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종섭 (정치발전소 기획실장, 지역시스템공학 03)
대통령의 개헌안에 국민소환제가 포함되었습니다. 국민소환제는 간단히 말하면 마음에 들지 않는 국회의원을 끌어내리는 제도입니다. 어떤 이유로든 국회와 정치에 불신을 가진 분들은 대부분 이 제도의 도입을 찬성하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저는 다른 생각을 갖고 있습니다. 국민소환제에 대해 말하기에 앞서 우리가 원하는 정치의 모습을 떠올려 볼 필요가 있습니다. 협상과 타협이냐, 대결과 선동이냐. 어떤 것이 우리가 채택하고 있는 민주주의 제도에 더 적합한 것일까요.
민주주의는 기본적으로 서로 다른 의견을 가진 시민들이 이 다름을 인정하는 제도입니다. 서로 다르지 않다면 민주주의를 할 필요도 없습니다. 민주주의는 서로 다른 의견을 좀 더 공익에 가까운 것으로 만들기 위해 협상하고 타협하는 제도입니다. 그리고 그 전제는 언제나 나도 틀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국민소환제는 대의 민주주의를 보완한다는 도입 취지와는 반대로 이러한 민주주의 원칙을 훼손하게 될 것입니다. 국회의원 소환은 찬성과 반대를 가르는 일입니다. 그 사이에 중간은 없습니다. 우리는 과거 누구 편이냐를 놓고 시민들을 갈라놓아 서로 죽고 죽였던 역사를 갖고 있습니다. 이러한 역사를 다시 반복할 수는 없습니다.
그럼에도 국민소환제가 국회의원 견제라는 측면에서 선용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분들이 많은 것 같습니다. 국민소환제가 가져올 미래를 보고 싶다면, 저는 지금의 베네수엘라를 보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베네수엘라는 차베스 전 대통령 당선 후 1999년에 국민소환제와 국민투표 등 소위 ‘직접 민주주의 제도’들을 도입했습니다. 이후 이 나라의 민주주의는 정치세력들 간 심각한 갈등 속에서 파탄이 나버렸습니다. 2003년에 야당은 차베스 대통령과 여당 의원 30명에 대한 소환에 나섰고, 여당은 37명의 야당 의원 소환을 추진하며 맞불을 놨습니다. 의회의 심의 민주주의 기능은 마비됐고, 무슨 일만 생기면 거리로 사람들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소환을 위해 서명을 받아야 했기 때문입니다.
정부는 정권을 지키기 위해 점점 더 권위주의적 통치를 하게 됐고, 사회는 거의 내전과 같은 상황으로 치달았습니다. 최근에도 현직 마두로 대통령에 대한 소환을 둘러싸고 정치공방이 이어졌으며, 사람들은 또 거리로 나와야 했습니다. 1년 사이 베네수엘라의 물가상승률은 8878%가 됐습니다. 정치가 사회경제적 문제를 전혀 해결하지 못한 결과입니다. 협상과 타협이라는 정치의 기능이 멈춘 베네수엘라는 홉스가 말한 ‘만인에 대한 만인의 전쟁상태’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이를 ‘자연 상태’ 또는 ‘무정부 상태’라고 부릅니다.
우리는 이미 4년에 한 번씩 전체 국회의원을 대상으로 선거라는 소환 투표를 실시하고 있습니다. 선거는 결코 가볍게 볼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주권을 대표자에게 위임하는 제도가 선거인데, 이렇게 위임된 주권을 회수하려면 선거만큼 큰 주권 위임 절차가 필요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국민소환제가 오히려 시민 다수의 의견에 반하는 결과를 불러올 수도 있습니다. 백번 양보해 소환제의 필요성을 인정하더라도 입법부 의원들에게 적용하는 것은 큰 의미가 없습니다. 행정부처럼 시민의 일상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정치적·정책적 이유로 국회의원을 소환하려면 다수의 의원을 소환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다수파가 바뀔 정도로 소환을 해야 효과가 있습니다. 베네수엘라가 의원 수십 명을 한 번에 소환했던 것이 이 때문입니다.
내 마음에 들지 않는 국회의원도 내 동료 시민에 의해 뽑혔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일은 굉장히 중요합니다. 제가 볼 때도 어떻게 이런 사람이 국회의원인가 싶은 분들이 많지만, 그들도 정당하게 뽑힌 시민의 대표입니다. 나와 다른 생각을 인정하는 것이 민주주의의 출발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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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종섭 _ 정치발전소 기획실장. 2006년 농대학생회장을 지냈고, 2011년부터 진보정치에 몸담았다. 정의당 기획조정실과 대표비서실을 거쳐, 2017년 심상정 캠프 전략팀·TV토론팀에서 일했다. (no1enem2@gmail.com)
Last modified: 2024-08-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