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세진 선구자 편집위원
1975년 4월 8일 오전 10시 대법원은 도예종, 하재완, 서도원, 송상진, 이수병, 김용원, 우홍선, 여정남 등 인혁당 관련자 8명의 사형을 확정하고 9일 오전 서울구치소에서 교수형으로 사형을 집행했다. 국제법학자협회가 ‘사법사상 암흑의 날’로 지정한 4월 9일은 김상진 열사를 비롯해 많은 사람들에게 충격과 분노, 울분과 고뇌를 불러 일으켰다. 이러한 분노와 울분은 광주의 한 고등학생에게도 전파되었다. 독립다큐영화 <1975.김상진>에 출연한 박석면(당시 광주일고 3학년, 67세)씨는 “75년 4월 9일 이후에 저는 굉장히 좀 우울하고 침울하고 뭔가 울분에 차서 뭔가 움직이지 않으면 안되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4월 12일 서울대 농대생이 유신반대를 외치면서 할복 자살했다는 소식을 듣고 친구들과 추도식을 거행하기로 결정, 추도문을 쓰고 4월 15일 추도식을 거행했다. 이 사건으로 제적당한 박석면씨는 현재 광주전남 농민운동역사관 건립추진위원회 상임추진위원장(이하 박석면 위원장)으로 일하고 있다. 고등학교 제적 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그간의 삶을 들어봤다.
인터뷰를 위해 찾아간 전남 무안 현경유치원(원장 박석면) 강당에는 수십개의 농민운동 자료 박스와 고서들이 가득했다. 역대 한국의 문집을 총망라한 한국판 사고전서(四庫全書) 《한국문집총간(韓國文集叢刊)》 수백 권과 해례본, 사상계, 창작과 비평 등 고서들은 박석면 위원장의 형님 박석무 다산연구소이사장의 자료들이다. 1964년 대학가에서 최초로 ‘박정권 하야’ 시위를 주동하는 등 광주 제1세대 민주화운동가로 활동한 박석무 이사장은 박석면 위원장의 삶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민주 운동가인 형님과 함께한 청소년기
“64년, 형님이 전남대를 다니면서 초등학교 2학년인 저를 무안에서 광주로 전학을 시켰어요. 그때가 한일협정반대 데모가 한창일 때였는데 유치장에 들어갔다가 나오면서 계란도 가져오고 그러더라고요.(웃음) 그러다가 65년에 형님이 강제징집되면서 무안으로 내려왔는데, 형님이 제대 후 복학하고 제가 중학교에 가면서 다시 광주로 옮겨서 계속 같이 산거죠. 그때 형님은 광주 제1세대 민주화운동가니까 알게 모르게 그런 영향이 아니었겠어요. 형님 친구들이 와서 하는 얘기도 듣고 이렇게 하다가 자연스럽게…. 그러던 중 75년 4월 9일, 인혁당 사법살인 이후에 굉장히 침울하고 울분에 차서 뭔가 움직이지 않으면 안되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어요. 그러다가 4월 12일에 서울대 농대생이 유신반대 외치면서 할복을 했다는 소식을 형님을 통해 들은거죠. 그리고 친한 친구 몇 명과 추도식을 준비했어요.
추도식 당일, 200여 명의 학생들이 운동장에 모여 시위를 시작하려는 순간, 교장 선생님이 뛰어 나오며 “김상진 그 사람 느그 선배(광주일고 출신) 아니다”라고 외치자 학생들이 술렁였죠. 그때 누군가가 “선배가 아니면 어떠냐, 일고선배만 선배냐”라고 외쳤고 그 순간 제가 구령대에 올라가 구호를 외치면서 판을 짠거죠. 친구들과 함께 스크럼을 짜고 교실도 돌고 운동장도 돌고 했는데 교문이 잠겨버려서 나갈 수가 없었어요. 가두시위를 하려고 했는데 막힌거죠. 그렇게 시위를 마치고 그날 저녁 집에 가서 자고 있었어요. 난 단순 가담자이니까…. 그런데 밤 12시가 넘어서 경찰이 잡으러 왔어요. 취조실에서 경찰이 너 이새끼 니가 다 해놓고, 모른척하고…. 니가 추도문 쓰고 주동하거 다 안다고 하더라구요.”
박석면 위원장은 당시를 회상하며 오래된 일기장을 보여준다. 화창했던 주말을 지나 며칠간 미룬 삭발을 하고 추도식을 준비하며 추도문을 쓰고 집회를 준비하는 결기가 담겨져있는 일기이다. 당시 집회 주동을 친구에게 맡긴 미안함과 죄책감도 일기에 고스란히 담겨있다. 박석면 위원장이 전면에 나설 수 없는 이유는 이미 시위로 경찰조사를 받았던 이력 때문이었다.
“74년에 두어번 잡혀갔다 온 경력이 있어서 내가 추도식을 주동하면 틀림없이 걸린다는 판단을 했던거죠. 그래서 잡혀갔던 경험이 없는 친구가 주동하게하고 나는 현장에서 단순 가담하는 식으로 진행했어요. 그래서 추도문을 써서 친구에게 줬었는데 어떤 연유로 그 추도문이 경찰에게 발각되서 결국 주동자로 잡혀갔죠. 추도문은 남은게 없어요. 제 생각에 추도문을 잘썼을 거 같은데(웃음)…. 그때는 제가 시를 쓰고 했던 시절이라…. 일기에도 싯구 하나 만들었다고 적혀 있는데, 아시겠지만, 싯구 하나 만들면 그게 이제 시가 되는 거거든요.”
2학년 때부터 계속된 시위 주동, 김상진열사 추도식으로 제적당하다.
75년 4월 15일 김상진열사 추도식에 전면으로 나서지 않은 이유는 이미 전과(?)가 있기 때문이었다. 2학년 때인 74년에 2번, 3학년 초인 75년에 1번 교내 시위에 가담하거나 주동한 전력으로 경찰 조사를 받았었다.
“74년에 광주일고에서 두 번의 유신반대 데모가 있었어요. 10월 21에는 3학년이 주동했는데 제가 2학년들을 모으는 작업을 한거죠. 그때는 동부교회에서 2, 3학년이 일요일마다 모여서 토론하는 모임이 있었는데 거기 중심들이 주동을 했어요. 그때 저도 잡혀갔었죠. 그후 2학년 중심으로 저하고 친구 여섯명이 주동해서 11월 15일 유신반대투쟁을 했어요. 일부러 교문을 열어놓고 민방위 훈련을 하는 15로 날을 받았어요. 밖으로 뛰쳐나가 가두시위를 해야야 된다는 생각이었죠. 2학년들이 거의 다 나왔어요. 700명이 휘각을 불자마자 교문 앞으로 모여들기 시작한 거예요. 바로 학교 앞 도로에서 스크럼짜고 유신 반대를 외치면서 도청앞까지 가버렸어요. 도청앞까지.(웃음) 광주일고에서 충장로를 쭉 타고 올라가면 도청 앞까지 거의 7~8km 됐을 거예요. 충장로는 차도 잘 안다녔는데 거기서 난리가 난 거죠. 최루탄 발사하고 울고불고 돌아서 학교까지 들어오고 그랬어요. 그때 잡혀가서 보니 경찰서 대공분실에 안기부까지 배후 캔다고 난리도 아니었죠. 그러고 나니 학교를 나오지 마라 해가지고 11월, 12월에 방학때까지 학교를 안 다녔었어요.
이듬해인 75년 초에 학교 운동장에 큰 실내 체육관이 지어지고 있었어요. 어떤 날 친구 하나가 저를 찾아와서 ‘야, 우리가 유인물을 뿌리자, 지금 지을 필요도 없는 체육관을 짓고 있다. 유기춘 문교부 장관이 박정희한테 돈을 받아서 체육관을 짓고 있는데 이건 국민의 혈세를 축내는 일이다.’ 그래가지고 교실에다 유인물을 뿌리고 잡혀갔죠.
그리고 75년 4월 김상진 열사 추도식으로 제적을 당한거죠. 4월 15일에 저 혼자 제적을 당하고 일곱명의 친구들이 무기정학을 당했어요. 제가 제적을 당하고 학교에서 안보이니까 친구들이 이에 항의하는 집회를 준비했어요. 당시 제가 3학년이었는데 2학년까지 함께 5월 1일에 학교 후문을 부수고 나가기로, 아주 대단한 작전을 세웠는데 그게 미리 발각이 되서 3명이 사전모의로 구속이 되고 13명이 구류를 살았죠. 16명이 제적을 당한거예요.”
당시 제적을 당하고 정학을 당한 친구들은 ‘김상진 열사로 관련된 청소년 시절의 그 의식이 지금까지도 쉽게 불의나 부정한 방법을 멀리하는 삶의 태도를 만들어주었다’고 이야기한다. 이러한 사건의 영향을 받은 광주일고 학생들은 5·18 당시 연대감이 유달리 각별했고 각 대학의 학생운동에서도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농민운동을 위한 귀향
“검정고시를 보고 대학에 진학하려고 했죠. 당시 글을 쓰던 때라 조선대학교 국문과에 응시를 했다가 면접에서 D를 받고 떨어졌어요. 이후 여러가지 진로를 고민하다가 77년 초에 무안, 고향으로, 부모님 곁으로 내려오게 됐죠. 내 터전이, 물적 기반이 농민이기 때문에 농민운동을 하고자 내려온 것이죠. 제가 내려왔다는 소식을 듣고 당시 무안에서 최초로 농민운동을 시작했던 배종열 씨(전 전농 의장)가 저를 찾아왔어요. 농민운동 같이 하자고…. 나는 이제 상당히 의식화돼 있는 사람 아닙니까?(웃음) 77년도에 ‘무안농사형제계’를 만들어서 배종열 씨가 회장하고 나는 총무로 활동을 했죠.
그런 과정에서 수원 ‘내일을 위한 집’에서 크리스찬 아카데미라고 이우재, 장상환 이런 양반들이 하는 프로그램이 있었어요. 전국에서 추천을 받은 사람들이 가는 곳이었는데 제가 77년 여름에 4박 5일 교육을 받고오고 이제 스무살에 열혈 농민운동가가 된 거죠.
76년부터 함평고구마사건이 터졌는데 바로 옆이 함평이니까…, 바로 무안, 함평이예요. 고구마 피해는 무안이 훨씬 더 많았어요. 무안도 피해보상 투쟁을 했었는데 그때 함평이 우리보다 훨씬 더 조직이 컸어요. 서경원, 노금노 이런 선각자, 선구자가 함평에 있었죠. 78년 4월 24일에 광주 북동성당에서 죽자는 각오로 농민 70여 명이 단식투쟁을 시작했는데 제가 제일 어린 나이로 단식에 참여했죠. 4월 29일에 피해액을 보상받고, 5월 1일에 단식투쟁이 끝났죠.”
박석면 위원장은 함평고구마투쟁이 끝나고 78년 7월 31일자로 군대에 입대한다. 33개월 복무를 마치고 제대 후 부모님의 성화에 못이겨 진학한 전남대학교에서 나이 먹은 학생 운동권이 되었다. 데모하고 주동 뜨면 잡아가고, 교내에서 잡아가던 시절, 집안의 권유로 하는 대학생활이라 졸업을 해야만 했던 그는 주로 배후에서 조직하는 활동을 했다. 그리고 86년에 졸업과 동시에 다시 무안으로 내려갔다. 대학을 다니면서 결혼한 부인과 함께였다. 집도 땅도 없었던 박석면 위원장은 무안읍에 녹두농약종묘사를 차리고 다시 농민운동을 시작했다.
농민운동을 시작하며 서로 어울리지 못하고 따로 활동하는 카톨릭농민회(카농)와 기독교농민회(기농)가 연대할 수 있는 ‘무안농민운동협의회’를 만들었다. 협의회를 통해 카농과 기농이 함께 6월항쟁, 87년 12월 대선무효투쟁 등 지속적인 투쟁을 이끌 수 있는 동력을 만들었다. 이를 기반으로 86년 조합빚 탕감운동(조합빚 상환거부 투쟁)을 진행하고, 87년 농민운동 세력을 넘어 범군민의 참여를 끌어낸 ‘박종철열사 추모위원회’, 민주화운동과 농민 생존권 투쟁을 결합한 ‘무안군 민주화 및 농민생존권운동 협의회’를 만들어 냈다. 이후 5·18 추모제, 마늘양파 공청회, 6월항쟁, 7월 양파투쟁(7.4 농민투쟁) 등을 진행하며 중심적인 역할을 했다. 6·29이후 ‘민주쟁취전남농민위원회’에서 각 지역별 투쟁을 모아내는 사무국장으로 일하며 농민위원회는 나주 수세투쟁을 촉발시키고 2.13 여의도 대투쟁까지 연결됐다.
그리고 90년대부터는 지역활동 시작했다. 지역활동은 도의원활동까지 연결되었다. 지방자치를 통해 지역운동을 더 이뤄내고 싶었기 때문이다.
지역운동 시작, 지역운동을 위한 도의원활동
“90년에 전농(전국농민회총연맹)이 만들어지면서 전국화가 됐잖아요. 근데 농민회가 지역 활동을 잘 안 해요. 지역운동과 농민운동은 다른 걸로 생각을 하고…. 좀 다르긴 하죠. 다르긴 한데 지역이 없는, 또 지역을 모르는 농민운동이라는 게 어떤 의미가 있겠냐 이런 생각들을 하게 된 거예요. 그래서 무안교육문화센터를 만들어서 청소년 교실, 여성 교실, 노인 교실 이런 것들을 했죠. 현경어린이집도 그런 활동의 일환이 됐어요. 어린이집은 사실은 안정적인 생계를 위한 수단으로 시작했는데 하다보니 문화적인, 일종의 지역 사람들과 관계를 하는 장(場)이 됐죠.”
“정치도 좀 했어요. 2002년에서 2006년까지 전남도의원을 했어요. 그때는 지방자치가 막 커나가고 있던 시기라 지역 단체장이라든가 이런 걸 좀 하면서 지역 운동을 좀 제대로 좀 만들어 봐야겠다는 생각이었는데, 적성에 안 맞았어요. 현실 정치가 제 생각과 많이 다르고 또 운동 쪽으로 실현을 해보려고 하다보니 괴리가 많이 생겼죠. 아주 이제 재미가 없었어요. 한 4년 동안 그러다가 연임을 하면 좀 발전이 있지 않을까 해서 출마를 했는데 열린우리당으로 나가면서 떨어졌죠. 이후 정치나 선거에는 관계되지 않겠다하고 지금까지 이렇게 와분 거죠.(웃음) 그래도 도의원이 되고 나서 지역 시민활동을 좀 제대로 하기위해 ‘무안아카데미’라는 일종의 지역 조직을 만들어서 10년 가까이 활동을 했네요.”
농민운동에 지역활동, 도의원까지 지낸 박석면 위원장은 이 시대에 지역활동이 참 힘들다고 이야기한다. ‘굉장히 척박하다’고 이야기하는 지역활동의 실정을 들어봤다.
“지방자치가 되면서, 여기는 또 민주당 일색이잖아요. 민주당 일색이니까 전부 포섭되어 가버려요. 당이 아니면 소위 살아남을 수가 없고요. 가까운 사람이 군수되고 뭐되고 하니까 대부분의 농민운동가들도 다 관계를 해요. 그래서 사업도 좀 따서 뭐 하고 이러다 보니까 비판 세력이 없는 거죠. 그러다보니까 아주 척박해요. 그런 걸 조금이나마 이겨내볼 수 있는 곳이 신문사를 가지고 있는 지역이라고 생각해요. 옥천이라던가 해남처럼 지역신문이 견제세력이 되는 거죠. 그래서 신문 운동도 좀 해봤는데 쉽지 않더라구요. 이 지역에 농민회가 비판적인 세력, 유일한 정치적인 집단이었는데 민주당에 포섭되고, 지방자치제에 포섭되어가고 있으니까 소위 말해서 비판 세력이 나올 수가 없는 거죠. 이게 아주 척박한 거예요, 지역이. 그래서 지역활동을 한다는 게 참 어려워요.”
박석면 위원장은 최근 광주·전남지역 농민운동의 역사적 의미와 뜻을 계승·보존하기 위한 ‘광주·전남 농민운동역사관’ 건립 사업을 시작했다. ‘사단법인 광주전남 6월항쟁’에서 6월항쟁 사료를 발굴하고 기록하기 시작한 것이 계기가 되었다.
“6월항쟁 당시의 광주·전남의 중심은 전남이에요. 광주가 분리되지 않았을 때니까요. 당시 전남은 유일하게 농민운동만 있었어요. 그래서 각 지역 농민운동가들이 6월항쟁때 광주에 모여서 학생들을 지도하고 했었죠. 6월항쟁이 이후에는 ‘민주쟁취 전남농민위원회’가 만들어졌는데 제가 사무국장을 했거든요. 그래서 당시 활동했던 사람들을 모아서 그때 기억들, 자료를 정리하자 그런 것이 계기가 되어가지고…. 제가 나이는 그렇게 많지않지만 초창기 농민운동가였기 때문에 초창기부터 농민운동에 대해서, 쭉 사람관계라든가 이런 걸 꿰고 있다고 봐야 되지 않겠어요. 그러다보니 농민역사관 건립립추진위원회 상임추진위원장을 맡게됐죠.
사료가 준비가 되니까 그걸로 역사관을 건립시키자, 그렇게 지금 한 4년됐는데 코로나 때문에 주춤하다가 이제 서서히 건립을 해나가는 방향으로 초점이 모아져서 그 일을 하고 있는 거죠. 지금 시기가 자료들도 망실되어가는 시기이고 그때 활동했던 분들이 돌아가시고 있는 중이거든요. 돌아가시기 전에 구술 영상도 하고 인터뷰도 하고 내용을 만들어 놔야 되는데 돈이 있어야 또 가능한 일은 아닙니까?(웃음) 그래서 도(道)에다가 요구를 했죠. ‘역사관을 지읍시다.’ 이게 도지사에게 받아들여져서 작년에 타당성 조사 용역 예산 2억원이 만들어졌어요. 최근에 그 용역을 발주하고 용역에 참여해서 타당성 조사하는 작업을, 올 1년 그 준비작업을 하려고해요. 농어촌사회연구소도 타당성 조사 용역에 응모했죠. 큰 작업인데…. 굉장히 어렵네요. 그것이 운동하는 것보다 훨씬 더 어려워. 큰 돈이 들어가는 일이라…. 꼭 해야 될 일인데(웃음) 참 어려워요.”
다시 문학소년으로
앞으로의 계획을 물으니 역사관 건립을 이야기한다. 그리고 그 후 작은 소망이 있다고 한다.
“나이가 이제 내가 67살 먹었어요. 고등학교 때 참 열심히 문학소년이었어요. 시를 쓰고 동인회도 만들고 동아리도 만들어서 박몽구(작가회의 시분과장) 이런 친구들하고 같이 시를 쓰고 그랬는데 그러고 나서 못 썼어요, 시를. 조선대학교 국문과에 떨어지고 농촌으로 내려오고 진로에 대한 갈등을 하는 과정에서 글 쓰는 것을 멈췄어요. 절필이라고 내가 얘기 했는데….(웃음) 그때는 이제 글들이, 시가, 뭔가 힘이 되고 이런 것이 있어야 되는데 이런 게 안 되는 것 같고 내 마음같지 않아지는 거겠죠.
그런데 한창 농민운동 열심히 하고 다른 운동에 빠져 있을 때는 생각이 안 나는데, 그런 일들이 좀 정리되면 그럴 때마다 다시 시를 쓰고 싶다는 생각을 해요. 그래가지고 재작년부터 시를 좀 써봐요. 지역에서 시 활동도 하고, 잡지에 게재도 하고…. 한두 군데 시작을 했어요. 그래가지고 지금 어느 일보다 열심히 하고 있어요. 역사관 문제가 정리가 다 되면 시작(詩作)을 본격적으로 해볼까 그러고 있죠.(웃음)”
강단있는 눈빛과 50여년 전의 일을 날짜까지 정확히 기억하고 있는 명석한 모습 사이사이 비추는 맑은 웃음은 그동안의 삶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신념을 지키며 살아온 삶 속에 김상진 열사 추도식이 있다는 것이 감사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인터뷰 도중 “그때 제적을 당한 것에 대해 피해보상 소송을 한 친구도 있어요. 저에게도 소송을 권했는데 성실히 안했어요. 솔직히 내가 제적당해가지고 피해 본게 난 별로 없는 것 같거든요. 그 뒤에 인생이 달라졌으면 뭐 얼마나 달라졌겠어요.(웃음)”라는 말이 가슴에 와 닿았기 때문이다.
여전히 신념을 지키며 지역을 지키고, 다시 시작(詩作)을 시작하는 67세 문학소년의 모습을 그리며 독립다큐멘터리 영화 <1975.김상진>에 출연해 했던 말로 인터뷰 기사를 마무리를 갈음한다.
“제적 안당하고 좋은 대학 가고 그랬으면 제가 이렇게 안 살았겠죠. 달리 살았겠지. 그러나 지금도 여기와서 이렇게 인터뷰를 할 수 있었던 것은 단순한…. 제가 그때 주동자라고 해서 여기 인터뷰에 쉽게 나와질까요? 못 나와진다고 봐요. 여기 인터뷰를 한다면…. 지금까지 살아온 것이 그래도 썩 그렇게 남에게 부끄럽지 않게 살았구나. 그래서 여기 자리에 나올 수 있는 거 아닌가 그런 생각이 들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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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환
– 박석면
아직도 고향에 돌아가지 못했다
50년을 고향에서 살았는데
마지막 나의 고향에는 아직도 돌아가지 못했다
삐비꽃 뽑아 진달래꽃 꺽어
방 윗목 구석에 몰래 감춰두고
봄을 맞이했던 유년의 고향
소 꼴을 먹이러 떼지어 소를 몰고 가던
뒷산 언덕길
소고삐 메어놓고 우루루 몰려가 일제히 뛰어들던
그 둠벙으로 가기에는 아직 멀었다
그 뿐이랴
고구마밭에 포기마다 주전자로 물을 주던
오뉴월 가뭄 든 들판
저건너 큰밭에서 늘상 혼자 고구마 밭을 매시던 어머니
고구마붓 따와 밥 위에 얹어 쪄주시던
그 어머니의 품 안까지 가기에는
아직도 너무 멀었다
이제 겨우 50년을 돌아 16살 풋내기 시의 고향으로 내려와
시에게 묻는다
고향가는 길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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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세진 _ 숭의여전 문창과에 입학, 문예창작보다 학보사 기사를 더 열심히 쓰고, 졸업 후 전국연합 기관지 ‘민’, 건강사회를 위한 치과의사회 신문 ‘건치신문’ 만드는 일을 하였다. 이후 성공회대 사회학과에서 공부하고 KOICA 봉사단을 다녀온 후 다양한 사람들의 인생을 인터뷰하고있다. (sejin3025@hanmail.net)
Last modified: 2024-02-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