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ritten by 8:41 오후 136호(2024.04)

[오정삼의 人 in 人]
어바웃타임

오정삼 삼양동 청소년아지트 센터장, 농경제 79

아내와 영화 『서울의 봄』을 봤다. 이미 알고 있는 역사적 사실인데도 불구하고, 혹시나 하는 마음 한켠의 조바심이 나는 걸 느끼면서 사람 마음이 참 희한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특히 영화에서 이태신(장태완) 수도방위사령관의 요청으로 반란군보다 먼저 서울로 진입했던 부평 주둔의 8공수여단이 마지막 순간에 철수하는 장면에서는 더욱이나 그랬다.

영화를 보면서 10여 년 전 봤던 멜로 코미디 장르에 속하면서도 따뜻한 가족애를 느끼게 하는 시간여행자를 다룬 영화 『어바웃 타임』이 떠올랐다. 시간여행을 다룬 영화나 드라마는 많다. 굳이 영국 드라마 『닥터 후』의 TARDIS라는 타임머신을 빌리지 않더라도 우리는 다양한 시간여행의 장면을 꿈꾸며 영화나 드라마를 본 경험이 있다.

영화 『어바웃 타임』에서는 주인공인 팀이 아버지로부터 가족의 비밀을 전해 듣게 된다. 그 비밀은 가문의 남자들이 과거 자신이 있었던 장소로의 시간여행이 가능하다는 것이었고, 처음에는 의심했으나 정말 시간여행이 가능하다는 것을 확인한 그는 첫눈에 반한 메리와의 사랑을 이루기 위해서 어설픈 고백, 서투르기만 했던 뜨거운 하룻밤에 대한 복기 등을 위해서 시간여행을 이용하기도 하고, 교통사고가 난 여동생의 행복을 되찾기 위해서 시간여행을 가기도 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폐암에 걸린 아버지와의 이별 여행을 경험하면서 인생은 매 순간이 행복하다는 것과 더 이상의 시간여행은 필요 없다고 느끼면서 영화는 막을 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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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게 시간여행의 기회가 주어진다면 어떤 순간으로 되돌아갈까? 정말 많은 장면들이 떠오른다. 대개의 경우는 아쉬움과 회한이 남는 장면들이다. 그러면서도 그 장면들을 선택하기는 쉽지 않아 보인다. 자칫하면 현재 나를 둘러싸고 있는 환경과 관계도 다 리셋될 듯하기에…. 아내, 아이들, 그리고 손녀딸까지. 그래서 관계가 리셋되지 않을 것 같은 역사적 사건 한 가지를 선택해 봤다.

1980년 5월 15일 서울의 봄 당시 20만 명이 모였던 서울역 집회 장소. 당시 대학 2학년이었던 나도 서울역에 모인 군중 속에 함께 있었고, 지금 생각해 보면 갓 스무 살을 넘기고 겨우 사회과학 서적 몇 권 밖에 못 읽은 처지임에도 불구하고 주위에 모여있는 사람들 앞에서 일장 연설을 하고 있었다. “12.12 사태라는 신군부가 주동이 된 쿠데타가 있었고, 그 쿠데타의 주범은 전두환입니다!”라고.

당시 우리는 군부의 저지선을 뚫고자 남대문으로 향했고, 남대문의 바리케이트 앞에서 돌과 화염병을 던지며 저들의 최루탄에 저항했다. 그리고 남대문으로 향하는 양옆의 고층빌딩에서는 시민들의 격려와 환호가 우리들을 더욱 용기백배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서울대 학생회와 학생운동 지도부는 신군부와의 싸움을 포기하고 소위 ‘서울역 회군’을 결정하게 된다. 그리고 ‘서울역 회군’의 과정은 훗날 역사가들에 의해서 서울대 학생회가 독단적으로 타 대학 학생회장들에게 강요했던 것으로 밝혀졌다.

아쉬운 것은 만약 신군부의 고도의 심리전에 말려들지 않고 서울에서 끝까지 싸웠다면 어땠을까? 그래서 더욱이 내가 그날 서울역으로 시간여행을 가서 학생운동 지도부에게 “신군부는 이틀 후인 5월 17일에 계엄령 선포를 준비하고 있다!” “지금 회군하는 것은 치명적인 전술적 오류이며, 만약 우리가 오늘 회군한다면 저들에게 폭력 진압의 자신감을 불러일으켜서 광주의 시민들에 대한 무자비한 폭력과 살인이 자행될 것이다!”라고 외쳤을 것이다. 물론 당시 학생운동 지도부가 나이 어린 2학년 짜리 풋내기의 외침을 들어주었을 리는 없지만 말이다.

굳이 따지고 보면 어차피 시간여행이 가능하지도 않을 것인데, 이런 상상이 부질없어 보이면서도 잠시나마 과거의 아쉬운 사건들에 대한 시간여행을 통해서 되짚어 리셋시켜 보는 것도 잠시나마 위안이 되는 느낌이 든다.

글을 마치면서 문득 애련한 한 장면이 떠오른다. 만약 내가 감옥 생활을 마치고 출소하던 날, 1년 6개월 동안 정성껏 옥바라지를 해주었던 그녀에게 크게 용기 내어 키스를 해주었다면 어땠을까?

아니다! 나는 그 장면으로 시간여행을 가지 않으리라. 나의 가족과 함께 하고 있는 지금 이 순간이 충분히 행복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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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정삼_ 젊은 시절 노동운동, 사회운동에 투신하였으며 결혼 후 30여 년 간 강북구 주민으로 살고 있다. 사단법인 삼양주민연대 사무국장으로 주민 참여와 자치를 통한 풀뿌리 민주주의를 확장하고 주민권익과 협동공동체를 실현하기 위한 활동에 매진하였으며, 현재는 삼양동 청소년아지트 센터장으로 ‘더불어 현재를 즐기고 미래를 여는 청소년’의 비전을 바탕으로 주체, 참여, 성장, 존중의 가치를 실현하고자 노력하고 있다. (baroaca@gmail.com)

Last modified: 2024-05-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