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광준 (경기방송 편성제작부장, 농화학 88)
생방송이 시작된 라디오 스튜디오에 다방 아가씨가 불쑥 들어온다.
“커피 시키셨죠?”
“???”
놀라서 토끼눈을 한 피디. 하지만 부스 안에 있던 디제이는 아무렇지도 않게 다방 아가씨에게 들어오라고 손짓한다. 좋아라 짧은 치마를 고쳐 입고 부스 안으로 들어가는 아가씨. 라디오 스튜디오가 이렇게 생긴 거구나, 하며 신기한 듯 둘러본다. 그때 음악이 끝나고 디제이가 말할 차례. 마이크가 열리는 ‘온에어’ 불이 켜지자 디제이는 뜬금없이 대본에도 없는 말을 하기 시작한다.
“오늘은 깜짝 인터뷰를 진행해 보려고요. 터미널 앞 청록다방에서 커피 배달 하고 있는……, (아가씨를 보며) 참 이름이 뭐였지?”
“그냥 김양…….”
“예 김양과 이야기 나눠보겠습니다.”
커피 배달 왔다가 뜻밖의 라디오 인터뷰까지 하게 된 다방아가씨는 그런데 너무 행복한 표정으로 말을 한다.
“아! 아! 이거 정말 방송 나가는 거 맞아요?”
“그럼.”
“와 신기하다. 아저씨, 나 사실 마이크 앞에 서보는 게 꿈이었어요. 가수…….”
마치 다방에서 손님과 이야기하듯 편하게 사는 이야기를 풀어내던 아가씨. 그런데 가출한 뒤 누가 제일 보고싶더냐는 디제이의 질문에 갑자기 울음을 터뜨린다.
“엄마, 비 온다. 그거 알아? 나 집 나오던 날도 비가 왔는데……. 엄마가 해주던 부침개 그거 해보려 했는데, 똑같은 맛이 안 나오네……. (울컥) 엄마 혹시 듣고 있어? 미안해……. 너무너무 보고 싶어.”
옆에서 짠한 표정으로 지켜보던 디제이는 아가씨를 다독여주며 이렇게 말한다.
“저기요. 한마디만 할게요. 여기 김양한테 커피 배달시켜놓고 아직도 외상값 안 갚으신 분들. 빨리 갚으세요. 누구니? 안 갚은 사람?”
“철물점 박 사장님…….”
“철물점 박 사장님 외상값 갚으세요. 또?”
“만두가게 이사장님.”
“이사장님 안 갚으면 만두가게 쳐들어갑니다.”
그 순간 라디오를 듣고 있던 박 사장과 이 사장의 얼굴은 사색이 되고 옆에서는 사모님들이 째려보고 있다. 영화 <라디오스타>의 한 장면이다. 국민배우 안성기 씨가 매니저로 나오고 박중훈 씨가 한물 간 가수출신 라디오 디제이로 나오는 이 영화는 당시 라디오 인터뷰의 길을 찾던 나에게 신세계를 열어주었다. 다방 아가씨, 중국집 배달원, 시골 할머니 등 우리 주변 보통 사람들과의 인터뷰가 그렇게 흥미진진하고 훈훈할 수 있다는 걸 봤을 때, 정말이지 나는 제대로 한 방 맞은 것 같았다. 인터뷰 할 사람은 주변에 널려있는데 나는 그런 사람들을 놔두고 전문용어로 맛있게 말하는 ‘선수들’만 찾아 헤맸다. 그들의 바쁜 일정과 무거운 몸값에 질질 끌려가던 끝에 ‘라디오에서 인터뷰가 없어지는 평화로운 그날’을 꿈꾸기도 했다. 진짜 파랑새는 가까운 곳에 있었는데 말이다.
“훌륭한 선수는 필드를 탓하지 않는다.”
좋은 인터뷰 상대와 나쁜 인터뷰 상대는 분명 차이가 난다. 그러나 인터뷰 상대를 탓하는 건 프로가 아니다. 프로는 어떤 상대이든 어떤 상황이든 간에 최선의 결과를 낳기 위해 끊임없이 상상하고 연구하고 도전한다. 상상력과 도전정신. 이게 인터뷰 게임의 승자를 가르는 제 1번 열쇠이다. 그럼 이제부터 여러분도 나와 함께 라디오 피디가 되어 인터뷰 게임에 도전해보자.
미션 1. 누구를 인터뷰하지?
퇴근시간인 금요일 밤 7시 30분대에 10분간 누군가를 인터뷰해야한다. 코너명은 <우리동네 사람들>. 수도권에 살고 있는 사람이면 누구나 훈훈하고 인간미 넘치는 인터뷰의 주인공이 될 수 있다. 스튜디오에 나오면 더할 나위없겠지만 전화인터뷰도 상관없다. 부스 밖에는 음질 조정의 마법사 김현아 피디가 있으니까. 누구를 연결하지? 우린 이 사람을 찍었다.
“가수 알리.”
불타는 금요일 밤이라 문화예술인이 좋을 듯했고. 이왕이면 주말에 우리 지역 경기도에서 공연이나 버스킹을 계획하는 사람이라면 더 흔쾌히 인터뷰에 응할 것 같았다. 그래서 인터넷으로 경기도 공연일정을 주르륵 찾아 나갔는데, 갑자기 김현아 피디가 탄성을 지르는 거다.
“어? 알리가 콘서트하네? 성남아트센터…….”
김현아 피디는 <한밤나라>라는 심야 청소년 프로그램을 하면서 게스트로 발탁한 무명시절의 알리와 언니 동생 하는 사이였다. 허나 알리가 <불후의 명곡>으로 스타 반열에 오른 뒤 자연스레 연락이 뜸했는데, 내 고집 덕분에 오랜만에 다시 연락하는 신세가 됐다.
“알리 스케줄 확정, 금요일 밤 7시 35분~45분.”
자 이제 다음 미션으로 가볼까. 이번에는 뭘 묻고 어떻게 끝낼지를 결정하는 인터뷰 내용 구성. 바로 요부분에서 선수들의 실력차이가 나온다. 관건은 첫 질문에 있다. 처음에 뭐를 묻느냐가 인터뷰가 재미있을지 늘어질지를 결정하는데, 만일 여러분 앞에 가수 알리가 앉아있다면 여러분은 그녀에게 뭘 물어볼 것인가?
“알리 씨, 그동안 어떻게 지내셨나요?”
라고 묻는다면 심심한 인터뷰로 가고 있는 거 맞다. 왜냐하면 이렇게 답할게 뻔하다.
“잘 지냈어요. 어쩌고저쩌고.”
이렇게 되면 인터뷰를 듣는 사람들은 둘 중 하나가 된다. 알리를 너무 좋아해서 알리의 근황이 궁금한 사람들이야 방송 들으며 ‘잘 지낸대. 너무 다행이야’ 하며 계속 듣겠지. 그러나 알리가 누군지 잘 모르고 따라서 그녀의 근황도 그닥 궁금하지 않은 사람들이라면 ‘내가 왜 이 인터뷰를 듣고 있어야 하지?’ 하며 채널버튼을 만지작거리고 있을지 모른다.
인터뷰란 알리를 아는 사람이든 모르는 사람이든, 그녀를 좋아하든 아니든 간에 방송을 듣고 있는 그 순간 많은 사람들이 몰입하게끔 만드는 것 아닐까. 그러기 위해서는 ‘몰입의 주제’를 찾아야한다. 알리를 알든 모르든 ‘맞아! 맞아! 이거 궁금했는데……’, ‘다음엔 무슨 이야기가 나올까?’ 할 수 있는 몰입의 주제. 그걸 쉽게 찾는 방법은 사람들이 알리에 대해 가장 많이 찾아본 ‘연관 검색어’를 발견하는 일이다.
“알리… 불후의 명곡.”
찾았다. 그러면 연관검색어인 ‘알리 + 불후의 명곡’으로 관련 기사나 글들을 산책하듯 읽어본다. 또 찾았다.
“알리… 불후의 명곡 역대 최다 우승자”
끝났군. 이로써 인터뷰의 물꼬를 어떻게 틀지 그 방향을 자신 있게 찾아냈다. 난 이렇게 시작했다.
“훈훈한 인터뷰하는 시간이죠? 우리동네 사람들. 오늘 만나볼 분은요, 여러분 잘 알고계신 모 방송사의 음악프로그램 <불후의 명곡>에서 역대 최다 우승을 차지한 가수입니다. <불후의 명곡>에는 지난 6년 동안 340명의 쟁쟁한 가수들이 나왔는데요, 여기서 역대 최다우승에 최다득표를 했습니다. 누굴까요? 궁금하시죠? 지금 만나 봅니다.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누구세요?”
“예, 저는 알리라고 합니다. 여러분 안녕하세요?”
알리는 기분이 좋은 듯 밝고 힘차게 첫발을 내딛었다. 이렇게 시작하면 탄탄대로가 열린다. 이어지는 질문은 당연 최다우승에 관한 뒷이야기.
“도대체 몇 번이나 우승을 하셨길래?”
“총 열한 번인데요, 단독으로 열 번 우승했고 한 번은 듀엣 미션으로 우승…….”
위 내용은 인터넷에 없는 내용이다. 위키피디아에는 알리가 열한 번 우승으로 최다우승자라는 기록만 있을 뿐 열 번 단독에 한 번 듀엣이란 기록은 없었으니까. 우리는 계속해서 인터넷에 없는, 알리만이 할 수 있는 관심답변을 캐냈다.
“우승하면 상금도 주나요?”
“아뇨. 상금은 없고 예쁜 트로피를…….”
“트로피는 어디다 보관하고 있나요?”
“제일 처음 받은 건 저희 집에 두고 있고요 나머지 열개는 부모님 댁에……. 부모님께서 너무 좋아하셔서요.”
“부모님 맘은 비슷한가 봐요. 저도 어릴 때 받은 상패가 있는데 매일 아침 그 상패를 닦으신다는…….”
“맞아요. 저희 부모님도…….”
이정도 되면 알리도 마음을 활짝 열었고 듣고 있는 사람도 알리의 일화가 남의 일이 아닌 자신의 일처럼 친근해진다. 나는 계속해서 불후의 명곡 무대 뒤에서 일어난 뒷이야기를 몇 가지 더 물었고 알리는 신나게 말을 했다.
“점수가 공개되는 떨리는 순간이면 늘 가수들은 눈을 감던데 그때 무슨 생각이 드는지?”
“준비는 며칠이나 하는지.”
“제일 기억에 남는 우승곡은?”
그러다 문득 화제를 돌려봐야겠다는 생각에 <불후의 명곡>을 빠져나왔다.
“우리동네에서 공연하신다면서요?”
알리는 더 좋아라 콘서트 계획을 말한다. 콘서트 제목이 <알리다>란다. 깨알재미. 여기서 더 깨알을 보태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조금 들어가 본다.
“공연하니까 생각나서 여쭤보는데요……. 해외토픽 보니까 ‘아델’ 있잖아요. 영국서 비틀즈 다음간다고 칭송받는 그 아델이 세상에 무대공포증이 있어서 더는 공연을 안 한대요. 세상에 아델 같은 가수가 무대공포증……. 깜짝 놀랐었는데 알리 씨는 어떻게 생각하세요?”
걱정했다. 어떤 대답이 나올지. 그런데 의외로 차분한 대답이 나왔다.
“저는 충분히 그럴 수 있다고 봐요. 주위에도 무대공포증 걸린 분들 실제로 여럿 계시고요.”
“헐…….”
“하지만 전 무대공포증 없으니까요, 내일 공연 많이 와주세용.”
참 소속사에서 예쁨 받을 가수다, 알리. 장난기가 발동해서 이렇게 맺어봤다.
“오늘 귀한 시간 내주셔서 감사드리고요, 인터뷰가 끝나면 우리 김현아 피디가 아주 친절한 목소리로 알리 씨한테 전화할거예요.”
“친절한 목소리요? 에이…….”
“친절한 목소리로 이렇게 말 할 거예요. 오늘 출연료는 없다고.”
“파하하하하~”
어찌나 크게 웃던지……. 그러나 진정한 마무리는 늘 방송을 듣는 청취자의 몫이다.
“농담이고요, 아마도 지금 이 순간, 금요일 밤을 함께하고 계신 경기방송 청취자 여러분들께 우리 알리 씨가 정말 들려주고 싶은 곡이 뭔지 딱 하나만 골라달라고 할거예요. 좋은 곡 들려주세요.”
“예. 정말 노랫말이 오늘밤에 딱 와 닿는 곡이 있는데 말씀드릴게요.”
“오, 그 노래군요. 기대됩니다, 지금까지 가수 알리 씨였습니다. 고맙습니다.”
인터뷰는 끝났고, 잠시 후 알리의 노래가 흘러나왔다. 벚꽃길. 아름다운 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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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광준_ 별명 ‘노진구’. 도라에몽에게 늘 민폐만 끼쳐 만화사상 최악의 캐릭터로 손꼽힐 만큼 띨띨하고 존재감 없던 어린 시절을 보낸 뒤, 우연히 라디오 피디가 되어 드라마 ‘도깨비’의 지은탁 양과 동종업계에서 일하고 있음. FM 99.9MHz 경기방송의 제작부장. 언젠가 농촌에 살고픈 닉네임 ‘시골피디’.
Last modified: 2024-08-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