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ritten by 2:39 오후 108호(2017.03)

[임은경이 만난 사람]
“전봉준 투쟁단, 넘쳐난 국민 성원에 용기 백배”
[인터뷰] 고제형 평택농민회 사무국장 (산림자원 89)

임은경 선구자 편집주간, 농학 95

주말의 광장엔 흥이 넘실댔다. 3월 11일 토요일 ‘촛불승리 축하’ 집회가 열린 광화문 광장 한복판에서 그를 만났다. 헌법재판소의 대통령 해임 선고가 내려진 바로 다음 날이었다. 정식 집회가 시작되기 전부터 축제를 즐기러 나온 사람들로 발 디딜 틈이 없었다. 미세먼지가 심한 날이었지만 사람들은 개의치 않았다. 인파를 헤치고 이순신 장군 동상 앞에서 마침내 그를 만나기까지 한참이 걸렸다.

지역에서 사드 배치 반대 1인시위에 참석한
고제형 평택농민회 사무국장

“촛불집회가 있을 때마다 거의 빠짐없이 참석했어요. 풍물패 활동을 하는 아내가 더 열심이죠. 오늘도 두 아이와 함께 가족이 다 같이 광화문에 왔어요. 애들한테는 치킨 사준다고 하고.(웃음) 농민회에서 주말마다 단체 버스를 마련하는데, 저는 늦게까지 있고 싶어서 주로 기차를 이용해요.”

인터뷰를 위해 질문들을 준비했지만, 바로 전날 나온 빅뉴스 덕에 질문지를 수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제일 먼저 헌법재판소의 탄핵 인용에 대한 소감을 물어보았다.

“어제 판결문 낭독 생방송을 봤어요. 아마 다른 사람들이랑 똑같았을 거예요. 20분 동안 ‘그러나’가 나올 때마다 조마조마하다가 마침내 감격. 눈물이 글썽하더라고요. 아내는 펑펑 울었다고 하더군요. 이번 촛불집회 과정은 누구에게나 특별한 경험이었겠지만, 농민들에게는 그 의미가 훨씬 더 컸어요.”

스무 번에 걸친 촛불집회에서는 ‘박근혜 탄핵’ 못지않게 박근혜로 상징되는 우리 사회의 수많은 적폐 문제들이 다루어졌다. 청년 실업 문제, 한‧일 위안부 합의, 역사교과서 왜곡, 사드 배치, 세월호 문제 등등. 농민들도 이에 보태 목소리를 냈다. 수십 년간 계속된 수입 개방 정책 끝에 2014년에는 식용 쌀까지 완전 개방이 되었다. 쌀값은 바닥을 치고 농민은 생존을 위협받고 있다.

“현재 쌀 가격이 2000년에 제가 처음 농사를 시작했을 때보다 더 낮아요. 가격이 높다는 경기미도 80kg 한 가마에 12만원이에요. 호남 쪽 쌀은 10만원 이하로 떨어졌다고 해요. 몇 년 전만해도 제가 받는 도매가격이 한 가마에 16,17만원이었거든요. 소비자가는 더 높았겠죠. 그런데 쌀 개방 3년 만에 쌀값이 이렇게 됐어요.”

심지어 쌀값이 16,17만원 할 때에도 생산비와 농민의 인건비가 보장되려면 한 가마에 22만원은 받아야 한다는 것이 농민단체의 주장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얘기를 하기도 무색해졌다. 미질이 떨어지는 다수확 품종을 재배하는 농민들의 경우, 벼를 사가는 이가 없어서 무작정 창고에 보관하고 있는 사람도 많다.

생존권을 위협받는 농민들

“지금 농촌에서 가장 이슈가 되고 있는 것은 공공비축미 환수금 문제예요. 예전에는 벼를 정부가 전량 수매했는데 우루과이라운드 이후에 정부 수매를 포기하고 공공비축제도로 바꿨어요. 정부가 1년 쌀 소비량의 30%만 수매해서 비축해두는 거예요. 자연재해나 전쟁 등을 대비한 일종의 비상식량 개념이에요. 문제는 이 공공비축미를 예전처럼 정부가 정한 가격이 아니라 시장 가격으로 수매한다는 것이죠.”

10월, 11월경에 정부가 농민에게 선급금을 주고 쌀을 수매한 후, 1월에 가격이 결정되면 나머지 돈을 추가로 지급한다. 그런데 올해는 쌀값이 그 선급금보다 더 떨어졌다. 그러자 정부는 그 차액을 도로 받아가겠다고 나섰다. 쌀을 판 농민들에게 고지서가 날아온 것이다. 개방 농정으로 쌀값을 이렇게 떨어뜨린 당사자가, 그 떨어진 쌀값의 차액마저 받아가겠다는 것에 농민들은 단단히 화가 났다.

“농민들은 이런 농업의 적폐 문제들을 다 가지고 촛불에 나왔던 것이죠. 평택에서도 평택역 광장에서 계속 촛불을 들었어요. 촛불이나 박근혜 탄핵이 아니었어도 농민들은 계속 싸웠을 거예요. 백남기 농민이 쓰러진 후 일 년 넘게 계속해왔던 싸움이, 이번에 최순실 사태가 터지면서 촛불집회로 이어진 거죠.”

2015년 겨울에 백남기 농민이 쓰러진 직후부터 각 지역 농민회가 일주일에 한 번씩 돌아가며 서울에 올라왔다. 농번기가 시작된 후에는 그것이 한 달에 한 번으로 바뀌었고, 서울대 병원 앞에 농성장을 차렸다. 가을에 백 농민이 마침내 돌아가시고 부검 논쟁이 벌어지면서 농민들은 매일 농성장에서 살았다. 작년 말 전국을 뒤흔들었던 농민들의 ‘전봉준 투쟁’은 이런 활동들의 연장선상에서 나온 것이다.

“농민회가 예전에 비해 규모가 많이 줄었어요. 한때는 서울 여의도에 13만 농민이 모였던 적도 있었지만, 지금은 총동원을 해도 만 명 넘기가 힘들어요. 이런 상황에서 우리가 촛불 정신에 맞게 국민의 목소리를 내는 데 기여하면서, 동시에 농민 문제도 알릴 수 있는 방법이 뭘까 고민하다가 나온 것이 전봉준 투쟁이었어요.”

120년 전, 남도에서 봉기해 전국을 휩쓸면서 서울로 진격했던 그 사람. 그가 이끈 싸움은 당시 조정의 폭정에 지친 민중들에게 한 줄기 빛이자 희망이었다. 2016년의 농민들은 그들이 가진 가장 큰 무기인 트랙터를 몰고 나섰다. 전국에서 2천 대에 가까운 트랙터가 서울로, 서울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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쌀 개방, 백남기농민들은 계속 싸워왔다

11월 15일, 전라남도 해남의 서군과 경상남도 진주의 동군이 각각 출정식을 갖고 길을 나섰다. 도로를 점령한 트랙터 행렬은 언론의 플래시 세례를 받았고, 국민들은 열광적인 성원을 보냈다. 두 갈래로 나뉜 전봉준 투쟁단은 열흘 만인 25일에 안성에서 만나 경기도에 입성했다. 거기서부터 경찰 부대가 앞길을 막기 시작했다.

“안성에서 막힌 대열이 평택으로 들어왔고, 그러면서 평택농민회에서도 나서게 됐죠. 그날 하루 종일 평택에서 경찰과 대치했어요. 그러다가 밤이 되면서, 갈 수 있는 사람들은 개별적으로라도 서울로 가기로 했어요. 저는 안성에서부터 길안내를 맡았어요. 맨 앞에 선 대장 트랙터 앞에서 대열을 유도하는 일을 했죠.”

그렇게 몇 안 되는 트랙터가 양재 IC까지 왔다. 함께 온 트럭은 400대가 넘었다. 양재 IC에서 벌어진 경찰과 농민 간의 대치는 전국적인 유명세를 탔다. 농민들의 목소리가 세상을 움직인 순간이었다.

“양재 IC에서 막혀있다는 소식을 듣고 먹을 것을 싸들고 달려오신 분들이 많았어요. 밤늦게 전남 광주에서 출발해서 새벽에 와주신 분도 있었죠. 그 자리에 초코파이, 따뜻한 커피 등이 넘쳐날 지경이었다고 해요. 정말 큰 감동을 받았죠. 우리가 열심히 하니까 이렇게 사람들이 지지해주는 구나.”

탄핵 국면과 맞물려 모든 것이 순조로웠다. 양재 IC에서 경찰과 대치하던 농민 30여 명이 연행되었지만 바로 훈방됐다. 예전 같으면 풀려나면서도 불구속 기소를 당하기가 십상이었는데 말이다. 길 위에서 열흘을 보내는 동안 다들 노숙자 못지않게 꼴이 말이 아니었지만, 마음만은 정말 즐거웠다고 그는 당시를 회상했다.

“2차 전봉준 투쟁은 국회 탄핵일에 맞춰서 12월 8일에 진행했어요. 1차 투쟁 때 앞장을 섰던 대장 트랙터가 경찰에 막혀 평택에 발이 묶여 있었는데, 그게 다시 출발한 것이 2차 전봉준 투쟁이에요. 대장 트랙터를 서울로 올려 보내기 위해서 평택에서 출정식을 가지고 국도를 따라서 출발했죠.”

탄핵 분위기가 무르익은 상황이라 경찰들도 심하게 막지는 않았다. 간혹 경찰 부대를 만났지만, 규모는 지역 경찰 1개 중대 정도가 전부였다. 가다가 경찰을 만나면 다들 차에서 우르르 내려서 뚫고, 가다가 막으면 또 뚫고 하면서 첫날은 수원까지 갔다. 그날 저녁에 수원에서 촛불집회에 참석하고, 다음날은 안양을 거쳐서 서울로 입성했다.

“그렇게 대장 트랙터가 여의도까지 갔어요. 대장 트랙터는 이효신 전농 부의장님이 가져오신 것인데 다른 트랙터보다 몸집이 두 배 이상 큰데다 투쟁단 분위기에 맞게 꾸며서 눈에 확 띠는 것이었죠. 총 45대의 트랙터가 출발했는데 그중에 서울에 진입한 것은 7대였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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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적 성원 쏟아진 전봉준 투쟁

당시 경찰은 트랙터가 서울 시내로 진입해서 시위를 하는 것은 막겠다고 통보해왔고, 농민들은 법원에 집행정지 가처분 신청을 내고 행진을 계속했다. 대장 트랙터가 여의도 KBS까지 왔을 때 법원에서도 불허 처분이 내렸다. 트랙터 시위는 거기서 중지했지만, 농민들은 촛불을 들고 국회 앞으로 모였다. 12월 9일, 그날 국회에서 탄핵이 가결되었다.

“그러고 나서 헌재의 탄핵 인용일에 맞춰 어제까지 3차 전봉준 투쟁을 진행했어요. 3월 9일에서 10일까지 1박 2일간, 전국 각 시군별로 군청이나 농협 마당에 집결했죠. 탄핵이 인용되지 않을 경우 서울로 상경 투쟁을 진행한다는 계획이었어요. 경기도 쪽보다 남녘에서 공공비축미 거래가 많아서, 그곳은 그전부터 적재 천막 농성이나 트랙터 농성 등을 계속 벌여왔죠.”

세 차례에 걸친 전봉준 투쟁은 정부에 실망하고 실의에 빠졌던 농민들에게 잃었던 용기를 되찾아준 소중한 경험이었다. 고제형 사무국장 역시 다르지 않았다. 그동안 들어간 비용이나 트랙터 기름값 등은 어떻게 했느냐고 물었더니 의외의 답변이 돌아왔다.

“단체나 개인 명의로 상당한 성금이 들어왔어요. 이번 일로 트랙터 기름값도 필요했고 많은 비용이 든 것이 사실이에요. 그런데 성금이 그걸 다 충당하고도 남을 정도였어요. 그야말로 국민의 성금이 들어온 거죠. 1차 전봉준 투쟁단 마지막 날에 광화문 세종로 공원에서 농민집회를 진행했는데, 서울대민주동문회에서 오셔서 금일봉을 전달하고 가신 적도 있어요.”

전농에서는 그 당시 ‘숙박비, 밥값, 기름값 등을 시군별로 정산해서 올리면 지급해주겠다’고 했지만, 안 받는 시군이 많았다. ‘집회, 시위는 우리 돈 들여서 한다’는 것이 농민회원들의 기본적인 생각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십시일반으로 한 걸음씩 떼면서 농민운동은 지금까지 왔다.

그는 대학 시절에 ‘영농개척단’ 활동을 했다. ‘농투신’을 고민하던 선후배와 친구들이 주축이 되어 만든 모임이다. 최재관(농생물 86) 여주농민회 교육부장, 이호중(농생물 91) 전 강기갑 의원 보좌관, 평택농민회에서 활동하다 지금은 진안에서 농사를 짓는 송태경(농학 90) 등이 모임을 함께한 멤버들이다.

고향은 제주도인데 어렸을 때 부산으로 이사 와서 자랐다. 부모님도 일찌감치 이농을 하셨기 때문에 농사를 지으려면 새로운 곳을 찾아가야 했다. 2000년에 여름 농활지였던 평택을 찾아와 자리를 잡았다. 쌀농사를 지으며 지금껏 농민회 활동을 계속 하고 있다.

“저는 쌀농사만 1만 5천 평 정도 짓고 있어요. 우리나라는 여전히 쌀농사를 짓는 농민이 제일 많지만, 작년부터는 소와 돼지를 합쳐서 축산 생산액이 전체 쌀 생산액을 넘어선 걸로 알고 있어요. 고기가 워낙 흔한 세상이 됐으니까요. 쌀농사 1만 5천 평으로 네 식구가 먹고 살기 힘들죠. 아내가 일을 하고 있어요.”

농사와 농민운동은 평생의 업

대중 사업을 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상황에 따라서 이렇게도 저렇게도 변하는 사람들을 상대하고 그들을 모아서 같이 가야하기 때문에. 힘들게 사람들을 모아서 서울에 올라와 집회에 참석하면, 가끔 차 막힌다고 삿대질을 하고 지나가는 도시인들을 만날 때도 있다. 농업을 하고 농민운동을 한다는 것이 점점 외롭고 힘든 일이 되어간다.

“대선을 앞두고 정권교체에 관심이 쏠리고 있죠. 전농의 입장은 대중적 진보정당을 건설하자는 거예요. 현재의 민중연합당, 과거 통합진보당이나 민주노동당 같은 모델이죠. 저는 거기에 동의하지만 그런 것을 저희 회원들에게 설명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어려워요. 농민 회원조차 여전히 새누리당을 지지하는 분들이 많은데, 그런 분들에게 어떻게 대뜸 진보정당 얘기를 꺼내겠어요.”

“농민 대중을 설득하는 과정은 단계적으로 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쌀 문제를 가지고 농민들과 많은 대화를 나누고, 이 문제들의 원인은 개방 농정을 펼쳐왔던 보수 세력들에 있다는 것, 그것만으로도 정권 교체가 필요하다는 광범위한 합의를 해가야겠죠. 대선 정국에서도 역시 좀 진부하긴 하지만 그렇게 공분을 모아내는 대중 투쟁이 답이라고 생각합니다.”

농민회 사무국장으로서 대중사업의 버거움에 힘들어했던 그에게 지난 몇 달 간의 광장의 경험은 새로운 배움과 깨달음을 얻은 시간이었다. 주류 언론이 보도하지 않는 우리 사회의 수많은 문제가 광장에서 소통되는 것도 목격했다. 농민들이 농업 문제를 얘기하는 것처럼, 청소노동자, 반핵 활동가 등 다양한 분야의 활동가들이 무대에 올라 서로의 문제를 공유했다.

“국민의 지지를 받은 전봉준 투쟁 이후로 나름 소극적이 되고 해이해졌던 마음을 다시금 되돌아보게 됐어요. 이 일을 계속할 많은 용기를 얻었죠. 이제 국민들의 귀는 많이 열려 있잖아요. 우리 힘을 최대한 모아서 농민의 문제를 호소해나가는 노력이 지금부터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박근혜는 물러났지만 국민들에게는 어쩌면 더 중요한 문제가 남았다. 눈앞에 닥친 5월 대선에 누가 당선되느냐 하는 것. 이번에는 농민의 목소리에 귀기울여줄 사람이 대통령이 될까. 누가 정권을 잡느냐 하는 것은 농민들에게도 중요한 문제이다. 하지만 김대중, 노무현 정권 때도 변함없었던 수입 개방 정책. 뜻을 세운 이들은 꿋꿋이 ‘농민의 길’을 가겠지만, 농업의 앞날은 불투명하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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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은경 _ 대학 졸업 후 인터넷 신문 ‘민중의소리’ 기자로 일했다. 남보다 조금 더 잘하고 가장 즐겁게 하는 일이 글쓰기여서, 아무래도 이것이 평생의 업이 되지 싶다. 저마다 다양한 사연을 안고 다양한 모습으로 살아가는 인간들의 이야기에 깊은 관심이 있다. 김상진기념사업회에서는 선구자 편집주간을 맡고 있다.

Last modified: 2024-11-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