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승용(한국농촌경제연구원 연구위원, 농화학 87)
그리 잘하지는 못하지만, 나는 노래를 듣고 부르는 것을 좋아한다. 영화에 나오는 음악 영재의 발끝에도 미치지 못하는 수준이지만 남들보다는 노래나 음악을 잘 기억하고 쉽게 배우는 편이다. 가끔은 어려서 누군가 내 음악적 재능을 발견하고 그 길로 나를 이끌어 주었다면, 지금보다 훨씬 역동적이면서 배고픈 삶을 살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상상을 하곤 한다.
얼마 전 본 ‘노무현입니다’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장면은 영화의 마지막 장면이다. 가장 인상적이라고 생각했으니 감독이 마지막에 배치했을 것이다.
카메라가 고 노무현 대통령의 뒷모습을 따라 간다. 아침 출근길 같은데 사람들과 만나 악수하고 인사하는 것을 보니 선거 운동을 하는 것 같다. 카메라는 따라가는데 수행원도 없고 혼자서 계속 걸으면서 악수를 하고 인사를 한다. 악수를 거부하는 사람도 있는데 개의치 않고 앞으로 걸어간다. 뭐라고 노래를 흥얼거리는데 유행가 같다. 처음에는 부산 갈매기나 돌아와요 부산항에 정도의 노래라고 생각했다. 가볍게 흥얼거리다 사람을 만나면 노래를 멈추고 인사를 나누고는 또 예의 그 상체를 크게 흔드는 걸음걸이로 걸어가면서 노래를 흥얼거린다. 조금 지나자 노래 가사가 귀에 들어온다.
‘고향집 하늘 위엔 굴뚝 연기만’
어! 많이 듣던 노랜데, 뽕짝은 아닌데. 오래 지나지 않아 깨닫는다. 노래 제목은 ‘선봉에 서서’. 참 재미있는 사람이다. 선거 운동을 하면서 민중가요를 흥얼거리다니. 그것도 트로트처럼. 처음에는 가사가 잘 생각나지 않았는데 자꾸 생각하니 길지 않은 전곡이 기억났다.
‘선봉에서서 하늘은 본다 / 고향집 하늘 위엔 굴뚝 연기만 / 투사가 되어 조국의 내일 / 이 몸과 이 혼으로 싸워나가리 / 오 어머니 당신의 아들(딸) / 자랑스런 민주의 투사/ …’
87년에 이 노래와 쌍벽을 이루었던 투쟁가요로 ‘어머니’라는 노래가 있었다.
‘사람 사는 세상이 돌아와 / 너와 내가 부둥켜안을 때 / 모순 덩어리 억업과 착취 / 저 붉은 태양이 녹아버리네 / …’
집회를 시작하면서 의지를 다지거나 집회를 마치고 행진을 시작하려 할 때는 빠른 템포의 민중가요를 부르곤 했다. ‘선봉에 서서’, ‘어머니’, ‘광주 출정가’ 따위의 노래들을 즐겨 불렀다. 88년 이후로 ‘휘몰아치는 거센 바람에도’로 시작하는 ‘동지가’, ‘흩어지면 죽는다’로 시작하는 ‘단결투쟁가’ 등 여러 가지 빠른 템포의 민중가요가 보급되었다. 나의 1학년 때 집회를 장식했던 노래들은 차츰 잊혀 갔다. 그래서 ‘선봉에 서서’의 전곡을 흥얼거려본 것이 족히 20년, 아니 25년은 넘은 것 같다.
서정적이어서 더 충격이었던 민중가요들도 기억난다. 87년 아크로 광장에서 열린 김세진, 이재호 열사 추도식에서 처음 들은 노래 ‘벗이여 해방이 온다’. 그 노래가 울려 퍼질 때의 느낌은 충격이라기보다는 전율이라는 표현이 적합할 것 같다. 1학년이었던 나는 그 자리에서 그 노래를 처음 들었다. ‘그날은 오리라’로 시작해서, ‘그대 타는 불길로, 그대 노여움으로, 반역의 어두움 뒤집어 새날 새날을 여는구나’로 고조된 후 ‘가자 이제 생명을 걸고, 벗이여 해방이 온다’로 끝나는 노래를 들을 때 가슴속에서 치밀어 오르는 무엇과 등골을 쏴하게 하는 무엇을 함께 느꼈던 것 같다.
물론 당시에도 서정적인 민중가요가 적지 않았다. ‘타는 목마름으로’, ‘노동의 새벽’, ‘죽창가’, ‘그날이 오면’, ‘청산이 소리쳐 부르거든’, ‘이 산하에’. 하지만 그해 4월 말의 어느 날 아크로 광장에서 처음 들은 ‘벗이여 해방이 온다’의 충격은 지금도 그 느낌을 기억할 정도로 강렬했다.
87년 절반의 성공을 경험한 이후 88년부터 정말 다양한 민중가요가 한 달이 멀다하고 보급되었다. 빠른 곡, 웅장한 곡, 경쾌한 곡, 서정적인 곡. 일반 가요만큼은 아니었지만 정말 다양한 민중가요들이 세상에 태어났다. 그 중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노래를 찾는 사람들 1집’이 아닐까 싶다.(나는 88년으로 기억하는데 검색을 해보니 84년에 발매되었고, 87년에 재발매 되었다고 한다. 내가 그렇게 기억하는 이유는 아마 수원의 선배 자취방에서 들었기 때문인 것 같다. 당시 농대 1학년은 관악에서 보내고 2학년부터 수원에서 강의를 들었다.) 20대 초반이어서 그런지, 아니면 누구나 다 그렇게 느꼈는지는 몰라도 여성 가수가 부른 노래들이 특히 신선했다.
‘내 눈길 닿는 곳 어디나’, ‘기도’, ‘바다여 바다여’ 같은 노래들을 즐겨 흥얼거렸다. ‘나는 달려 가며 소리 질렀네, 바다여 바다여, 사랑이여’로 끝나는 ‘바다여 바다여’를 특히 좋아했다. 누군지 이름은 기억나지 않지만, 아마 그 때에도 가수 이름을 몰랐을 수도 있다. 하여튼 민중가요는 물론 대중가요에서도 거의 들어 본 적이 없는 청아한 목소리가 정말 매력적이었다.
비록 87년 대선에서 노태우를 앞세운 군부 세력이 재집권하기는 하였지만, 87년 6월 항쟁이후 노동자 대투쟁, 88년 사상 최초의 여소야대 등의 국면을 거치면서 유연하고 자유로운 사회 문화가 확산되기 시작했다. 민중가요 운동에도 이런 요소들이 작용했을 것이고 지금도 불리는 많은 명곡들이 세상에 소개되었다. ‘광야에서’, ‘솔아 푸르른 솔아’, ‘마른 잎 다시 살아나’, ‘동지를 위하여’, ‘꽃다지’ 등등.
역사적인 배경을 담은 민중가요들도 기억에 남는 것이 몇 개 있다. 87년에도 일제에 저항하는 민요나 독립군 노래들을 불렀고, 4.19 혁명과 관련된 노래들도 있었으며, 5.18 항쟁 관련된 다양한 노래들도 있었다. 해방 정국 등 독특한 역사적 배경을 가진 노래들도 몇 곡 소개되었다. 도둑맞은 나라 찾겠다고 임진강의 뱃사공이 북으로 강을 건넜는데, 해방으로 철조망이 가로막혀 남편을 기다리며 목메어 우는 아낙의 심경을 노래한 ‘임진강 뱃사공’, 제주 4.3 항쟁을 배경으로 한 ‘잠들지 않는 남도’, ‘이 목숨 다 바쳐 싸우리라 해방의 그날까지’로 끝나는 ‘만주출정가’ 등의 노래가 기억난다.
대학을 졸업하고 취직을 한 이후로는 새로 나온 민중가요를 배우거나 부를 기회가 없었다. 내가 곡과 가사를 기억하는 최신 민중가요는 ‘바위처럼’이다. 뜻하지 않게 전혀 예상하지 못한 곳에서 과거 내가 좋아했던 민중가요를 들으면 몸 속 깊은 어딘가에서 뜨거운 것이 느껴진다. 2012년 대선을 앞두고 ‘나는 꼼수다’라는 팟캐스트가 인기를 끌었다. 그런 것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몇 번 듣기는 했지만, 욕설을 내뱉는 김어준의 말투도 거슬리고 해서 그다지 호감이 가지는 않았다.
그러던 어떤 편에선가 마지막 곡으로 ‘민들레처럼’이 흘러나왔다. 박노해의 시에 곡을 붙인 그 노래는 ‘특별하지 않을지라도 / 결코 빛나지 않을 지라도 / 흔하고 너른 들풀과 어우러져 / 거침없이 피어나는 민들레 / 아아 민들레 뜨거운 가슴 / 수천 수백의 꽃씨가 되어 / 아아 해방의 봄을 부른다 / 민들레의 투혼으로’로 끝을 맺는다. 나꼼수에서 내가 좋아했던 노래를 듣는 순간 묘한 느낌이 들었다. 정말 오랜만에 한때 좋아했던 그 노래를 들어서 참으로 기뻤다. 그 후로 나꼼수의 애청자가 되었음은 두말하면 잔소리.
‘노무현입니다’에서 ‘선봉에 서서’를 거쳐 ‘민들레처럼’과 ‘나꼼수’까지 와 버렸다. 나는 요즘도 노래 듣는 것을 좋아한다. 요즘에 나오는 노래들은 예전보다 훨씬 어려워서 따라 부르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주로 가요를 많이 듣는데 팝을 싫어한다기보다는 가사가 깔끔하게 들리지 않으니 가사가 잘 들리는 가요를 좋아할 뿐이다.
딸래미들이 좋아하는 ‘트와이스’나 ‘마마무’의 노래를 흥얼거리기도 하고, ‘볼빨간 사춘기’를 따라 부르기도 한다. 지난 겨울 팬텀싱어는 이태리어 가사를 뜻도 모르고 흥얼거릴 정도로 좋아했다. 요즘 가장 즐겨 듣는 노래는 박효신의 ‘숨’이다. 고음을 워낙 편하게 불러서 듣기에는 만만해 보이지만 원키로는 도저히 숨이 차 따라 부를 수 없다. 하지만 듣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마음의 위안이 된다.
‘오늘 같은 밤 / 이대로 머물러도 될 꿈이라면 / 바랄 수 없는 걸 바라도 된다면 / 두렵지 않다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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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승용 _ 학부를 졸업하고 수년간 농산물 유통 분야에서 경험을 쌓고, 느낀 바가 있어 농경제사회학부에서 농산물 유통을 연구해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지금은 한국농촌경제연구원의 연구위원으로 농업정책에 대한 연구를 수행하고 있다. 직장이 전남 나주 혁신도시로 이전하면서 가족들과 함께 나주로 이사해 지역에 뿌리내리고자 노력하고 있다. (gouksy@daum.net)
Last modified: 2024-08-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