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은경 선구자 편집주간, 농학 95
올해는 1987년에 벌어진 6월 항쟁 30주년이 되는 해이다. 그해 1월에 일어난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과 4월 13일에 전두환 전 대통령이 발표한 호헌조치는 6월 항쟁에 뜨거운 불씨를 당겼다. 부패한 정치에 분노해 온 국민이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그 모습은 지난해 연말부터 또다시 온 나라를 달궜던 촛불시위와 많이 닮았지만, 구체적인 양상은 상당히 달랐다.
노태우 당시 민정당 대통령 후보의 6‧29 선언으로 승리의 기쁨을 맛보았던 6월 항쟁은 12월의 대선 패배로 좌절하는 듯했다. 하지만 그해 벌어진 ‘노동자 대투쟁’과 이어진 민주노총 설립은 엄연히 6월 항쟁의 성과이고, 더 이상 독재정치의 공포 하에 숨죽이지 않아도 되는 오늘의 민주화된 사회도 6월 항쟁의 값진 유산임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김상진 가족한마당’ 행사가 열린 지난 6월 6일 수원 농대 교정에서 87년 6월을 기억하는 사람들이 모여 이야기를 나눴다. 참석자는 당시 1학년으로 관악에서 시위에 참가했던 국승용(농화학 87), 87년에 학생회 투쟁위원장을 맡았던 김규호(임학 84), 87년 1학기에 학생회 간부였던 이동규(농생물 85), 87년 2학기 학생회 간부였던 정철훈(농학 82) 회원이다.
정철훈 : 86년 2학기에 복학을 했다. 인천 부평에서 공장을 다니다가 이런저런 사정으로 복학을 한 것이 10월이었다. 온 나라가 한창 아시안게임 열기에 빠져있을 때였다. 복학하자마자 ‘건대 항쟁’(86년 10월 28일) 사건이 터졌다. 그때 건대 사건하고 조직 사건에 엮여서 84학번들이 다 잡혀 들어가고 수배당했다.
84학번이 당시 3학년이었으니까 학생회의 주축인데, 학생회를 꾸리는 것이 불가능해질 정도로 84학번이 학교에서 다 사라졌다. 원래 복학생은 취직이나 사회 진출을 준비하면서 학생운동 전면에 나서지 않는 것이 관례였지만, 그런 상황에서 가만히 있을 수만은 없었다. 2학기에 복학생 그룹에서 학생회에 한 명 보내라 그래서 내가 학생회에 총무부장으로 들어갔다.
김규호 : 건대 항쟁으로 연행되었던 84들이 87년 1,2월경에 감옥에서 다 풀려났는데, 그 다음엔 학교로부터 무기정학을 받았다. 학생회에서 활동하려면 재학생이어야 했기 때문에, 84들은 학생회에 들어갈 자격이 없었다. 그래서 87년 학생회 집행부가 전부 85학번들이다.
그해 홍진선(농가정 84), 김원일(농학 84)하고 수원역 뒤편 동네에 방을 하나 얻어서 같이 지냈다. 4월경에 학생회장이었던 김효정(농가정 84)이 교통사고를 당해 입원하면서 85학번들에게만 학내 시위를 맡길 수는 없다는 얘기가 나왔다. 그래서 내가 투쟁위원장을 맡았다.
나는 그때 수배 상태여서 학내 시위에는 참여해도 학교 밖으로는 나갈 수 없었다. 다들 시위를 나가면 혼자 학생회실에 앉아서 무사히 돌아오기만을 기다렸던 기억이 난다.
이동규 : 87년 1학기 학생회에서 섭외부장으로 일을 했다. 건대 항쟁은 구속자만 천 명이 넘는 엄청난 일이었고, 그 여파로 각 학교의 학생 조직이 다 파괴되었다. 그러다보니 ‘집’이나 써클에 한 번도 가입을 안 했던 나 같은 사람까지 학생회에 참여하게 됐다. 나도 운동권이 아니었고, 학생회 문화부장을 맡았던 목경찬(농화학 85)이라는 친구도, 총무부장을 했던 최춘식(원예 84) 형도 운동권이 아니었다.
김효정 학생회장이 다치고, 2학기에 학생회가 다시 구성되면서 1학기 때 집행부는 다 물러났다. 저는 학생회 활동을 87년 1학기 동안만 한 거다. 87년 2학기에 학생회 선거를 다시 해서 정근우(농화학 84) 학생회장이 당선되었다.
건대 항쟁으로 3학년(84학번)이 모두 사라진 학교,
복학생과 85학번이 학생회 참여
정철훈 : 87년 6월 항쟁에 참여했던 복학생들은 문화적으로 큰 충격을 받았다. 우리는 화염병을 들어본 적이 없었다. 그냥 벽돌 깨서 던지다 도망가는 것까지만 해봤지. 복학해서 학교에 와 보니까 분위기가 완전히 바뀌어 있었다. 화염병이 날아다니고, 분위기가 굉장히 공세적이었다. 학생회를 탄압하는 분위기 때문에 아무래도 투쟁적으로 바뀌었을 거라고 예상은 했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지.
나는 85년 인천에서 벌어진 ‘인천 5.3 운동’ 현장에도 있었지만, 거기도 이 정도는 아니었다. 한번은 내가 화염병을 한번 던져 보겠다고 했다가 후배에게 다 뺏겼다. ‘그렇게 던지면 우리 편이 맞는다’면서 다 뺏어가더라. 과격한 상황에는 서툴렀던 거지. 말로만 듣던 80년 광주의 상황을 겪는 기분이었다.
이동규 : 87년 초기 시위는 폭력 대 폭력으로 맞서는 상황이었다. 경찰은 최루탄을 쏘고, ‘백골단’으로 잘 알려진 곤봉을 든 폭력 경찰들이 시위 학생들을 마구 두들겨 팼다. 학생 시위대는 돌과 화염병을 들고 대치했고. 그러다가 여론이 학생 시위에 동조하고, 사람들이 모이고, 이한열 열사 사건이 터졌다. 그때부터 시위대의 힘이 경찰이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을 넘어섰다. 그때부터는 굳이 강경하게 화염병 던지고 그러지 않았다. 우리 쪽의 힘이 저쪽을 능가하는 수준이 되었으니까 그럴 필요가 없었다. 지난해 촛불처럼 당시 시위 현장에도 엄청난 인파가 모여들었다.
당시 농대 캠퍼스 재학생이 2천명 정도였는데, 87년 6월에 학내에서 시위를 하면 거의 2천명이 다 모였다. 김상진 열사가 할복했던 6동 앞 잔디밭을 중심으로 주변 길까지 사람으로 가득 찼다.
5월에 학생회 간부들과 함께 ‘호헌철폐, 동맹휴업’을 구호로 일주일간 단식 투쟁을 했다. 공부가 제대로 되는 분위기가 아니었다. 아마 시험들도 다 못 치르고 그랬을 거다. 학생들 상당수가 정치 투쟁에 호응하는 분위기였다.
국승용 : 선배들이 주로 수원에 있으니까 관악의 1학년들은 과 선배들이 잘 챙기지 못했다. 선배들이 바빠서 관악캠퍼스에 못 왔다. 나는 시위에 아주 많이는 못 나갔지만, 나갈 때는 주로 동아리를 하는 1학년 친구에게 이끌려 나갔다. 지금 김현권 의원실 수석보좌관인 김현곤(농화학 87)이 1학년 때 기독학생회에서 활동하며 시위에도 열심히 참여했던 친구다.
당시 거리 시위에서는 연행되는 경우가 있었지만, 교내 시위에서 잡혀가는 일은 많지 않았다. 잡혀도 지금처럼 구속되는 경우는 별로 없었고, 닭장차 타고 가다가 멀리 가서 내려주고 그랬다. 연행되면 보호자가 와야 훈방 조치한다는 명목으로 부모님에게 연락했는데, 그게 제일 무서웠지.
거리 시위 참여는 상당한 결단을 필요로 하는 일이었다. 그래서 선배들이 처음에는 시위 나가자고 안 하고 ‘피 세일(P Sale)’이라는 걸 시킨다. 시민들에게 유인물 나눠주는 걸 페이퍼 세일(Paper Sale)의 약자로 피 세일이라고 불렀다. 집집마다 유인물을 돌리거나 버스에 스티커 붙이는 일을 했다. 스티커를 들고 있다가 버스에서 내리기 직전에 붙이고 얼른 내렸다.
선배들이 가끔 관악캠퍼스에 오면 1학년 후배들 불러놓고 ‘얘들아, 우리 얘기 한번 해보자’ 그런다. 그럼 그런 얘기였지. 스티커 미리 반쯤 떼어놓고 있다가 잽싸게 붙이고 내리는 것도 가르치고.(웃음) 그러다 차츰 거리 시위에도 참여하게 됐다.
경찰 상주하던 학교, 최루탄‧화염병 날아다니던 거리
정철훈 : 84년에 학원자율화 조치가 이루어졌다. 이 때문에 84학번 이후는 그 전 학번들과 사고가 완전히 다른 것 같다. 우리가 1학년 때는 전단지 나눠줄 때 무조건 뿌리고 튀었다. 잡히면 안 되니까. 한번은 84년에 당시 1학년인 84학번들을 데리고 전단지를 돌렸는데, 우리는 다 도망 왔는데 84가 안 오는 거야. ‘잡혔나보다, 큰일 났다’ 이러고 있는데, 이 녀석이 나중에 태연히 오더니 ‘나눠주면 되는데 왜 뛰느냐’고 묻더라고.
87년은 그렇게 바뀐 문화가 정점에 이른 시기라고 할 수 있다. 그전에는 항상 학내에 경찰이 있었다. 세 명 이상만 모이면 짭새가 달라붙었다. 그런데 84년도 이후에는 더 이상 경찰이 학교에 상주하지 않았다. 일상적인 억압이나 공포가 사라지고, 좀 더 자유로워진 분위기가 운동의 대중화에 한몫을 한 것 같다.
83년만 해도 시위 전날 밤에 학교 캠퍼스에 모여 시위 연습을 했다. 당시 농대에 ‘집’(언더 써클)이 다섯 개 있었는데, 저녁 때 ‘집’ 별로 몇 명씩 나와서 다섯 줄을 만들어가지고 술 마시고 나란히 캠퍼스를 행진했다. 그게 다음 날 시위 연습이었다. 왜냐하면 시위 딱 시작하면 5분 만에 깨지니까. 교수가 학생 머리채를 잡아서 경찰한테 넘기던 시절이었다. 87년에도 농대 교수들은 거기서 별로 벗어나지 않았다.
‘집’들은 학원자율화 분위기를 타고 86년경에 학생들 스스로 합의 하에 해체했다. 그리고 거기서 활동하던 사람들이 학생회에 모였다. 지하에 숨어서 하던 운동에서 대중 앞에 나서는 대중 투쟁으로 바뀐 것이다.
가족한마당을 마치고 주변을 정리하던 회원들이 너도 나도 인터뷰 자리를 기웃거렸다. 마침 그 옆을 지나가던 김용진(농생물 82) 회원을 정철훈 회원이 불러 앉혔다. 김 회원은 87년 6월 거리 시위에서 전신 화상을 입었던 김재연(농화학 85)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김용진 : 김재연은 연극반 후배였는데 화염병을 만드는 일을 담당했다. 사람이 가장 많이 모였던 6월 10일에 함께 현장에 나가 화염병을 던졌다. 내가 바로 옆에 있었다. 보통은 불을 붙이고 그냥 던지는데, 김재연은 좀 더 들고 있다가 끝까지 예열을 시켜서 던진다는 것이 그만 손에서 터져버렸다.
그런데 화염병을 만들면서 몸에 기름이 많이 묻은 상태가 화근이었다. 전신화상을 입었는데, 목숨이 위험할 정도로 상태가 심각했다. 6월 내내 수원역 등 집회가 열리는 곳마다 찾아다니면서 모금운동을 했다. 내가 모금통을 관리했는데, 모금이 상당히 잘 됐다. 기억이 정확치는 않지만 7,800만 원 정도가 모였다. 당시 한 학기 등록금이 40만 원쯤이었으니 큰돈이었다.
그 돈으로 초기 처치와 수술을 했다. 김재연은 천만다행으로 몸이 회복되어 유학을 다녀와 현재 경상대 교수로 재직 중이다. 당시 수원역이나 팔달문 시위에 모금을 나가면 시민들이 너도나도 돈을 넣어주는 것이 너무 감동적이었다. 왜 모금을 하는지 잘 모르는 사람도 있었는데, 고생하는 학생들에게 뭐 하나라도 보탬을 주고 싶다는 마음으로 해주었던 것 같다.
국가 폭력에 맞선 대학생들의 외로운 싸움,
6월에 전 국민 항쟁으로 폭발
정철훈 : 그때 사회적 분위기가 다 그랬다. 학생들 나오면 시민들이 다 박수치고, 고생한다고 그러고. 시위에 굉장히 우호적이었다. 그 무렵 고등동 파출소 기습 시위를 나갔던 일이 생각난다. 파출소 주변이 사창가다. 도망을 가다가 갈 데가 없어서 그 안으로 들어갔는데, 그 사람들이 다 숨겨주고 수건으로 닦아주고 그랬다. 그때 파출소 기습시위를 많이 했다. ‘파쇼의 개들이 지키는 곳, 적들의 기관을 깨러 간다’ 그런 거였지.(웃음)
그때는 언론통제가 심했기 때문에 우리의 주장을 알리려면 행동으로 보여줄 수밖에 없었다. 시위를 하거나, 전단지를 뿌리거나. 경찰서 기습시위도 그 중 하나였다. 당시 언론은 ‘보도지침’이라는 것에 메여있었기 때문에, 웬만큼 큰 시위 아니면 보도도 거의 안했다. 정부가 언론을 통제하고 있으니까. 바로 옆에서 시위를 해도 일반 시민들은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잘 모르는 경우도 많았다. 아 맵네? 뭔 데모하나보다. 이 정도.
국승용 : 사람들이 시위에 호응하고 박수쳐주고 그랬던 것은 경찰도 통제가 안 될 정도로 우리 쪽 세력이 불어난 뒤이고, 그 이전에는 외로운 싸움을 계속했다. 경찰하고 그야말로 치열하게 싸웠다. 파출소 기습시위도 그럴 때 했던 거고.
그러다 상황이 폭발적으로 바뀐 것은 6월 10일이 정점이다. 6월 10일은 민정당 전당대회가 열려서 노태우를 대통령 후보로 뽑던 날이다. 당시에는 대통령 선출이 간선제였으니까 민정당 대선 후보가 되면 대통령이 되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그것에 항의해서 전국적으로 시위가 일어났고, 그래서 6월 10일 시위가 그렇게 컸던 거다.
그날 이후 ‘최루탄 추방 범국민대회’ 등이 열리고, 비폭력 평화시위를 하겠다고 시위 군중들이 전경들에게 가서 장미꽃을 꽂아주는 퍼포먼스도 했다. 시위 규모가 커진 뒤부터는 경찰이 시위대를 막지 못했다. 경찰력으로 막을 수 있는 규모가 아니었다. 그때부터는 그렇게 치열하게 싸울 필요가 없었다.
경찰들이 시위를 막는 게 아니라, 경찰서를 지키기도 바쁜 상황이었다. 경찰서만 빼고 온 거리가 다 시위 물결이었으니까. 나는 관악캠퍼스에 있다가 시위를 하면 서울역 쪽으로 나갔는데, 그 모습을 또렷이 기억한다. 너무 동시다발적으로 시위가 일어나니까 지도부도 더 이상 폭력시위를 할 필요가 없다고 판단했을 거고, 그런 자신감이 ‘평화시위’를 하게 만들었을 거다.
‘광장에서의 승리’ 경험, 촛불세대의 자산 되길
김규호 : 그전에는 거의 전쟁 느낌이었지. 학내 시위를 하다가 스크럼을 짜서 시내로 나가려고 하면 경찰이 교문을 막아서고 최루탄을 쏘아댄다. 그걸 뚫으려면 돌이나 화염병이라도 던질 수밖에 없었다. 경찰서 기습 투쟁도 ‘적의 전방 초소가 앞에 있으니 우리가 가서 타격을 하겠다’ 그런 거였다.
수원은 안양 쪽으로 나갔다. 안양에 공단이 많아서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곳이 안양이었다. 분위기는 말도 못했지. 경찰 부대가 지나가면 근처 빌딩 사무실에서 근무하던 넥타이 부대가 창문 밖으로 화분 같은 것도 던졌다. 촛불을 들었던 마음과 비슷한 것이 아닐까 싶다. ‘세상 한번 바꿔보자.’ 그때는 막 바꿀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었다. 실제로 6.29 선언이라는 승리까지 이끌어냈다. 저쪽의 패배 선언이었지. 호헌철폐, 직선제 쟁취가 구호였는데, 그걸 얻어낸 거다.
정철훈 : 그 시대를 거쳐 왔다는 것이 마음 한편으로는 영광이라고 생각한다. 늘 지는 싸움만 해왔던 우리가 승리했던 벅찬 경험이었다.
김규호 : 요즘 촛불 시위처럼 ‘아, 나 오늘 약속 있는데. 미안하지만 못가겠다’ 이래도 되는 분위기가 아니었다. 당연히 나가야되는 것. 나는 정말 겁이 많은 사람인데도 다들 가니까 돌 들고 가투를 나섰다. 억압받았던 것이 분출되는 에너지는 지금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이동규 : 싱가포르에 있다가 지난 겨울 한국을 들러 촛불집회에 한번 참석했는데 격세지감을 느꼈다. 87년에는 의무적으로 참가하는 느낌, 조직된 싸움이라는 느낌이 컸는데 이번 촛불은 민주적인 분위기에서 평범한 시민들이 모두 자발적으로 나왔다. 우리 사회가 민주화되었고, 미래가 밝다는 느낌이 들었다. 희망적이었다.
국승용 : 내가 87년 그 자리에 있었다는 것이 큰 자부심이었다. 그것이 지금까지 영향을 미친다. 젊었을 때 어떤 경험을 했느냐가 그 사람의 삶에 중요한 영향을 끼치는 것 같다. 2016, 2017년 촛불시위를 경험한 청년들이 이 경험을 가지고 좀 더 자신감 있게 살아갔으면 좋겠다. 우리가 그랬듯이. 우리가 87년을 돌파했기 때문에 이후의 삶에 큰 용기를 얻은 것처럼, 그런 자신감을 이 세대 젊은이들이 가질 수 있는 것 아닐까.
정철훈 : 촛불세대라고 하면 바로 지금의 우리 자식 세대다. 이번 촛불시위 과정에서 당당하게 자기 의사를 표현할 수 있는 세상을 경험한 것 같다. ‘하니까 되는구나’ 하는 경험, 이것이 되게 중요한 것 같다.
김규호 : 87년에는 6월 항쟁은 승리했지만 결국 정권 교체에는 실패했다. 하지만 이번 촛불은 박근혜를 퇴진시키고 결국 정권 교체까지 성공했다. 광장에서의 성공의 경험이 우리에게 앞으로 큰 에너지로 작용할 것이고, 두고두고 역사적 본보기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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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은경 _ 대학 졸업 후 인터넷 신문 ‘민중의소리’ 기자로 일했다. 남보다 조금 더 잘하고 가장 즐겁게 하는 일이 글쓰기여서, 아무래도 이것이 평생의 업이 되지 싶다. 저마다 다양한 사연을 안고 다양한 모습으로 살아가는 인간들의 이야기에 깊은 관심이 있다. 김상진기념사업회에서는 선구자 편집주간을 맡고 있다.
Last modified: 2024-08-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