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세진 선구자 편집위원
부천시장 재선과 국회의원 5선을 지낸 원혜영 의원은 20대 국회를 끝으로 정계를 은퇴하고 아름다운 삶의 마무리를 위한 길을 걷고 있다. 천만 노인시대, 인류 역사상 처음 맞는 장수시대에 한 해 사망자는 30만 명에 이르고 사망 전 1년간 치료비는 인당 2천만 원이 넘는다. 병원과 요양병원 병상에 누워 있는 노인이 70만 명, 이들에게 들어가는 국민건강보험공단의 장기요양보험 총급여는 11조 원이 훌쩍 넘는다. 이중 10만 명이 연명치료를 받지 않겠다고 하면 연간 2조 원의 의료비가 절감된다며 웰다잉의 중요성을 이야기하는 원혜영 의원을 만나 학창 시절부터 평생 이어온 민주화의 삶을 들어봤다. <편집자 주>
대학 입학 첫해, 제적과 강제징집
제가 71년도에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역사교육과에 입학을 했어요. 그때 서울대학이 1학년 학생들을 교양과정부라고 별도의 교양학부를 만들어서 단과대학으로 운영했어요. 그해 박정희가 유신 독재 체제 구축을 위해 대학 정화 작업을 했어요. 당시는 노동조합이나 시민사회가 활성화되어있지 않았던 시대여서 제일 시끄럽고 귀찮은 데가 대학이었죠. 71년 10월 15일에 위수령을 발동해서 대학에서 문제 일으키는 사람들을 다 제거를 해요. 그때 전국에 170여 명의 학생들이 제적당하고 강제 입영을 해요. 저도 71년에 서울대학교 교양과정부 학생회장을 하며 유신헌법 반대 시위로 긴급조치 위반으로 11월 20일 육군에 강제징집됐죠.
74년도 가을에 복학해서 1학년을 마쳤죠. 2학년이 된 75년도가 서울 관악산 캠퍼스 시대가 열리는 첫 해예요. 다른 대학들하고 달리 대학이 장위동, 제기동 등 각지에 분산돼 있던 단과대학을 통합해서 캠퍼스를 운영하기 시작하면서 악 시대가 온거죠. 그해 4월 3일, 관악캠퍼스 최초 시위를 제가 주동했어요. ‘민청학련 구속자 석방, 유신헌법 철폐’ 시위를 주동하고 도피 생활을 하던 중에 김상진 열사 할복자결 소식을 듣고 굉장히 충격을 받고 동요를 했죠. 김상진 학형의 죽음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되나 또 어떻게 대응해야 되나 고민하던 가운데 제가 잡혀서 감옥에 갔어요. 그 직후에 5.22 사건이 터진 거예요. 감옥에 있다가 나중에 5.22에 관련자들이 줄줄이 잡혀오면서 반갑기도 했고(웃음) 또 큰 고생을 한 것도 알게 됐죠. 5.22 추모식 참여자들이 다 동료이고 선후배들이니까, 그 이후 김상진 열사 추모 모임에 같이 참석도 하고 쭉 그랬었죠.
그때 내가 주동한 서울대 4.3시위 등이 터지면서 긴급조치 9호가 발동됐거든요. 그래서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 위반으로 구속돼서 징역 1년에 집행유예 2년을 받았죠. 6~7개월 살다가 가을에 출감을 했죠. 출감 후에도 유신 체제가 기승을 부릴 때니까 박정희가 10.26으로 살해당할 때까지는 복학을 못 했죠. 그러다가 10.26 이후 유신 체제가 끝나면서 서울의 봄시기에 잠시 민주화 바람이 불 때(80년 3월) 복학해서 학교를 다니다가 5.17 쿠데타가 일어나고 광주 학살 일어나면서 다시 제적당했어요. 지명수배 되고 도피 생활하고 그러다가 87년 6월 시민항쟁 때 6.29 선언 일어나고 전두환 독재 체제도 종식되고 상대적이지만 민주화가 되면서 복학했죠. 근데 그때는 제가 또 다른 활동을 하고, 국회의원도 하고 그러던 과정에서 뒤늦게 96년도 봄에 졸업을 했어요. 25년 만에, 4반세기 만에 졸업을 하게 됐죠.(웃음)
이웃을 사랑하는 방법으로 탄생한 유기농산물, 압구정동에 직매장을 열다
79년도에 결혼도 하고 아기도 낳고 했어요. ‘YWCA 위장결혼식’ 사건으로 지명수배당해서 도망다니다가 전두환 신군부가 정권을 탄생시킨 후 유화책을 써서 지명수배가 해제됐어요. 그런데 우리 집사람이 한국일보사 기자였는데 전두환 신군부가 80년도에 강제 해직을 시켰어요. 먹고 살 대책이 필요해진 거죠. 80년도에 대학교 중퇴 학력에 요시찰 인물로 경찰들이 항상 따라붙다보니 취직이 어려웠죠. 그러던 중 생계 대책으로 부모님이 하시는 ‘풀무원농장의 유기농산물을 가치를 아는 소비자들에게 판매를 하면 장사가 되겠구나’ 이런 생각을 한 거죠.
우리 풀무원농장에서 유기농업을 국내 최초로 개척했어요. 유기농법이 무슨 기술이 뒷받침된 게 아니고 선한 의지로, 성경에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 그랬는데 우리 농사짓는 사람들은 내 이웃을 사랑하는 방법은 좋은 농산물을 공급하는 거라는 생각이었죠. ‘좋지 않은, 공해가 있는 농산물을 농사지어서 공급하는 건 성경의 이웃사랑 정신에 어긋나는 거 아니냐, 그러니까 우리라도 이웃사랑의 정신으로 이웃에게 좋은 농산물, 해로운 공해가 없는 농산물을 생산해서 공급하자’는게 유기농업 운동의 시작이었죠.
유기농법으로 풀무원 농장이 유명해지면서 내가 생각한 게 ‘아 이 풀무원 농장의 농산물, 유기농산물을 판매하면 그 가치를 인정해 주는 소비자들에게 제 값을 받고 팔 수 있지 않겠냐’ 이게 풀무원 식품 창업 당시에 시장 진단이자 사업 구상이었죠. ‘싼 게 좋다, 보기 좋고 때깔 좋은 농산물이 더 좋다’는 인식이 보편적이었지만 일부는 ‘그렇지 않다. 자연의 법칙대로 화학물질과 공해물질을 사용하지 않고 자연적인 방법으로 농사를 지은 유기농산물이 훨씬 더 가치 있다’는걸 아는 극소수의 소비자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거죠. 그렇게 해서 81년 봄에 압구정동에 ‘풀무원농장 무공해 농산물 직매장’을 시작했죠.
그런데 사업을 하다 보니까 농산물 유통이 자연의 섭리와 다 연결돼 있잖아요. 유기농업은 농약 같은 걸 안 치니까 자연의 상태에 따라 변동이 더 심했죠. 배추밭이나 열무밭이 폭삭 망가지기도 하고 벌레 때문에 농사가 망하기도 하다보니 소비자들이 원해도 공급을 못하고 그런 점에서 사업의 한계에 부딪혔죠. 돌파구로 농산물뿐만이 아니라 소비자들이 식탁에서 일상적으로 먹는 대표적인 식품인 두부, 콩나물을 자연적인 방법으로 생산해서 공급하기로 했어요. 풀무원 식품 사업의 성격에도 맞고 고객에게 더 다양한 상품을 제공할 수 있고 사업적으로도 확대될 수가 있겠구나 해서 두부, 콩나물 제조 사업으로 발전한 거고 그게 오늘날 풀무원 식품의 기반이 됐습니다.
민주화를 위해 정치에 참여하기 시작
86년 말까지 사업을 꾸준히 하다가 사회의 민주화 운동에 복귀하기 위해서 사업을 정리했어요. 마침 87년도 6월 시민항쟁이 일어나고 6.29 선언 이후 정치적 자유가 허용되면서 우리 사회 민주화를 위해서는 정치에 적극 참여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됐죠. 그런 생각에 공감하는 학생운동 출신 청년들이 88년에 한겨레민주당을 만들어서 정치에 참여를 하게 돼요. 당시 3김시대였는데 김대중, 김영삼, 김종필이 쪼개져서 대통령 선거 나왔죠. 청년 학생운동 출신 세력이 양김분열을 비판하고 ‘독자적인 정치 세력을 구축하자’며 새정치 운동에 참여해서 한겨레 민주당으로 출마했는데 보기 좋게 다 떨어졌죠. 결국 3김 분열로 노태우 장군을 쿠데타가 아닌 국민의 투표로 합법적으로 집권하게 만들어준 셈이 됐어요. 그 뒤에 정치 활동을 쭉 하게 된 거죠. 이후 야권 통합 운동을 하고 92년도에는 제가 국회에 가게 됐어요.
92년에 14대 국회에 초선 국회의원으로 등원을 했죠. 그런데 또 정치적인 풍파가 생긴 게 96년에 15대 대선을 할 무렵에 92년도 대선 후 정계은퇴를 했던 김대중 총재가 복귀를 하고 대통령 선거에 다시 나와요. 그 과정에서 은퇴했다가 복귀하면서 민주당이 순순하게 자기를 따라주지 않으니까 새정치국민회의라는 새로운 정당을 만들었어요. 새정치국회의를 만들 때 ‘이건 야권 분열이니까 안 된다’라고 반대하고 민주당을 지켰던 사람들이 노무현 의원이랑 김원기 의장님, 최종국 의원, 유인택 의원, 저 이런 사람들이 민주당을 지킨 거예요. 그래서 그때 재선에 실패했어요.
문화도시 부천, 세계 최초로 버스 도착시간 안내 시스템 도입
96년도 봄 선거에 재선에 실패하고 2년 지나서 98년에 부천시장이 됐죠. 부천시장이 된 게 저로서는 가장 복 받은 일이라고 생각해요. 시장으로서 부천을 문화도시로 만들기 위해서 여러 가지 사업을 했어요. 부천 국제 판타스틱 영화제에서 이를테면 AI 주제 영화상영전도 하고 부천이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만화영화, 애니메이션 문화도시가 되게 하는 사업을 한 게 아주 큰 보람이죠. 부천시장이 되었을 때 저의 가장 큰 관심사는 특색없는 수도권의 여러 도시 중 하나였던 부천을 어떻게 하면 주목 받는 도시로 만들 것인가 하는 것이었어요. 도시가 발전하려면 시민들이 애착과 자부심을 느낄수 있어야 하는데 부천시는 무엇으로 시민들에게 자부심을 심어줄 것인가 고심 끝에 해답은 ‘문화’라는 데에 생각이 미쳤습니다. 그렇게 시작 된 ‘문화도시 부천’을 향한 긴 여정의 첫번째 열매가 된 것이 바로 부천국제만화축제였죠.
그리고 제일 자랑할 만 일이라고 생각하는 게 제가 부천에서 2001년도에 한국 최초, 세계 최초로 버스 도착시간 안내 시스템을 실용화한 거예요. 버스 타실 때 전광판에 버스 도착시간이 딱 뜨잖아요. ‘12번 버스 5분 뒤 도착, 세 정거장 전 출발’ 이렇게 돼 있잖아요. 지금은 뉴욕도 하고, 베이징도 하고, 런던도 하죠. 그런 일들을 아주 열심히 보람 있게 잘했죠.
국회선진화법과 연명의료결정법
부천시장에 재선으로 당선되어 일하던 중 노무현 대통령이 당선되고 탄핵사태 때 신당이 만들어지면서 중앙정치 복귀 요청을 받아서 재선시장으로 일하다가 그만두고 2004년도에 17대 국회로 다시 돌아오게 됐고 20대까지, 2020년 봄까지 국회의원으로 일했죠.
국회에서 했던 대표적인 활동은 국회선진화법과 연명의료결정법이라고 생각합니다. 국회선진화법은 국회에서 몸싸움을 방지하고 대신 필리버스터를 허용하는 내용을 핵심으로 하고 있죠. ‘몸싸움 국회’라는 오명을 벗고 의견진술을 진행하는 필리버스터를 통해 ‘일하는 국회’를 만들기 위한 법안이죠.
연명의료결정법은 정확하게 말하면 ‘호스피스 완화의료 및 연명의료 결정에 관한 법률’을 줄여서 연명의료결정법이라고 얘기해요. 연명의료를 안 받을 수 있는 권리를 보장한 법을 제정한 거예요.
현대의학이 발달하면서 생긴 문제가 옛날 같으면 그냥 자연사하실 분이 지금은 인공호흡기 끼고, 심폐소생술하고, 투석하고, 항암 치료해서 목숨만 연명하는 경우가 엄청 늘어난 거예요.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나는 저렇게 고생하면서, 또 가족들에게 부담 주면서 무의미하게 목숨만 연명하고 싶지 않다’는 희망이 강력한 사회적 요구로 등장했는데 법적으로 허용이 안 되고 있었어요. 그래서 법을 만들어 달라는 얘기를 듣고 2015년에 ‘웰다잉 문화조성을 위한 국회의원 모임’을 만들어 입법 활동을 해서 2016년도 2월에 연명의료에 대한 자기결정권을 보장하는 법률 연명의료결정법을 제정합니다.
연명의료 결정법이 2016년에 제정이 되고 2018년부터 시행돼서 지금 7년 차인데 저는 빠르게, 순조롭게 잘 진행되고 있다고 생각해요. 법이 시행된 지 7년 만에 200만 명이 넘는 시민들이 무의미한 연명 치료를 거부하는 사전연명의료의향서를 작성하고 있습니다. 가까운 동네 보건소나 건강보험공단 지사에 가서 상담하고 등록을 하면 국가가 그걸 보장을 해 줍니다.
정계은퇴 후 시작한 웰다잉 문화운동은 은퇴자로서 봉사활동
20대 국회 끝으로 ‘정치 그만하겠습니다.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저는 제3의 인생을 새롭게 시작하겠습니다’하고 정계를 은퇴했어요. 지금은 웰다잉 문화운동을 하고있죠. 새로운 직업, 새로운 사업 이런 개념이 아니라 봉사활동으로, 은퇴자로서 봉사한다는 개념으로 하고 있어요.연명의료 결정법을 바탕으로 무의미한 연명 치료를 받지 않는 웰다잉 문화가 우리 사회에 확산되도록 봉사하는게 좋겠다 생각에 은퇴 후 웰다잉 운동을 하고 있는 겁니다.
제가 복 받았다고 생각을 하는 게 제가 입법 활동을 한 성과물이 잘 발전하고 확산될 수 있도록 노력을 하는 활동을 할 수 있다는 거죠. 많은 분들이 법의 취지를 잘 이해하고 자기 삶을 자신의 뜻대로 마무리하는 문화를 만드는 게 참 중요한 일이고 또 그 법이 잘 시행될 수 있도록 돕는 것도 참 보람 있고 의미 있는 일이라는 생각을 하게돼요.
아직 법에 미비한 게 많이 있어요. 이를테면 인공호흡기는 안 낄 수 있어요. 그런데 인공 영양 급식 즉 호스로 강제 영양 급식하는 거는 내가 안 하겠다고 해도 허용이 안 돼요. 강제로 해야 돼요. 이런 모순들이 있어서 개선할 과제들이 남아 있죠.
자기 삶을 주체적으로 마무리, 내 생명에 대한 결정을 내가 하는 것
웰다잉이 중요한 게 베이비부머 세대가 은퇴하고 노인이 된 인구가 800만 이거든요. 베이비부머 세대가 인류 역사상 없었던 장수시대를 맞이하고 있어요. 은퇴해서도 30년을 더 살아야 되는 이 새로운 상황에 다들 어려움을 느끼는 거죠. 지금처럼 나이 먹으면 본인의 존재 의미나 가치도 모르고 또 무기력하게, 내 삶을 내 뜻대로 어떻게 꾸려갈지에 대한 준비나 훈련, 사회적인 뒷받침이 없는 상태에 놓이게 되는 거죠. 그래서 이 웰다잉 문화가 초고령 사회 장수 시대에 그야말로 천만 노인들이 자기 삶을 보다 주체적으로 당당하게 결정하고 실천하는 생활문화를 만드는 참 중요한 일이다 이렇게 생각하고 있어요.
제가 적극적으로 소개하고 권하는 건 내 생명에 대한 결정이에요. 내 삶을 마무리하는 과정에서 내 생명에 대한 결정을 내가 하는 게 중요하다. 그걸 왜 병원에 맡기고, 자식 손에 맡겨서 내가 겪지 않아도 될 원치 않는 고통을 겪고 가족들에게 부담을 주느냐, 그리고 사회적으로 얼마나 큰 낭비냐 이런 걸 생각해보고 결정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중요한 거죠.
내 땀방울이 깃든 재산 정리, 유언장 쓰기는 당연한 책임
또 하나가 내가 평생 모은 내 재산을 내 뜻대로 정리하는 것도 중요한 과제인 것 같아요. 그러기 위해서는 유언장을 써야하죠. 내가 유언장을 쓰지 않고 세상을 떠나면 우애롭게 지내야 할 자식들, 또 형제 간에 분쟁이 날 가능성이 커지는 거죠. 물론 유언장을 안 썼다고 무조건 다 싸우고 다툼이 생기는건 아니지만 내가 유언장을 쓰면 분쟁이 일어날 일을 충분히 예방할 수 있는데 유언장을 안 써서 상속 분쟁이 일어난다면 그게 얼마나 안타까운 일이겠어요. 그건 내가 해야 할 일을 방기했기 때문에 생기는 문제이기에 더 안타까운 일이 되는 거죠. 그래서 유언장 쓰기 운동을 열심히 하고 있습니다. 우리 사회가 지금은 아무도 안 써요. 흔히 유언장 쓰라고 얘기를 하면 ‘유언장이야 재벌들이나 쓰는 거지 뭐 나같이 뭐 서민들이 쓸 게 뭐있어’ 그러는데 재벌들도 유언장을 안 써서 최근에 LG그룹이 자식들 간에 재판을 하고 있어요.
내 뜻대로 내 삶을 마무리하는 게 웰다잉의 기본 핵심 원리인데 내 손때가 묻고 땀방울이 길들여져 있는 재산이 크든 작든 소중하긴 마찬가지 아니겠어요? 돈 많은 사람의 강남에 있는 빌딩이나 변두리에 작은 연립주택, 아파트 하나도 다 똑같고, 하다못해 전세 보증금도 작다면 작지만 크다면 클 수도 있는 거란 말이죠. 그러니까 그걸 귀하게 생각하고 내가 세상을 떠날 때 내 뜻대로 잘 정리하는 것이야말로 당연히 해야 할 책임인데 그걸 기피해서 자녀들이 싸우게 하고 내 재산을 법원이, 판사가 결정하게 만드는 것이야말로 얼마나 무책임한 일이겠어요.
그래서 유언장 쓰기 운동을 요새 열심히 강조하고 댕깁니다.
유산 기부, 내가 마지막 돈을 마음껏 써볼 수 있는 기회
그 일환으로 유산 기부도 얘기하고 있습니다. 기부가 좋은 일이라는 건 다 알지만 평상시에는 있는 분은 있는 분대로, 없는 분은 없는 분대로 쪼들리고 살잖아요.
평생 마음 편하게, 통 크게 마음껏 돈 써볼 기회가 없이 사는데 내가 마지막 돈을 마음껏 써볼 수 있는 기회가 죽을 때 아니에요?(웃음)
사람은 누구나 죽는 거고 죽을 때 한 푼도 못 가져가는 거는 만고의 진리니까 그게 100만 원이 됐든 100억 원이 됐든 어차피 내가 못 가져가는 걸 어떡할까 생각해보자는 거죠. 그리고 우리는 자식들에게 몰빵했는데 이제는 ‘장수시대’이다 보니까 통계적으로 80대 90대에 죽는다면 자식들이 60대 70대가 돼버린 거예요. 자식도 자식 다 키우고 은퇴한 입장에 물려준다는 게 그렇게 절절한 의미가 없는 걸 수 있는 거죠. 물론 자식에게 안 물려주면 누구한테 물려주겠어요? 물려주는 건 좋은데 그중에 일부 영국식으로는 레거시 텐(Legacy 10) 유산의 10%는 좀 좋은 일이라 써보자. 이게 유산기부죠. 어차피 못 가져갈 거 그렇다고 자식한테 물려주는 게 그렇게 절실하고, 그렇게 안 하면 큰일 나는 것도 아닌 사회적 변화가 있잖아요? 그런 점에서 ‘내가 피땀 흘려 모은 귀한 재산을, 크든 작든 내 전부의 일부를 10%든 1%든 또는 50%든 좋은 일에 써보자’라고 한번 생각해보자. 이게 유산기부죠. 영국 같은 데는 오랫동안 산업혁명으로 부를 축적하는 과정이 이루어져 온 탓이겠지만 최근에는 기부의 3분의 1이 유산 기부로 이루어진다고 해요.
어차피 다 놓고 갈 때를 생각해보면 넓은 마음으로 이 문제를 우리가 대처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죠.
회원들이 다함께 참여해 50주년을 기념했으면
지난 4월에 김상진 열사 49주년을 맞이하면서 ‘아 오랜 세월이 흘렀구나. 사람이 겪으면서 경험할 수 있는 기간에 최대한이 50인데 벌써 내년이 50주년이구나’라는 생각을 했죠.
50주년을 앞두고 김상진 열사의 삶과 또 죽음에 대해서 한번 우리가 다시 잘 정리하고 그걸 우리 삶으로 어떻게 잘 연결시키고 받아들일 것인가에 대해서 좀 크게 정리해 보는 기회가 되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내년도 50주년 행사가 우리 김기사의 오랫동안 헌신해보고 애쓰신 그걸 이끌어 오신 분들과 나 같이 이렇게 회원격인 사람도 다 참여해서 김상진열사의 50주년을 뜻있게 우리가 잘 준비하고 정리하는 계기로 삼았으면 좋겠습니다.
걸핏하면 고성과 몸싸움이 난무하는 국회에서 5선을 지내온 사실이 믿기지 않을 작은 체구에 온화한 미소, 푸근한 말투의 원혜영 의원은 아직도 대중교통을 이용하고 하루 만보걷기를 하며 건강을 유지하고 있다. 건강하게 살아야 건강하게 삶을 마무리할 수 있다는 생각에서 이다. 민주화를 위해 애쓰던 평생의 삶, 그 삶을 아름답고 품위있게 마무리하려는 마음은 혼자만의 생각에 그치지 않고, 천만노인이 자신의 삶을 아름답게 마무리할 수 있도록 돕는 삶으로 이어지고 있다. 어떤 삶을 살아왔던, 한 개인의 삶에 대한 평가는 누구도 섣부르게 할 수 없는 것. 그 삶의 끝이 무기력하게 병원에서, 요양원에서 원치않는 시술로 연명되지 않도록, 주체적으로 삶을 마무리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 민주화의 길에서 결코 동떨어진 것이 아니라는 생각에 그 행보에 감사하는 마음이 든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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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세진 _ 숭의여전 문창과에 입학, 문예창작보다 학보사 기사를 더 열심히 쓰고, 졸업 후 전국연합 기관지 ‘민’, 건강사회를 위한 치과의사회 신문 ‘건치신문’ 만드는 일을 하였다. 이후 성공회대 사회학과에서 공부하고 KOICA 봉사단을 다녀온 후 다양한 사람들의 인생을 인터뷰하고있다. (sejin3025@hanmail.net)
Last modified: 2024-08-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