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근우 (김상진기념사업회 회장, 농화학 84)
올해는 제주 4·3항쟁 70주년을 맞이하는 해이다. 국가 원수로서는 두 번째로 문재인 대통령이 추념식에 참석하여 국가권력의 잘못으로 희생된 유족들에게 사과와 위로를 표시했다. 4월이 가까워지면서 전국의 민족·민주운동 시민단체들이 꾸린 평화기행단이 줄을 이어 제주를 찾았다. 우리 김상진기념사업회도 마침 수원지역의 시민단체 평화기행단과 단체를 이루어 지난 3월 31일에서 4월 2일 사이에 제주를 찾았다. 마침 서울 농대 출신인 김공림 열사가 제주 출신이고 1991년 사망한 그의 묘소가 제주시 조천읍에 있어서 유족도 찾아뵙고 묘소도 참배하는 일정을 함께 잡았다.
전야제
제주 평화기행을 본격적으로 시작하기 전날. 제주에 살고 있는 김상진기념사업회 회원들과 만남의 시간을 가졌다.
제주 출신이고 75년 김상진 열사 의거 당시 1m 앞에서 현장을 목격한 송관철(농화학 73) 선배. 농촌진흥청에서 근무하시다가 정년퇴직하고 수원과 제주를 왕복하며 농사를 짓는 토양학자이다. 양돈 관련 사업을 하며 제주에서 잠시 축사를 짓고 있다는 박종대(원예 86) 동문. 농업경제학 박사학위를 받고 제주발전연구원에서 제주의 매력을 탐구하는 안경아(식생 98) 동문. 제주 출신이고 서귀포에 있는 제주농업기술원에서 늦깎이 공무원 생활로 정신없이 바쁜 홍성철(농화학 89) 동문. 그리고 육지에서 평화기행에 참가한 정근우, 김원봉, 조미경 등 7명이 자리를 함께 했다.
제주의 역사, 제주의 농업, 제주의 문화, 제주의 숨겨진 매력에 대해서, 그리고 4·3과 현재의 삶에 이르기까지 여러 가지 이야기를 하며 알찬 전야제를 보냈다.
제주 4·3 사건은 1947년 3·1운동 기념식장에서 발생한 경찰의 발포사건으로 시작해 1948년 4월 3일부터 1954년 9월 21일까지 제주도에서 일어난 대학살극이다. 남로당 무장대와 미군정, 국군·경찰 간의 충돌 과정과, 이승만 정권 이후 미국 정부의 묵인 하에 벌어진 초토화 작전 및 무장대의 학살로 많은 주민이 억울하게 희생당한 사건이다. 여기에 이승만 망명 이후로도 박정희, 전두환 등 반공정권 하에서 수많은 제주도민과 민주인사들이 4·3을 언급하였다는 이유로 체포되고 고문당했던 것까지 합치면 지속기간을 더 길게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이것이 위키백과에 나오는 4·3에 대한 일반적인 설명이다. 하지만 이번 70주년 평화기행에서 전문 해설사들의 얘기를 들으며, 예전에 미처 알지 못했던 오래된 진실의 일단을 알게 되었다.
70년이 지나도 상처는 아물지 않았다
그동안 우리 마음속에 4·3은 레드콤플렉스에서 완전히 자유롭지 못했다. 1948년 4월 3일 당시 남로당 제주지부의 선도투쟁이 무모한 무장봉기가 아니었는지? 만일 그 과정에서 북쪽의 지령이 있었다면 너무 현실을 외면한 결정은 아니었는지? 당시 김달삼(본명 이승진)을 포함한 지도부는 왜 제주의 동지들을 남겨놓고 북한으로 가버려 4·3의 본질에 빨간색을 칠하는 세력에게 빌미를 제공했을까? 학창시절부터 4·3 이야기만 들으면 뭔가 꺼림칙한 구석이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이번에 알게 된 사실은 1947년 3·1운동 기념식장에서 벌어진 사소하고 황당한 사건에서 그 엄청난 학살로 번지는 과정이 너무나 원통하고 처참했다는 것이다. 역사에 가정법은 무의미하다고 하지만, 너무나도 엄청난 생명이 스러져간 4.3의 진행과정을 듣고 있자니 ‘그때 이랬다면?’ 하는 안타까운 상상을 자꾸 하게 되었다.
1947년 3·1운동 기념식에 제주도민 3만 명이 모였다는 사실이 일단 놀라웠다. 관덕정 앞에서 우연히 기마경찰의 말발굽에 차여 도랑으로 떨어진 어린 아이를 경찰이 말에서 내려서 툴툴 흙이라도 털어 주었다면. 흥분해서 경찰에 돌멩이를 던지던 군중에게 무장 경찰들이 망루대에서 공포탄만 쏘았더라도 군중은 흩어져서 아무 일 없었을 것을. 6명의 사상자가 발생한 며칠 후, 당시 95%가 참여한 민관합동 총파업에서 경찰이 사과하고 발포자를 색출, 문책해서 분노한 제주도민의 민심을 달랬다면. 제주가 왜 이리 시끄러운지 진상조사를 나온 미군정과 그 하수인들이 “제주는 이미 빨갱이의 세상이 되었다”는 내용의 “Red island”라는 보고서를 내지 않았다면.
4·3 문화해설사에게 그날의 진상을 들으며 너무나 안타까운 마음에 ‘만일’을 하릴없이 되풀이했다. 그날따라 하필 붉은 동백은 자꾸만 뚝뚝 떨어지고 왕벚나무를 스치는 바람에 꽃비가 심하게 내리고 있었다.
첫날은 4·3의 시발점인 관덕정과 제주목 관아지 주변을 탐방하며 희생자의 명복을 빌고, 화해와 상생의 공간인 ‘평화기념관’에서 위령제단, 각명비, 행불자 표석, 봉안관, 영상관을 참관하고, 당시 전략지역으로 돌담으로 만든 낙선동 마을, 영화 ‘지슬’을 촬영했다는 만못굴 동굴, 북촌리 학살사건의 현장과 애기무덤, 북촌 너븐숭이 기념관을 둘러보고 북촌리 유족과 만남의 시간을 가졌다.
어느 누구도 그 시대의 억울한 죽음에 대해서 말할 수 없었고, 누가 가해자인지 누가 피해자인지 구분하는 일 자체가 고통인 70년 세월을 보내고 올해부터는 국가 추념일로서 4월 3일 오전 10시에 전 국민이 1분간 묵념을 하게 되었다. 희생자 가족의 가슴에 맺힌 한을 보듬어주는 일은 이제 비로소 시작된 듯하다.
유홍준 교수가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7권에서 일갈한 조용한 목소리에 공감한다.
“우리는 있는 그대로 사건을 세상에 알려 영혼과 유가족을 위로하고, 그간 왜곡되어 알려졌던 사실을 바로잡아 가해자든 피해자든 역사의 굴레로부터 자유로워져야 한다. ‘진실과 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가 그래서 필요한 것이다.”
김공림(원예 80) 열사와 어머니 이야기
둘째 날 우리 일행은 김공림 형의 묘소를 참배하고 유족과의 만남을 가졌다. 형은 제주 조천사람이다. 조천에서 태어나 제주농고를 졸업하고 1980년 서울대 농대에 입학했다. 시대가 시대이니 만큼 학생운동에 뛰어들어 1981년 학내시위 관련 무기정학을 당한 이후, 형의 삶을 설명하는 단어들은 전형적인 80년대의 언어이다. 강제징집, 위장취업, 노동운동, 대통령 선거과정에서 연행, 고문당하고 출소 후 다시 노동운동, 그리고 위암 말기 판정을 받아 투병하다가 1991년 30세라는 꽃다운 나이에 영면에 들었다.
형의 벗들이 쓰고 신영복 선생의 글자로 새긴 묘비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 있었다.
“공림아, 너는 말하지 않았지만 온몸으로 보여준 그 뜻을 새기고 본받아 열심히 더욱 열심히 모든 것을 바쳐 서로 사랑하며 비록 작지만 우리의 힘을 모아 네가 바라던 세상으로 변화 발전하는 그런 날들이 되도록 노력하마. 자주민주통일의 그날까지 고이 잠드소서.”
형의 동생 김두한 씨와 어머니 이덕례 여사를 만났다. 친정이 북촌이신 어머니는 북촌마을 학살사건 현장에 있었던 6살 때를 또렷이 기억하고 계셨다. 경찰이 마을사람들을 초등학교 운동장으로 모이라 해놓고 군인·경찰 가족을 한쪽으로 분리시키는 장면. 그와 동시에 온 마을이 불길에 휩싸이는 장면. 그리고 저녁에 가보니 불타지 않고 신기하게 남아있던 친정집에 대한 이야기. 낮에는 경찰, 밤에는 산사람들에 의해 무참하게 죽어간 동네사람들 이야기까지.
그리고 먼저 간 큰아들 김공림에 대한 애틋한 기억도 함께 쏟아내셨다. 잊지 않고 아들을 찾아온 아들의 후배들을 인자한 미소로 맞아주셨다. 아들이 아직도 보고싶으시단다. ‘그렇게 하지 마라 하지 마라 했는데, 그 길을 그렇게 가더니……’ 하면서 말을 잇지 못하신다.
“마라도라 마라도라 했더니…….”(제주방언)
제주의 아픈 현대사가 어머니의 주름살에 새겨져 있었다. 더 이상 슬픈 일 없이 여생을 행복한 햇살 속에 건강하시길 기원하며 작별을 했다.
2018년 4월. 김상진기념사업회 제주평화 기행단.
※ 이번 제주 기행 과정에서 큰 도움을 주신 홍성철 회원과 김공림 형의 동생 김두한 님에게 감사의 인사를 표합니다.
필자소개 :
정근우_ 김상진기념사업회 회장. 김상진을 기리는 것이 민주주의적 가치를 지키는 일이라는 신념을 가지고 여러 가지 활동을 하며 수원에서 살고 있다.
Last modified: 2024-08-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