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종섭 김한규 의원실 보좌관, 지역시스템공학 03
정치의 계절을 맞아 한국 정치에 대한 이해를 돕는 책 한 권을 소개하고자 합니다. 책 제목은 <성공한 민주화, 실패한 민주주의: 86포퓰리즘 넘어서기>입니다.
모름지기 세상 모든 일은 사람이 하는 일입니다. 정치 역시 정치인이라는 사람이 하는 일입니다. 이 나라 정치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이해하기 위해서는 정치 체계나 제도, 절차를 아는 것도 도움이 되겠지만, 정치를 하는 사람들이 어떤 방식으로 사고하는지 아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이 책은 민주당 당직자부터 국회 보좌관, 청와대 행정관까지 당과 입법부, 행정부를 두루 경험해 본 80년대생 청년 정치인이 쓴 책입니다. 80년대생이 86세대 선배 정치인을 경험하고 관찰하면서, 86세대가 어떤 인생의 배경을 갖고 있고, 그것이 어떻게 지금의 사고방식에 녹아 있는지 정리하였습니다.
저자는 이를 ‘86포퓰리즘’이라고 부르는데, 우선 포퓰리즘이란 무엇이고, 무엇이 아닌지부터 확인할 필요가 있습니다. 흔히 퍼주기를 통한 매표 행위를 포퓰리즘(populism)이라고 알고 있는데, 이는 포퓰러리즘(popularism)에 가깝습니다. 포퓰리즘은 ‘순수한 민중’과 ‘부패한 엘리트’ 혹은 ‘민족’과 ‘외세’와 같이 진영을 나누고, 각 진영이 같은 이해관계를 갖고 있다고 보는 정치행동을 의미합니다.
우리나라에서 80년대 구성된 ‘86포퓰리즘’이 정확히 이와 같습니다. 군사독재와 재벌, 그리고 이를 비호하는 미국이라는 ‘부패한 엘리트’, 그리고 이에 맞선 노동자, 농민, 빈민, 그리고 한민족이라는 순수한 민중 구도입니다. 당초 이런 이분법으로 복잡한 사회를 담아내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시대 상황에 따라 다수 국민들에게 소구 하는 세계관을 제공하기도 합니다. 우리에겐 80년대 후반 민주화에 이르는 시기가 이에 해당했습니다.
민주화 이전에는 군사독재의 탄압 때문에 ‘순수한 민중’을 대변하는 ‘우리’의 목소리가 세상에 알려질 기회가 차단됐지만, 만약 공개적으로 외칠 수만 있다면 국민들의 압도적 지지를 얻을 것이라 상상했습니다. 그래서 처음에는 자유롭게 시위를 할 수 있다면, 그다음엔 선거에 출마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면, 또 그다음엔 국회에 민중의 대변자를 세울 수 있다면, 또 다음엔 제1야당이 될 수 있다면, 그리고 결국에는 ‘우리’가 집권할 수 있다면, ‘부패한 엘리트’를 몰아내고 ‘순수한 민중’의 세상을 만들 수 있다고 기대했습니다.
그러다 정말 민주화가 되었습니다. 국회에도 86세대의 상징적 인물들이 대거 들어갔습니다. 심지어 집권까지 이뤄냅니다. 하지만 86세대가 함께 만든 노무현 정부는 2007년 대선에서 국민들로부터 크게 심판받습니다. ‘순수한 민중’과 ‘부패한 엘리트’의 대결보다 세상은 더 복잡했습니다.
대선 패배 후 민주당은 큰 혼란을 겪고 있었는데, 기적적으로 또 한 번의 포퓰리즘 모멘트를 맞이합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서거하신 겁니다. 노 전 대통령의 죽음에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미친 검찰, 언론, 상대당이 군사독재와 재벌을 대체해 ‘부패한 엘리트’로 묶였고, ‘순수한 민중’의 자리를 ‘깨어있는 시민’이 대체했습니다. 대신 ‘순수한 민중’의 계급성과 민족성은 묽어졌습니다. 포퓰리즘 모멘트를 잘 포착했고 성공적으로 세계관을 퍼트렸지만, 현실의 복잡성은 달라진 게 없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2022년 대선에서 또 국민들의 지지를 받는 데 실패합니다.
모든 포퓰리즘이 나쁘다는 얘기를 하는 게 아닙니다. 군사독재에 맞서 민주화 운동을 한다는 것은 매우 큰 위험을 동반한 일이었습니다. 당시 구금과 수배, 고문이 일상적으로 이뤄지는 내전과 같은 상태였다는 점을 고려하면 민주화 세대를 또 하나의 전쟁 경험 세대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민주화 운동은 매우 강한 응집력이 필요했을 것이고, 이를 위해 포퓰리즘을 수단적으로 활용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라는 점은 충분히 이해할 만합니다.
게다가 민주화로 인해 공권력만으로는 여론을 좌지우지할 수 없게 된 보수정당 역시 적극적으로 포퓰리즘적 세계관을 활용하고 있습니다. 윤석열 대통령도 각종 카르텔을 ‘순수한 국민’과 분리합니다. 최근 여당 비대위원장이 된 한동훈 전 법무부 장관 역시 ‘부패한 운동권’과 ‘동료 시민’을 나눕니다. 전형적인 포퓰리즘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86포퓰리즘만 과도하게 비판하는 것은 부당해 보입니다.
다만 이러한 분석은 우리 정치가 왜 이렇게 되었는가를 알려주는 단초가 됩니다. 새해 벽두부터 야당 대표가 린치로 쓰러진 이유를 헤아려 볼 수 있게 해 줍니다.
앞서 말씀드렸듯이 포퓰리즘적 세계관에서는 각 진영의 이해관계가 단일하다고 전제합니다. 진영 간 이해 조정은 ‘더러운 타협’이 되고, 진영 내 이해 조정 요구는 ‘내부 총질’로 여겨집니다. 물론 정치의 엔진은 갈등이고, 각 당이 명시적으로 대표하는 이해관계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렇다 하더라도 공동체의 유지와 발전이라는 더 큰 대의를 위해서는 대화와 타협, 조율과 합의가 필수입니다. 포퓰리즘에서는 금기시되는 것들입니다.
포퓰리즘이 득세하면 갈등을 해결하는 정치가 설 곳이 없어집니다. 포퓰리즘에 기대지 않으면 정치적으로 영향력을 얻기도 매우 힘듭니다. 여론과 언론의 관심도 갈등의 조율보다 증폭에 더 관심을 갖고, 이는 또다시 악순환의 동력이 됩니다. 이렇게 포퓰리즘이 극단으로 발현되면 공동체가 위기에 처합니다.
완전히 이상적인 정치 문화를 갖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인간은 애초에 불완전하고 욕망 또한 잘 제어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금이나마 더 생산적인 정치 문화를 갖기 위한 노력을 포기할 순 없습니다. 개발도상국뿐만 아니라 미국이나 유럽 같은 민주주의 선진국에서 펼쳐지는 포퓰리즘 정치의 말로를 보면, 절대 포기해선 안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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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종섭_ 김한규 의원실 보좌관. 박주민 국회의원의 선임비서관, 박원순 서울시장의 정책비서관, 조희연 서울시교육감의 정책보좌관, 심상정 정의당 대표의 메시지 비서를 역임했다. 정치와 정무, 정책을 조화하는 일을 하고 있다.
Last modified: 2024-02-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