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광준 OBS 피디, ‘오늘의 기후’ 뉴스레터 발행, 농화학 88
그날의 의혹을 재구성해본다. 연구원 난자 강압 의혹 말이다. 2005년 12월 31일, 그날 밤 아내는 다소 성난 목소리로 내게 말했다.
“자기야, 뉴스 봤어? 솔직히 난 황 박사 그런 사람인 줄 몰랐는데 충격이네.”
“무슨 기사?”
“몰랐구나. MBC 기사 말이야.”
솔직히 나는 그즈음 MBC 기사를 보지 않고 있었다. ‘영롱이 없다’ 기사도 그랬고 <피디수첩> 논조도 그렇고 자꾸 황우석을 희대의 사기꾼으로 몰아가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MBC 기사를 보고 흥분한 사람이 다름 아닌 내 아내라는 사실에 모른 척할 수만은 없었다. 아내는 며칠 전까지도 같은 연구자로서 황 박사의 해명 기자회견이 더 설득력 있어 보인다고 덤덤하게 말하던 사람이다. 그 무덤덤한 한 마디가 나로 하여금 황에 대한 진실을 파고들어 가게 만들기도 했다. 그런 그녀가 황 박사를 다시 보게 됐다고 말하고 있다. 도대체 무슨 기사를 본 걸까.
찾아봤더니 과연, 그럴만한 기사였다. 연구원 난자 강압…. 황 박사가 지도교수 지위를 이용해 젊은 여성 연구원이 난자를 기증하도록 강요했다는 폭로기사였다.
‘외국 유학의 꿈을 꾸며 황우석 교수의 줄기세포 연구팀에 합류한 여성 연구원 박 모씨는 지난 2003년 3월 실험 도중 실수로 난자가 담긴 접시를 엎질렀습니다. 귀중한 실험재료인 난자가 없어지자 박 연구원은 결국 자신의 난자를 제공하기로 결정했습니다. 과배란 촉진 주사를 맞고 전신마취상태에서 난자를 뽑아내야 했던 26살 미혼의 박 씨는 동료에게 보낸 편지에서 자신의 난자로 자신이 직접 복제실험을 해야 하는 처지를 스스로 지독하게 독하다고 표현했습니다.
이에 대해 황 교수는 여성 연구원들이 난자를 제공한 것은 맞지만 자발적이었다고 밝힌 바 있습니다. 그러나 박 연구원의 편지에는 ‘이 방법은 아니었다’며 ‘황 교수에게 대적하지 못했던 자신을 후회한다’는 내용이 담겨 있습니다. 당시 박 연구원의 동료들은 황 교수 논문의 공동저자에 끼지 못할까 봐 불안해하던 박 연구원으로서는 황 교수의 지나가는 말 한마디도 그냥 흘려듣기가 어려운 처지였다고 말합니다. MBC뉴스 현영준입니다.’ (2005년 12월 31일 기사)
특히 연구원의 편지 내용이 강렬했다. 이 방법은 아니었다. 황 교수에게 대적하지 못한 자신을 후회한다. 이 정도면 거의 빼박 아닌가, 비윤리적인 갑질…. 세상에, 아무리 연구가 중요해도 그렇지 제자의 실수를 빌미로 소중한 난자까지 바치라고 강요하는 사람들이 과연 제정신이란 말인가. 아내의 심정이 이해됐다. 이 기사를 본 어떤 여성이 황 박사를 인간으로 보겠는가. 나 또한 황 박사라는 사람의 인격을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무심코 기사 밑에 달린 댓글을 읽어 내려가던 중 그중 하나에 시선이 멈춰 섰다.
‘또 구라 치시네. 연구원이 난자 접시를 엎지른 날은 2003년 3월, 난자 제공 병원 진료받기 시작한 날은 2003년 2월, 그러면 자신이 나중에 난자 접시 엎질러 실수할 줄 미리 알고 난자 제공 진료를 받기 시작한 거냐? 소설을 쓰려면 좀 제대로 써라’
이건 또 무슨 말인가. 무슨 뜻인지 이해하기는 어려웠지만 뭔가 의미심장해 보였다. 학습효과가 작동했다. 며칠 전 황 박사가 열 살 소년에게 ‘내가 널 일으켜주겠다’고 하느님 놀이했다는 기사, 그 조작된 기사를 잡아낸 것도 바로 해당 기사 밑에 붙은 누리꾼 수사대의 댓글이었다. 혹시 이번에도? 나는 이 댓글이 도대체 무슨 뜻인지 다시 한번 귀 기울여보았다.
이런 뜻이었다. <MBC> 기사에서 제기한 의혹이 합리적이라면 여성 연구원은 난자 접시를 2003년 3월 경에 엎지르는 실수를 범했고 그 때문에 강요당했다면 여성 연구원의 난자 시술 시점은 3월 이후인 4월이나 5월, 6월, 7월이었어야 맞다. 그런데, 해당 기사에 그래픽으로 등장한 연구원의 난자 시술 시점은 4월도 아니고 5월도 아니고 2월 7일이었다. 2월이라고? 난자 제공 시점이? 분명히 뉴스 자료화면으로 그렇게 나왔다. 출처는 미즈메디 병원 진료기록. 이러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 여성 연구원의 첫 번째 난자 시술일 : 2003년 2월 7일
– 여성 연구원이 난자 접시를 엎지른 시점 : 2003년 3월
여성 연구원이 난자 접시를 엎지르는 실수를 저지르기 전부터 이미 그 연구원은 난자 시술을 받고 있었다는 말이 된다. 이렇게 되면 난자 접시를 엎지른 죄책감에 난자 제공을 강요당했다는 기사의 추론은 뿌리째 흔들린다. 헐, 또 한 번 누리꾼 수사대의 눈썰미에 놀란다. 하지만, 뭔가 정리되지 않는 혼란한 감정에 휩싸이게 되었다. 질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기 때문이다. 실험 실수가 아니라면, 그녀는 왜 그 힘든 실험을 하면서 그 힘든 난자 제공 수술을 받으러 다닌 걸까, 또 황 박사의 강요가 아니라면, ‘이 방법은 아니었다’ 며 ‘대적하지 못한 자신을 후회한다’는 그녀의 편지는 또 무엇일까?
열흘 뒤 1차 단서가 나왔다. 의혹 당사자인 여성 연구원이 <서울대 조사위원회>에 출석하여 난자 접시 사건 때문에 난자 제공을 강요당했다는 <MBC> 기사는 사실무근이라고 진술한 거다.
– ○○○ 전 연구원은 자신이 실수로 난자를 깨뜨려 그 죄책감 때문에 난자를 제공하게 되었다는 소문은 사실무근이라고 진술하였다. (서울대 조사보고서, 33쪽)
하지만 모든 의혹이 풀린 건 아니다. 이럴 수도 있지 않은가, 난자 접시 사건 때문은 아닐지라도 다른 이유 때문에 강요당했을 수도, 이를테면 논문 저자에서 빠질 수도 있다는 두려움 같은 것 말이다. 실제로 그즈음 <MBC 피디수첩>은 여성 연구원이 동료에게 보냈다는 이메일 내용(이 방법은 아니었다 등)을 토대로 황 박사가 연구원에게 논문 저자에서 빠질 수도 있음을 암시하는 교묘한 방식으로 난자 제공을 압박했다고 방송하고 있었다. 하지만 해당 연구원은 이 의혹 또한 부정했다. <서울대 조사위원회 최종보고서> 33쪽.
– (여성 연구원은) 논문 저자로 참여하려는 걱정 때문에 난자를 제공하게 되었다는 소문도, 당시 실험 자체가 너무 진척이 안된 상태여서 논문이 나갈지에 대해서는 생각조차 하기 어려운 형편이었기에 역시 사실이 아니라고 진술하였다.
흐음…. 실험 실수도 논문 저자도 아니라면, 정말로 그녀는 누군가의 강압에 의해서가 아닌 자신의 의지로 난자를 제공했다는 것인가, 하지만 이럴 수도 있지 않은가, 그녀가 진실되지 못한 진술을 하고 있다는…. 그때만 해도 황 박사가 아직 무너지지 않고 권력을 유지하고 있었기에, 이 좁은 바닥에서 찍힘을 당하지 않기 위해 마음에도 없이 황 박사에게 유리한 진술을 해준 것이라고. 단 1%라도 그럴 가능성이 남아있는 한 나는 섣불리 판단할 수 없었다. 만날수만 있다면 그 여성 연구원을 만나보고 싶었다. 직접 만나 그녀의 비언어적 행동들, 이를테면 눈빛이나 목소리의 가느다란 떨림이나, 손모양을 확인해보고도 싶었다. 하지만 나는 이 사안 하나에 매달리기에는 맡은 일이 너무 많았고 슈퍼맨도 아니었기에, 그저 그렇게 의혹에 찬 시선으로 이 사안에 물음표만 쳐놓고 생활했다.
그렇게 넉 달이 지난 2006년 5월 12일, 두번째 단서가 나왔다. 이즈음에는 황 박사는 완전히 무너져 있었다. 그는 서울대 교수직에서 파면되었고, 줄기세포 연구 권한도 박탈되었으며, 검찰로부터 특정범죄가중처벌법 상 사기 및 횡령죄로 기소당한 신세였다. 그런데, 그렇게 황 박사에게 사실상 자연인으로서의 사형선고를 내린 <검찰 수사 결과>에 연구원 난자 강압 의혹에 대한 흔적이 나올 줄이야…. 검찰 수사 결과 110쪽이었다.
– 난자제공 과정에서 황우석의 강압성은 없었던 것으로 확인됨.
없었던 것으로 확인됐다고? 간결하지만 큰 의미를 담고 있었다. 단지 해당 여성 연구원의 진술만 들은 게 아니라 의혹을 제기한 사람 (제보자), 제3자적인 동료 연구원들을 모두 불러 조사를 벌인 결과 그랬다는 거니까. 이러한 사실은 그 후 수년에 걸친 법정공방에서도 일관되게 유지되었다. 강압이 아니었다. 그렇다면 ‘대적하지 못했다’는 이메일은 어떻게 된 걸까? 강압이 아니었다면 자발적 기증이었다면 ‘대적하지 못했다’는 이메일을 보낼 이유가 없지 않은가. 또 다른 의문이 들었다.
더구나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은 <MBC>와 <PD수첩>의 태도였다. 자신들이 대서특필했던 강압의혹이 서울대와 검찰조사에서 연속으로 부정당했음에도 그들은 어떤 언급도 해명도 하지 않았다. 심지어 그랬다는 팩트조차 보도하지 않았다. 그리고 피디들의 태도가 너무도 당당했다. 담당 피디가 쓴 책을 보면 황우석은 정말 난자를 강요한 악마였는데 검찰 수사가 잘못됐다는 투로 쓰고 있었다. 그 당당함 자체가 의아했다. 뭔가 믿는 구석이라도 있는 걸까? 그래서 더 궁금해졌다. 여성 연구원을 직접 만나보고 싶었다. 만나서 이렇게 묻고 싶었다.
‘자발적으로 난자를 기증했다고 수사결과 나오는데, 그러면 ‘이런 내가 지독해요’라는 이메일은 왜 제보자에게 보낸 건가요?’
그러나 나는 그녀의 소재를 파악할 길이 없었다. 그녀는 미국의 섀튼 교수 실험실에 파견된 이후 줄곧 한국에 돌아오지 않고 해외에 체류하고 있었다. 그녀와 연락을 주고받을 만한 연구원들을 접촉해 봤지만 그 누구도 그녀의 이메일을 알려주지 않았다. 이런 답변뿐.
‘순하디 순한 ○○이가 이젠 조용히 살도록 도와주세요. 부탁입니다.’
그래, 그럴 수 있지. 나도 굳이 무리수를 두지 않았다.
그렇게 다시 10년이 지났다. 2015년 5월 경, 우연히 또 다른 단서를 얻게 되었다. 외국에 체류하고 있던 여성 연구원이 한국에 잠시 들어와 결혼식을 올렸는데 그녀의 결혼식 주례를 맡은 사람은 다름 아닌 황우석 박사였다는 것이다. 리얼리? 정말?
– 2010년 10월 10일 서울 모 호텔, 주례 황우석
사실이었다. 그녀는 자신의 결혼식을 통해 황 박사의 무죄를 입증해 준 셈이다. 자신에게 난자기증을 강요한 옛 스승에게 결혼식 주례를 부탁할 사람은 없기 때문이다. 더구나 지금은 서울대 교수도 뭐도 아닌 옛 스승에게 말이다.
모든 것이 분명해졌다. 나는 그날 그녀의 결혼식 사진을 찍어준 황우석 팀 젊은 연구원을 통해 사실 여부를 확인할 수 있었고, 그녀와 함께 미국의 섀튼 교수 실험실에 파견되었던 연구자로부터 그녀에 관한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 충북대 현상환 교수, 그는 그녀가 외국에서 연구원 생활을 하면서도 한국에 올 때면 꼭 황우석 박사를 찾아와서 ‘선생님 힘내시라’고 응원하고 갔다고 말해줬다.
– 예전하고 똑같았어요. 황 박사님을 대하는 모습이 공손하고 깍듯하고. 힘내시라고 멀리서도 응원하고 있다고. 저는 그런 모습을 옆에서 보니까 피디수첩을 본 일도 없지만 의혹제기는 말이 안 된다고 생각하죠. (현상환 교수, 2015. 6. 8)
좀 더 자세한 상황을 황우석 박사에게 물어봤다. 그날은 메르스 바이러스가 온통 퍼져있던 2015년 6월 9일 아침 7시 반이었다. 그녀의 이야기를 꺼내자 황 박사는 조심스러워했다. 그러나 이내 하는 수 없다는 듯 웃으며 말했다. 여성 연구원이 신랑과 함께 인사를 드리러 온 자리에서 결혼식 주례를 부탁하던 상황에 대해서.
– 제가 웃으며 그랬죠. ‘야, 세상 사람들은 모두 내가 네 난자 빼앗았다고 알고 있는데 어떻게 주례를 서겠니’라고 하며 거절했어요.
그런데 난색을 표하는 황 박사에게 박 연구원은 거듭 주례를 부탁했다고 한다.
– 여자에게 있어 일생에 단 한번 가장 소중한 게 결혼식 주례인데 사람들 앞에서 제 주례를 맡아주시면 그 모든 게 다 해소될 거라고 그렇게 말하더군요.
그렇게 그녀는 황우석 박사의 주례로 화촉을 올렸다. 나는 황 박사에게 이메일에 대해서도 물어봤다. ‘선생님께 대적하지 못했다’는 이메일에 대해 혹시 박 연구원으로부터 들은 말은 없느냐고. 그랬더니 황 박사는 2005년과 2006년 사건이 한창 진행될 무렵 그녀가 자신에게는 이런 취지로 말했다고 전했다.
– 저에게는 이런 말을 했어요. ‘그 이메일은 자기가 보낸 게 아닌데 자기가 보낸 것처럼 됐더라’라고. 이메일 계정을 잠깐 빌려달라고 하더래요. 그래서 빌려줬더니 마치 자기가 보낸것처럼…. 저한테는 그렇게 말했습니다.
그 이메일이 조작되었다고? 이 부분은 더 신중히 따져볼 일이다. 본인에게 직접 듣지 않는 이상. 더구나 검찰 수사 결과에서도 이메일을 본인이 보낸 것은 사실이지만 강요는 아니라는 내용이 있기에…. 하지만 이 의혹을 방송사에 제보한 <PD수첩> 제보자에 대해서는 다시 생각해 보는 계기가 되었다. 누구냐 넌…. 과연 그는 언론에 보도된 것처럼 모든 사실을 양심대로 고백한 정의의 사도일까? 그 또한 또 다른 신화에 불과한 것 아닐까? (제보자 부분은 후술 하기로)
이제 연구원들의 난자 제공과 관련된 사실관계를 정리해 보자.
이 실험을 하면서 자신의 난자를 기증한 여성 연구원은 모두 2명이다. K연구원과 P연구원.(난자 강압 의혹이 제기된 이는 P연구원). 먼저 자신의 난자를 기증한 K연구원은 결혼해서 두 아이를 키우고 있는 엄마 연구원이었다. 그녀가 먼저 난자기증을 했고 이후 P연구원이 했다. 이들의 상황은 줄기세포 법정 진술에 나온 부분과 내가 취재한 내용을 종합해 이렇게 정리해 본다.
2004년, 당시만 해도 연구 관련자가 자신의 신체를 연구에 활용하는 것을 금기시하는 국제 의료 규범(헬싱키 선언)의 존재조차 알고 있는 사람이 드물던 시기였다. 이때 2004년에 발표된 논문 실험에 참여하고 있던 K연구원은 아내로서 그리고 두 아이의 엄마로서 열심히 연구에 참여하고 있었다. 그녀는 줄기세포 연구에 참여하면서 난치병으로 고생하시던 자신의 어머니를 떠올렸다고 한다. 진심으로 자신이 하고 있던 줄기세포 연구가 성공하기를 바랐다고 한다. 그러나 2001년과 2002년, 연구는 아무런 진전이 없었고 실험은 실패만 거듭했다. 그러자 그녀는 연구에 조금이라도 보탬이 되고자 자신의 난자를 기증하기로 마음먹고 남편과 가족들의 동의까지 구했다. 그러나 황우석 박사에게는 이 문제를 상의하지 않았다. 허락하지 않을게 불 보듯 뻔했기 때문이다. 그녀는 곧바로 의사를 찾아갔다. 이때 의사가 미즈메디 노성일 이사장이다. 그런데 노 이사장도 국제 의료 규범을 인지하지 못했던 것 같다. 그녀의 난자기증 의사를 들은 노 이사장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내 아내도 못하는 결단을 너는 했구나. 참으로 대단한 결단이라며 칭찬한 노 이사장은 그녀의 수술을 준비했고 K연구원은 노 이사장에게 절대로 자신이 난자를 기증했다는 사실을 황 박사에게 알리지 말아 달라고 당부했다고 한다. 그리고 조용히 자신의 난자를 기증했다. 검찰수사 결과 K연구원은 황 박사가 나중에라도 이 사실을 알까 봐 연구팀에 제공되던 난자기증자 정보조차 자기 이름이 아닌 다른 이름으로 기재하도록 했다. 그녀는 누구에게 보이려는 게 아니라 진심으로 이 연구의 성공을 바라고 있었기 때문이다. (훗날 <네이처>지 기자가 황우석 팀 연구원의 난자기증 사실을 취재할 때 기자와 통화한 연구원도 K연구원이다. 그녀는 헬싱키 선언을 모른 상태로 자신도 이 소중한 연구에 자신의 난자를 기증했다고 기자에게 밝혀 국제적 논란이 되기도 했다.)
그런 사실을 K의 후배 연구원인 P연구원이 알게 되었다. P연구원은 K연구원을 언니처럼 따르면서 속 깊은 이야기를 나누던 사이였는데, 우연히 K의 난자기증을 알게 된 것이다. 그리고는 자신도 난자기증을 하겠다는 결심을 한다. 그녀는 황 박사의 총애를 한 몸에 받고 있던 줄기세포 연구의 핵심 연구원이었고 2004년과 2005년 <사이언스> 논문 실험에서 체세포 핵이식 작업을 하고 있었다. 첫 실험인 2004년 <사이언스> 논문 실험에 진척이 없자 P연구원은 2003년 1월경 황 박사를 찾아가 상의를 했다. 자신의 난자를 기증하겠다고. 그러나 황 박사는 허락하지 않았다. 아무리 실험 진척이 없어도 시집도 안 간 처녀 몸으로 난자기증을 하게 할 수는 없다고 말렸다. 그러자 그녀는 굽히지 않고 당시 연구팀의 생명윤리 자문을 맡고 있던 서울대 의대 문신용 교수를 찾아갔다. 문 교수는 쉽지 않은 결정이라고 동의하며 미즈메디 노성일 이사장에게 이 사실을 전했고 노 이사장은 황 박사에게 ‘이런 정성이라면 못할 게 없지 않느냐’며 전화했다. 결국 두 명의 의사 동의를 통해 황 박사 또한 박 연구원의 난자기증을 허락하게 된 것이다.
– 노 이사장이 제게 “일났네, 일났어. 이런 정성이면 못할게 뭐있어.”라고 특유의 어투로 전화를 했어요. 이 녀석(박 연구원)이 오죽했으면 그분들께 찾아갔을까 싶어 결국 난자기증을 허락했고, 이왕하는 거 병원까지 차라도 태워줘야겠다는 생각에 제가 운전해서 데려다주고 기다렸다가 데려왔습니다. (황우석 박사, 2015)
난자 채취 수술을 받던 날 황 박사는 자신의 차로 박 연구원을 병원에 데려다줬다. 정확한 날짜는 2003년 3월 10일이다. 당시 황 박사의 행동을 어떤 시선으로 바라볼지는 철저히 독자들의 영역이다. 자신의 연구에 자신의 난자를 기증한 연구원들의 행동에 대한 판단 또한 독자들의 영역이다. 나는 이 사실이 미담도 괴담도 아닌 그저 치열한 연구현장에서 일어난 팩트로서 굉장히 유의미한 ‘토론’과 ‘교육’의 소재라고 생각한다. 과학의 진보를 어떻게 하면 윤리적으로 이뤄낼 것인가 하는 인류의 큰 관심사에 대한 연장선 말이다. 단, 팩트는 정확해야 한다. 오염되면 안 된다. 그런데 오염되어 잘못 뿌려지고 말았다. 지금도 오염시켜 뿌려댄 자들은 바로 잡을 줄을 모른다. 이것은 정치의 영역이다. 하긴, 세 명만 모여도 정치라는 데 이 거대한 사건에서 누군들 정치와 무관할 수 있을까.
왜 그랬을까, <PD수첩> 제보자 말이다. 적어도 연구원 난자 강압 건에 있어서 그는 오버했다. 한편으로는 이해도 간다. <PD수첩>에 제보할 당시 그는 줄기세포가 가짜라는 물증이 없었다. 그런 상태에서 제작진을 설득하기 위해서는 황우석이 충분히 조작을 하고도 남을 인간임을 여러 각도로 증명해야 했으리라. 시간이 많지 않기에 이 건처럼 짧은 시간에 강한 공분을 자아내는 소재가 필요했으리라.
바로 여기서 저널리즘의 역할과 책무가 나온다. 100% 진실로 이뤄진 제보자는 없다. 제보를 결심한 이상 거대 언론에서 다뤄주기를 원하는 제보자들의 특성상 그들이 내미는 다이어리에서 팩트는 어디까지이고 의혹은 어디까지이고 가장 후순위로 다뤄봐야 함직한 ‘꺼리’는 무엇인지를 저널리스트는 구분해줘야 한다. 그런 뒤 팩트에 집중해 싸움을 시작해야 한다. 개인의 신상까지 털다 보면 개싸움이 나고 본질이 흐려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냉정함을 잃어서는 안 된다. 허나 이들도 사람이기에 어느 순간 냉정함을 잃는 대목이 있다. 나는 황 박사를 검증한 <PD수첩>이 어느 순간 냉정함을 잃기 시작하면서 연구원 난자 강압 건을 들고 나왔다고 생각한다. 그 시점은 아마도 그 지점부터이지 않았을까. (다음 편에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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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광준_ 우리농촌연구회에서 농업농촌의 현실을 깨닫고 토양학 실험실에서 흙을 연구하던 중 BBC ‘Farming Today’같은 농업전문방송을 꿈꾸며 방송에 입문, KBS TV 구성작가와 경기방송 PD를 거쳐 현재 OBS에서 2023년 상반기 개국예정인 OBS 라디오(FM99.9MHz)의 기후변화 전문 프로그램 준비중, 별명 기후보좌관. (pdnkj@naver.com)
Last modified: 2024-02-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