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ritten by 10:05 오전 110호(2017.10)

[마을을 꿈꾸다]
나주에 의료사회적생활협동조합을 만들 수 있을까?

국승용(한국농촌경제연구원 연구위원, 농화학 87)

요즘은 새로운 사업을 하려면 제일 먼저 시장조사를 해야 한다. 시장에서 수요가 없는 재화나 용역은 제값을 받지 못하기 때문이다. 자본주의에 의한 산업화가 우리 사회를 지배하기 전에는 시장의 개념도 지금과 같지 않았다.

자기가 필요한 물건은 생산했고, 남는 것은 시장에 나가 필요한 물건으로 바꾸었다. 물론 그 당시에도 팔기 위해 만드는 물건이 적지 않았지만, 장터에 나가는 사람 대부분은 자기가 만든 물건을 장에서 팔아 필요한 물건을 사람들이었다.

싼값에 대량 생산할 수 있는 산업사회에 들어서면서 자본은 대규모 시장을 필요로 했다. 초기 자본주의 사회에서 농촌 사람들이 모여들어 대도시가 형성되면 그곳에는 어김없이 아케이드(요즘으로 치면 백화점이나 대형마트)가 생겼다. 공장에서 생산되는 물건은 시장에서 팔리기 위한 것이었고, 시장에서 물건을 사려면 내 노동력을 팔든지 팔릴 수 있는 물건을 만들어야 했다.

물자가 부족한 시절에는 만드는 대로 팔렸으니 시장조사 따위는 할 필요가 없었다. 생산력이 발달해 얼마든지 물건을 만들어 낼 수 있게 되면서 팔리지 않는 물건이 늘었고, 수요를 고려해 물건을 만드는 시대가 되었다.

이런 얘기는 경제학 원론이나 경영학 원론의 앞부분에 나오는 상식 수준의 이야기다. 그런데 이건 대도시의 상식이지 어느 곳에서나 통용되는 상식은 아니다. 나주시 인구가 11만 명쯤 된다. 2014년엔 9만 명이 채 못 되었는데 혁신도시 인구가 증가하면서 그렇게 되었다. 이 쯤 되면 전국 시군 중 인구수 60위 근처이니 그다지 특별한 지역은 아니다. 나주보다 인구가 적은 시군이 100개는 넘는데 이들의 여건은 나주보다 열악할 것이다.

그런데 나주에 정형외과가 없다. 아니 있긴 한데 그게 정형외관지 잘 모르겠다. 작년 여름 아내 어깨가 너무 아파 나주 원(原)도심에 하나 있는 정형외과를 찾았다. 어깨가 아파서 왔다니 아무런 검사도 하지 않고 약을 처방해 주겠다는 것이다. 왜 아픈지 어떻게 해야 낫는지 알고 싶어 병원을 찾았는데 궁금한 것은 알려주지도 않고 그저 아프지 않게 약을 주겠단다.

기겁을 한 아내는 그 길로 30분 넘게 차를 달려 광주의 정형외과를 찾았다. 나주로 이사한 우리 회사 가족 단톡방이 있는데, 작년까지만 해도 밤늦은 톡의 대부분은 아이가 열이 난다며 어느 병원으로 가면 되냐는 것이었다. 유경험자들이 해주는 대답은 아이가 열날 때는 일단은 해열제나 항생제 처방이 보통이니 가장 가까운 병원에 가라며 위치를 알려주는데 대개 광주의 남부에 있는 병원들이다.

검사도 않고 약 주겠다는 말에 기겁해 광주로 달려가

아토피가 있는 나는 피부 가려움증이 심해질 때가 있는데 나주 혁신도시에는 피부과 병원이 없다. 피부클리닉이 있긴 한데 알 수 없는 영어 이름의 미용 시술들을 전문으로 하는 곳이라 나는 그냥 내과에 가서 처방을 받는다. 처방전을 조회해 보면 스테로이드약이어서 바르는 약만 쓰거나 스테로이드 알약은 빼고 먹는다. 찜찜하긴 해도 광주까지 나가는 것보다는 동네에서 해결하는 것이 좋다.

대도시에는 장비가 빵빵한 정형외과도 있고 약 처방을 주로 해주는 정형외과도 있다. 스테로이드제를 처방하는 피부과도 있고 어지간해서는 그러지 않는 피부과도 있다. 사람도 많고 병원도 많으니 조금 발품을 팔면 원하는 병원을 찾을 수도 있다. 병원도 주변에 여러 부류의 사람이 살고 있으니 그럭저럭 먹고 살 수 있다.

그런데 같은 시대 같은 나라에서, 대도시에서는 잘 작동하는 시장 시스템이 소도시나 농촌에서는 전혀 작동하지 않는다. 지역에 의료에 대한 수요도 있고 의료를 공급하려는 의사도 있다. 그런데 믿지 못하거나, 정보가 부족하여 대도시 병원을 향한다.

병원을 열려는 사람은 지역 주민들이 대도시 큰 병원을 찾을 것 같아 병원 열기를 주저하거나 마음껏 투자하지 못한다. 시간이 지나면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대도시 병원을 찾고, 소도시 병원의 수는 점점 줄어든다.

수요도 있고 공급도 가능한데, 수요 공급이 잘 맞아 떨어지지 않을 때 적절한 방법이 바로 협동조합이다. 따지고 보면 협동조합은 시장이 잘 기능하지 못하는 여건에서 주로 발전했다. 우리나라는 그 배경이 서구와는 많이 다르긴 하지만, 원래 농업협동조합은 힘이 강한 상인들과 맞서기 위해 발전했다. 고리대금업자와 맞서기 위해 신용협동조합이 발전했다.

우리나라의 경우 소비자들은 친환경농산물을 원하는데 시장에서 이를 원활하게 공급하지 못했기 때문에 생활협동조합이 발전했다. 안성이나 안산의 의료생협도 비슷한 여건에서 발전했을 것이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대도시보다는 소도시나 농촌에서 협동조합을 통해서 해결해야 할 일들이 많다.

언젠가 우리 회사 관리직 직원이 지나가듯 말을 했다. 나주로 이전하고는 임시직이나 일용직 고용이 더 어려워졌다고 한다. 서울에서는 일당이 8만원 정도였는데 나주에서는 일당 10만원 밑으로는 사람을 구할 수 없단다. 언뜻 들으면 노동력을 가진 사람에게 서울보다 나주가 좋아 보인다. 그런데 문제는 나주는 서울처럼 일할 기회가 많지 않다는 것이다. 가끔 일이 있으니 일당이 높아야 생계가 유지될 밖에.

협동조합, 대도시보다 소도시와 농촌에 필요

노동력을 가지고 있는 사람을 모아서 노동력을 필요로 하는 사람과 연결해 주면 되는 일이다. 이것이 자발적으로 이루어지는 곳이 수수료를 내는 인력거래소이고, 규모와 체계를 갖춰 이루어지는 방식이 파견근로이다. 지역 노동자 협동조합을 만들고 일자리를 이어주면 서로에게 도움이 될 것 같은데, 시도했다거나 성공했다는 사례를 들어보지 못했다.

꽤 오래전에 읽은 글이어서 출처가 정확하지 않은데, 아마 유럽의 어느 나라에서 했던 연구(실험)였을 것이다. 정부에서 어떤 방식의 사회적 지원이 효과적인지 검증하기 위해서 다양한 특성의 집단에게 예산을 지원해서 사회적 활동을 하도록 했다고 한다. 여러 집단 중 활동성과가 우수했던 것은 교육수준이 높은 중산층 집단이었다.

지역 사회에 의미 있는 활동을 하기 위해서는 다양한 의견이 제시되어야 하고, 집단에서 리더십을 세우고 의견을 조율하여 행동으로 옮겨야 한다. 저소득층이나 저학력층 집단에서는 리더십을 세우고 행동으로 옮기는 과정이 원활하지 못했다.

소득이 낮은 집단은 중산층 집단에 비해 지역 사회를 위한 활동에 쏟을 수 있는 여력이 부족했을 수도 있다. 협동조합이라는 조직 형태를 굳이 띠지 않더라도 협동이 더 많이 필요한 농촌 지역에서 오히려 협동이 잘 이루어지지 않는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은 아닐까?

80년대 나주에서 시작된 농민약국 운동은 상당한 사회적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지금보다 의료보험 혜택을 받는 사람도 적었고, 직장 의료보험뿐이어서 농촌 지역은 가입자가 거의 없었다. 게다가 의료보험의 보장 범위도 지금과 비교할 수 없이 좁았다.

80년대 나주 농민회는 전국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정도의 조직력을 자랑하는 곳이었다. 나주농민회를 주축으로 한 농민들의 농촌 의료 확대 요구와 상업화된 의료 체계를 극복하고 민중의 건강권을 지키자는 나주 지역 의료인의 요구가 만나 1990년 4월 나주에 농민약국이 설립되었다. 마을 순회 진료도 하고 농약 중독 치료 등 농민의 건강을 지키기 위한 다양한 활동을 전개했다.

공권력의 탄압도 받았지만 농민들과 의료인의 힘으로 이를 극복해 가며 면 단위에도 농민약국을 개설했다. 영광군까지 순회 진료를 했고 인근 해남과 화순의 농민약국 개설에도 영향을 주었다. 이 시기에 나주지역에 농민의원도 여럿 문을 열었다고 하는데 그에 대한 기록은 찾을 수가 없다.

확산되던 농민약국 운동이 위축되는 변곡점이 2000년 실시된 의약분업이었다. 진료와 처방은 의사가, 약의 조제는 약사가 하도록 하면서 약사들이 할 수 있는 합법적 의료 활동의 범위가 축소되었다. 그동안 농민약국에서 하던 진료와 처방을 합법적으로 할 수 없는 상황에 봉착했다. 적지 않은 아픔을 겪으면서 나주 동강면과 공산면의 농민약국은 폐업했고, 화순 능주면의 농민약국은 화순읍으로 이전했다.

나주농민회와 의료인 손잡은 농민약국에서 힌트를 얻다

농민약국 운동 내부에서 어떤 고충이 있었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지금 나주에는 영산포에 농민약국 한 곳과 농민의원에서 이름을 주민의원으로 바꾼 의원 한 곳이 운영되고 있다. 1990년 16만 명이던 나주인구는 2010년에 반토막이 났다. 여러 가지 사회적 여건의 변화도 있었지만 나주의 위축과 농민약국, 농민의원 운동의 쇠락도 그 궤를 같이 했을 것이다.

경제 분석을 직업으로 하고 있어서 보통 사람들보다는 시장분석을 잘 하는 편이다. 이것저것 따져 보다 나주에서 먼저 추진하고 싶은 일로 의료생협을 생각하게 되었다. 우리 가족에게도 의료생협은 필요하고 지역 사회에도 필요할 것이라 생각했다.

대학 시절 가지고 있었던 나주 농민회의 강한 조직력에 대한 이미지, 나주에서 시작된 농민약국 운동에 대한 피상적인 지식. 이전 기관의 직원 가족들은 믿을 수 있는 의료 서비스를 원할 것이라는 느낌. 혁신도시에 새로 들어선 병원들도 혁신도시 병원에 위기의식을 느끼는 원도심의 병원들도 고객 확보를 위해 여러 가지 고심을 할 것이라는 생각. 이런 것들을 잘 엮으면 의료생협을 만드는 일이 그리 오래 걸릴 것 같지 않았다.

그런데 막상 사람들을 만나 보니 실상은 생각과 너무 달랐다. 나주의 농민약국은 잘 운영되고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지역 운동에 관심 있는 젊은 약사들이 나주로 오지 않는다는 이야기도 함께 들었다. 농민회 운동을 하는 사람이나 지역에서 생협운동을 하는 사람들을 만날 때마나 의료생협에 대한 이야기를 해봤지만 공감을 이끌어 내지는 못했다.

차가 있는 사람은 광주 병원에서 진료 받는 것이 그리 힘든 일이 아니다. 매일 가는 것도 아니고 어쩌다 한 번 가는데 차 타고 10분 가나 광주까지 30분 가나 큰 차이는 없다. 나주 혁신도시 인구가 빠르게 늘면서 적어도 혁신도시 내에 개업한 병원들을 찾는 진료 환자가 크게 늘었고, 평판 좋은 병원도 차츰 늘어나고 있다.

그러던 차에 홍양현(농경제 84) 형을 만나 이야기를 나누다 의료생협 이야기를 꺼내게 되었다. 나주가 고향인 양현 형은 서울에서 활동하다 몇 년 전 광주에서 생협 등 시민사회 운동을 잠깐 하고 고향인 나주에서 이러저러한 모색을 하고 있었다.

나주학교를 운영하면서 시민 강좌를 열고, 나주 슬로푸드협회도 운영하고, 나주 문화재 보전 운동, 나주 원도심 주말 장터 등 여러 가지 일을 하고 있는데 혼자서 여러 일을 벌이다 보니 손에 잡히는 성과를 거두기 어려운 처지였다. 지난 6월 어느 날이었을 것이다. 양현 형과 차를 마시다가 의료생협 이야기를 꺼내니 형이 반색을 한다.

뜻을 세우니 좋은 사람들이 모여

내가 몇 년 나주에서 살아보니 나주 사람이 일을 벌이지 않고서는 되는 일이 없더라. 형이 나서 주면 내가 힘껏 도울 테니 한번 해보자 하니, 그래 한번 해보자 한다. 그날 바로 안산의 경창수 형에게 연락을 해서 도움을 요청했다. 광주 지역에서 의료사회적협동조합(이하 의료사협) 결성을 준비하고 있는 분들과 연락이 닿았다.

7월 14일 광주 의료사협 준비모임에 양현 형과 참석했는데 거기서 또 소중한 인연을 만났다. 나주 영산포에서 노인요양 협동조합을 운영하고 있는 사람인데 나주에 의료사협을 결성하고 싶어 초창기부터 광주지역 준비 모임에 참여했다고 한다. 며칠 동안 양현 형이 지역사회 네트워크를 동원해서 참여할 사람들이 모으기 시작했다.

그 과정에서 농민약국 뿐만 아니라 농민의원 운동도 있었고, 그 중 한분이 이름을 주민의원으로 바꾸어 영산포에서 의원을 운영 중이라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안성 의료생협에서 일을 하다가 나주 혁신도시에 개업한 치과의사가 있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경창수 형에게 도움을 청하기로 했다. 어느 정도 준비할 사람이 마련되었으니 안산 의료생협의 경험에 대해 설명해 주고 나주 지역의 움직임에 힘을 실어 달라고. 7월 24일 경창수 형이 나주에 오셔서 의료사협에 대해 강의해 주셨다.

나, 양현 형, 노인요양 협동조합 C 대표, 주민의원 원장, 안산생협 출신 치과의사가 모두 모였다. 광주에서 의료사협을 준비하시는 분들도 모였다. 분위기는 좋았다. 첫 출발이지만 노력하면 조금씩 나아갈 수 있을 것 같았다. 우리는 즐겁게 맥주를 마시고 헤어졌다.

그리고 세 달이 다 되어가는 지금, 별다른 진전이 없다. 양현 형은 벌여 놓은 그 많은 일을 추스르기에 여념이 없다. 나도 회사일이 바쁘다는 핑계로 손을 놓고 있다. 딸내미 데리고 생협 출신 치과의사 병원에 한번 다녀온 것이 전부다.

노인요양 협동조합 C대표는 가끔 전화를 걸어 공부모임이라도 해야 하는 것 아니냐고 하는데. 처음엔 근거 없는 꿈을 꾸었고, 체념하고 있을 무렵 좋은 인연을 만났다. 뭔가 이루어질 것 같은 분위기도 있었는데 막상 손에 잡히는 진전이 있었던 것도 아니다.

그래도 이런 식의 만남을 계속해 나가면 5년 안에는 뭔가 진전이 있을 것 같다는 막연한 기대도 생긴다. 조만간 양현이 형에게 연락을 해야겠다. 처음 만난 3명이든, 의사 2명을 보태 5명이든, 공부모임이든 친목모임이든 일단 한번 만나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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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승용 _ 학부를 졸업하고 수년간 농산물 유통 분야에서 경험을 쌓고, 느낀 바가 있어 농경제사회학부에서 농산물 유통을 연구해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지금은 한국농촌경제연구원의 연구위원으로 농업정책에 대한 연구를 수행하고 있다. 직장이 전남 나주 혁신도시로 이전하면서 가족들과 함께 나주로 이사해 지역에 뿌리내리고자 노력하고 있다. (gouksy@daum.net)

Last modified: 2024-08-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