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ritten by 11:51 오후 136호(2024.04)

[선구자 인터뷰]
기억하지 않는 역사는 의미가 없다
김상진 열사 50주년 기념사업 추진위원장 안병권(농생물 79)

임세진 선구자 편집위원

2025년, 내년은 김상진 열사 의거 50주년이 되는 해이다. 1975년 4월 11일 할복하며 유신독재에 항거하고 민주화의 물꼬를 튼 김상진 열사의 뜻을 계승하기 위해 (사)김상진기념사업회는 ‘김상진열사 50주년 기념사업 추진위원회’를 발족하고 위원장으로 안병권 이야기농업연구소장(농생물, 79)을 위촉했다. 2019년부터 4년여간 독립 다큐멘터리 영화 <1975.김상진>을 감독·제작하기도 한 안병권 위원장을 만나 50주년을 맞아 준비하고 있는 사업과 추진방안 그리고 그간의 삶을 듣는 시간을 가졌다. ( 편집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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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평생 마음에 품고 사는 김상진 열사

먼저 50주년 기념사업 추진위원 위원장으로 위촉된 소감을 물었다.

“이웃과 공동체 또는 국가, 사회를 위해 헌신한 사람들이 많고 죽음으로 항거한 분들도 계시는데 그 대표적인 인물 중 하나가 김상진 열사라고 생각해 한평생 마음에 품고 살고 있습니다. 사람이 태어나 어떤 한 인물하고 이렇게 평생 같이 사는 경우가 쉽지 않잖아요. 서울농대를 매개로 김상진 열사와 인연을 맺게 됐는데 내가 입학하기 4년 전에 학내에 있었던 인물이 이렇게 평생 내 삶과 같이 갈 줄은 미처 몰랐거든요. 근데 김상진 열사가 참 자랑스러운 인물이라고 생각을 해요. 그래서 평생 내 삶의 곁에 있는 게 영광스러워요.

그렇게 그분의 이야기를 평생 품고 살다가 2019년부터 4년 동안 영화를 만들면서 그 양반 삶결로 확 뛰어 들어갔었는데 그 또한 내 인생에서 굉장히 유쾌하고 즐거운 여정이었어요. 그 작품의 품질 높낮이를 떠나서 총감독 입장에서 굉장히 소중한 역할로 기억이 되고 이후에 어떻게 콘텐츠를 이어갈까 고민하고 있었죠. 그러던 중 지난 2월 김상진기념사업회 이사회에 영화 <1975.김상진> 지역상영회 보고겸 2024년 계획을 의논하기 위해 참석했다가 50주년 기념사업회 추진위원장직을 요청받았죠. 느닷없이 받게 된 제안이라 처음엔 당황스러웠는데 순간 ‘거기까지가 내가 해야 하는 일’이라는 운명적 판단이 들더라고요. 영화 찍으면서도 느꼈지만 김상진 열사는 한국의 1970년대를 관통했던, 독재에 저항했던 물결의 정점에 있었던 양반인데 너무 저평가되어 있다는 생각이 많이 들었어요. 그래서 그것을 끌어올리고 후세에 알리는 작업이 서울농대인으로서 해야 될 마지막 작업이라고 생각했어요. 갑작스러웠지만 엄중하게, 의미 있게, 재기 발랄하게 50주년을 준비할 생각이에요.
그래서 시작을 했는데 앞으로 100주년을 맞이할 친구들에게 50주년을 잘 마무리해서 넘겨줘야 되는 여정에서 부담스러운 측면이 분명히 있어요.”

다큐영화 <1975.김상진> 광주전남시사회

김상진을 기억하는 유형 자산 세 가지 구상 김상진홀, 김상진 이미지(·무형), 백서

“50주년을 맞아 구상하고 있는 것은 첫째가 김상진기념사업회가 계속 추진해 온 관악 캠퍼스에 ‘김상진홀’ 지정인데요. 본관동 옆에 새로 지어진 건물에 ‘김상진홀’ 지정 추진을 위해 3월 28일에 정근우 회장, 최윤재 선생과 함께 서울농대를 방문, 장판식 학장과 기획팀 면담을 했어요. 그 자리에서 굉장히 고무적인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2층에 계단식 세미나실(116㎡/52석)을 김상진 홀로 하고 맞은편 강의실 2개를 하나는 1975호(55㎡/30석), 하나는 4.11호(55㎡/30석)로 구상하고 있다고 합니다. 그렇게 진행이 된다면 2층 열사의 공간(가칭)을 어떻게 잘 꾸밀 것인가 기획해야겠죠.

두 번째로는 50주년을 맞아 ‘김상진 이미지’를 만들고 싶어요. 쿠바의 체 게바라 하면 딱 떠오르는 이미지처럼 누구나 상상하는 그런 이미지를 만드는 거죠. 유·무형의 이미지를 형상화하고 그것이 파생돼서 여러 가지 콘텐츠들이 생산되겠죠. 김상진 홀에도 사용될 것이고 수원 캠퍼스 돌아가신 현장인 농생대교육관(구6동 강의동) 벽면에 크게 그림으로 넣을 수도 있고요. 그것을 바탕으로 돌아가신 잔디밭 현장, 강당 앞과 계단 등을 ‘김상진 기억의 공간’으로 만들고 싶어요. 지금은 바닥에 표지석만 하나 있는데 이게 좀 약해요. 전국적인 공모 등 다양한 형태로 아이디어를 내서 치밀하게 준비해서 김상진 기억의 장소로 만들 생각입니다.

세 번째 작업은 백서예요. 김상진 열사 20주년에 평전 『긴 겨울 얼음 뚫고』(김상진기념사업회, 1995)가 나왔지만 보다 구체적으로 75년 4월 11일 전후에 무슨 일들이 벌어졌는지 정리해보려고 합니다. 영화 찍을 때 모아둔 자료도 있지만 이후에 또 밝혀지는 얘기들이 많아요. 예를 들면 75년 4월 12일 김상진 열사가 사망한 후 공릉동 서울 공대에 양심선언문이 뿌려지고 4월 15일에 서울 공대에서 700명 정도가 장례식 추모 시위를 하는 사건이 있었는데 이 사실이 여태까지는 잘 알려지지 않았어요. 영화 제작을 마칠 즈음 알게 되어 영화에 담지 못했는데요. 이렇게 알려지지 않은 사실을 더 발굴해서 기록으로 남기려고 합니다. 또 당시 함께 계셨던 분들을 통해 돌아가시기 전에는 어떤 일이 있었고 당일은 어땠는지 살펴보고 가능하다면 협조를 얻어서 필요한 부분들은 영상 기록으로 남기고 싶고요. 경찰청이나 보안대, 당시 중앙정보부, 학교 당국은 어떻게 행동했는지 관련 기록이 있다면 입수해서 정리할 생각입니다. 또 1980년 4월 11일 서울의 봄 시기, 장례식 자료(이태근(농학, 78) 선배가 갖고 있다가 경찰에 빼앗긴 자료)도 최대한 발굴해서 백서 형태로 후세에게 넘겨야겠다는 생각입니다.
아울러 그 사건으로 상처받은 이들은 없는지, 또 트라우마를 입었거나 다양한 이유로 지금도 전면에 나서지 못하고 이런저런 의미로 말씀을 안 하시는 분들이 있거든요. 그런 분들 또한 최대한 찾아뵙고 미흡하나마 상처를 치유하고 마음을 열게 해 드리고, 나온 결과들은 기록으로 차곡차곡 일목요연하게 정리할 계획입니다.”

김상진을 기억하는 무형 자산 김상진을 기억하고 추모하는 후배들

“세 가지가 50주년에 눈에 보이는 목표가 될 것 같고요. 눈에 보이지 않는 무형의 자산으로는 역시 사람을 키우고 남기는 작업을 해야 된다는 생각입니다.
지금까지 우리들끼리, 나이 먹은 자들의 공간이었다고 하면 앞으로의 김상진 열사 추모와 방식과 공간, 이런 의미들을 젊은 세대들이 어떻게든 이어가게끔 했으면 해요. 예전에는 4월이면 추모 기간을 정하고 재학생들이 과별이든 뭐든 추모를 하고 형님의 삶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시간들이 있었거든요. 재미가 있든 없든 어울려서 김상진 열사를 기억하고 추모했던 흐름들이 있었는데 그게 딱 끊겼잖아요.
이제 김상진 홀도 생기고 나름대로 의미 있는 이미지들이 배치가 되면 서울대학교 재학생들을 대상으로 해마다 4월에 끊임없이 추모하고 명맥을 유지하게 하고 싶습니다. 축제나 행사, 심포지엄 등 요즘 친구들의 흐름에 맞는 방식으로 결합하는 방법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재학생들하고 학교, 동창회, 김상진기념사업회, 서울대 민주동문회가 50주년을 꼭지로 꿰매지도록 만들어야죠. 우리 후배들이 상진 형의 공간에 가서 체험하고 생각하고 느낄 수 있도록 하는 정도까지는 한번 해보자, 그래서 “100주년은 이제 자네들이 해야 할 몫일세”라고 전할 수 있는 작업들을 하려고 구상중입니다.”

전국을 다니며 스토리텔링 강사로 활동하는 안병권 위원장은 영화 <1975.김상진> 감독으로 전국 상영회를 이어가고 있다. 또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용역 「강제징집 및 녹화선도공작 피해자 증언채록」 조사원으로 채록 작업도 계속하고 있다. 빽빽한 일상 속에 50주년 기념사업 추진위원 위원장으로 위촉된 그는 50주년 기념사업을 1순위로 움직이겠다고 말한다. 아울러 영화 <1975.김상진>도 올해 춘천영화제를 시작으로 인권영화제 등 국내 영화제에 출품노력과 동시에 지역상영회와 공동체상영회를 계속하면서 내년 4월까지 기념사업회가 기획하에 전국 적재적소를 다니며 ‘50주년 준비 미팅 겸 상영회’로 꾸미는 방안을 강구 중이다.

김상진 열사를 평생 품에 안고 살게 된 계기와 그간의 삶을 들어봤다.

대학시절 만난 김상진 열사, 힘들 때 등을 토닥여주다

“고향은 경기도 양평이고요. 국민학교 2학년 때 대전으로 가서 고등학교까지 나왔죠. 1979년 대학에 발을 디딜 때부터 4년 전 할복·의거하신 김상진이라는 이름은 ‘전설’이었어요. 마지막 죽음 순간까지를 후배에게 녹음을 부탁해 ‘육성’으로 남긴 스물여섯 청년. “어떻게 그럴 수 있는 거지!”부터 “그 뜻을 이어받겠습니다”까지 20대 초반의 제게 형님의 삶은 ‘여러 가지 의미’ 그 자체였습니다. 그 후로 지금까지 일관되게 ‘정의로운 방향 나침반’이 되고 있죠.

81년에 학내시위로 무기정학 당했다가 82년 2학기에 복학했어요. 그러니까 4학년 때 아직 3학년이 된 거죠. 그런데 그해 겨울을 넘기고 다음 학기 83년 6월 8일, 학내시위 배후·조종혐의로 서둔동 자취방에서 긴급 체포되어 수원경찰서 보안분실에 닷새 동안 구금당했어요. 마지막 날 밤에 ‘내일 아침에 군대 간다’는 통보를 받았습니다. 전두환 정권의 강제징집·녹화공작이었죠. 멀리 계신 부모님을 뵐 수도 없고 친구나 선후배들을 만날 수도 없고…. 그때 늘 마음에 품었던 상진이 형이 생각났습니다.

‘무릎 꿇고 살지 마! 나쁜 짓 한 거 아니잖아? 군대 잘 다녀와. 토닥토닥’

그분에게서 위로 받고 다음날인 6월 13일, 씩씩하게 헌병 지프차에 실려 의정부 101보충대를거쳐 김화 백골 3사단으로 단독 입대했습니다.

제대 후 뛰어든 빈민운동

“제대를 하고 바로 빈민운동 쪽을 선택했어요. 그 당시에 서울농대생들은 학생운동 애프터 작업으로 노동운동과 농민운동으로 많이 갔는데 저는 조금 다른 선택을 했죠. 1985년 8월 15일 제대하고 8월 29일에 금천구 시흥동 달동네에 방 하나 얻어 살면서 학교 복학과 동시에 빈민운동을 시작했어요. 새봄교회에서 권춘택(78, 농학) 선배가 미리 활동을 하고 있었고 서울 의·치대생들하고 판을 짜고 있을 때 제가 결합해서 빈민 지역 활동을 한 10년 해요. 결혼도 그때 했죠. 마을 사람들이 사람으로 인정해 주는 기준 중 하나로 가정이 있느냐 없느냐가 굉장히 중요했거든요. 와이프가 간호사였는데 살림을 차리고 마을 입구에 가정의원(서울의대졸업생 원장)을 설립할 때 간호사로 취직해서 함께 활동했죠. 그리고 동네 시장 골목에 가게를 얻어서 부모님도 올라오시도록 했어요. 부모님께서 시장통에서 인삼가게를 운영하면서 터를 잡으셨어요. 지금은 도시재개발 아파트단지로 변했지요. 아버지는 돌아가시고 어머니는 아직 그 동네에 살고 계시죠.

지역에서 빈민운동을 하면서 1988년 이후에는 민주쟁취국민운동본부 구로지역 위원장으로 한 2년 반 활동을 해요. 한편으로 생업으로 여의도에 풀무원 내추럴하우스라는 유기농산물 전문 프랜차이즈점을 오픈해요. 그것을 계기로 유기농 관련사업 일을 15년 정도 진행하죠. 그러다 친구가 삼양사 올리고당 사업을 한번 해보자고 제안해서 전국총판을 했죠. 거기서 한번 고생을 해요. 94년도쯤에 부도가 난 거죠. 빚 청산을 하면서 경기도 화성으로 내려가게 되고 유기농 관련 업체에 취업을 해서 유통 사업을 계속하죠. ㈜풀무원 내추럴하우스 본사에서 유기농 팀장으로도 한 3년 정도 근무했죠. 유기농사업은 어느 경우든 ‘생산현장’이 핵심이므로 결국은 전국을 다니는 게 일이 되죠. 카메라 하나 들고….”

기록을 좋아하는 청년, 유기농을 기록하다

“저의 기본적인 특징 중 하나가 기록하는 걸 참 좋아했어요. 지금도 일기를 계속 써요. 50년 가까이 쓰고 있죠. 국민학교 4학년 때부터 쓴 일기장을 아직도 보관하고 있어요. 심지어 군대 끌려갔을 때도 대학 노트 3권 분량의 일기를 썼어요. 보안대에 안 들키게 쓰느라 고생 많이 했죠.(웃음)

1985년 4월 11일, 상진형 10주기 일기

제 사업의 관점은 농촌 현장의 실제 생산 과정을 사진과 영상으로 찍어서 상품에 반영하는 거예요. 그런 기록이 쌓여서 1999년도에 멀티미디어 벤처기업에서 유기농 사업을 기획해 달라는 제안과 투자를 받았어요. 그간의 기록 노하우를 기반으로 ㈜이팜이라는 유통사를 만들고 서울 목동에 대형 유기농 샵을 기획, 오픈했죠. ‘유기농 인터넷쇼핑몰(이팜)’도 오픈했고요.

2008년도에는 한국농업대학(現 한국농수산대학)에서 제안이 들어왔어요. 농업대학 졸업생들이 한 2천여 명 정도 되는데 이 친구들이 생산한 상품을 판매하는 유기농 샵부터 쇼핑몰 준비를 학교에서 하려고 한다. 졸업생들이 영농조합법인을 만들어서 사장 공채를 진행한다고 하더라고요. 공채로 뽑혀서 공동브랜드 ‘농온’(NongOn) 런칭과 인터넷쇼핑몰인 ‘농온넷’(www.nongon.net)을 오픈했죠.
쇼핑몰을 기획하고 전국을 다니면서 ‘결국은 스토리구나, 생산과 소비 영역에서 벌어지는 에피소드가 참 중요하구나’라는 생각에 스토리를 요긴하게 설계·활용하는 방법을 고민했죠.”

새로운 세상을 열어준 영상편집

“인터넷 시대가 오면서 현장에서 디지털카메라로 찍어서 이메일이나 홈피에 업로드하면 바로 고객에게 날아가는 시스템이 생긴 거죠. 그런 것들이 신기하면서 중요한 역할을 했죠. 그러던 중 내 인생에 큰 영향을 끼친 게 영상 편집기였어요.
파워포인트에 사진 넣고, 글 넣어 자동으로 페이지 넘기면서 BGM(음악)을 넣어서 돌리는 방법이 내 생각을 재미있게 표출하는 최신 버전이었어요. 그러다가 2007년도 7월 어느 날, 매직원이라는 ‘운명’을 만났어요. 지금은 없어진 동영상편집기(프로그램)인데 사진을 넣고, 길이(시간)를 느낌에 맞춰 마음대로 세팅하고 자막을 넣었어요. 배경음악을 업로드하고 동영상저장 버튼을 누르니까 음원이 깔리면서 한 편의 영상이 만들어지는 거야, 그날이 지금도 기억나는데 내 방 책상에서 벌떡 일어나 막 만세 부른 것이 기억나요. ‘이게 가능하구나, 이렇게 영화가 가능하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죠. 완전히 다른 세상으로 가는 거였죠. 그래서 그날로 보따리 싸들고 직원들에게 ‘일주일 동안 사라질 테니까 찾지 마’라고 말하고 두문불출하며 1주일 동안 매직원 프로그램을 완전히 섭렵했어요. 그 후 그동안 모아져 있던 수많은 기록들을 영상스토리로 표출하기 시작했죠.

유기농 유통사업도 제가 거의 1세대예요. ‘한살림’이나 생협, 초창기 1세대 멤버들하고 같은 시기에 활동했으니까요. 매장운영하고 온라인 쇼핑몰을 기획하면서 2007년도에 출판사 요청으로 첫 번째 책 『도시와 통하는 농촌쇼핑몰 만들기』도 쓰고 그랬으니까, 그런 기획이나 기록 쪽에 내가 좀 능했던 것 같아요.(웃음)”

스토리텔링 강사로서의 삶. 업무로 쌓은 자료는 최고의 자산

“2010년에 경북도청에서 운영하는 쇼핑몰 경북고향장터 <사이소> 생산 농가 70여 명과 도청 공무원 2~30명, 행정부지사 등이 모인 자리에서 농촌스토리텔링 특강을 했어요. 내 방식대로 경북농업에 대한 이야기를 내가 제작한 영상스토리 서너 개를 돌려가면서 한 2시간 풀었죠. 그게 인생의 반전이 됐어요. 강연 끝나고 일주일 후에 경북도청에서 ‘소장님 영상을 좀 만들어 주세요. 지난번에 보여줬던 그 방식대로 경북 사이소 생산 농가 중에서 10개 농가를 뽑아서 10가지 이야기를 만들어 주세요’라며 ‘용역은 뭐 그렇게 크진 않지만 2천만 원 배정하겠습니다’라고 하더라고요. 2010년도에 2천만 원이면 컸어요. 내가 유통 도매사업을 했지만 순이익 2천만 원 뽑으려면 매출을 한 3억 정도는 해야 됐죠. 그래서 ‘세상에, 내가 본 것을 이야기로 펼치는데 나라에서 돈까지 주는구나’라고 생각하며 시작을 한 게 내 ‘이야기농업’의 공식 출발점이 됐죠.
경북을 샅샅이 다니면서 10가지 이야기를 만들어서 납품하고 도청 ‘사이소’ 홈페이지에 업로드되면서 스토리텔링 강사로 전면적인 활동을 시작한 거죠. 2013년부터 코로나 이전까지 1년에 100회 이상 출강했어요. 그러니까 일주일에 거의 3~4일은 강의 일정으로 보냈어요. 남은 시간에는 요청 들어온 영상제작하면서 바쁘게 살았어요. 일을 하고 난 후에 자료는 계속 쌓이죠. 생생한 현장 자료가 내게는 최고의 자산이 되고, 어떤 경우, 어떤 키워드라도 다양한 자료들을 꺼내서 스토리텔링으로 재구성할 정도의 수준까지 됐죠.”

스토리두잉 강의 모습

다양한 자료와 기록은 이후 『이야기농업』 (2011)과 『안병권의 스토리두잉』 (2018 개정판) 두 권의 책으로 다시 정리, 출판0되었다.

어린 시절 꿈이 신문기자였던 그는 의사나 약사, 판검사는 남이 아프거나 안 좋은 상황을 이용해서 돈을 버는 직업이라 거부감이 생겼다고 한다. 기록을 좋아하는 그가 선택한 것은 삶을 기록하고 스토리를 만드는데 집중하는 것이었다. 그는 생동하는 것들에 대한 애착이 있는 것은 아닐까. 김상진 열사에 대한 열정도 우리를 살게 하고 움직이게 하는 열사의 뜻을 더 가슴깊이 새겼기 때문이리라 조심스레 짐작해 본다. 50주년을 맞아 더 살아있는 역사를 기록할 그의 행보가 주목된다.

구체적으로 기억하고 상상할 수 있어야 올바른 역사

끝으로 마무리 한 말씀을 부탁했다.
“역사는 지금을 살고 있는 사람들이 기억하지 않으면 의미가 없다고 생각해요. 그저 흘러가는, 흘러갈 게 역사가 아니고 어떤 일들이 있었는지 지금 우리가 구체적으로 기억하고 상상할 수 있어야 올바른 역사라고 생각해요.
오늘날 우리가 이렇게 편안하게 하늘을 보고 살 수 있는 이유 중에 하나는 민주주의 과정에 희생당한 김상진 열사 같은 분들이 계셨기 때문에 가능한 거죠. 그런데 그런 한국의 역사, 민주주의 역사를 얘기할 때 1970년대 노동열사 전태일 이후로 학생열사 김상진을 건너뛰고 80년대로 그냥 점프하는 경향을 뼈저리게 느꼈어요. 제일 안타까웠던 부분이에요. 분명히 1970년에 노동자 열사 전태일이 있고 75년에 학생 열사 김상진이 있는데…, 심지어 김상진 열사의 최후는 세계사적으로 유례가 없잖아요. 돌아가시는 순간을 육성으로 남긴 사람은 없어요. 내가 자료를 다 뒤져봤어요. 유서는 보통 다 남기는데 당신의 목소리를 남긴 경우는 없어요. 세계사적으로 인문학적 보고인 김상진 열사의 뜻과 의지가 너무 저평가돼 있는 게 아쉽습니다. 이것을 바로 세우려면 기억을 해야 하고, 또 상상을 하고 그다음에 그걸 기반기억으로 미래를 설계해야 되는 거죠. 그러려면 50주년이라는 터닝 포인트야말로 굉장히 중요하다는 생각입니다. 70년대 운동사를 얘기할 때 김상진 열사가 굉장히 중요한 분수령이 될 거라고 봐요. 그래서 김상진기념사업회 회원들뿐만이 아니라 우리 동문들이 이번에는 아주 마음 야물게 먹고 50주년을 준비하는 데 함께 동참해 주셨으면 하는 것이 추진위원장으로서 바라는 바입니다.
김상진 열사가 우리 시대에 다시 훨훨 날아다닐 수 있도록 꼼꼼하게 준비하겠습니다. 지금까지 생각하지 못했던 방식도 있다면 기꺼이 채택해서 젊은 친구들과의 연결고리로 꾸며보도록 노력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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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세진 _ 숭의여전 문창과에 입학, 문예창작보다 학보사 기사를 더 열심히 쓰고, 졸업 후 전국연합 기관지 ‘민’, 건강사회를 위한 치과의사회 신문 ‘건치신문’ 만드는 일을 하였다. 이후 성공회대 사회학과에서 공부하고 KOICA 봉사단을 다녀온 후 다양한 사람들의 인생을 인터뷰하고있다. (sejin3025@hanmail.net)

Last modified: 2024-05-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