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ritten by 2:22 오후 108호(2017.03)

[라피의 꿈]
무한도전

노광준 경기방송 편성제작부장, 농화학 88

요즘 자유학기제를 맞아 많은 중학생들이 방송국에 찾아온다. 꿈을 찾는 아이들, 피디가 되고싶다는 아이도 있고 아나운서, 기자가 되고싶다는 아이들도 있다. 아이들이 자주 묻는 질문 중 하나는 이거다.

– 피디되려면 대학도 ‘언정’가는게 좋겠죠?

언정. 언론정보학과의 줄임말이다. 옛날엔 신문학과였는데 그게 신문방송학과로 바뀌더니 이젠 언론정보학 이나 미디어 관련 학부로 바뀌었다. 여론을 선도하던 매체가 조선일보에서 KBS로, 이젠 네이버 등 포털과 SNS로 바뀐 세태를 반영하고 있다. 내일 아침에는 또 어떻게 바뀌어 있을까? 그건 아무도 모를 일이다. 그런 가운데 난 ‘언정’을 가야하느냐는 아이들에게 이런 말을 해준다. 몇 해 전 전화로 상담을 해온 어느 고3 여학생의 이야기.

– 피디님, 제가 꿈이 기자나 PD수첩 같은 시사피디 쪽인데요… E대 ‘언정’언론정보학부)을 가기엔 좀 모자라요. 그래도 전 꿈을 위해서 대학을 좀 낮춰서 ‘언정’을 꼭 가려고 하는데… 부모님께서 반대하세요. 꿈이란건 언제든 바뀌지만 출신 대학은 바뀌지 않는다고. 그냥 E대 다른 과 가라고. 그래서 많이 싸웠어요ㅠㅠ 피디님이 저라면 어떻게 하시겠어요?ㅠㅠ

그 학생은 청소년 프로그램을 할 때 딱 한번 봤던 아이다. 그 아이가 얼마나 간절하고 절박했으면 나에게까지 전화했을까? 잠시 자세를 고쳐앉은 뒤 이런저런 이야기를 해줬다. 그랬더니 세상에나, 불과 몇 분만에 울음을 그치더니 빵끗 웃으며 고맙다는 인사를 여러 번 하는 게 아닌가. 신기했다. 진짜 별거 아닌 이야기를 해주었을 뿐인데.

– 그러니까 ‘언정’이냐 대학간판이냐 그것이 문제구나?

– 예ㅠㅠ

– 아저씨가 보기엔 ‘언정’가서 피디의 꿈을 이루면 더할 나위없이 좋겠지만, 설령 ‘언정’을 못 간다고 해도 기자나 피디되는 데에는 아무 지장 없을듯.

– 옝?

– 아저씨 전공이 뭐 같으니?

– ???

– 아저씨 농대 나왔어. 농약, 비료, 생물공학 하는 농화학과라고 아주 좋은 과지. 비록 ‘언정’은 아니지만 그래도 아저씬 아직까지 일 못한다고 혼나지도 않고 운좋을 땐 상도 받고 그랬어.

– ^^(신기방기)

– 아저씨네 방송국에는 8명의 피디가 있는데 정작 언론계열은 두 명 정도? 나머지는

사회학과, 정치학과, 과학교육과, 다양해 아 참 체육교육과도 있다.

– 헐, 체육교육과도요^^

– 그럼 그 친구 잘해요. 박철쇼라고 아저씨네 방송국 간판프로그램 연출맡고 있는데^^ 뿐만아니라 3사(KBS, MBC, SBS) 피디들 만나봐도‘언정’출신만 있는게 아녀. 그야말로 다양해. 임재윤이라고 아저씨 나온 농화학과 후배인데 그 친구는 MBC 라디오 피디하면서 인터넷으로 라디오 듣는 툴 ‘미니’mini)라고 그 친구가 아이디어 내서 MBC가 최초로 만든거잖아. 포상으로 서울대 경영대학원 MBA 과정 공짜로 MBC에서 전액 지원해줬고.

– 우와~

– 또 아저씨 친구중에 역시 농대 나온 도 아무개라는 기자가 있는데 그 친구는 취재를 기가 막히게 해서 CBS 라디오 기자로 무척 높이 올라갔지? 특종상도 받고. 자기 하기 나름인듯……

– 그러니까 피디님 말씀은 꼭 ‘언정’이 아니어도 길이 있다는??

– ‘언정’을 가면 더할 나위없이 좋겠지만 꼭 그렇지 않아도 하기 나름인것 같아. 문제는….

– 문제는?

– 아저씨가 조금 해보니까 이 바닥이 ‘백문이 불여일행’인 것 같아.

– 백문이 불여일행 이요?

– 응. 보는 거하고 해보는 거하고 완전 다르다는 말이지. 대학 가거들랑 기자가 꿈이라면 ‘내가 기자다’라고 생각하고 기사부터 써봐. 피디가 꿈이면 ‘내가 피디다’라고 생각하고 만들어봐. 그걸 해본 사람하고 이론으로만 배운 사람하고는 하늘과 땅 차이.

– 근데 ‘언정’을 가지 않는 한…….

– 기회는 찾으면 찾을 수록 널려 있음. 블로그 만들어서 관심분야에 대해 취재하거나

조사해서 써봐. 그럼 기자여. 학보사나 시민기자로 활동해도 되고. 또 학교 방송국 들어가도 좋고 방송국 아니어도 휴대폰으로 영상 찍어서 유튜브에 올리면 영상피디, 휴대폰으로 녹음해서 올리면 팟캐스트 피디. 마을방송이나 소출력 라디오에서 봉사해도 되고.

– 중요한 건 실제로 꿈을 향해 실천해 보는 거라는 말씀이죠?

– 당근이지. 피디들 중에서도 개편 때마다 회의 하다보면 해보지도 않고 ‘이건 안돼’‘되겠어?’ 뭐 이렇게 머릿속으로만 생각하고 평론하는 친구들이 있는가하면 평소에 조금씩이라도 도전해보고 부딪쳐보고 실천해보는 친구들이 있어요. 나중에 김제동같은 사람이 필요할 때 그런 사람 섭외해오는 피디가 누군지 알아? 그렇게 도전하고 실천하는 친구들이야. 머리 굴리며 팔짱끼고 평론하는 친구들은 십년 이십년이 지나도 거기서 거기더라구. 그러니까 유명한 CEO가 그런 말 했다며. ‘Do it’ 난 그 말에 백퍼 공감.

– 와 피디님 말씀들으니까 웬지 힘이 나는 것 같아요.

– 힘내라고 일부러 하는 말이 아니고, 피디 그 자체가 삶의 목적이 아니잖아? 그 직업을 통해 다른 사람들을 행복하게 하는 게 목적이잖아? 그러려면 피디 돼서도 얼마나 넘어야할 산이 많겠어? 제작비가 없거나 위에서 압력이 들어오거나… 그럴 때도 진정한 피디라면 도전. 또 도전. 무한도전.. 어쩌면 그렇게 도전하는 훈련을 하는게 피디수업일지도 몰라.

– 감사합니다^^(흐뭇흐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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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인이 된 신해철씨가 남긴 불후의 명곡 중에 ‘민물장어의 꿈’이라는 노래가 있다. 좁고 좁은 문을 통과하기 위해 그 구멍에 맞춰 자신의 몸을 깎아내고 잘라내다보니 이제는 버릴 것 조차 없는데 문득 거울을 보니 자존심만 남아있다는… 그래도 언젠가 저 넓은 바다로 나아가 긴 여행을 끝낼 것이며 아무도 말해주지 않는 것, 내가 누군지 알고 싶다는…입시라는 좁은 문을 통과하기 위해 자신의 몸을 깎아내고 그 후 언론고시라는 더 좁은 문을 통과하기 위해 더 많이 깎아내다보면 어느새 자신이 누구인지 반문하던 시절이 있었다. 2차 산업혁명 시대 방송인들의 모습이다. 그러나 시대는 어느새 4차 혁명으로 가고 있다. 언론고시 한번 통과하지 않은 김어준이지만 그는 숱한 실행과 통찰, 자기 학습을 통해 누구보다 대중적이고 예리한 저널리스트로 우뚝 서있다.

개인방송을 하는 아프리카 TV의 BJ를 시상하는 BJ 시상식이 전통의 대종상 시상식보다 더 많은 관심 속에 치뤄지고 있고 지금 이시간 유튜브 채널에서 천문학적인 조회수를 기록하고 있는 ‘연고TV’라는 영상물의 제작자들은 공중파 피디도 케이블 피디도 아닌 대학생들이다. 그들의 공통점은 ‘언론고시 → 방송국 → 피디입봉’이라는 기존 공식이나 기존 방송 문법을 깨고 자신들만의 언어와 정서로 바로 해버린다는 것이다. 또 그게 먹히는 시대가 왔다는 것이다.

– 어떤 일을 하고자 할 때 가장 먼저 해야할 일은, 그냥 하는 거다. (김어준)

Do It. 피디가 되고 싶다면… 기존 질서로의 편입, 즉 명문대 ‘언정’을 가기 위해 자신을 짜맞추고, KBS에 가기 위해 짜맞추고 방송국에서 열라 말 잘듣고 시키는 거 잘해서 비로소 프로그램 만들어야지…가 아니라 지금 해보는 것, 지금 써보는 것, 지금 만들어보는 것. 그렇게 부딪치고 깨지고 배우면서, 부족한걸 채우고 공부를 자기식대로 재발견하다보면 그게 진짜 공부가 아닐지.

다행스럽게도 요즘 대학들은 그렇게 자기주도적인 학생을 우대한다고 한다. 만일 그 학생들이 대학에서도 그렇게 실천하고 사색하며 나아간다면 그를 홀대하는 방송국이 어디 있을까? 없으면 그런 방송국을 만들면 될 일이다. 4차 혁명 시대에도 여전히 피디의 DNA는 ‘무한도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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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광준_ 드라마 ‘도깨비’의 히로인 지은탁 피디와 동종 업계에 종사하고 있다. FM 99.9MHz 경기방송 편성제작부장. 언젠가 농촌에 살고픈 닉네임 ‘시골피디’로 나무위키 선정 언론계 황빠 5호

Last modified: 2024-11-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