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정삼 삼양동 청소년아지트 센터장, 농경제 79
‘한강의 기적’이 일어났다. 한강의 기적은 흔히 일제 36년의 식민지 지배 이후에 6.25 전쟁이라는 내전의 상흔으로 폐허가 되어버린 대한민국 사회가 고도의 경제적 발전을 이룬 것에 대한 상징적 언어로 쓰였다. 그런데 오늘 우리는 또 다른 의미의 한강의 기적을 얘기한다. 한강 작가가 노벨 문학상을 받은 것이다. 그 얼마나 기다리고 기다리던 노벨 문학상이던가. 가까운 이웃 일본이 이미 여러 분야에서 30개에 가까운 노벨상을 수상하고, 문학상 부문에서도 세 차례나 노벨상을 받은 터라 부러움은 더욱더 컸다.
고교시절 자칭 문학 소년임을 자부하던 필자는 ‘메타피지카(MetaPhysica:형이상학)라는 이름의 문학서클 활동을 시작했다. 평소 조용한 성격으로 혼자만의 사색을 자주 즐기던 필자에게 어느 날 말 한번 섞어본 적도 없는 친구 한 명이 다가와 대뜸 물어본다.
“너, 염상섭의 『표본실의 청개구리』를 읽어봤니?”
“응.”
“그럴 줄 알았어. 너 우리랑 서클 활동 하자.”
그래서 만들어진 서클이 위에서 밝힌 메타피지카라는 다소 관념적이고도 현학적인 이름의 학교밖 연합서클의 형식을 띤 문학 서클이었다. 당시 우리는 한껏 지적인 우월감에 빠진 채 매주 한 번씩 지금은 대학로가 된 혜화동 인근의 한 건물에 월세를 내고 스터디 공간을 확보했다. 지적 욕망에 가득 찬 우리들은 고전주의 문학에서부터 중세의 문학, 그리고 모더니즘과 포스트 모더니즘에 이르기까지 시대와 장르를 가리지 않고 손에 닿는 모든 책들을 섭렵하며 소위 ‘개똥 철학’을 읊어내며 토론을 즐겼다. 그중에는 1968년 일본 최초의 노벨 문학상 수상자인 가와바타 야스나리(川端康成) 작가가 쓴 『雪國』도 있었다. 아마 제목에서 풍겨오는 눈의 나라 일본에 대한 짙은 내음이 서양세계의 심사위원들에게는 더욱 짙은 감성을 불러일으켰을 것이고, 작가 특유의 섬세하고 정교한 문체를 동원한 세밀한 인간의 감정과 주변에 대한 묘사는 뛰어난 감수성과 표현의 능숙함으로 다가왔을 것이다.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수상 이후 반세기가 흐르는 동안 일본은 두 차례나 더 노벨 문학상을 받았고, 우리는 여전히 몇몇 작가들의 수상에 대한 막연한 기대감과, 뒤따르는 실망감만 경험할 뿐이었다. 그리고 그 반복되는 좌절에 때로는 적당한 자기 합리화를 통해서 ‘한국 문학은 번역 시장의 한계 때문에 아직은 노벨상 수상이 불리할 수밖에 없다’며 자조적인 위로를 하곤 했다. 그런데 이번에 한강 작가에 의해서, 그것도 우리 현대사의 가장 뼈아픈 질곡 중의 하나인 5.18 민주화 항쟁과 4.3 제주 항쟁을 배경으로 한 『소년이 온다』, 『작별하지 않는다』 등에 대한 스웨덴 한림원의 “역사적 트라우마와 보이지 않는 규칙에 맞서고 인간 삶의 연약함을 폭로한 강렬한 시적 산문”이라는 평가와 함께 노벨 문학상을 수상하게 되었으니 가히 그 감동이 크지 아니할 수 없다.
이쯤 되면 눈치 빠른 독자들은 오늘 필자의 글이 왜 한강 작가의 노벨 문학상 수상으로부터 시작됐는지 눈치챘을지도 모르겠다. 오늘 필자의 글의 제목이 「유혹에 빠진다」로 현재형 시제를 가리키는 서술형 종결어미로 되어 있는 이유가 한강 작가의 수상에 대한 오마주임을.
그런데 왜 하필이면 한강 작가에 대한 존경의 표시가 「유혹에 빠진다」일까? 그것은 요즘 필자가 쿠팡의 ‘로켓배송’의 유혹에 빠져들었기 때문이다. 오늘 밤 12시에 주문한 식재료를 다음날 새벽 7시 전에 각 가정에 배달하기 위해서는 전국에 배치되어 있는 쿠팡의 물류 허브에서 밤샘 노동을 통해서 쿠팡의 신선식품을 담는 ‘프레시백’을 누군가 밤새워 래핑을 해야만 한다. 지난 10월 11일 국회 환경노동위원회의 국정감사에서도 의원들은 건설업의 평균 재해율이 1.45%이고, 산업 전체 재해율이 0.66%인데 비하여 쿠팡로지스틱스서비스의 평균 재해율이 5.9%에 달하고 있음을 지적하며 이는 쿠팡의 고정적이고 연속적인 야간노동 때문이라고 질타했다.
특히 올해 5월 쿠팡 로켓배송 기사로 일하다 숨진 故 정슬기 씨의 아버지 정금석 씨는 “제 아들이 죽고 난 후 손자의 친구들이 ‘너희 아빠는 로켓 배송의 연료가 되었다’라고 한 말이 다시 생각난다”며 진상 규명과 대책 마련을 촉구했다.
그런데도 나는 어제도 배송비가 무료라는 이유로, 가격이 싸다는 이유로, 신속 배송이 가능하다는 이유로 쿠팡 로켓배송 주문을 했다. 더욱이 그냥 동네 재래시장이나 대형 마트에 장바구니를 들고 가면 택배 배송에 필요한 포장재가 전혀 필요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말이다. 나이 60대 중반이나 된 생산력과 체력이 서서히 쇠퇴해 가는, 황혼에 접어든 노인네(?)가 ‘로켓프레시’의 유혹에 빠져들다니….
나이깨나 먹은 노인네가 지구종말시계(Doomsday Clock)가 자정까지 90초 밖에 안 남은 시점임을 알면서도, 2024년도 대한민국 산업재해 보험료 할증액 1위의 기업인 쿠팡에서 생필품을 사면서 플라스틱 쓰레기를 마구 배출하고 있다니 한심하고도 애처롭기까지 하다.
그러나 나는 과연 언제쯤이나 이 편리함의 유혹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를 반성하면서도 오늘 또다시 로켓배송의 유혹에 빠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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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정삼_ 젊은 시절 노동운동, 사회운동에 투신하였으며 결혼 후 30여 년 간 강북구 주민으로 살고 있다. 사단법인 삼양주민연대 사무국장으로 주민 참여와 자치를 통한 풀뿌리 민주주의를 확장하고 주민권익과 협동공동체를 실현하기 위한 활동에 매진하였으며, 현재는 삼양동 청소년아지트 센터장으로 ‘더불어 현재를 즐기고 미래를 여는 청소년’의 비전을 바탕으로 주체, 참여, 성장, 존중의 가치를 실현하고자 노력하고 있다. (baroaca@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