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ritten by 8:43 오전 111호(2018.01)

[임은경이 만난 사람]
“6월 지방선거, 촛불혁명 정신 계승할 중요한 시험대”
[인터뷰] 이광희 김해시 의원 (원예 76)

임은경 선구자 편집주간, 농학 95

이광희 김해시 의원은 1976년에 농대에 입학해 학생운동에 가담했다가 제적을 당했다. 이후 고향으로 내려가 농사를 짓고 시민단체 활동을 했다. 여기까지는 7,80년대 농대생들이 흔히 겪었을 법한 스토리다. 하지만 이후 그는 고 노무현 전 대통령 추천으로 정계에 입문하고, 두 번의 국회의원 도전과 한 차례 김해시장 도전, 경상남도 교육위원으로 선출되어 활동한 후 네 차례의 교육감 선거 캠프에 참여해 선거를 승리로 이끄는 등 평범하지 않은 삶을 살아왔다.

김상곤 교육감과 함께 경기도 교육청에 입성해 대외협력관으로 일하며 민주시민교육 운동에도 참여하던 그는 이제 두 번의 도전 끝에 김해시 의원에 당선되어 고향 김해에서 일하고 있다. 지난 2016년 6월 김상진 가족한마당 행사에 참가해, 김상진기념사업회 회원들이 민주시민교육 프로그램에 참여해줄 것을 호소한 바도 있다. 올해 6월 지방선거에서 재선에 도전하는 이 의원은 작년 촛불혁명의 개혁 과제가 제대로 완수되려면 6월 지방선거에서 반드시 민주개혁세력이 집권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시의원 업무와 지역의 민주시민교육 운동, 그리고 선거 준비로 바쁜 이 의원의 얘기를 들어봤다.

2017년 5월 대통령선거에서 어머니(95세)와 아내와 함께 투표를 마치고 나와서

대학 때 학생운동을 하시고 감옥에 가게 되고, 학교에서 제적당하기까지의 이야기를 좀 들려주세요. 그때의 경험이 젊은 시절의 삶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 궁금합니다.

= 제가 대학에 입학한 1976년은 바로 전 해에 일어났던 김상진 의거로 인해 농대의 학생운동 세력이 많이 파괴되고 난 뒤였습니다. 그래도 일부가 남아서 한얼, 농사단, 농업문제연구회, 개척농사회 등 써클 활동을 하고 있었죠. 그 때 고등학교 선배의 권유로 개척농사회에 가입했고, 한국현대사와 농촌 문제 등을 학습하면서 현실을 다시 인식하게 되었습니다.

1978년 6월, 75학번 이병호, 권오훈, 신언관 세 선배가 농대캠퍼스에서 반 유신, 반 박정희정부 시위를 벌였습니다. 그 때 저는 학우들을 선동하고 모으는 행동대 역할을 했다가 무기정학을 받았죠. 게다가 하필 비슷한 시기에 소위 ‘서울농대 편지사건’의 수사에 걸려 책임자로 검거되었습니다. 어느 농대생이 서울지역 대학 연합시위에서 나온 유인물을 부산대학교에 다니는 친구에게 보냈는데 그 편지가 검열을 당했고, 부산대에서부터 거꾸로 추적해 저에게까지 온 것입니다.

당시에 10여 명이 함께 검거되었는데 주동자로 몰린 저는 긴급조치9호 위반으로 1년 실형을 선고 받았습니다. 출소 후 학교에서 제적되고 고향 김해에 내려가 농사를 짓기 시작했죠. 학교에서는 2006년에 명예졸업장을 받았습니다.

결국 학생시절의 민주화운동 경험이 제 인생의 좌표를 결정한 것이지요. 우리의 삶은 정신이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실체 있는 행동’이 결정하는 것이라고 봅니다. 생각은 행동으로 나타나지 않으면 현실에서는 미미한 것입니다.

학교에서 제적되고 고향으로 내려가서 농사를 지으신 걸로 알고 있습니다. 농사일과 함께 지역 단체 일도 병행하셨을 텐데 어떤 활동을 하셨나요?

= 학교에서 제적되고 고향 김해로 내려가서 3년간 벼농사, 밭농사, 축산 농사를 지었습니다. 농대에서 공부했다는 사명감에다 ‘민중 속으로’ 들어가자는 생각이 있었기 때문이었죠. 그러다 부산지역 재야운동인 양서조합과 1983년 송기인, 노무현, 문재인 변호사 등이 창립한 부산민주시민협의회에서 하는 활동에 가담하여 부산을 자주 다니면서 농사는 그만두게 되었습니다.

1983년 당시 부산은 부산민주시민협의회를 중심으로 반독재민주화운동이 조금씩 뿌리내리고 있었습니다. 저는 부산을 다니는 동시에 김해에서 후배들과 함께 ‘김해대학생연합학우회’라는 단체를 만들어서 활동했습니다. 그 당시 김해에 하나도 없던 도서관을 건립하고, 유신 때 중단된 지역 축제인 가락문화제를 부활시키자는 문화운동을 벌여 성과를 거두었죠. 기관장들을 모아놓고 ‘김해의 미래를 위한 시민토론회’를 열어 김해경찰서 정보과 직원들을 긴장시키기도 했습니다.

학생 신분이 아니었던 저는 자문위원으로 활동했습니다. 소위 반정부운동을 하다가 긴급조치9호 위반으로 제적당한 사람도 이렇게 지역에서 대중적인 활동을 한다는 것을 보여준 것이죠. 그러던 중 6월항쟁이 도래했습니다. 1987년 6월에 저는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부산본부의 상임집행위원이 되어서 민주화투쟁에 참여했습니다. 당시 부산본부 위원장은 노무현 변호사였습니다.

– 91년에 김해시군 지구당 위원장을 맡으며 정계에 입문하셨더군요. 고 노무현 대통령의 추천으로 정치를 시작하셨다고 하셨네요.

= 6월항쟁 이후 김해지역 민주화운동협의회 사무국장과 김해민주청년회장으로 활동했습니다. 각종 집회와 대외교섭 등으로 바빴던 1991년 초, 당시 국회의원이었던 노무현 의원이 자신의 고향인 김해에서 활동하고 있는 저를 보시고 ‘김해에 민주당 깃발을 꽂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야당이 없어진 희한한 3당야합의 판에서 야당을 되살리고 지역의 민주화를 꾸준히 이끌어가야 한다면서요. 이 권유를 받아들여 그해 김해시 지구당 위원장을 맡으며 생각지 않았던 정당생활이 시작되었습니다.

대학은 중단하셨지만 그 이후에 방송통신대, 경남대 북한대학원, 동국대 박사과정 등 공부를 많이 하셨더군요. 그 많은 공부를 하신 이유와 그 과정에서 얻으신 것은 무엇인가요?

= 1983년에 대학 복학 기회가 있었지만, 이미 결혼해서 지역에서 활동을 벌이고 있던 터라 복학을 포기하고 대신 방송통신대 경제학과에 입학해 공부했습니다. 1998년 초에는 경남대학교 북한대학원에서 공부를 시작했습니다. 우리사회의 가장 중요한 모순이 남북분단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죠. 3년 동안 토요일만 되면 새벽 기차를 타고 서울 삼청동 북한대학원 캠퍼스에 가서 수업을 듣고 밤차를 타고 내려왔습니다. 그때 받은 석사학위로 2005년부터 2010년까지 인제대학교 통일학부의 겸임교수를 맡기도 했죠. 2008년에는 동국대학교 북한학과에 진학해 박사과정을 수료했습니다. 앞날을 개척하고 지혜를 얻기 위해서는 평생 배우고 공부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2017년 9월, 시의원으로서 김해시 청년일자리 토론회에서

경기도 교육청에서 일하시고 지역에서도 교육 관련한 활동을 하셨네요. 특별히 교육에 관심을 가지게 된 계기가 있으셨나요? 교육 분야에서는 주로 어떤 활동을 하셨는지요?

= 2000년에 둘째 아들이 다니던 초등학교에서 학교운영위원장을 하게 된 것을 계기로 김해지역 학교운영위원장협의회 사무국장을 맡게 되었습니다. 학교 운영위원들을 모아서 교육과 학교운영을 공부하고 견학도 다니는 활동을 재미있게 했죠. 그러다가 2년 후인 2002년 7월에 경상남도교육위원 선거가 다가오자 수년간 활동해왔던 참교육학부모회에서 조직후보를 내자는 얘기가 나왔습니다. 당시 도 교육위원회는 학교 교장 출신이 70% 이상이었거든요.

그때 제4대 경상남도교육위원 선거에 출마해 당선되었습니다. 1992년과 1996년 두 번의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했다가 낙선하고 난 뒤였죠. 1990년대 영남에서 민주당 간판으로 출마한다는 것은 시작부터 지는 선거나 다름없었습니다. 그런데 도 교육위원은 정당과 무관하게 학교 운영위원들이 뽑는 간접선거죠. 후보자 중 교육장 출신이 두 명, 그리고 현역 교육위원이 두 명 있었지만 제가 당선되었습니다.

4년간 교육위원으로 일하면서 절실히 느낀 것은 교육이 철저하게 정치적인 성격을 갖고 있다는 것입니다. 지배자는 권력 유지를 위해 자신의 구미에 맞는 내용만 교육하고, 독재에 반대하거나 미래지향적 교육관을 가진 사람들은 그에 맞서 교육운동과 사회운동을 벌이죠. 교육은 이처럼 정치적인 속성을 띠고 있기 때문에 교육감 선거에 그토록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갖는 것입니다.

교육과 맺어진 인연 덕에 저는 더 많은 경험을 하고 성장했습니다. 2006년에 교육위원 임기를 마칠 즈음, 저는 김해시장의 꿈을 갖고 당시 열린우리당 시장 후보 예선에 뛰어들었으나 근소한 차이로 낙선하고 말았습니다. 이듬해인 2007년 12월 경상남도교육감의 직선보궐선거가 있었는데, 이 선거에서 진보측 후보인 권정호 후보의 총괄선거대책위원장을 맡게 됐죠. 상대적으로 진보적인 교육감 후보가 상대적으로 수구적인 고영진 당시 현역 교육감을 상대로 싸우는 선거였습니다.

저는 그 때 학교무상급식을 선거공약의 맨 선두에 내세우도록 했습니다. 권정호 후보는 처음에는 머뭇거렸지만 결국 이 공약의 위력으로 당선되었습니다. 그 덕으로 저는 2009년 4월 경기도 교육감 보궐선거 캠프에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당시 경기도 교육감 선거는 전국적인 관심의 대상이어서 온 시민사회가 총력을 기울이고 있었지요. 다행히 보궐선거는 승리를 거두었고, 이를 계기로 이명박 정부의 모든 보궐선거에서 야당이 당선되었습니다.

당시 김상곤 교육감 후보와 함께 인구 1,200만 명의 경기도 곳곳을 누비고 다닌 때가 제 인생에서 가장 빛나는 순간이었습니다. 김상곤 교육감 당선 후 2010년부터 경기도교육청 대외협력관이 되어 공무원 월급을 받으면서 일했습니다. 2014년 현 이재정 교육감이 선거를 치를 때도 캠프에 참여해 선거를 승리로 이끌었고요. 2007년부터 2014년까지 경남에서 한 번, 경기에서 세 번 등 총 네 번의 교육감 선거를 줄곧 승리로 이끈, 대한민국 최초의 기록을 만든 셈이지요.

저는 경기도교육청에서 처음 실시하여 전국으로 확산되고 있는 ‘혁신교육’이 우리나라 교육의 아주 중요한 변화라고 생각합니다. 광복 이후 우리 교육은 분단과 독재라는 모순 하에 놓여있었습니다. 외세와 정치권력이 벌인 교육은 우리 민중을 외세와 독재에 길들여, 일하는 기계로 만들기 위한 교육이었죠. 이에 대한 반발로 새로운 교육운동이 벌어졌습니다. 전교조운동, 대안학교운동, 참교육학부모운동 등이 그것입니다.

2009년 김상곤 경기도교육감의 당선은 그런 움직임이 제도권을 점령한 최초의 사건입니다. 이어서 2010년과 2014년 두 번의 선거를 통해 전국 17개 시도에서 대전, 울산, 경북, 대구를 제외한 13개 시도를 진보교육감이 석권하는 기염을 토했죠.

국회의원 선거에 두 번 출마하셨는데, 2012년과 2017년에 기초의원에 두 번 도전하시고 결국 시의원이 되셨습니다. 기초의원 쪽으로 방향을 전환한 것은 지역의 풀뿌리 운동이 중요하다고 생각하셔서인가요?

= 고 노무현 대통령께서 후배들에게 “내가 부산시 구의원에 나가서 기초의원 활동을 하면 안 될까?”하는 말씀을 여러 번 하셨다고 합니다. 기초의원으로서의 의정활동이 지역 주민의 생활에 가장 밀접하고, 민주주의의 발전에 큰 역할을 하기 때문이겠지요. 기초의원은 주민의 생활에 가장 가까운 활동을 합니다. 주민이 불편 사항을 얘기하면 그 상황을 기초자치단체에 요청해 바로 시정할 수 있죠. 중앙정부를 대상으로 활동하는 국회의원에 비하면 생활정치로서 장점이 있지요.

하지만 불공정하게도 국회의원과는 제도적인 대우에서 차이가 큽니다. 국회의원은 비서와 보좌관을 9명까지 둘 수 있고, 후원회를 만들어 실무자를 고용하면 2명 정도가 늘어나므로 사실상 10명 이상의 비서 및 보좌진을 활용합니다. 하지만 지방의원은 아예 비서나 보좌관을 둘 수 없게 되어 있습니다. 후원회도 불가능합니다. 그런데도 많은 분량의 업무를 해야 하는데, 혼자서 북 치고 장구 치는 격이어서 시간과 체력의 한계로 제대로 된 활동을 하기 어렵습니다.

그동안 지방의원의 보좌진 제도와 후원회 설립에 대해 여러 차례 청원과 헌법소원 등이 있었지만, 국회의원들이 그것을 허용하지 않고 있습니다. 지방의원 출신 국회의원들은 현실을 더 잘 알 텐데 그들이라도 왜 나서지 않을까? 저의 큰 의문이자 심각한 불만입니다.

지방의원들은 의원이 되기 전에 했던 일이 의정활동에 많은 영향을 미칩니다. 저처럼 시민운동가 출신은 의정활동의 중심을 주민에게 두고, 민주적인 관계를 만들고 소통하려 합니다. 하지만 공무원 출신이나 자영업자 출신 등은 권위주의적이거나 출세지향적인 행동을 보이는 경우가 보다 많은 것 같습니다. 대학이나 지역의 시민단체를 통해 지방의원에 대한 교육이 이루어질 필요가 있습니다.

서울시민대학 민주시민교육사 수료식에서

지난 20166월 가족한마당에 참석해 김상진기념사업회 회원들에게 민주시민교육 프로그램에 동참해줄 것을 호소한 적이 있으시죠. 김해에서도 이와 관련한 활동을 하고 계시다고 하던데 어떤 일인지 소개해주세요.

= 1987년 유월항쟁 이후 여러 차례 정부 기구를 통한 공식적인 민주시민교육에 대한 법제화 시도가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서울시의회의 3/4을 민주당이 점한 2014년에 이르러서야 ‘서울시민주시민교육조례’가 만들어졌죠. 2015년 5월부터 9월까지 동국대학교 홍윤기 교수의 지도로 체계적인 민주시민교육 프로그램이 진행되었습니다. 그 때 저도 80여 명의 활동가들과 함께 60시간의 교육을 받고 제1기 민주시민교육사 예비자격증을 얻었습니다. 이후 성남과 의정부시에서 각각 민주시민교육조례가 제정되고 시민교육이 이루어졌죠.

제가 김해에서 시의원이 된 뒤인 2017년 10월에 김해에서도 민주시민교육을 하고 거기 모인 분들로 ‘김해민주시민학교’라는 단체를 결성했습니다. 2018년 초에 김해시 민주시민교육조례를 만들어서 법제화할 예정입니다. 시민들이 교육을 받은 후, 스스로 필요를 느껴서 단체를 만들고 조례를 제정하는 일은 민주시민교육의 주체를 형성하는 중요한 과정입니다. 깨어있는 민주시민을 계속 양성하고 그들이 성장하도록 지원하는 것이 암흑의 시대에 생명을 내던진 김상진 선배님의 정신을 계승하는 길이라고 생각합니다.

– 5월 장미대선 등 정치적으로 큰 변화를 맞았던 작년에 이어 올해 지방선거가 중요한 전환점이 될 것이라는 전망이 나오고 있는데요, 시민운동가이자 시의원으로서 바라보는 작년과 올해 정국의 흐름, 올해 6월 지방선거 전망은 어떻게 보시는지, 지방선거에 출마하는 소감 등을 여쭤보고 싶습니다.

= 2017년은 1987년 6월항쟁 이후 꼭 30년 만에 세계사에 유례없는 명예혁명이 이루어진 해입니다. 미완의 혁명이었던 6월항쟁이 완성의 열매를 거둔 것이지요. 민중의 손으로 촛불혁명을 일으켜 평화적으로 부패한 지도자를 끌어내리고 정권을 교체하였으므로, 이제 촛불혁명의 정신으로 나라를 개혁해가야 합니다. 이 과업이 제대로 이루어지려면 올해 6월 지방선거에서 민주개혁세력이 집권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중앙정부가 아무리 민주개혁을 하려해도 지방에서 방해하면 안 되기 때문에 지방마다 민주개혁이 이루어져야 합니다. 저도 제 인생에서 제일 중요한 선거라는 생각으로 전심전력을 다해서 임할 각오입니다.

대학에서 학생운동을 하면서 저의 인생의 진로가 결정된 것도 김상진 선배님처럼 민주주의를 위해 생명을 바친 분들 때문입니다. 수많은 민주‧민족‧노동열사들의 희생의 빚을 갚으면서 살아가려고 합니다. 항상 노력하며 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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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은경_ 대학 졸업 후 인터넷 신문 ‘민중의소리’ 기자로 일했다. 남보다 조금 더 잘하고 가장 즐겁게 하는 일이 글쓰기여서, 아무래도 이것이 평생의 업이 되지 싶다. 저마다 다양한 사연을 안고 다양한 모습으로 살아가는 인간들의 이야기에 깊은 관심이 있다. 김상진기념사업회에서는 선구자 편집주간을 맡고 있다.

Last modified: 2024-08-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