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ritten by 1:54 오후 108호(2017.03)

[나 이렇게 산다]
옷 입는 것도 예술행위이다

박애란 (전 평택여고 교사, 후원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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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떠세요?

어여쁜 여성을 보면 기분이 좋아지죠?

바로 그거예요.

“아름다운 헤어스타일은 샤넬의 재킷보다 디올의 구두보다 당신을 빛나게 합니다”라는 말이 있는데, 헤어스타일이 환상적으로 아름답죠? 옷 입는 것도 일종의 예술행위거든요.

‘이왕에 입는 거 예쁘게.’

‘여성이 아름다우면 남성이 행복하고 남성이 행복해지면 세상이 평화로워집니다.’

“나는 애란 씨를 첫눈에 보고 어떻게 저런 미인이 내 주변에 계시나 황홀했는데, 장미의 가시에 찔릴 때마다 가슴이 아파요.”

서초문화원에서 같이 수필공부를 하고 있는 남자회원의 카톡 문자이다. 내가 황홀할 정도의 미인? 천만의 말씀이다.

나는 결코 선천적인 미인은 아니다.(다시 태어난다면 남자들이 나를 한번 보고 싶어서 안달이 날 정도의 절세미인으로 태어나고 싶다. 사내대장부로 태어나서 천하를 호령하고 싶은 생각은 조금도 없다.) 자신에게 맞게 연출을 잘할 뿐이다. 어렸을 때 부모의 양육방법은 자녀들의 성격형성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치기 마련이다.

‘애란이는 코가 잘 생겼어’ 10대 중반의 나를 바라보시던 아버지가 하신 말씀이다. 나보다 세살 위인 언니는 나보다 예쁘고 머리도 좋고 키도 크고 성격도 좋았다. 여러모로 우월한 언니를 유독 사랑하는 아버지였다.

“대전시장이 대전 제일의 미인이라고 한 네 작은 고모도 너보다 못했다.”

열여섯 살 무렵이었다. 어느 날 우리 집 대문으로 들어서는 내 뒤통수에 대고 동네 총각이 휘파람을 불었다. 내가 보기에 영 껄렁껄렁해 보이는 사람이었다. 감히 나를 넘봐? 나는 그게 너무 자존심이 상해서 마침 마당에 계신 아버지께 “아버지 저 사람이 글쎄 나한테 휘파람을 부는 거예요. 아유! 뭐 저딴 사람이 다 있어. 아유! 자존심 상해”하며 신경질을 냈다.

그런 나를 어처구니없어 하며 아버지가 한마디 하신 것이다. 아버지가 보시기에는 둘째딸 인물이 영 시원찮았던 것이다. 내편을 들어주실 줄 알았는데. 아버지가 서운했던 나는 속상해 하며 속으로 말했다 “아버지, 예쁘다고 다는 아니에요. 자신의 가치는 자신이 지켜야 하는 거예요.”

이남 이녀인 아버지의 형제들은 모두 탤런트 뺨치는 미남미녀였다. 아버지는 외탁을 한 내 인물을 늘 탐탁지 않게 생각하셨다. ‘코만’ 이라고 하시지 않은 것이 다행이다. 나는 관심과 사랑을 받기 위해 치열하게 노력을 해야만 했다. 오늘의 나는 그 결과이다. 옷을 입을 때는 어떻게 하면 좀 더 예쁘고 멋지게 보일까를 궁리하며 입었다.

2015년 9월 코엑스에서 시니어 패션쇼를 마친 후에

수필반 남자회원은 내 옷발에 넘어간 것이다. 나는 ‘나에게 어울리는 색깔이 무엇일까?’ ‘디자인은 어떤 게 더 멋져 보일까?’ 등등을 디테일하게 연구하며 옷을 입는다. 체형의 단점은 감추고 장점은 더 부각시킬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도 생각한다. 아침에 일어나면 체중과 체지방량부터 체크한다. 거울에 전신을 비추어보고 뱃살을 확인한다. 사이즈가 66이 넘지 않도록 긴장한다. 내가 좋아하는 백화점의 영 캐릭터 브랜드 옷들이 66까지만 나오기 때문이다.

교사로 재직 시 내 사이즈는 늘 55였다. 한때 체중이 57kg에 가까워져 옷맵시가 나지 않으니 외출하기가 싫고 당장에 기분이 우울해졌다. 이러면 안 되지 하는 맘으로 그때부터 다이어트가 내 일상이 되었다. 식사는 하루에 두 끼 채식과 현미밥 위주로. 설거지는 까치발로 서서하고 에스컬레이터 대신 계단을 오른다. 일주일에 세 번은 왈츠, 모델 워킹, 탁구 등의 운동을 해주고 있다.

“얘들아, 너희들 좋은 남자 만나고 싶지? 그러면 내가 좋은 여자가 돼야 해. 이제 거울은 그만 보고 다양한 책을 봐서 내면을 채우도록 해. 몇 번 만나다 보면 얕은 지식이 드러나거든. 그럼 그 남자가 나를 계속 만나고 싶어 할까?”

재직 시 열여덟 살 제자들에게 즐겨 했던 말이다. 삶에 공짜는 없다. 지속적으로 탐구하여 내면을 꽉 채우고 겉모습도 멋진 여성이 되고자 나는 오늘도 노력한다.

2015년 4월 예술의 전당 연습실 옥상에서

사람은 몇 살이 되든 자신의 마음밭과 겉모습 가꾸는 것을 게을리 하면 안 된다고 생각한다.

“내가 지금 몸 여기저기에 공작털을 듬성듬성 꽂은 까마귀는 아닐까?”

한껏 치장을 하고 나온 어느 날, 문득 이런 깨달음이 왔다. 공작새로 위장한 까마귀면 어떠랴! 자신의 가치를 높이는 일에 최선을 다 할 것이다. 기품 있고 우아한 삶을 살 것이다.

“아름다운 옷차림은 보는 사람을 즐겁게 해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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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글을 쓰는 이유이자 목적

나와 서둔야학과의 인연은 1963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54년 전의 인연이 지금까지 면면히 이어지고 있다. 서둔야학 선생님들은 서울대학교 농과대학생들로, 가난하여 정규 학교에 못 간 농대 인근의 청소년들에게 야간에 공부를 가르쳐 주셨다.

가난 때문에 우리를 돌보지 못하는 부모님들을 대신하여 사랑과 관심을 쏟으셨다. 황폐해진 야학생들의 마음을 문학과 음악으로 곱게 가꿔주셨다. 수업을 가르친 후에는 대부분이 여학생인 우리들이 염려되어 꼭 집까지 데려다 주셨다. 1965년에는 농대 연습림 한 귀퉁이에 배움의 보금자리를 손수 지어주셨다. 그런 다음 호롱불 대신 전기를 끌어와 불을 밝혀 주셨다.

1967년에는 바닥에 까는 멍석 대신에 책걸상을 손수 만들어 주셨다. 소풍을 갈 때는 병약해서 잘 걷지 못하는 학생을 업어서 왕복 20리 길을 데려다 주기도 하셨다. 초등학교 때부터 선생님들을 좋아했던 나로서는 최고의 스승들을 만나게 된 셈이다.

우리의 배움터가 새로 지어졌을 때, 전기불이 처음으로 들어왔을 때, 책걸상이 처음으로 들어왔을 때마다 나는 감격했고, 선생님들에 대한 고마움이 뼈에 사무쳤다.

‘언젠가는 이 이야기를 꼭 글로 써서 세상에 널리 알릴 거야! 반드시.’ 하고 결심했다.

열여덟 살에 세상에 절망하여 죽으려고 마음먹은 후에는 선생님들께 보은의 꽃을 만들어서 달아드린 후 약을 먹었다. 다시 깨어난 후에는 결혼하여 애 둘을 낳아 키우며 직장생활을 하느라 정신없이 살게 된다. 그러다가 1992년 9월에 서둔야학 우명옥 선생님과 전화통화를 한 후에는 별안간 ‘글만 쓰고 싶은 병’이 생기게 된다.

그때부터 서둔야학 선생님들에 대한 얘기를 쓰게 되었다. 기억을 더듬고 정확한 자료를 찾기 위한 여행도 하였다. 그로부터 25년이 지난 이 시점까지도 서둔야학 선생님들에 대한 얘기를 쓰고 있다. 내가 글을 쓰는 절대적인 이유와 궁극적인 목표는 서둔야학 은사님들의 선행을 보다 널리 알리기 위함이다. 가능하면 파급력이 높은 TV 드라마로 만들어졌으면 하는 바람이다.

우리가 살아갈 때 우리의 의지로 살기도 하지만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삶의 바퀴가 돌아가기도 한다. 코엘료는 그의 저서 ‘연금술사’에서 말했다.

‘우리가 무언가를 간절히 원하면 온 우주가 나서서 그 일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도와준다’고.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는 말도 있다. 내가 할 수 있는 방법을 다하여 50여 년 전의 간절한 소망이 이루어지도록 노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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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애란 _ 선생은 서둔야학 시절 야학생과 교사로서 맺은 인연을 누구보다도 소중히 여기며 본회에 각별한 애정을 가지고 있다. 평택에서 어릴 적 꿈이었던 교사로 학생들을 가르치다 은퇴하였다.

Last modified: 2024-11-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