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ritten by 11:18 오전 110호(2017.10)

[임은경이 만난 사람]
“봉하마을에서 자연을 벗 삼아 느릿느릿 살아요”
[인터뷰] ‘봉하마을 식물 의사(草醫)’ 최은주 한의사 (농화학 84)

임은경 선구자 편집주간, 농학 95

지금과는 많이 다른 환경에서 대학을 다녀야 했던 80년대 학번들의 삶을 보고 있으면 가끔 낯선 느낌을 받는다. 지나친 엄숙함, 개인의 삶을 희생하는 것을 당연시하는 사회적 부채감. 그들의 젊은 시절엔 밝고 건강한 미래에 대한 기대 같은 것은 감히 꿈꿀 수도 없었는지도 모른다.

기독교에서 사람들에게 ‘태어나면서부터 죄인’이라는 ‘원죄’ 의식을 덮어씌우듯이, ‘사회를 위해 행동하지 않는 것은 곧 죄’라는 죄의식이 그 세대를 지배하고 있는 정서인 듯싶다. 그것은 삶을 의미 있게도 만들어주지만, 동시에 고통에 빠뜨리기도 한다.

30여년이 지난 지금, 그들은 사회의 다양한 곳에서 저마다의 삶을 살고 있다. 더 이상 질풍노도의 젊은 열정은 아니지만, 그 시절이 주었던 의미 혹은 상처를 딛고 삶의 하루하루를 나아간다. 자신의 삶을 스스로 선택한 이에게는 주변의 그 어떤 말도 무의미할 뿐이다.

경남 김해의 봉하마을에서 식물 의사로 제 3의 삶을 살고 있는 최은주 한의사도 남들이 가지 않는 자신만의 삶을 택한 사람이다. 서울대 농화학과를 졸업하고 시민단체에서 일하던 첫 번째 삶을 정리하고 한의대에 진학해 한의사가 된 두 번째 삶을 거쳐, 이제는 사람 대신 식물을 치료하는 한의사로 세 번째 삶을 살고 있다.

“2009년 노무현 대통령 서거 직후부터 2년간 주말마다 자원봉사를 하러 봉하마을에 내려왔어요. 그땐 원주에서 한의원을 운영하고 있을 때였죠. 처음 자원봉사자로 활동할 때는 꽃길 관리와 장군차 밭 잡초 제거, 화포천 마을청소 등을 했어요. 잡초는 호미와 낫으로 일일이 뽑고 베어냈죠.”

장군차가 뭐냐고 물어봤더니 노무현 전 대통령이 조성한 차밭이란다. 봉하마을 북쪽 산기슭에 꽤 너른 차밭이 있다. 장군차는 김해 특산물로, 녹차인데 잎이 좀 커서 장군차라고 불린다. 가락국의 초대왕인 수로왕의 부인 허황옥이 인도에서 가져왔다는 설화가 전해진다. 화포천은 마을 옆을 흐르는 습지 하천이다.

봉하마을 안내도 (김해시 공원관리과 홈페이지)

원주에서 봉하마을까지 600km2년간 매주 왕복

원주에서 봉하마을까지 거리는 약 300km. 왕복하면 600km다. 그 먼 길을 매주 아무렇지 않게 다니도록 만든 원동력은 무엇일까. 그는 자신의 젊은 시절 이야기를 꺼냈다.

“생전에 노무현이라는 사람을 특별히 좋아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의 서거를 둘러싼 과정을 보면서 그 사람의 삶에 나의 20대의 삶이 많이 겹쳐졌어요. 오래 묻어두었던 서러움이 울컥 올라오는 기분이었다고 할까요.”

성년이 된 후 자신의 삶을 그는 세 단계로 나누어 설명했다. 첫 번째 삶은 농대에 입학해서 80년대 많은 대학생이 그랬듯이 운동판에 뛰어들고, 시민단체에서 일하다가 그만둘 때까지 12,3년의 삶이다. 두 번째는 한의대에 진학해서 6년 동안 공부하고 이후 또다시 6년 동안 한의사로 일했던 12년의 삶.

“나의 세 번째 삶은 자연(저절로 그러한) 속에서 자연을 배우고 함께 호흡하며 살고 싶었어요. 2011년에 한의원을 정리하고 봉하마을로 이사 온 것이 세 번째 삶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겠네요.”

84년에 입학한 학교는 92년에야 졸업을 했다. 3학년이던 86년에 제적을 당했다가, 88년에 복학조치가 이루어지는 등 우여곡절을 겪었다. 복학을 하면서 87년 6월 항쟁 때 만들어진 ‘민주헌법쟁취 국민운동본부’ 구로지부 간사 일을 시작했다. 졸업 후에도 96년까지 이곳에서 상근자로 일했다. 급여가 없는 무급 상근이었다. 학교에 다니고 졸업한다는 조건으로 생활비는 부모님께 받아서 썼다.

“단체 상근을 그만둘 무렵 몸도 마음도 아팠어요. 일상생활이 어려울 정도로 정신적인 스트레스가 심했죠. 운동이라는 것이 하고 싶은 일이냐, 적성에 맞는 일이냐 같은 것은 생각할 수도 없었던 시절이죠. 그냥 사람으로서 꼭 해야 하는 의무로 생각했으니까요. 시민단체 간사라는 게 끊임없이 새로운 사람을 만나야 하는 일인데 내 성격에 맞는 일은 아니었어요.”

그는 사람을 만나기보다 ‘틀어박혀서 혼자 노는 것’을 좋아한다고 했다. 사명감만으로 버티는 것에는 한계가 있는 법. 안 맞는 일을 억지로 하다 보니 괴로웠던 것이다. 이 일을 계속하다보면 앞으로 어떻게 될 지 한없이 불안하고, 미래가 보이지 않는 캄캄한 기분이었다.

운동은 첫 번째 삶, 한의사는 두 번째 삶,

세 번째 삶은 식물의사

“지금 돌아보니 20대는 작두를 타는 것 같은 불안한 삶이었어요. 두 번째 삶은 새로 태어난 듯 전혀 다르게 살아보고 싶었지요. 두 가지 목표를 정했는데, 하나는 동양철학의 세계관을 공부하는 것이고 둘째는 생계를 해결하는 것이었어요. 20대의 삶을 지배한 서양철학에 기반한 맑시즘에 지쳐있기도 했고, 정반대는 어떨까 궁금해졌죠.”

이 두 가지 목표에 딱 맞는 것이 바로 한의대 진학이었다. 혼자서 공부를 시작해 1999년에 원주에 있는 상지대 한의학과에 입학했다. 수석 입학이어서 학교는 장학금을 받고 다녔다. 그의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시기였다. 원하는 공부만 하면 되었고, 아무도 간섭하는 사람이 없었다. 공부가 그렇게 재미있는 것인 줄 처음 알게 되었다.

“농대를 다닐 때는 공부를 거의 안 했잖아요.(웃음) 공부라는 것을 처음 하고 보니 내가 뭘 공부하는 것에 적성이 맞더라고요. 학교를 졸업하고 원주에서 선배 한의원을 물려받아 진료를 시작했어요. 고향인 춘천하고 가깝기도 해서 그냥 원주에 자리를 잡았죠.”

그렇게 한의사로 보낸 시간이 6년. 돈도 많이 벌었지만, 끊임없이 환자를 대하는 일에 지쳐갈 무렵 봉하마을과 인연을 맺게 되었다. 2009년부터 매주 봉하마을을 오가며 자원봉사를 하면서 그의 눈에 들어온 것은 식물의 생육과정이었다.

“일 년 내내 그곳에서 일을 하다 보니, 봄에 싹을 틔워서 가을에 열매 맺기까지 생육의 과정을 지켜보게 되잖아요. 작물에 병충해가 생기는 것을 보고 친환경방제에 관한 내용을 찾아보게 되었죠. 내가 가진 한의학 지식을 여기에 적용해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고. 그러면서 유기농업에 대한 관심이 커졌어요.”

당시 봉하마을은 노무현 전 대통령이 거주했을 때부터 시작한 실험적인 유기농업이 한창 진행 중이었다. 그녀의 눈길을 끈 것은 주민들이 한약재로 만들어 사용하는 천연 농약이었다. 가만히 보니 효능을 서로 떨어뜨리는 약재를 섞어서 쓰거나, 약재를 원래 기능과 다르게 잘못 사용하고 있는 경우도 있었다.

“한약재에 대해 잘 모르시다보니 그냥 ‘누가 써보니 좋다고 하더라’는 귀동냥으로 쓰는 경우가 많더라고요. 원래 약성과 전혀 무관한 곳에 사용하는 분들도 있었고요. 내가 농사는 잘 모르지만, 한의사의 지식을 가지고 이분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죠.”

한의사 지식 토대로 마을 유기농업에 큰 도움 줘

직접 제조한 천연농약 살포를 위해 통에 담아 준비하는 최은주 한의사
차를 만들기 위해 채취한 금계국

그녀 역시 자신이 배운 지식을 토대로 실험을 해가며 터득하는 과정이었다. 그런데 작물에 적용을 해보니 놀랍게도 효과가 있었다. 봉하마을로 이주한 첫 해에는 물바구미 천연방제약을 발명해 큰 성과를 거두었다. 어린 모의 잎과 뿌리를 갉아먹는 물바구미는 농민들의 큰 골칫거리였다.

그녀는 살충효과가 있는 사상자와 양파껍질 끓인 물, 열성이 강한 황토 유황 등을 섞어 천연 농약을 개발했다. 이를 논에 뿌렸더니 물바구미가 크게 줄어들었다. 농작물에 칼슘이 부족하다 싶으면 그에 맞는 처방을 하고, 병충해 방제에 효과적인 결명자를 과수나무 아래에 심어서 진딧물을 잡기도 했다.

“내가 아는 지식을 식물에 적용하고 그 결과를 눈으로 확인하게 되니까 그 과정이 너무 즐겁더군요. 그러면서 자연히 전업하기로 결심하게 되었어요. 사람을 고치던 의사에서 식물을 고치는 의사가 된 거죠.”

대학 다닐 때는 정작 관심 갖지 않았던 농업을 시간이 지나서 다시 하게 될 줄은 그 자신도 몰랐을 것이다. 그는 가끔 자신의 삶을 정(농화학), 반(한의학), 합(유기농업)의 인생이라고 얘기하곤 한다. 2011년 봉하마을에 처음 이사 왔을 무렵에는 몇몇 매스컴에서 인터뷰도 왔다. 한의사가 와서 식물 의사로 활동한다는 사실이 화젯거리가 되었던 것이다.

“가장 보람 있을 때는 제가 개발한 약재가 병충해 방제에 효과를 보았을 때죠. 사람을 대할 때보다 식물을 대할 때 더 평화롭고 고요한 행복감을 느껴요. 일하는 것도 보통 혼자 하고, 대부분의 시간을 혼자 보내지만 외롭다는 생각은 들지 않습니다. 해 뜨고 해 지는 자연의 흐름에 따라, 사계절 날씨에 맞게 자연의 일부가 되어 느릿느릿 살아가는 맛이 참 좋아요.”

하루 일과는 보통 아침 6-7시에 두 시간, 오후 4-5시에 두 시간 정도 작물을 돌보는 일을 중심으로 돌아간다. 현재는 개인 사업자등록증까지 낸 프리랜서이기 때문에 누가 시키는 일도, 매일 따로 정해진 일도 없다. 애들(작물들)이 잘 크고 있나 궁금하면 보러 나가고, 그때그때 필요한 일, 계절의 흐름에 따라 해줘야 하는 일들을 할 뿐이다.

“천연살충제 개발을 위해 키우는 멀구슬 밭 300평과 동네 길가의 멀구슬 나무 200주, 꽃길 200미터 정도를 직접 관리하고 있어요. 밭에 난 잡초를 베고, 봄에는 파종해서 모종을 키우고, 모종을 옮겨 심는 일을 하죠. 멀구슬 나무가 다 자라면 가지를 잘라서 분쇄하고 건조해서 병충해 방제약을 만드는 데 써요.”

사람을 고치는 의사에서 식물을 고치는 의사로

금계국 꽃길은 5월에 꽃이 피면 온 동네가 꽃밭으로 변한다. 꽃은 따서 차로 만든다. 금계국차는 어혈을 풀어주고 해열 작용 및 항암 효과가 있다. 아기 주먹만 한 병에 담아 5천원에 판다. 보기엔 양이 적어보이지만, 꽃 한 송이만 넣으면 차 한 잔이 진하게 우러나기 때문에 생각보다 오래 마실 수 있는 양이다.

그 외 노무현 재단에서 운영하는 생태 공원 관리 등 몇 가지 자원봉사도 한다. 봉하마을로 자원봉사 하러 오는 사람들을 인솔해서 일을 할 때도 있다. 그가 하는 일들은 다음카페 ‘초의초당(草醫草堂)’에 가면 자세히 볼 수 있다.

“우리집에는 개 두 마리, 고양이 두 마리, 닭 열다섯 마리가 함께 살아요. 얘들 밥 주고, 주1회 서예와 논어 배우러 다니고, 그 외는 집에서 책을 읽거나 인터넷을 하거나 서예 연습 등을 하며 하루를 보내요. 물론 상황에 따라 가끔은 종일 일할 때도 있지만. 되도록 일 자체를 많이 벌이지 않아요. 사실은 그냥 놀고먹고 지내고 싶거든요.(웃음)”

서울의 직장인들이 보면 깜짝 놀랄만한 생활이다. 대출금은 어떻게 하나? 집은? 차는? 매달 내야하는 각종 보험금은? 그도 아니라면 ‘커리어’는? 그의 삶을 이해하고 못하고는 내려놓고 그렇지 못하고의 차이일 것이다. 욕심을 내려놓는다면 삶은 단순해진다. 가진 돈은 줄어들겠지만 대신 시간이 늘어난다. 그리고 그 시간이야말로 삶의 본질이다.

“봉하마을에서 내가 제일 좋아하는 시간은 일하다가 해질녘에 꽃길에 있는 정자에서 캔맥주를 한잔 할 때에요. 해본 사람은 알겠지만 몸으로 일하고 나면 알코올이 좀 필요하잖아요.(웃음)”

그는 올해 아담한 컨테이너 하우스 한 채를 마련해서 이사했다. 집 이름은 다음카페와 같은 ‘초의초당(草醫草堂)’이다. “전화하면 배달해주는 집”이라고 그는 농담을 던졌다. 일할 때 필요한 자재 등을 보관하는 창고는 별도로 마련했다.

“개들은 밖에서, 고양이들은 집 안팎을 들락거리면서 살아요. 현관문 밑에 고양이문을 따로 만들었거든요. 닭 열다섯 마리는 이장님 집과 함께 키우는 것인데, 달걀이 하루에 6~7개 정도 나와요. 두 집이 나눠먹고, 주변에 나눠주기도 하고, 가끔은 춘천에 계시는 어머니한테 부치기도 하죠.”

요즘처럼 계란에 대한 신뢰도가 바닥일 때 아는 사람들한테 집에서 낳은 달걀이라고 주면 아주 좋아한단다. 그에 대한 마을 사람들의 평은 ‘돈도 안 되는 일만 열심히 하는 안타까운 주민’이다. 마을의 부녀회원이고, 마을회의 등 행사에 참석하고, 가끔 마을여행도 함께 간다.

해 뜨고 해 지는 흐름에 따라 느적느적,

지금이 가장 행복하다

봉하마을 단감밭

“요즘엔 봉하 재단의 단감 농사를 돕고 있어요. 노무현 전 대통령이 젊은 시절 고시 공부하던 자리인 마옥당 터에 있는 단감 밭 6천7백 평을 봉하 재단에서 매입한 거죠. 2016년부터 무농약 단감 농사를 짓기 시작했어요.”

최 한의사는 단감 밭의 병충해 방제 지도와 약재 제공을 담당하고 있다. 봉하 재단과는 년 단위로 계약을 했다. 단감은 11월 초부터 판매할 예정이다. 5kg 2만원, 10kg 4만원택배비 4천원은 별도. 그녀는 단감 좋아하시는 분들이 봉하마을 무농약 단감을 많이 사주셨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연락처 최은주 010-4321-6948)

“단감 밭 관리를 맡으면서 개인 사업자등록증을 냈어요. 영농조합법인하고 계약을 한 것인데, 거기서 영수증 처리를 해야 한다고 해서. 요샛말로 프리랜서인데, 해보니까 지금 상태가 제일 좋은 것 같아요. 내가 하고 싶은 만큼만 일하고 자유롭게 지내는 것.”

단감 밭 해충 방제는 년 단위 계약이고, 그 외에 소소한 천연 농약 판매 수입이 있다. 요즘 사람들 기준으로 보면 얼마 안 되는 수입이지만 살아가는 데 부족함은 없다. 돈벌이나 재산 모으기에는 거의 관심이 없다. 정작 한의사를 할 때는 돈 버느라 바빠서 돈 쓸 여유가 없었다고 한다.

“제가 번 돈은 다른 사람들이 썼죠. 주변에 돈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빌려주고, 기부도 하고. 내가 달리 쓸 데가 있는 것도 아니었으니까. 신기하게도 봉하마을 생활 초기에 돈이 떨어졌을 때, 예전에 돈을 빌려줬던 사람들이 하나 둘 나타나서 빌려갔던 것을 갚더군요.”

쌓아둔 것이 없으니 자연히 비어있는 삶을 살게 된다. 봉하마을로 옮겨왔을 때 그의 나이가 마흔 일곱. 올해로 7년 차가 되어 가는 그의 세 번째 삶은 이제 자리를 잡아가는 듯하다. 그는 이곳에서 ‘나른하고 편안한’ 여생을 보낼 계획이다.

그가 관리하는 다음카페 ‘초의초당(草醫草堂)’에서 사용하는 그의 닉네임은 ‘건너가자’이다. 그는 예전의 한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 바 있다.

“건너가자라는 것은 불교에서 ‘아제아제 바라아제(건너가자 건너가자 피안으로 건너가자)’에 나오는 말입니다. 저는 삶의 매 순간이 죽음으로 건너가는 과정이라고 생각해요. 오늘이 인생의 마지막 날이라 생각하고 너무 가볍지도 무겁지도 않게 살아가는 것이 목표이고 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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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은경 _ 대학 졸업 후 인터넷 신문 ‘민중의소리’ 기자로 일했다. 남보다 조금 더 잘하고 가장 즐겁게 하는 일이 글쓰기여서, 아무래도 이것이 평생의 업이 되지 싶다. 저마다 다양한 사연을 안고 다양한 모습으로 살아가는 인간들의 이야기에 깊은 관심이 있다. 김상진기념사업회에서는 선구자 편집주간을 맡고 있다.

Last modified: 2024-08-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