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은경 선구자 편집주간, 농학 95
차성환 위원은 몇 년 전 김상진기념사업회 회원들과 함께 부산에 내려갔을 때 식사 자리에서 만난 적이 있다. 부산, 경남 지역에 거주하는 동문들을 만나는 자리였다. 73학번이라는데 나이에 비해 해사한 동안이라는 것과, 말수가 적은 듯 침착하고 조용한 태도가 기억에 남았다. 더 놀란 것은 그가 과거 ‘남민전’ 사건으로 한때 무기징역형까지 받은 적이 있는 장기수였다는 것이었다.
누가 먼저 얘기를 꺼냈는지 몰라도, 어느새 우리는 그에게서 당시 사건 얘기를 듣고 있었다. 꿈꾸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의기투합했던 피가 뜨거운 청년들, 활동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재벌집 담을 넘었던 어느 숨 막히는 밤의 이야기를. 그런 그가 올해 3월 15일 차관급인 ‘부마민주항쟁 진상규명 및 관련자명예회복심의위원회’ 상임위원으로 위촉되었다는 소식은 반갑고도 좀 놀라운 것이었다.
알고 보니 차 위원은 2000년경부터 지금까지 꾸준히 부마항쟁 및 민주화운동 관련 연구를 진행하며 저서와 논문들을 집필했다고 한다. “부마항쟁은 유신체제를 무너뜨린 결정적인 사건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제대로 된 조사나 연구가 없어 안타까웠다”는 것이 그가 부마항쟁 연구에 후반생을 바치게 된 이유다.
부마민주항쟁 진상규명위원회는 박근혜 정부 시기인 2014년에 출범해 활동해왔지만, 그간 사료 비판 없이 관변 자료에 과도하게 의존하는 등 부실 조사 논란에 시달렸다. 그러다가 지난해 문재인 정부가 들어선 이후 변화의 요구가 받아들여지면서, 이번에 차성환 상임위원을 비롯한 다섯 명의 위원이 새로 위촉되어 새롭고 공정한 조사가 실시될 것으로 기대되고 있다.
부산에 집과 가족이 있는 차 위원은 요즘 서울과 부산을 오가며 여느 때보다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다. 부마민주항쟁 진상규명위원회가 서울 종로구 통의동에 위치해 있기 때문이다. 또 지난 6월 29일에는 부산의 한 주민센터에서 부마민주항쟁 기념재단설립 추진위원회 첫 회의가 열리는 등 부산에도 그가 수시로 참석해야 할 일이 적지 않다.
김상진기념사업회라는 이름 덕분에 인터뷰 요청은 쾌히 받아들여졌지만, 막상 질문지에 대한 답변은 일주일이 지나서야 받을 수 있었다. 지금까지 한 번도 빵꾸(?)가 난 적이 없었던 선구자 인터뷰가 이번에야말로 드디어 사고가 나는 것인가, 마음 졸이던 마지막 순간에 인터뷰 답변을 받았다. 관련 뉴스를 검색해보니 그가 왜 그렇게 시간이 없고 바빴는지가 이해되었다.
부마민주항쟁은 40여 년 전 사건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최근 들어 관련 뉴스가 쏟아지고 있다. 진상규명위원회의 활발한 활동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부마민주항쟁을 국가기념일로 지정하기 위한 논의가 진행 중이라는 뉴스에 이어, 7월 6일에는 위원회의 42차 본회의가 열려 부실 조사 논란 이후 41건의 내용을 수정·보완한 보고서가 조건부 채택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그나마 유일한 휴식시간이 되었을 일요일 오후 시간을 쪼개어 적어 보내온 그의 이야기는 담담했지만 솔직했다.
김상진 의거로 무기정학, 남민전 사건으로 감옥살이
“저는 1953년 마산 출생인데 교사인 아버지의 발령지를 따라 유년기에 부산으로 이사한 후 쭉 부산에서 살았습니다. 1973년에 서울농대 조경학과에 입학해서 학교를 다니다가 1975년 4월 김상진 사건으로 무기정학을 받았어요. 1978년 복학 후 남조선민족해방전선준비위원회(남민전)에 관여해 활동을 하다가 1979년 4월 남민전 활동과 관련해 지명수배를 받고 그해 10월에 검거되었죠.”
남민전은 1976년 반유신·민주화와 반제·민족해방운동을 기치로 조직돼 활동한 비밀단체였으나, 1979년 10월에서 11월까지 총 84명의 관련자들이 검거되면서 유신정권 말기 최대의 공안사건으로 부각했다. 사건 관련자들 중에는 고 김남주 시인, 임헌영 민족문제연구소 소장, 수학자 안재구, 권오헌 민가협양심수후원회 회장, 이수일 전 전교조 위원장, 이학영 더불어민주당 의원, 홍세화 노동당 고문, 이재오 자유한국당 고문 등이 포함되어 있다.
1980년에 내려진 최종심에서 주동자 2명은 사형, 안재구 등 5명은 무기징역, 차성환 위원과 고 김남주 시인 등 7명은 15년 형이 선고되었다. 광주교도소에서 복역하던 차 위원은 1988년 12월 크리스마스 특사로 출소했다. 그런데 남민전 사건 관련자로만 알았던 그가 김상진 의거와 관련해 무기정학 처분까지 받았다는 것은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1975년 4월 11일 김상진 의거 현장에 저도 있었어요. 그날 시위 후 바로 휴교령이 떨어졌고 50명 정도가 학사징계를 받았죠. 유기정학, 무기정학, 제적 등의 처분이 내려졌어요. 그 당시 농대 이념 써클을 초토화시키기 위해 관련자들을 다 처벌한 거죠. 저도 농촌문제연구회에서 조사연구부장 직책을 맡고 있어서 학사징계 대상이었어요.”
남민전 사건의 주요 인물로 검거돼 실형을 살고 출소한 뒤, 그는 한동안 결혼과 취업 등 먹고 사는 일을 해결해야 했다. 남민전 사건관련자란 딱지가 붙은 데다 이미 적지 않은 나이였기 때문에 취업도 쉽지 않았다. 게다가 ‘사회안전법’에 따라 공안당국의 감시 대상이었던 터라 정치활동은 자제했다. 1990년대에 그가 했던 유일한 활동은 부산민주항쟁기념사업회의 임원직을 맡은 것이었다.
“부산민주항쟁기념사업회는 송기인 신부님 등 부산의 민주화운동을 주도하셨던 분들이 만든 단체에요. 이분들이 1997년부터 부산에 민주항쟁기념관을 포함하는 민주공원을 조성하는 사업을 추진했습니다. 2000년에 정부와 지자체의 도움을 받아 부산민주공원이 설립되었고, 저는 그곳에서 학술과 교육사업을 하는 실무자로 일을 시작했죠.”
“저항이 불가피한 시대, 대가를 치렀을 뿐”
이 일을 시작하면서 그는 부마항쟁에 주목하게 됐다. 박정희 유신 체제를 무너뜨린 우리 현대사의 중요한 사건임에도 불구하고 그동안 조사·연구가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사실이 너무도 안타까웠다. 이후 부마항쟁을 중심으로 한 민주화투쟁 연구에 매진하게 된 그는 2002년 부산대학교 일반대학원 정치외교학과에서 석사학위를, 2009년에는 같은 곳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2005년부터 2007년까지는 민주공원 관장을 하고 임기가 끝나 그만 두었지요. 2008년 이후에는 대학 강사로 정치학을 강의하면서 시민운동에 참여했습니다. 2010년 지방선거부터는 야권후보단일화운동도 하고 시민정치운동단체도 만들고 부산참여연대 공동대표도 하고 주민운동도 하면서 살았죠.”
그는 분명 보통 사람들과는 많이 다른 20대와 30대를 보냈다. 90년대 학번인 나는 7,80년대에 대학을 다닌 선배 세대의 정서에서 어쩔 수 없는 괴리감을 느낄 때가 있다. 한 인간으로 세상에 태어나 누구나 당연히 추구하게 마련인 ‘나 자신의 행복’을 희생하고, 나 자신보다 사회에 대한 의무감이 앞서야 하는 삶은 너무 가혹하다는 생각이 든다. 시대가 부과한 어쩔 수 없는 사명일까. 누구보다 뜨겁게 보낸 젊은 시절에 대한 소회를 물었다. 감히 물을 자격이 있는지는 모르지만.
“그 당시 우리 세대가 직면했던 정치사회적 모순을 해결하기 위해 불가피하게 저항이 필요한 시대였지요. 다만 그 저항이 치러야 할 대가가 워낙 컸기 때문에 운명을 걸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지요. 그렇다고 모두가 똑같은 방식으로 저항하지는 않았겠죠. 한 사람이 어떤 시기에 어떤 선택을 하는지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타고난 성향도 큰 영향을 미치는 것 같습니다. 어쨌든 저는 당시 급진적인 저항에 쉽게 동의했고 그 대가를 치렀을 뿐입니다. 목숨도을 잃은 사람들도 많은데 저는 그나마 운이 좋아 여전히 살아 있고요. 살아남은 자의 몫이라도 잘 해야 먼저 가신 분들에게 덜 죄송할 것 같습니다.”
그가 선택한 ‘살아남은 자의 몫’이 바로 2000년 이후 꾸준히 진행해온 부마항쟁 및 민주화운동 관련 연구일 것이다. 벌써 20년 가까이 되었으니 사실상 후반생을 다 바쳐서 하는 일이다. 이번에 그가 부마민주항쟁 진상규명위원회 상임위원으로 위촉된 것도 그간 꾸준히 쌓아온 그의 연구 성과에 대한 사회적인 인정에 다름 아니다. 하지만 이 문제에 대해 그는 아쉬운 점이 너무나 많다.
“부마항쟁은 4.19 혁명 이후 다시 일어난 대규모 민주화 운동이자 5.18 광주 민주화 운동과 6월 항쟁, 촛불 항쟁으로 연결되는 민주화 대장정의 큰 봉우리입니다. 그런데 여러 가지 이유로 국민들에게 잘 인지되지 못했습니다. 유신체제를 무너뜨린 결정적인 항쟁이었는데 말이죠. 이를 제대로 밝혀서 정리하고 젊은 세대에게 알리는 일이 우리의 의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살펴보니 너무 조사, 연구가 안 되어 있는 겁니다.”
부마항쟁, 사안의 중요성에 비해 저평가돼
부마항쟁이 상대적으로 주목받지 못한 이유에 대해서는 몇 가지 해석이 있다. 4.19 혁명은 이승만을 몰아냈고, 5.18 때는 충격적인 학살이 일어났으며, 6월 항쟁은 전두환의 항복을 받아낸 것에 비해, 부마민주항쟁은 10.26의 계기가 되어 유신정권을 끝낸 의의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12.12 군사반란으로 인한 신군부 정권이 들어서는 것은 막을 수 없었던 한계가 있었다는 것이다. 또 부산-경남 지역이 1990년 3당 합당 이후 보수화되면서 PK사람들이 자연스럽게 박정희 등 군부독재세력을 계승한 정당을 지지하게 됐고, 따라서 그를 전면 부정하는 이 항쟁을 높이 평가할 수 없게 되었다는 시각도 있다.
“87년 이후 절차적 민주화가 정착되면서 역설적으로 민주화운동에 대한 연구는 크게 줄었습니다. 밥벌이에 도움이 안 되니까요. 그래서 누가 해주길 기다리지 말고 내가 하자고 마음먹었지요. 그런데 부마항쟁 등 민주화운동들은 기초자료도 정리가 안 되어 있고, 문서도 많이 남아 있지 않더군요. 독재시절에 문서를 남기면 유죄의 증거가 될까봐 모두 다 없애 버린 거죠. 고민하던 차에 그렇다면 살아있는 사람들로부터 증언을 모으자는 생각을 하게 됐습니다.”
그렇게 2006년부터 시작한 구술작업이 이제 10년이 넘었다. 문서 자료가 충분치 않을 때 해당 사건을 직접 경험한 사람들로부터 증언을 모으는 ‘구술사 방법론’은 사회과학에 도입된 역사가 짧지만 아주 빠른 속도로 보급된 효과적인 연구 방법이다. 부마항쟁과 민주화운동 분야에서 그가 해온 구술작업은 그간 여러 편의 논문과 저술로 결실을 맺는 성과를 남겼다.
“제 박사논문도 구술사 방법론으로 작업한 것인데, 부마항쟁에 참여한 다양한 민중들 중에서 노동자들이 어떤 생각을 가지고 어떤 방식으로 참여했는지를 연구한 것입니다. 한계가 많습니다만 나름 성과도 있었고요. 아직 부마항쟁 연구에는 제 논문 이후에도 석사나 박사 논문이 없습니다. 이런 점이 아쉽지요.”
구술작업을 하면서 수많은 사람을 만나다보니 인간적으로 안타까운 사연도 있었고, 잊을 수 없는 놀라운 이야기를 듣게 되기도 했다. 부마항쟁 당시 마산에서 시위에 참여했던 여대생들을 만났을 때도 그랬다. 시위 도중 경찰에 연행되어 성적인 수치심을 주는 언행과 심한 고문을 당한 이들이었다. 구술하는 도중에 감정이 북받쳐 우는 그들을 보면서 정말 마음이 아팠다고 차 소장은 말했다. 그 당시 고문의 트라우마 때문에 그들은 4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정상적인 삶을 살지 못하고 있다.
“당시 부산의 대학생이었다는 한 시위 참여자의 증언도 잊을 수가 없어요. 계엄군과 긴박하게 쫓고 쫓기던 깊은 밤에, 눈앞에 갑자기 여고생쯤 된 소복을 입은 여학생이 나타나더랍니다. 그 여학생이 청년의 팔짱을 끼면서 ‘오빠, 아버지 제산데 왜 이렇게 늦었어’ 하더래요. 뒤쫓아오던 계엄군은 그들을 망연히 바라볼 수밖에 없었죠. 그녀를 따라 바로 옆에 있는 집으로 들어갔는데, 거기에 자기처럼 위험을 모면한 사람들이 여럿 모여 있었답니다.”
차 위원은 “그런 일을 직접 겪지 않은 사람이 지어내서 할 수 있는 얘기는 아니었다”면서, 그 당시 시민들이 어떻게 그런 용기를 발휘했는지 놀라울 뿐이라고 덧붙였다.
“새롭게 출발한 진상규명위, 할 일 쌓였지만 잘 될 것”
이처럼 부산, 경남 지역 시민들의 민주화 열망이 담긴 부마민주항쟁에 대해 지난 2014년에야 진상규명위원회가 출범했지만, 그동안 제대로 된 조사가 이루어지지 못했다는 비판을 받았다. 박근혜 정부 당시 구성된 위원회는 그간 사료 비판 없이 관변 자료에 과도하게 의존하는 등 부실 조사 논란에 시달렸다. 지난 3월에 차 상임위원을 포함한 다섯 명의 위원이 새로 위촉되어 위원회가 새롭게 출발했지만, 아직 해야 할 일이 산적해있다.
“1,563명에 달하는 연행자 중에서 겨우 200명밖에 조사를 하지 못했어요. 나머지 사람들에 대한 조사도 해야 하고, 아직 조사가 미흡하거나 안 된 사건들도 많습니다. 부마민주항쟁기념재단도 설립해야 하죠. 내년은 부마항쟁 40주년이라서 이를 계기로 국가기념일 지정을 위한 시민들의 운동도 활발해지고 있습니다. 이 모든 일을 짧은 기간 동안 해내야 하기 때문에 만만치가 않습니다. 법을 개정해서 조사기간을 연장해야 하는데 아직 국회에 계류 중이죠. 하지만 부산과 마산의 시민들이 강한 의지로 나서고 있기 때문에 잘 되리라 생각합니다.”
1990년, 당시로는 남들보다 늦은 결혼을 한 그는 아내와의 사이에 딸 셋을 두고 있다. 가족이 함께 찍은 사진 속에 나란히 선 세 딸의 얼굴은 티 없이 밝기만 하다. 어떤 삶을 살든, 어떤 경험을 했든, 결국 사람의 삶은 기본적으로 다 비슷비슷한 것이 아닐까. 독재 타도와 민주화의 깃발을 들었던 7,80년대 학번도, 졸업 무렵 IMF 사태를 만나 신자유주의라는 격랑에 휩쓸린 90년대 학번도, 살인적인 무한경쟁에 청춘의 낭만을 즐길 시간도 여유도 없는 2000년대 학번도.
“가족과 함께 행복하게 살기 위해 노력한다”는 차 위원의 말은 이 세상 모든 아버지들이 그런 것처럼 평범했지만 솔직했다. “김상진기념사업회가 지금까지 많은 사업들을 잘 해 오신 것으로 안다”는 그는 “미력하나마 할 수 있는 힘을 보태겠다”는 말로 인터뷰를 맺었다.
차 위원을 비롯한 많은 이들의 노력으로 부마민주항쟁은 한국 현대사 속에 새로운 조명을 받고, 그 의의를 제대로 평가받게 됐다. 부마민주항쟁 기념재단 설립을 위한 첫 회의가 시작되었고, 내년 부마민주항쟁 40주년을 맞아 국가기념일 제정 논의도 활발해지고 있다. 자라나는 세대는 자칫 잊힐 뻔했던 부마민주항쟁을 기억할 수 있게 됐다. 사람들의 노력이 역사를 새롭게 쓰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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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은경 _ 대학 졸업 후 인터넷 신문 ‘민중의소리’ 기자로 일했다. 남보다 조금 더 잘하고 가장 즐겁게 하는 일이 글쓰기여서, 아무래도 이것이 평생의 업이 되지 싶다. 저마다 다양한 사연을 안고 다양한 모습으로 살아가는 인간들의 이야기에 깊은 관심이 있다 . 김상진기념사업회에서는 선구자 편집주간을 맡고있다 . (atree12fly@daum.net)
Last modified: 2024-08-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