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현수 (사회복무요원, 임산공학과 08)
1.
새 정부가 출범했다. 새 출발에는 모두를 들뜨게 하는 마력이 함유된 것 같다. 정부조직의 최말단인 주민센터에도 그 설렘이 전파되었다. 직원들의 민원 응대에 묘한 미소가 번진다. 식사시간에 오가는 대화에는 다시 미래에 대한 희망이 포함되었다. 오랜만에 열린 회의에서는 기존 사업에 대한 새 안건들이 제시되었다고 한다. 다들 뭔가 제대로 해보자는 의욕에 들떴다. 민원인들도 한결 덜 부담스럽다. 묘하다.
대선 기간에, 대통령 하나 바꾼다고 세상 다 바뀌는 거 아니라는 말을 많이들 했다. 적폐세력은 광범위하게 존재하고 일거에 없어질 리가 만무하기 때문이다. 그 말은 반만 맞는 말이다. 개개인에게 제공된 ‘희망’이라는 메시지는 세상을 바꿀 충분한 동력이 될 수 있다. 보다 나은 사회를 위해 더 필요한 건 제도의 변화보다 그것을 운영하는 사람들의 마음가짐일지도 모르겠다.
2.
근무지를 옮기게 되었다. 소속은 여전히 주민센터지만, 이번엔 주민센터에서 관할하는 자치회관이다. 전임자가 4월 9일부로 소집 해제되어 공석이 생겼기 때문이다. 임무는 민원인 응대에서 시설관리로 변경되었다. 시설관리의 주 업무는 가만히 앉아 있는 것이다. 경계근무의 마이너 버전 이려나.
가만히 앉은 채로 며칠을 보내던 중 갑자기 구청 사람들이 찾아왔다. 공원녹지과 직원들이었다. 그들이 건넨 첫 마디는 “도시녹화 사업 대상지로 자치회관 옥상이 선정되었다”는 것이었다. 관리인이라고 앉혀놨으면 언질이라도 해주지. 며칠 뒤 옥상에는 자그마한 텃밭이 만들어졌고, 모종이 배달되어왔다. 관리는 부녀회에서 맡아준다고 문만 잘 열어달라고 했다.
며칠 뒤 팀장님이 자치회관을 방문했다. 그는 새로운 한 마디를 던졌다.
“야 너 농대 나왔더라. 네가 이 텃밭을 맡아서 관리하면 되겠다.”
농대 출신이라고 농사를 시키다니. 군대는 군대인 걸까. 나무를 전공한데다, 학부 때 공부도 제대로 안 했고, 공부랑 실제랑 다르지 않냐고, 우리는 연구를 하지 실제로 뭘 심고 기르는 건 아니라고 하는 등등 온갖 항변을 해 보았으나, 당연히 반영되지 않았다.
이제 사회복무일기는 텃밭농사일기로 변경될 것 같다.
3.
이제 출근하자마자 하는 일은 옥상 텃밭에 물을 주는 일이다. 퇴근 직전에도 반복하여, 텃밭에는 하루 2회 물을 공급한다. 이랑과 고랑을 내고 오와 열을 맞춰 놓으니 나름대로 밭의 모양새를 갖춘 것 같다. 혼자 뿌듯해하며 물을 양껏 준다. 고추도 열리고 꽃도 폈다. 가지에도 꽃이 폈다. 조만간 결실을 보는 걸까.
고춧잎에 진딧물이 생겼다. 딸기에 박힌 씨앗처럼 보인다. 텃밭을 만들어준 구청 공원녹지과에 연락해 진딧물 약을 달라고 요청했다. 구청에서는 그런 예산이 배정된 것이 없고, 유기농으로 키워야 하기에 약은 칠 수 없다고 대답했다. 유기농에도 약을 친다는 걸 잠시 설명해 보았으나 소용없었다. 그냥 진딧물을 물로 씻어 내렸다.
4.
이파리를 씻으며 밭을 자세히 보다가 자그마한 새싹 하나를 발견했다. 분명 내가 심은 것이 아니었다. 클로버처럼 생긴 친구와 미니 벼처럼 생긴 친구가 보였다. 미세먼지에 어떤 종자가 포함된 걸까. 자연발생설을 주장했던 선현들의 관찰 결과를 다시금 수긍해 보았다. 그러면서 이 생명을 내가 앗아도 되나 고민했다.
인간은 생명의 경중을 따진다. 인간과 비인간을 비교할 땐 인간의 생명이 더 중하다. 비인간끼리의 비교에서는 인간에게 유익하냐-유해하냐의 척도로 생명의 중함을 따진다. 인간끼리의 비교는 사회적, 문화적 맥락에 따라 경중이 달라진다. 잡초도 어엿한 생명이다. 허나 비인간이다. 그 중에서도 인간의 유익함에 해가 되는 존재로 여겨진다. 그래서 인간은 쉽게 그 생명을 앗아간다.
시선을 조금 돌려 밭 전체를 샅샅이 살펴보니 온갖 곳에 잡초가 피어 오르고 있었다. 이대로 두면 저 치들이 영양을 다 뺏어먹을 기세였다. 결국 잡초를 솎아내는 일을 자행했다.
5.
사회복무요원 복무기본교육 이수를 위해 5일간 충북 보은 소재의 사회복무연수센터에 합숙하게 되었다. 교육은 사회복무요원이 갖춰야 할 기본적인 역량을 기르는데 초점을 맞추었다. 각종 기본 교육 중에 성평등 교육이 있었다.
안타깝게도 병역의 의무를 이행하고 있는 남자아이들에게 성평등이라는 담론이 마음 가까이 다가올 리 만무했다. 강사는 나름대로 기계적 평등을 유지하기 위해 남자의 가해사례와 여자의 가해사례를 병치하여 제시하는 등, 여권신장을 뒤로 숨기고 모두 함께 받는 피해를 강조하려 했다. 그럼에도 당장 처한 복무상황이 여자라는 사회의 반쪽을 배제하는 상황에서, 강한 차별감을 느끼는 이 남자아이들의 마음에 그런 내용이 닿을 리가 만무했다.
담론이 더 발전해서, 한쪽 성별이 온전히 배제된 상황도 성차별의 연장선에 있다는 걸 풀어내는 내용이 담길 수 있으면 좋겠다. 제도의 변화를 위해서는 적을 만들기보단 연대가 중요하다는 막연한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6.
안보관 강연을 온 전남대 여수캠퍼스 김영택 교수는 20세기 최고의 기적으로 이스라엘 건국을 꼽았다. 2천년의 방랑을 끝내고 어엿한 독립국가로 거듭난 이스라엘, 4차례 주변 강국과의 전투를 승리해낸 강소국, 300여개의 핵을 보유해 누구도 건드릴 수 없는 나라를 안보의 모범으로 삼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지역경제 활성화 강연을 온 동양일보 임재업 국장은 5.16 군사혁명으로 잠시 지방자치가 멈췄지만 93년부터 다시 시작되었다는 말로 강연을 시작했다. 배고파 보지 않아서 이렇게 일자리가 많은데도 일을 안 하려 한다고 우리를 질책했다. 87년 민주화 이후 너무 자유가 많아져서 언론이 남발되어 수용자 입장에서 너무 많은 정보가 남발되고 있다고 강연을 마무리했다.
아직 우리 사회에는 넘어야 할 적폐가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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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수_ 농대 학회 ‘농학’에서 활동했으며 농대 부회장을 역임했다. 학부 졸업 후 교육학과 대학원에 진학하여 석사 과정을 마쳤다. 교육협동조합 아카데미쿱 자연반 강사이며 현재는 관악구 청림동주민센터에서 사회복무요원으로 국방의 의무를 수행 중이다.
Last modified: 2024-08-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