7월 3일에 공연을 하여야 한답니다. 어차피 하는 것 부지런히 해서 올 연말에는 대면이든, 화상이든 모임에서 한 자락 뽑아 재껴 볼랍니다. 가능하다면 미완의 상태로라도 6월 6일에 뵐 수 있으면 그때에도 살짝 불러 보고 싶습니다.

처음에는 북이 특별히 불교 사찰에 있는 “법고”를 제외하고는 한 가지 인 줄로만 알았습니다. 그런데 여러 가지가 있으며, 비슷한 것으로만 세 가지가 있다는 사실도 알았습니다. 사물놀이용, 북춤용, 판소리용이 그것입니다. 사진에서 왼쪽이 사물놀이용이고, 오른쪽이 판소리용입니다. 북춤용은 흔하지 않은데, 사물놀이용과 더 비슷한 것 같습니다.

지금 가장 시급한 것은 소리북을 구하는 것인데, 강사님께서 그리 서두르지는 말라고 하십니다. 소리북은 가죽이 아주 단단하기 때문에 새로운 북을 사서 적응하는 것이 어렵기 때문에 차라리 천천히 기다려서 좋은 중고를 사라고 하시더군요. 그래서 서울에 있는 큰아들과 인터넷 검색을 잘하는 둘째 아들에게 구해 달라고 부탁하여 놓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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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마음이 바빠서 연습용 북을 만들어서 부지런히 두드리고 있답니다. 계란 박스에 버릴 옷을 넣어서 튼튼하게 해서 두드리면 제법 북 같은 느낌이 난답니다.

사실 고법 강좌를 신청하기에 앞서서 국립민속국악원 홈페이지에서 “2021년 공연평가 모니터링단” 모집공고를 먼저 보았습니다. 거리가 조금 멀기는 하지만 한 달에 한두 번씩 공연을 보러 다니면 좋겠다는 생각에 신청을 하였습니다. 그러면서 “청출어람” 교육 공고를 보게 되어서 교육도 신청하게 되었습니다.

어지간해서는 많이 흥분하거나 들뜨지 않는 성격인데, 지난 3월 2일부터 지난 4월 6일까지 고법 교육을 여섯 번 받으면서 살아 있음이 고마울 정도로 재미가 있습니다. 거기에다가 2주에 한 번 정도 국악 공연을 즐기는 저의 삶이 감사하게도 느껴집니다.

예전에는 시골에서 자연과 가까운 곳에서 사는 것이 로망이었는데, 올해 공연을 보고, 강습을 받으면서는 자연보다는 문화생활을 누릴 수 있는 곳에서 살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예전에 먼저 퇴직하신 분들이 나이 들면 병원 가까운 도시에서 살아야 한다고 하신 말씀이 생각나는데, 저는 나이 들면 문화생활을 누릴 수 있는 도시에서 살아야 한다고 말하고 싶을 정도입니다.

저는 제가 직접 명창이나 명고수가 될 수 없다는 것을 너무도 잘 압니다. 하지만 귀명창은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아니 귀명창이 되지 못해도 괜찮습니다. 그냥 우리 민족 문화를 즐길 수만 있으면 됩니다. 그래서 행복하면 되고요. 누구에게 피해 주지 않고, 가끔 즐거움을 줄 수 있으면 더욱 좋고요.

고흥에서 조금 멀기는 하지만 누릴 것이 많아서 남원으로 매주 한 번, 또는 두 번 세 번씩 달려갔다 달려오는 것이 즐거운 요즘입니다. 다들 남들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범위 내에서 즐겁게 사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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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양_ 두 차례의 공무원 생활을 그만두고 지난해 와포햇살영농조합법인에서 연구부장으로 근무하였고 중학교 텃밭교육 및 귀농인과 청년농업인 컨설팅을 했다. 종자기술사, 농화학기술사, 시설원예기술사 자격증과 천문지도사 자격증을 가지고 있다. 2020년 9월 15일부터는 한국농촌경제연구원 농업관측본부 산지조사위원으로 일하고있다. (ljycby@daum.net)

Last modified: 2023-11-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