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상돈 (서강대 사회과학연구소 선임연구원, 농생물학과 82)
2016년 10월 24일 밤 8시. 한국 사회를 대 격변으로 몰아간 충격적인 소식이 전해졌다. 이날 JTBC 뉴스는 훗날 박근혜 정부 국정농단 사건에 분노한 수천만의 시민들을 광장으로 불러낸 ‘최순실의 태블릿 PC’를 최초로 입수해, ‘비선실세 최순실’의 막후정치를 상세히 보도했다. 4년차에 접어든 박근혜 정부가 사실은 최측근 최순실의 ‘결재’를 받아 운영돼 온 꼭두각시에 불과했다는 것이었다. 인수위 시절부터 박근혜 당선자의 동정과 면담 내용을 담은 문서가 최순실에게 전달되었고, 대통령의 외국순방 연설문이 사전 유출돼 수정되는 등, 최순실이 박근혜 위에 앉아 사실상 ‘수렴청정’을 해 온 정황이 상세히 드러났다.
최순실 국정농단의 전모는 이후 미르재단, K스포츠 재단 사건으로 이어지면서 ‘최순실 게이트’로 몸집을 키워, 한국사회의에 빅뱅을 몰고 왔다. 연인원 천만 명이 넘는 시민이 광장에 나와 촛불을 들었고, 국회에서 대통령 탄핵안이 통과되었으며, 헌정사상 최초로 법절차에 따른 권력이양을 하는 등, 온 국민이 4.19혁명 이후 또 한 번의 ‘혁명정부’를 탄생시키는 역사적 경험을 하도록 했다. 특히 역사상 유례가 없는 혁명적 상황에서도 헌법에 정해진 민주적 절차에 따라 권력을 교체함으로써, 한국 민주주의는 성장을 넘어 성숙해지는 계기를 맞고 있다.
이런 국면에서 만약 JTBC 뉴스보도가 없었다면? 최순실의 태블릿 PC를 입수하지 못했다면? 입수했더라도 보도하지 못했다면? 아마도 우리는 여전히 박근혜 정부와 그 정부를 승계한 자유한국당 정부 치하에서 살고 있을지도 모른다. 다른 모든 언론이 권력에 의해 장악된 상태에서, 재벌기업이 세운 한 종합편성채널방송이 정치권력의 감시와 견제를 벗어나 이런 과정을 주도했다는 사실은 인간과 정치사회에 내재하는 고도의 아이러니가 표출된 결과라고 할 만하다.
재벌언론사의 사주가 상업적인 목적에서 시작한 일이긴 하겠지만, 올곧게 살아온 한 언론인에게 방송국 운영의 전권을 맡겼고, 권력을 붕괴시킬만한 대형 게이트로 비화될 사건 보도에 간섭하지 않았고, 심지어 재벌언론사와 직간접적으로 연결된 재계 1위 기업의 비위사실에 대한 보도에도 개입하지 않았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확실하게 보장된 언론자유가 때론 ‘장사도 된다’는 사실을 보여줬고, 한 인간이 어디까지 해낼 수 있는 지도 알려줬다. <선구자>에 이런 말을 해도 될지 모르지만, 재벌기업도 선하거나 악하거나 어느 한편으로 몰아갈 수 없다는 사실도 일깨워줬다.
인간사회는 그만큼 다양하고 다이내믹하기에 절망의 상황에서도 희망의 싹이 움트고, 희망이 열광의 단계를 넘어 일상으로 돌아가면, 또 다른 절망의 세균들이 번식하기 시작한다. 역사의 반복은 인간이 만드는 것이고, 그 와중에도 역사는 전진한다는 것이 인간의 믿음이기다. 그 역사를 전진하도록 바퀴를 돌리는 것도 인간이고, 그 역사의 수레바퀴를 거꾸로 되돌리는 것도 인간이다. 그래서 우리는 인간을, 역사 앞에서 바퀴를 전진시키는 인간과 거꾸로 되돌리는 인간, 앞으로 가든 뒤로 가든 그 수레 위에 올라탄 인간, 세 종류로 분류할 수 있을 것이다.
역사의 전진은 자유와 평등, 정의, 공정, 평화, 민주주의, 이런 가치를 위해 투쟁해 온 인간과 삶이 일으킨 변화다. 전태일, 김상진 열사가 그러했고, 민주화 투쟁과정에서 산화한 박종철, 이한열 열사, 그리고 ‘촛불시민’은 그 전진의 수레바퀴를 돌렸고 큰 변화를 일으켰다. 지난해 우리는 이름 없는 시민의 이름으로 촛불을 들었고 전진하는 역사의 수레에 올라탔다. 이제 촛불은 꺼졌고, 우리는 다시 평범한 혹은 힘겨운 일상의 ‘고단함’으로 돌아갔다.
일상에서 다른 사람보다 먼저 깨어나고 일어나고 행동하며 산다는 것, 소위 선구자로 산다는 것은 시간이 지나고 나면 대단해 보인다. 그러나 그 속에서 허우적댈 때는 위태롭고, 불안하고, 갈등하고, 고민하는, 고난의 인생을 사는 것이다. 나이가 들수록 불의에 항거하고 새로운 일에 도전하는 것은 힘들어진다. 더구나 역사의 선구자로 산다는 것은 점점 더 불가능한 일로 다가온다. 대부분은 그동안 살아온 삶으로 앞으로 살아갈 날을 밀고 살아가지만, 살아온 삶이 허접하거나 부실할 때, 그렇다고 느낄 때, 늦었다고 생각할 때가 가장 빠른 때라는 말에 용기를 얻어, 허접과 부실을 채워줄 수행에 나서기도 한다. 새로운 삶에 도전하기도 한다.
모든 ‘선구자’는 스스로 꽉 차서 더 이상 채울 것이 없는 자가 타인과 역사를 주도적으로 끌고 가는 자가 아니라, 비우고 비워도 계속 비워야 할 것이 있는 자가 그 비운 공간을 이웃과 공동체의 웃음과 행복으로 가득 채우고자 하는 열망에 가득 찬 자라고 정의하고 싶다. 자유도 정의도 평화도, 역사의 전진도, 따지고 보면 함께 짧은 이 생애를 어깨 걸고 살아가자는, 공존의 생애를 다짐하자는 것이 아닌가 싶다.
언론의 자유가 질식된 박근혜 정부에서, 오직 ‘언론인’으로서의 삶에 충실했던 손석희 기자와, JTBC, 그리고 또 다른 언론인의 길을 가는 기자들, 그들의 보도를 지켜보며 분노하며 촛불을 들었던 천칠백만 ‘선구자’들께 ‘그 삶을 잊지 않겠습니다’는 헌사로, 무술년 새해, 인생의 모든 선구자들께 경의를 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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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상돈_ 고려대 정치외교학과 석‧박사 졸업. 일요신문기자, 고려대 연구교수, 국제 엠네스티 한국지부 사무국장 역임. 오는 6월 지방선거에서 진주 시장에 출사표를 냈다.
Last modified: 2024-08-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