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세진 선구자 편집위원
안동에서 태어나 의성에서 초·중학교를 다니고 서울 보성고에 입학한 이호선 선배는 안종건(축산 68, 김상진기념사업회 초대회장) 선배와 함께 김상진 열사의 보성고 동기이다. 한 학년이 6반, 360명이었던 보성고에서 김상진 열사와 같은 반이 된 적은 없었지만 서로 알고 지내던 사이였다. 당시는 박정희 정권이 축산을 매우 강조하던 시기로 축산과 경쟁률이 5.9:1(1969년)로 인기가 높던 시기였다. 3명이 함께 축산과를 지원하여 김상진, 안종건 선배는 68학번으로 이호선 선배는 69학번으로 입학했다.
입학 후 3년 동안 서둔야학에서 활동했다. 함께하는 친구들과 ‘우리는 (대)학교를 다닌 게 아니라 서둔야학을 다녔다’는 이야기를 할 정도로 열심이었다. 한편 69년 3선개헌 반대투쟁 등 시위 경력으로 학생과에 요주의 인물로 찍혀 재학중 징집연기도 못 받고 군대에 끌려갔다. 군대 가서 이유도 모를 구타와 폭력에 시달리며 고생했다. 제대 후 복학, 4학년을 다니며 김상진 열사와 몇 과목의 수업을 같이 들었다. 1975년 4월 8일 인혁당 재건위 사건 며칠 후인 4월 10일 교육관에서 만난 김상진 열사는 이호선 선배에게 11일 집회 시국성토대회에 학우들을 모아달라고 도움을 요청하고, 함께 양심선언문을 검토했다.
김상진 열사 할복의거 현장의 생생한 증언과 이후 이호선 선배의 삶을 들어봤다.
<편집자 주>
함께한 집회 준비, 예상치 못했던 할복
“저는 75년도 4월 둘째 금요일을 항상 기억하고 있어요. 김상진 열사가 양심선언문을 저하고 같이 썼어요. 농대 교육관 잔디밭에서 앉아서 같이 보면서 ‘대통령에 대해서 너무 강하다. 조금 순화시키자’ 이런 식으로 조언해 가면서 매듭을 지었거든요. 그전에는 양심선언문이 조금 강했어요. 문구는 자세히 기억은 안 나는데 강해서 조금 순화시킨 거예요.
후배들에게 고마운 게, 당시 후배들이 복학생 얘기를 많이 따라줬어요. 그때 인혁당 재건위 사형집행으로 상진이가 분기탱천(憤氣撐天)한 상태였고, 저도 굉장히 분개한 상태여서 집회에 학우들을 모으는 것을 흔쾌히 수락했죠. 전날 오후에 교육관에서 만났을 때와 달리 당일 대강당 계단에서 만났을 때는 상진이 얼굴이 창백하고 매우 긴장된 표정이었어요. 저는 어제 같이 봤던 양심선언문을 낭독하는 일반적인 집회 자리로만 생각했죠. 학생들이 모이기 시작하는 모습을 보다가 ‘다 모였으니 시작하자’ 하고 계단을 걸어 내려와 저는 집회 대열에 앉아 있었어요. 상진이가 칼을 갖고 있는 것은 몰랐어요. 알았으면 제가 말렸죠. 양심선언문 낭독 도중에 표현하는 것과 분위기가 이상해서 살금살금 다가가서 연단에 접근하는 순간 과도로 할복을 했어요. 쓰러지는 순간 제가 붙잡았죠. 바로 둘러메고 나서니 당시 교내에 있던 경찰들이 교문을 활짝 열고 택시를 잡아줬어요. 택시에 태워서 제 무릎에 상진이 머리를 올리고 칼로 찌른 배를 제 손으로 막고 중동 파출소로 갔습니다. 시간이 지체될까 싶어서 경찰차로 에스코트를 요청한 거죠. 그리고 도립병원으로 갔죠. 수술은 잘 끝났다는 얘기를 들었는데 저녁 6-7시쯤에 재수술을 들어가야 한다고 해요. 간호원 말로는 내부 출혈이 생겨서 복부가 팽만해져 재수술 들어간다고 하길래 왜 출혈이 생기냐고 물으니 수술 중에 상진이가 몸을 비틀어서 출혈이 생긴 거 같다고 얘기하더라구요. 그게 사실인지 핑계인지는 알 수 없죠.”
그 이후 학교로 돌아오니 거리 진출을 시도했다가 실패한 학생들이 농대 대형강의실(205호실)에서 단식농성을 하고 있었다. 농성 중인 학생들에게 김상진 열사 상황을 보고하고 다음날 아침 일찍 도립병원을 다시 찾았다. 김상진 열사가 서울대병원으로 출발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학교로 돌아와 집회를 계속하던 중 엠블런스가 서울 들어가는 톨게이트쯤에서 김상진 열사가 운명했다는 얘기를 들었다.
“그 4월 둘째 주 금요일 이후에 우리 축산과가 쑥대밭이 됐어요. 저도 교수님이 도망 다니라고 해서 도망다니고 그 이후에 고생 좀 했습니다. 75년도에 다 정학, 제적, 무기정학을 당하고 나니까 20명 되는 사람 중에서 졸업생 한 4~5명밖에 안 돼요. 저하고 김상진 열사와 68 동기인 박동희 씨 두 명만 복학생이었어요. 후배들은 어려운 결과가 닥쳤는데 복학생 둘은 괜찮았단 말이죠. 그래서 미안한 마음이 좀 많이 깔려 있었어요. 그래서 그 후배들이 어떻게 지내는지 자주 소식을 묻곤 했죠.”
민주화 운동의 시발점, 김상진 열사 알리기는 긴 호흡으로 가야
“김상진 열사 의거 전에는 반독재, 삼선개헌 반대 같은 산발적인 이슈에 대항하는, 이슈를 타켓으로 하는 무브먼트(movement)였어요. 김상진 열사가 민주화 운동 개념의 출발점입니다. 민주화는 단순 명료해요. 헌법 제1조에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고 되어있어요. 나라의 주인은 국민이죠. 주인이 권리를 박탈당한 것, 그걸 되찾기 위한 운동이 민주화 운동이에요.
선구자의 김상진기념사업회에 대해서 한마디 부탁하고 싶은 거 우리는 이념의 집단이 아니고 기념의 집단이잖아요. 김상진 기념사업회지 이념사업회는 아니라는 거에 대해서는 인식을 같이 했으면 어떨까 싶어요. 맞나요?
우리는 민주화 운동을 한 사람이지 학생운동한 사람 아닙니다. 지금 국회의원들, 지금 대통령은 우리가 민주화 운동을 했기 때문에 존재하는 거예요. 그전에는 유신 헌법에서는 3분의 1은 대통령이 임명하고 대통령은 장충체육관에서 뽑았잖아요. 박정희가 그랬잖아요. 그걸 없앤 거예요. 나는 운동권이 아니고 민주화 운동을 했던 게 자랑스럽습니다. 우리 선구자도 김상진 열사 의거가 민주화 운동이라는 것을 한번 정리해서 썼으면 좋겠어요. 운동권에 대한 어떤 반감이라든가 오해가 많거든요. 저항적이고, 데모나하고, 반대만 하는 것이 운동권인 듯 표현이 잘못되고 있죠.”
“안중근 의사를 알게 된 게 해방 이후에도 한참 지나서입니다. 김상진 열사를 알리는데 50년은 아직 짧습니다. 7,80년 지나야 됩니다. 김상진은 그냥 운동권이라고 알고 있는 사람이 많은데 아니다, 민주화의 시작이다, 그것을 알게 되는데 앞으로 2-30년은 더 걸립니다.”
졸업과 조기취업, 삼성에서 자리를 잡다
졸업 전 마지막 학기 가을에 야쿠르트에 입사한 이호선 선배는 8개월 만에 그만두고 삼성에 입사했다. 6년간의 해외 근무를 마치고 돌아와 일에 미쳐있던(?) 그는 우리나라 최초의 아파트 재건축과 주상복합 건물을 기획하는 등 다양한 성과를 이뤄냈다. 현재에 머무르지 않고 늘 새로운 것을 추구하는 자세가 회사에서, 그리고 퇴직 후의 삶에 녹아나며 자긍심과 자신감을 만들고 있다.
“제가 76년 2월에 졸업했는데, 75년 10월에 야쿠르트 공채 1기로 졸업 전 사전 입사를 했어요. 야쿠르트에 다니며 공장 여성 근로자들이 대부분 중학교 졸업하고 공장에 들어와 24시간 3교대로 고된 일을 하는 것을 보며 당시 우리 산업계의 고용 패턴을 목도했죠. 비번으로 쉬는 날 여성 근로자들을 데리고 야외로 소풍 겸 바람 쐬러 나가면 노동법에 대해 얘기를 해주었습니다. 그로 인해 회사에서 저를 매우 경계했습니다. 계속 눈치 보이게, 근무에 눈치 보이게 만들었어요. 한 8개월 가까이 다니다가 내가 다녀서는 안 될 직장이라고 생각하고 그만뒀어요.
그만두고 바로 삼성에 입사를 했어요. 76년도에 입사해서 2011년까지 36년 동안 근무했죠.
삼성 다닐 때 제가 조금 엉뚱한 면이 있었어요. 신입사원 면접을 보는데 이병철 회장님이 어느 부서에 가고 싶냐 하길래 ‘남이 안 가는 부서 가고 싶습니다’ 했죠. 입사 시험 보고는 잊어버리고 지냈는데 어느 날 인사담당이 집에 찾아왔더라구요. 합격해 놓고 사람이 안 나타난다고 데리러 온 거죠. 나중에 알고 보니까 이병철 회장님이 그 면접 기록을 갖고 체크한 거예요. ‘여기 필요한 놈이다’ 이렇게 생각했겠죠. 입사 1년쯤 돼서 77년도에 결혼했거든요. 집사람이 약간 핑크빛 도는 와이셔츠를 줘서 입고 갔더니 과장이 지적을 하는 거예요. 과장한테 달려들었어요. ‘옷 색깔을 가려야 되면 피부색도 가려야 되는 거 아닙니까?’ 그걸 사장이 알게 돼서 ‘너무 튀지 않는 거면 제한하지 않는’ 쪽으로 방침이 바뀌었어요. 삼성은 흰 와이셔츠만 입는 게 전통처럼 이어져 오고 있었거든요.”
해외근무로 끊어진 활동의 연결고리, 회사에 충실했던 시간들
“79년도부터 6년간 해외 근무를 했어요. 주로 중동 쪽에서 일을 했죠. 완전히 귀국하게 된 게 85년도였으니까, 6년간 국내 브랭크(blank) 기간이 있었죠. 그 기간 안에 광주 사태가 있었고, 김상진 열사의 뒷얘기, 또는 이어진 활동의 연결고리는 다 끊어진 상태였죠. 그리고 귀국해서 나름대로 삼성에서 매우 바빴어요. 말하자면 열심히 한 결과의 결과물일 수도 있는데 많은 칭찬도 받고 중용(重用 중요한 자리에 임용함)을 받았어요.
하나 예를 들면 80년대 중반, 우리나라의 아파트 재건축을 처음으로 구상하고 기획하고 입법을 해서 시작한 사람이 저와 우리 부하 동료들이에요. 제가 부서장이었죠. 회사에서 일본에 연수를 갔다가 우연찮게 리컨스트럭션(reconstruction), 재건축이라는 개념을 알게 됐어요. 일본하고 우리하고 공동주택, 아파트를 도입하고 진행한 시기가 20~30년 정도의 간격이 있거든요. 80년대에 일본은 재건축이 될 시기가 왔고 우리는 막 아파트가 지어지는 상태인데 관청에 가서 재건축을 하겠다 하니까 말귀를 못 알아먹어요. ‘언젠가는 우리나라 건물의 노후화로 인해서 진행될 수밖에 없는데 결국은 고용 문제, 건설 자재 소비 문제, 삶의 질의 문제, 그리고 재산의 측면에서 모든 국민에게 도움이 될 것이다’ 그렇게 설득하고 법을 만들었습니다. 마포 서울가든 호텔 뒤에 삼성 래미안 아파트가 재건축 1호 아파트예요. 그것까지 다 마무리했어요. 지금도 그런 부분에서 긍지를 가지고 있죠. 제가 우리나라 공동주택의 산 증인입니다. 뭐든지 열심히 해요.(웃음)”
“젊은 사람한테 항상 ‘일을 보고 일을 해라, 돈을 보고 일을 하지 마라. 그리고 항상 변화해라’라고 얘기합니다. ‘어제와 오늘이 같으면 내일도 같다’하는 게 제가 갖고 있는 경구(警句)입니다. ‘항상 변화해라, 바꿔라, 집착하지 마라’는 거죠. 우리 애들한테도 그렇게 얘기하거든요. 일할 때도 그랬죠. 변화하는 자세와 함께 그때는 일에 미쳐있었어요. 주말도 없이…. 그러다 보니까 성과도 많이 생기고 그에 대한 만족감과 자긍심이 있죠. 늙어서 이후에도 자신감을 갖고 살 수 있는 동력이 되고 있고요.
타워팰리스가 제가 기획팀 리더로 저희 팀과 함께 기획한 우리나라 최초 주상복합 건물입니다. 그 이전에는 주상복합이라는 단어조차 없었어요. 원래 100층짜리 삼성 본사 건물을 지으려고 그 땅을 산 겁니다. 그런데 주민들이 반대해서 못 지었잖아요. 그러면 뭘 할까 하다가 주거 용도하고 상업하고 융합해서 믹싱(mixing)을 하자, 그렇게 나온 게 주상복합이라는 겁니다. 허가를 신청했더니 ‘이게 또 무슨 말이냐. 이게 도대체 뭐냐고’ 그러면서 반대 많이 했습니다. 그 건물 지었다고 이건희 회장한테 되게 야단맞았습니다. 듣도 보도 못한 건물이니까.(웃음) 그런데 지금은 전부 주상복합이잖아요.”
문득문득 생각나는 김상진 열사, 그리고 노무현 전 대통령과의 인연
“그러면서 김상진 열사에 대해서 때로는 잊어버리고 지내다가 때로는 생각이 나기도 했죠. 87년에 우리 회사가 서소문에 있었는데 전경들이 시민들을 곤봉으로 때리던 때였죠. 그때 우리가 회사 문을 활짝 열었어요. 안으로 피해 들어오게 하고, 전경들이 오면 샷다를 닫아버리고 그런 기억이 있죠. 그럴 때 김상진 열사가 생각나곤 했죠. 김영삼 대통령이 집권한 93년도에 김상진 열사 벽제 무덤에 갔었어요. 그 이후는 또 뜸했죠. 언젠가 인터넷을 하다가 김상진 이름을 치니 88년도에 김상진기념사업회가 조직이 됐더라고요. 그래서 연락을 하게 됐죠.”
노무현 전 대통령과의 인연을 물으니 사적인 관계지만 오래 지속돼었던 시간에 대해 말을 아끼는 모습을 보인다.
“제가 87년도 말 부산에서 현장 소장을 할 때 우연한 기회에 그분과 인연을 갖게 되었습니다. 이후 서울로 와서 그분이 1998년 서울 종로구 국회의원을 하면서 계속 인연이 이어졌죠. 명함에 자동차가 3개가 그려져 있고 밑에 종로구 국회의원 노무현이라고 써 있던게 기억납니다. 그걸 보여주면서 ‘이게 무슨 뜻인지 아냐’고 묻더라고요. ‘차가 3개 그려져 있네요’ 하고 보니 차 세대 차세대를 그렇게 위트 있게 로고로 해 놓았던 것이 인상 깊었습니다. 그분의 철학이라든지 그분이 그리는 정치의 미래상을 보면 웬만한 사람들은 말귀를 잘 못 알아먹을 정도로 진취적이었습니다. 대통령 선거운동 기간 중 공약사항에 세종 신도시 건설, 행정도시 이전에 필요성에 대한 서로 간의 대화가 잠시 있었죠. 그분을 생각하면 우연한 기회가 평생의 운명적 인연을 가지게 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저는 여태까지 살아오면서 김상진 열사를 만나게 된 기회, 노무현 대통령을 만나게 된 기회가 나에게 자랑스러운 기회였다, 이렇게 생각하고 어디에서든지 그걸 자랑삼아 얘기를 합니다.”
민주주의 국가는 보수와 진보가 동행하는 사회
“요사이 우리나라 정치 경향을 극단적인 양극화라고 표현하는데, 저는 지금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분리화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민주주의 국가는 보수와 진보가 동행하는 사회라고 생각해요. 서로 앞서거니 뒤서거니 해서 시너지 효과를 얻을 수가 있는데, 극단적으로 가다 보니까 물리적 대립만 있지 화학적인 융합 관계는 안 되는 거죠. 세계 어디서나 보수와 진보는 항상 존재합니다. 우리나라는 극단적인 적으로 몰거든요. 앞으로 우리 사회가 변화가 참 어려울 거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결국은 기득권이나 힘이 있는 사람은 정치권력이거든요. 정치권력은 투표란 말이에요. 투푠데 우리나라가 노인들이 너무 많아요.(웃음)”
“저는 세 가지 장벽을 없애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첫째 성별의 장벽, 둘째 빈부의 장벽, 마지막으로 지식 학문의 장벽을 없애야 된다는 거죠. 여자라 해서 불이익을 받아서는 안 되고, 돈이 없고 가난하다고 해서 불리해서도 안 되죠. 빈익빈 부익부가 심화되고 있는데 빈자도 기회가 박탈되지 않고 동등한 선상에서 기회 주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또 ‘나는 이 학문을 했다’, 또는 ‘나는 못 배웠다’는 것이 장벽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을 합니다. 공부에 뜻이 없는 사람도 길을 막아서는 안 되고 기회를 줘야 하는 것이죠.”
AI시대 대안은 창의력, 새로운 건물을 구상하다
회사에서 끊임없이 새로운 것을 구상, 기획, 실현해 온 그에게 창의력은 삶의 모토와 같다. 퇴직 후 10년이 넘은 지금도 창의력이 발휘되고 있다.
“앞으로 AI가 더 발전할 텐데, 그렇게 되면 기존의 지식자들이 망하는 거예요. 멸망의 길로 가는 거죠. 인간이 인간을 파괴해 버리게 되는 게 AI죠. AI를 극복할 수 있는, 때로는 피해갈 수 있는 유일한 부분은 창의력이라고 생각합니다. AI는 창의력은 없으니까요. 그러면 앞으로 학생들 교육 방향, 어떻게 사람을 만들고, 키우고, 채용을 해야 되는지 답이 나올 것입니다. 창의력이죠. 창의력이 없는 사람은 죽은 사람이라고 생각해요.”
“저도 뭔가 창의를, 새로운 걸 하려고 합니다. 저희 집 인근에 있는 큰 건물 리컨스트럭션(reconstruction 재건, 복원)을 맡아서 하고 있어요. 봉사 활동 비슷하게 하고 있는데 그것 때문에 구글 본사를 방문한 적이 있어요. 건물을 아주 잘, 정말 색다르게, 창의적으로 지었더라구요. 저도 건물을 그렇게 지으려고 하는데 사람들이 말귀를 못 알아들어요. 타워팰리스 같이 새로운 거를 한번 유행을 시켜보자는 생각인데요. 핵심은 한전 전기가 필요 없는 건물, 매일매일 집의 레이아웃(layout)을 바꿀 수 있는 건물입니다. 그런 건물이 아직 우리나라에 없습니다. 침대가 하나 사라져도 부부가 5평밖에 못쓰는 공간을 10평을 쓸 수 있습니다. 침대가 차지하는 면적, 식탁이 차지하는 공간 같은 데드 스페이스(dead space)를 액티브화(Activation) 하는 거죠. 그런 거를 디자인 했는데 도통 말귀를 못 알아듣네요.(웃음)
파괴가 있어야 합니다. 재건축하니까 언젠가 파괴가 있을 겁니다. 선구자를 편집하시면서 한번 파괴해 보세요. 배치를 파괴하고 다른 색깔로 인쇄를 한다든지….”
퇴직 후의 시간들 – 사회봉사, 건강, 영어, 트래킹
“제가 그동안 해왔던 일을 바탕으로 한 업무적 사회봉사를 하고 있고요. 이제 건강 관리에 신경 써야 할 나이이고요. CNN하고 BBC를 들으면서 영어 안 잊어버리려고 계속 주입식으로 하고 있어요. 살아온 시간은 시작과 끝을 알 수가 있는데 주어진 시간은 끝을 알 수가 없잖아요. 그래서 내일일 수도 있고 10년 후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가지고 항상 알차게 보내려고 하고 있고요.
제가 트레킹을 많이 합니다. 우리나라에서는 그 분야에 대해서는 좀 아는 사람이에요.(웃음) 봄에 산티아고 트레킹을 또 계획을 하고 있습니다. 산티아고를 다섯 번 갔다 왔는데 제일 인상적이었던 것은 헝가리 부다페스트에서부터 프랑스 리옹까지 2천 km를 걸어간 겁니다. 7개 나라를 거쳐서 간 거죠. 헝가리, 그다음에 슬로바키아 조금, 오스트리아 관통, 독일 조금, 리히텐슈타인 조금, 스위스 관통, 프랑스. 73일 걸립니다. 그거 아주 멋있어요. 데일리 루틴, 1일 일정표는 없습니다. 그냥 가는 대로 가서 자고 이렇게…. 이번에는 세비아에서 출발해서 가보려구요. 세비아에서 산티아고를 향해 북쪽으로 올라가는 거죠. 한 1천 km 정도 됩니다.”
여행을 즐기는 그는 2007년 미국 동부를 남북으로 왕복했고, 2009년 3월부터 아내와 딸과 함께 미국 남부를 횡단하고 서부를 종단했다. 33일간의 여행, 그 기록을 글과 사진, 부인 김미자 화백이 그린 그림으로 채워 300여 쪽의 책으로 남기기도 했다. 다섯 번을 다녀온 산티아고 성지순례는 인생에 전환점을 만들어 주기도 했다. 종교를 갖게 됐고, ‘욕심이 때로는 나를 욕되게 할 수도 있다는 것’을 깨닫고 ‘부가 전부가 아니다, 권력이 전부가 아니다’라는 것도 깨달았다. 앞서 얘기한 세 가지 장벽을 없앤다는 부분도 성지순례를 하면서 많이 체득한 것이다.
우리가 잊어버린 것들, 못했던 것들을 해주는 여러분이 너무 고맙죠.
‘민주화 운동을 한 것은 지구상에 와서 잘하고 가는 것 중 하나’라며 ‘보람찬 일을 했다’고 말하는 그에게 선구자 회원들에게 한 말씀을 부탁하니 그저 고맙다고 답한다.
“저는 선배로서, 또 그 일의 당사자로서, 현장 당사자로서 매우 고마움을 느끼거든요. 왜 그러냐면은 다들 생업이 있잖아요. 그리고 대부분 비(非) 현장 참여자들이잖아요. 그런데도 불구하고 소사이어티(society)를 구성하고, 정보를 교환하고, 또 소사이티 안에서는 보이지 않는 혈관을 통해서 김상진 열사의 정신이 이음새가 계속 이어가는 것에 대해서 매우 고맙게 생각해요. 우리는 나이도 그래서 여러모로 제약이 있을 거예요. 시간이 지날수록 MZ 세대들이 등장하면 소사이어티가 끊어지면 어떡하나 그런 걱정도 가끔 들기는 하죠. 여러분들이 잘 이끌어줘야죠. 그 당부 외에는 할 게 없어요.”
끝없이 새로운 것을 기획, 창의력을 발휘하고 틈나면 트래킹을 하는 삶은 청년의 기운이 가득했다. 앞으로도 끝없이 활기찬 활동을 이어갈 것 같은 생각에 이호선 선배의 행보가 김상진기념사업회에 활기찬 기운을 불어넣어줄 것 같았다. 아울러 장편다큐멘터리 <1975.김상진> 상영과 영화제 출품을 위해 정보와 소식을 전해주고, 김상진 기념홀 진척상황을 체크하는 등 김상진기념사업회 사업을 살뜰히 챙기는 선배의 든든함에 가슴이 뿌듯해지는 시간이었다.
.
임세진 _ 숭의여전 문창과에 입학, 문예창작보다 학보사 기사를 더 열심히 쓰고, 졸업 후 전국연합 기관지 ‘민’, 건강사회를 위한 치과의사회 신문 ‘건치신문’ 만드는 일을 하였다. 이후 성공회대 사회학과에서 공부하고 KOICA 봉사단을 다녀온 후 다양한 사람들의 인생을 인터뷰하고있다. (sejin3025@hanmail.net)
Last modified: 2024-02-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