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ritten by 3:23 오후 135호(2024.01)

[기고]
「숲에서 배우다」를 읽고

이정자(임학 85)

「숲에서 배우다」라는 책의 저자 도쿠무라 아키라 씨는 홋카이도의 숲 또는 아키타현(秋田縣) 오쿠모리요시(奧森吉)의 너도밤나무 숲에서 20여 년 이상 지내면서 숲문화를 체험하고 배우며 숲속학교를 운영, 보급하는 일을 하고 있는 사람으로서 번역자인 소진열(임학 74) 씨와 숲을 통해 교류를 해왔다고 한다. 그 당시 병을 앓고 있던 소진열 씨가 이 책을 번역한 것은 자신의 병을 극복하기 위해 그 병을 직시하는 과정이었고, 단순한 번역이 아니라 투쟁의 한걸음 한걸음이라며 도쿠무라 씨는 이 책은 ‘소진열이 쓴 책’이라고 말하고 있다.

도쿠무라 씨는 이 책에서 인류의 현재 상태가 가히 ‘절망적’이라고 한탄하며, 혹시나 인류에게 내일이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숲과 인간과의 새로운 사랑의 관계를 회복하는 것”밖에 방법이 없음을 숲이 가르쳐 준다고 주장한다. 작가는 숲을 木자 밑에 水土를 나란히 적는 방식으로 표기하고 있다. 즉 숲이란 단순히 나무가 많이 있다는 것을 뜻하는 森이 아니라 나무(木)와 물(水)과 흙(土) 사이에서 모든 생명들이 빛을 내며 자라는 곳이라는 의미이다. 저자는 앞으로의 시대는 분명 ‘숲(木水土)의 시대’일 것이라고 숲 속에서 살아온 경험 속에서 확신하고 있다.

(내용 중)

폐활량이 남보다 적은 나는 쉽게 숨이 차고 허리도 아프고 다리가 아플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어느 정도까지 가게 되면 ‘고통’을 넘는 황홀한 상태가 됩니다. 흔들리는 것 같은 따뜻함에 안겨 황홀한 기분이 됩니다. 어머니의 자궁 속에 있는 것 같은 느낌, 양수에 떠 있는 태아의 안도감과 분명 비슷한 기분일 것입니다. 그걸 느끼는 순간 너도밤나무 숲은 쑤욱 내 안으로 들어옵니다.

글로 표현하기 어렵지만 이 기분을 느끼고 싶은 마음 만으로 나는 숲에 있을 수가 있습니다. 될 수 있으면 그렇게 느낀 숲 속에 눌러앉아 마음껏 숲을 느껴 보고 싶습니다.

이것은 그 숲이 생명으로 한가득 차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수많은 생명이 복잡하게 서로 얽혀서 안정된 생태계를 이루고 있습니다. 그것은 저 풍부한 개울물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십 년 또는 수십 년 전에 내린 비가 너도밤나무 숲에서 여과되고 저장되었다가, 차갑고 투명하고 맑고 달콤한 물이 되어 흘러나옵니다. 우리들이 무심코 지나치거나 빠질까 봐 조심하며 건너던 그 개울물과 견줄만한 물은 요즘 세상에 그다지 많지 않을 것입니다. 구리코마의 물은 그 숲의 풍요함을 보여주는 틀림없는 증거라고 생각합니다. (이하 생략)

수목원에서 근무하는 나는 날씨와 상관없이 매일매일 숲에 가고 있는데 숲 속에서 어렴풋하게 이와 비슷한 느낌을 받는다. 사람이 숲에 있을 때 편안하고 행복한 느낌을 가지게 되는 원인에 대해서는 여러 학자들의 주장과 가설이 있다. 모두 대체적으로 우리 인류는 오랫동안 숲에서 살아왔고, 인류의 진화과정 전체로 볼 때 최근인 도시화 이후에서야 숲에서 나왔으므로 숲에서 지내는 것을 그리워하고 편안하게 느끼는 것이라고 한다.

저자는 숲을 신봉(?)하고 있지만 모든 이에게 똑같은 방식으로 숲을 강요하고 있지는 않고 숲을 느끼는 방식은 사람마다 다름을 인정하고 있다.

(내용 중)

사람이 숲과 대면할 때 여러 가지 개성이 나타납니다. 어떤 게 좋다는 것은 아니지만, 숲 속에서 존재감이 있는 사람도 있는가 하면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습니다. 당신의 경우, 숲 속에 있는 것이 너무도 자연스럽고 금세라도 슬그머니 풍경 속에 녹아 사라져 버릴 것처럼 생각되었습니다. 걷다가 문득 뒤돌아보면 뒤에서 오는 당신이 아주 작게 보였습니다. 큰 나무가 빽빽한 숲 속에서 인간은 누구나 하찮은 존재입니다. (생략)

저자가 이 책에서 말하고 있는 것은 단순히 숲이 좋으니 함께 즐거움을 나누자는 것이 아니다. 저자는 지금 우리 인간은 존재 자체가 심각한 위협을 받고 있고 이대로는 지속할 수 없음을 말한다. 요즘 여러 사람들이 각각의 분야에서 주장하고 있는 기후변화, 물질만능주의, 도시화, 인간성 상실 등등 모든 것을 포함하여 지금 시대는 위기라는 것이고 그 대안으로 숲을 제시하고 있다.

(내용중)

이 시대에서 숲이 말해주는 것을 재빨리 파악하는 감성이 어느 시대보다 중요해졌습니다. 인류는 지금 중대한 국면에 서 있습니다. 이제까지의 가치관이나 세계관, 인생관을 뿌리째 뒤집지 않으면 인류 자신이 멸망할지도 모르는 상황입니다. 인간 중심으로 자연을 계속 파괴해 온 결과, 이제까지의 ‘좋아’가 통용되지 않게 됐습니다. 이제까지는 ‘괜찮아’였던 것이 그렇지 않게 되었습니다. 가까스로 지탱해 온 생태계는 조그만 틈새로 일제히 무너져 내릴 우려가 있습니다. 그런 위기적 상황입니다.

우리는 사계절의 변화가 당연하다고 생각하지만 세계적으로 보면 특별한 모습입니다. 숲이 있다는 것 자체가 세계 속에서 결코 당연한 일이 아닙니다. 당신이 본 구리코마의 너도밤나무 숲은 일본의 귀중한 숲이지만, 세계적으로 보아도 귀중한 숲입니다. 50년 전 태국의 열대우림은 국토의 60%를 차지하였는데 20년 전에는 국제자본의 남벌 등으로 30%가 되었고, 지금은 겨우 20%라고 합니다. 숲이 국토의 10%가 안 되는 상황이 되면 질병, 전쟁…. 더 무서운 일이 일어나도 이상하지 않을 것입니다. 숲이나 나무, 풀 또는 야생동물과 버섯, 균류마저도 저마다 자기들의 언어로 이 위기를 말해주고 있는데도 둔감한 인간은 태평스레 자기 멋대로 행동하고 있습니다.

산속에서 우리가 쉽게 보는 버섯은 한 그루의 나무와 공생관계에 있을 뿐만 아니라 숲 속 어디에나 균사의 그물을 내뻗어서 나무와 나무, 큰 나무와 어린나무를 서로 맺어주어서 영양을 주고받거나 상호 보급하는 관계를 만들어 냅니다. 영화 아바타에서 나무들이 모두 하나로 연결되어 정보를 주고받는 것이 과학적 사실인 것입니다. 우리 인간들이 그 정보를 해독하지 못할 뿐입니다.

인간이 숲 속에 있다는 것 자체가 숲을 파괴하는 것과 마찬가지일 지도 모릅니다. 인간의 존재 그 자체가 숲이나 자연에게는 커다란 모순입니다. 그것이 모순이라는 것을 깊이 주시하지 않는 인간이 살아갈 방법은 없다고 말합니다.(생략)

인간은 숲에 대해, 자연에 대해 너무나 오만해져 오감을 둔화시키고 인간이 인간이기를 반은 포기하고 핵이나 환경호르몬, 유전자 조작에 이르기까지 본디 인간이 들어가서는 안될 영역에 거침없이 침입하고 있다는 것이다. 숲은 상냥함으로 가득하여 숲 속의 생명들이 자기의 생존을 위해 다른 어떤 것도 희생시키지 않으며, 모든 생명이 땅 위에서나 땅 속에서도 서로 맺어지고 서로 돕고 있어서 아무렇게나 해도 되는 생명 같은 것은 하나도 없는 관계 속에 있다.

숲의 생명들은 수백만 년에서 수천만 년을 살아온 체감을 통해 변화와 위험을 민감하게 헤아리고 갖가지 형태로 소리를 높여 경고를 보내고 있다고 한다. 그런 소리 없는 아우성을 들을 수 있는 감성이 필요하다. 숲 속 생명들의 모든 생태에서 배우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 인간이 한 그루의 나무를 심을 수는 있으나 그것이 어떻게 자라날지 어떨지는 인간의 지혜를 훨씬 뛰어넘는 무수한 생명들, 눈에 보이는 생명뿐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미생물, 균류 그 밖의 것들이 지극히 치밀하게 서로 연결되어 있는 속에서 비로소 결정되는 것이다. 이 신비함이 있어 아름답고 풍요로운 것이다.

숲 속에서는 ‘해야 한다’ 거나 ‘하지 않으면 안된다’ 거나 ‘힘껏 노력한다’ 조차도 몸에서 떨쳐 내었을 때 숲의 생명들과 하나가 될 수 있다고 한다. 그저 두 손을 모아 합장하며 “제발 이 작은 생명을 친구로 받아주세요”하는 것이다. 이때 ‘숲이 지켜주고 돌봐주는데’에 대한 고마움이 마음에서 우러나올 것이고 어떤 파괴에 대해서도 대항하는 강력한 힘을 가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제 숲이나 자연에 대해 인간은 ‘무언가를 해야 한다.’가 아니라, ‘무엇을 하지 않는 게 좋을까?’를 깊이, 또 깊이 생각해 봐야 할 시대인 것이다.

저자는 다가올 새로운 시대는 숲의 시대(나무와 물과 흙속에서 생명이 피어나는 시대)가 되기를 바라고 있다. 숲 속에서 수렵채집으로 생활하던 조몬시대(縄文時代)의 사람들이 이어온 삶의 방식에서 희미하게나마 숲의 사상, 숲의 문화를 찾아갈 수 있다고 믿고 있다.

우리는 지금까지 인류 진화의 역사를 말할 때 수렵채집의 시대가 미개하고 농경시대로 변화함이 발전이라고 배우고 믿어왔는데 일본의 조몬문화는 수렵채집을 기본으로 하는 문화에서 교역 수준이 높아 벼농사의 존재를 알았지만 자연을 파괴하는 농업이 아닌 자연과 친화적인 수렵채집 위주의 생활방식을 선택한 것일 수도 있다는 진화생물학적 주장을 하고 있다. 이것은 유발하라리의 책 사피엔스에서 농업혁명이 “인류 최대의 사기극”이라고 표현한 것과 일맥상통하는 면이 있어서 흥미로웠다. 즉 인류가 농사를 짓기 위해서는 많은 인력이 필요하고 대가축을 사용해야 하므로 집단거주 및 대가축 사육을 위한 자연파괴가 필연적이게 되는 것이다.

내가 학력고사 점수에 맞춰 입학한 전공이 임학과였고 사십이 넘을 때까지 나무나 숲에 대해 생각하는 거 없이 그냥 살아왔다. 가끔씩 가는 산행은 기승전결이 있는 재미나는 놀이라고만 생각했는데 요즘에는 숲이 점점 더 고맙고 그 안에 무언가 있을거 같다는 생각을 조금씩 하고 있다. 나이가 든다는 것은 경험이 축적된다는 것이라는 것을 인간의 짧은 삶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인간보다 수 만배 더 오래 이 땅에 살아오고 있는 숲 속 생물들에게는 상상할 수 없이 많은 경험과 지혜가 축적되어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한다.

이 책 「숲에서 배우다」를 읽으며 진정한 ‘배움’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진정한 배움이란 단순히 지식을 늘리는 것이 아니라 무언가를 온 마음과 몸을 함께 쏟아부어 일을 하는 과정에서 자기 마음속에 지금껏 알지 못했던 자아, 새로운 자신을 발견하는 것, 그 발견의 과정에서의 즐거움, 그것이 진정한 배움이라는 저자의 생각에 공감하면서 나도 이러한 배움의 기쁨을 맛보고 싶다는 열망이 솟아난다. 저자가 어느새 나를 감동시키고 있었던 것이다.

우연한 기회로 시작한 “산림치유” 공부를 하다 보니 숲이 인간에게 큰 도움을 주고 있음을 알게 되었고 덩달아 이산, 저산 가고 싶은 산도 많아졌다. 그러던 중에 돌아가신 우리 소진열(임학 74) 선배님이 옮기신 도쿠무라 아키라 씨의 책 「숲에서 배우다」를 읽게 되어 우리가 산에 가는 행복, 진정한 깨달음의 맛을 볼 수 있어 감사했다. 이 글을 쓰는 이유는 <선구자>의 독자들에게 이 책의 아무 곳이나 펴서 천천히 읽어볼 것을, 또 아울러 일상 속에서 시간 날 때마다 “숲 속을 거닐 것”을 권유하기 위함이다. 책 속의 한 구절 한 구절의 문장이 숲 속의 한그루 한그루 나무가 되는 착각을 하면서 깨닫고 행복을 느끼는 체험을 하게 될거라 믿는다. 또 개인적으로는 숲으로 가는 기회가 생길 때 저를 꼭 끼워달라고 부탁하기 위함이다.

나와 우리 앞의 날들이 숲 속에서 느낄 수 있는 충만한 ‘배움’, ‘행복감’으로 가득 차게 될 것을 충심으로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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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자_경기도산림환경연구소에 근무하며 경기도의 자연휴양림 또는 수목원을 관리하는 업무를 현업으로 하고 있다. 그동안 축령산자연휴양림, (가평)잣향기푸른숲, (오산)물향기수목원을 거쳐 현재는 (대부도)바다향기수목원에서 숲을 가꾸는 일을 하고 있다.

Last modified: 2024-02-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