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ritten by 4:56 오후 111호(2018.01)

[살아가는 이야기]
베를린 견문록 3 + 파리 견문록

황종섭 (정치발전소 기획실장, 지역시스템공학 03)

또 다녀왔습니다. 독일 총선을 보러 작년 9월에 베를린에 다녀왔으니, 4개월도 안 됐네요. 2015년에 처음 갔을 때, 베를린의 자유로움에 놀랐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어디서나 맥주를 마시는 청춘들을 볼 수 있고, 거의 모든 벽에 그래피티가 되어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수수했고, 물가는 쌌습니다. 작년에 다시 방문했을 때 베를린은 수도지만 가난하다고, 그렇지만 섹시하다고 했습니다. 2003년 전직 시장이 했던 말이라고 합니다.

저는 도시의 자유로움이라고만 생각했습니다. 이번에 가서 행정부를 방문해보니 그런 게 아니었습니다. 거리와 공원은 쓰레기가 넘쳐나고, 지하철 플랫폼은 전혀 관리가 안 되고 있으며, 벽에는 온갖 낙서로 가득한 것이 자유의 공기 아니냐고 물었습니다. 답은 이랬습니다. “가난해서 그렇다.”

심지어 시청 건물도 간신히 관리되고 있었으며, 베를린주 의회 바닥 카펫도 때가 잘 타지 않는 무늬로 정한 것이라고 설명했습니다.

한국과는 상황이 또 다른 것이, 독일은 지방자치가 정말 철저하게 이뤄지고 있는 나라라는 점입니다. 동네마다 독립적으로 자치를 합니다. 그리고 실생활에 가장 가까운 일, 예를 들어 청소나 기초적인 복지는 가장 낮은 단위의 지방정부에서 수행합니다. 그러니 도심은 그나마 깨끗한 편입니다만, 동베를린 지역으로 가면 돈이 없어서 아무 것도 하지 못한다고 합니다.

저는 여기서 한국의 상황을 생각해봤습니다. 지금 한국에서는 개헌의 내용과 관련해 지방분권을 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습니다. 저는 이를 진지하게 검토해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지금은 하나의 국가를 이루고 있기 때문에 지역 균형 발전 같은 것이 가능합니다만, 이를 모두 자치의 영역으로 넘겨버리면 아무리 균형 발전을 하고 싶어도 못 하는 상황이 발생할 것입니다. 그리고 가장 먼저 삭감되는 건 청소, 대중교통, 복지 등 서민의 생활 기반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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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를린

베를린에서 9박 11일의 일정을 마치고 프랑스 파리로 넘어갔습니다. 파리의 아름다움을 극적으로 느끼고 싶으시다면 베를린-파리 여행 코스를 추천합니다. 가난하지만 섹시한 도시와 화려함 그 자체인 도시를 한 눈에 비교할 수 있습니다. 물론 베를린에도 수없이 많은 관광지가 있습니다. 전승기념탑, 독일연방의회, 브란덴부르크 문, 베를린장벽, 훔볼트 대학, 독일역사박물관을 지나면 한 눈에 들어오는 베를린 돔과 텔레비전 탑까지. 도시 자체가 역사를 간직하고 있고, 정말 볼 만합니다.

하지만 파리는 차원이 다릅니다. 프랑스 관광청 공식 사이트는 파리를 ‘빛의 도시’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정말 정확한 말이 아닐 수 없습니다. 제가 파리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해가 지고 난 뒤였는데요, 짐을 풀고 거리로 나가니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습니다. 야경이 멋지다, 이런 표현으로는 설명할 수가 없습니다. 제가 제일 많이 한 말은 이렇습니다.

“정신을 차릴 수가 없다.”

노트르담 드 파리부터 파리 시청, 파리경시청, 퐁네프와 거기서 보이는 수많은 다리들, 루브르 박물관과 오르세 박물관으로 이어진 길, 그리고 ‘오늘 밤 주인공은 나야 나’라는 듯 파리 전체에 뿜어지는 에펠탑의 불빛까지. 화려함이란 이런 것이다, 하고 보여주는 것 같았습니다. 세계의 모든 도시는 파리의 모조품이라는 얘기를 어디선가 들은 적이 있는데, 정말 정확한 말이었습니다.

게다가 사람들의 옷차림까지 베를린과는 완전 딴판입니다. 베를린 시민들은 주로 검은 옷을 즐겨 입습니다. 검은 색 옷은 뭘 입든 가격 차이가 나지 않기 때문이랍니다. 때도 잘 안 타고요. 그러나 파리 시민들은 중절모에 깃털을 꽂고 다닐 정도로 패션에 신경을 많이 썼고, 검은 옷조차 명품이었습니다. 덕분에 베를린에서는 결코 느낄 수 없었던 감정, ‘내가 너무 초라하게 입었나’ 싶은 생각까지 들었습니다. 같은 자유의 공기가 흘러도 베를린이 뭔가 음침한 냄새가 난다면, 파리는 향수 냄새가 났습니다(사실 베를린 사람들은 향수도 잘 안 씁니다).

그러나 그런 파리에도 어두운 면은 있었죠. 제 애인은 공항으로 가는 길에 소매치기를 당해 아이폰을 잃었습니다. 말이 소매치기지 거의 강도나 다름없었습니다. 단체로 지하철로 밀고 들어와 가방과 주머니 곳곳을 뒤져 물건을 빼갑니다. 거리의 화려함에서 몇 계단만 내려오면 바로 어둠이 보입니다. 아무튼 사람이 안 다쳐서 다행이지만, 혹시라도 파리에 가실 일이 있으면 사람 많은 지하철은 무조건 피해야 합니다.

두서없이 썼습니다. 이번호 원고는 마감 날짜도 한참 지나서 마쳤네요. 유럽에서도 노트북을 두드릴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던 저의 불찰입니다. 새해 여행 계획을 짜시는 분들에게 도움이 되었길 바라며 글을 마칩니다.

필자소개 수정

황종섭_정치발전소 기획실장. 2006년 농대학생회장을 지냈고, 2011년부터 진보정치에 몸담았다. 정의당 기획조정실과 대표비서실을 거쳐, 2017년 심상정 캠프 전략팀·TV토론팀에서 일했다.

Last modified: 2024-08-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