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경남 (농민, 농화학 87)
“농사만 짓고 살아도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세상을 꿈꿉니다.”
05:00
저절로 눈이 떠지는 시각. 알람 없이 깨어지는 나이가 되었다. 농사짓고 산 지가 벌써 23년이다. 나는 당신 평생 처음이라던 80줄 노인의 경험을 23년간 많이도 겪었다. 1998년 10월, 고흥 지역은 태풍 피토로 수확을 앞둔 벼가 전부 쓰러지고 후기 무더위로 수발아(벼 이삭에서 싹이 나와 아주 땅에 뿌리를 내려서 기계로 수확할 수 없는 상황)가 되어 서리가 내릴 때까지 90%를 낫으로 수확했다.
06:00
차로 10분 거리의 축사에 소밥 주러 간다. 가기 전에 발효시킬 원료를 챙긴다. 마을기업의 들깻묵, 두부 비지, 유기농 쌀겨와 축협에서 구입한 옥수수, 단백피, 밀기울 그리고 농협에서 가져온 유통기한 지난 유자절임이 우리 소의 먹이다. 부담스런 사료 값을 극복하고자 자가 발효 사료 만들기를 시작한 지가 5년이 되었다. 소먹이 주는 시간 30분, 발효 사료 비비는 데 1시간이 걸린다. 이틀에 한번 꼴로 만드는 일이 쉬운 일은 아니지만 사료 절감 효과는 35~40%정도 된다. 거기에 덤으로 농후사료는 100% 수입에 의존하지만 우리 사료는 국산 원료가 30%.
07:30
아침밥 시간. <이노무시키>는 아직 비몽사몽이다. 스쿨버스 올 시간이 30분밖에 안 남았다. 초등학교에 입학한 <이노무시키>가 우리 집으로 온지가 햇수로 5년째다. 처음 봤을 때 어찌나 귀엽던 지, 이름을 이노무시키라고 지었다. “시후야, 누가 이름 물어보면 <이노무시키>입니다. 라고 해라 잉~.” 실제 동네 할아버지가 이름을 물어보자 <이노무시키>가 “이노무시키!”라고 대답했다나.
08:30
마을기업 출근하기. 무보수 대표이사지만 매일 아침 일과를 서로 공유해야 한다. 무수한 우여곡절 속에 출범한 지 4년이 되었다. 직원은 5명, 그중에 환갑 넘은 김여사 때문에 반드시 샤워하고 출근해야 한다. 초등학교 입학 대신 광주로 식모살이 갔던 김여사는 위생과 청소에 아주 민감하다. 식품을 취급하는 마을기업 입장에서는 최고의 직원이다. 어업을 겸한 털보 공장장은 항상 그 비린내로 인해 김여사의 밥이다.
털보 공장장 왈 “나는 오늘 침전 끝난 생들기름 포장하네 잉~!” “ 김여사와 득수 형님은 주문 받은 두부 두 판, 오전 중에 끝내시고.”
2년 전부터 ‘전통 가마솥 손두부 체험사업’을 하던 중 어느 초등학생이 “선생님, 이날 평생에 이런 두부 맛 처음이에요!”라고 한 이후 간간이 주문을 받아 만들어왔다. 올 해 초 정식으로 식품군을 추가하여 가마솥 두부(바닷물로 간수-두부공장을 하시는 분들도 바닷물로 응고되느냐고 의아해 하지만)를 출시하고 있다. 단점은 한 판 만드는 데 한 시간이 걸린다는 것.
총무는 장애인이다. 뇌병변 2급. 눈썰미가 있는 친구라 이제 제법 한다. 엑셀 서식은 어려워하지만 마을기업의 재무, 문서관리, 택배 관리에 무리가 없다.
“고흥군 유통에서 학교급식 200포대 발주 있네. 내일 오후까지. 이번 쌀은 생산자가 누군가?”
마을기업 매출의 60%가 학교급식 유기농 쌀이다.
12:00
포두면에서 사회적 기업을 하는 자염(煮鹽) 권대표와 점심 약속! 대구 출신으로 귀촌한 젊은 사업가다.
“고흥에서 마을기업, 사회적 기업이 독자 생존하기 어려우니, 협동조합을 만들어 공동 유통을 해보자고 제안한다.”
오늘은 참여할 기업과 철학이 있는 농부들 몇 명을 추가하여 구성하기로 하고 헤어진다.
13:30
석인이의 전화.
“왜 안 오요?”
뭔 소리?
“오늘 논에 소똥 내기로 안했소?”
아차!
항상 자신의 일보다 남 일을 먼저 생각해주는 마을 후배다. 마을기업을 운영하는 데 무보수 자원봉사를 직원들의 일보다 더 많이 하는 날도 많다. 이번 관악구청 특판 행사도 이 후배가 자원해서 일을 덜어주기도.
1년 쌀농사 중에 제일 큰 일이 논에 퇴비 넣는 일이다. 3년 단위로 임대하는 간척지를 제외하고 전체 필지가 유기농 필지라 화학비료나 편리한 유박비료 대신, 1년 삭힌 쇠두엄으로만 농사짓는다. 물기 있는 논은 트랙터 살포기가 빠지기 십상이니 2대 1조로 살포하는 것이 안전하고 든든하다.
15:00
총무 전화다. “네오게임즈 주문이 46건이여, 쌀이 부족한디!”
“내일 방아 찧어서 내일 배송하소.”
원예과 박동우 형님의 개발품, ‘레알팜’의 농산물 상품이다. 3년째 발주해 주신 덕에 마을기업의 수도‧광열비등 공과금은 걱정이 없다. 개인적으로는 우리집 유기농쌀 판매의 절반이 넘는다.
17:00
입대 앞둔 아들에게 전화.
“오늘 두엄 치느라 바쁘다. 오늘 소밥 줘라.”
휴학하고 집에 왔다. 다음 달 입대. 요즘 군대 가기가 어려운지 어느 날 아빠 부대명, 군번, 주특기를 물어본다. 두 번 떨어지고 ‘직계 가족병 입영 모집’에 신청한다고. 내가 근무했던 화학대로 입대한단다.
18:00
털보 공장장이 마을기업 사무실에서 부른다. 석인이와 일 마치고 가니 쌀모치(숭어 새끼)가 양동이로 가득이다. 근무 중에 이탈하여 덤장(정치형 어망)을 털어온 모양이다. 1.8L들이 소주병이 금새 비워진다.
21:00
우리 집의 유일한 여성, 아내가 <이노무시키>를 안고 들어온다. 일주일에 세 번은 9시 퇴근이다.
“빨리 받어. 이노무시키가 왜 이리 무거워!”
저녁 한글교실에 엄마 따라갔다가 잠든 모양이다. 동갑인 아내가 고흥여성농업인센터를 운영한지도 10년이 넘었다. 부설 한글교실은 항상 저녁에 한다. ‘낮에 개설하면 창피해서 안 온다’고.
“아이고, 설거지도 안했네! 그럼, 저녁 없다.”
‘문기야, 우리는 라면이나 끓이자!’
이렇게 밤은 깊어간다.
신경남_ 전남 고흥에서 유기농 쌀농사. ‘차를 운전하다가 제초제 등 화학농약을 살포하는 광경만 보아도 헛구역질이 나는 화학농약 중독자’라고 자신을 소개한다. 23년 전 시작한 하우스농사 때문에 농약 중독증이 생겨서 지금은 유기 농사를 짓고 있다. 가정이 필요한 아이들을 맡아 양육하는 ‘위탁부모’ 사업에 참여해 ‘이노무시키’를 키우고 있다.
Last modified: 2024-11-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