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ritten by 3:05 오후 134호(2023.10)

[일농(一農) 김준기 선생님 2004년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인터뷰 정리]
“지행합일(知行合一)주의 실천했던, 우리 시대의 사회변혁운동가”

출처 :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구술아카이브

정리 : 임세진 편집위원

김준기 선생님은 2023년 3월, 황달기가 심해 동네병원에 갔다가 큰 병원에 가보라는 이야기를 듣고 큰아들이 근무하는 서울대학병원에 가서 췌장암 판정을 받았다. 황달이 심해 바로 암치료를 하지 못하고 황달을 치료한 후 5월부터 암치료를 시작했다. 선구자 편집위원회는 김준기 선생님의 췌장암 투병소식을 듣고 지난 7월 23일 선생님 댁을 찾았다. 선생님의 삶을 기록하기 위함이었다. 선생님은 “몇년 전에 사월혁명회 친구들하고 다들 몇 살까지 살 거냐고 얘기 하다가 어떤 스님 예언가가 몇 년도에 통일된다고 얘기한다고 그러니까 다들 깜짝 놀라잖아. 그래 그때까지 살 사람 손 들어봐. 그랬더니 없어. 우리 나이에는 그런 없거든. 나는 자신 있다 하고 했는데 이렇게 아프다”고 말씀하시며 웃으셨다. 투병 소식을 듣고, 포항에서, 성남에서, 서울에서 많은 사람들이 찾아온다며 “제대로 한 일도 없는데 찾아주니 그저 고맙다”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얼마 전에 자녀와 손주들이 모두 와서 함께 식사를 했다며 “식사를 하면서 뭐 할 말이 있나, 그냥 애들 얘기나 듣다가 그렇게…. 끝나면서 내가 얘기했어. 야, 너희들 다 보고 나니까 이제 남은 인생 아버지 노릇, 할아버지 노릇 제대로 하고 죽어야 되는데 어떻게 해야할지 모르겠다.”고 말씀하셨다고 한다. 선생님의 걸어오신 걸음걸음마다 결코 작지 않은 흔적을 남기셨음에도 불구하고 겸손한 말씀에 부디 건강하시기를 부탁드렸다. 2004년에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에서 진행한 인터뷰가 있어, 그 이후의 삶을 선생님과의 인터뷰를 통해 기록하기로 했다. 선생님의 건강 상태를 살피고, 8월 4일에 항암치료차 병원에 다녀오신 후 일정을 잡아 인터뷰를 진행하기로 했다. 선생님은 기운이 없고 긴 시간 앉아있는 것을 힘들어하셨으나 기억도 또렷하시고 말씀도 잘하셨다. 8월 9일에 전해진 부음이 믿어지지 않았다. 암 판정을 받고도 4·19 행사에 참석하시는 등 걸음이 허락하는 한 투쟁을 멈추지 않으셨던 선생님의 삶을 조금 더 일찍 기록하지 못한 아쉬움을 안고, 2004년에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에서 진행한 인터뷰를 일부 정리해 보는 장을 마련했다. <편집자 주>

제목 : 2004_1960-70년대/4월혁명 시기, 농민, 빈민_5,60년대 농민운동_김준기
□ 면담개요
○ 면담일자 : 2004년 8월 7일
○ 면담장소 : 사월혁명회 사무실
○ 구술자 : 김준기
○ 면담자 : 노중선
* 녹음테이프 7개, 녹화테이프 6개, 녹취문 A4 129매, 재생 시간 6시간 35분
☐ 녹취 내용
사월혁명회 공동의장이며 민주노동당 당기위원장인 김준기 선생님에 대한 구술테이프입니다. 면접자는 노중선이며 구술장소는 중구 정동에 위치한 사월혁명회 사무실이고, 일시는 2004년 8월 7일입니다. 이 녹음 테이프는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가 주관하는 민주화운동 관련인사 구술사료 수집사업에 제출하기 위한 결과물입니다.

산사람(빨치산)이었던 아버지가 그린 세상, 돈 없고 가난해서 학교 못 가는 사람들 누구나 다 공부할 수 있는 세상을 만들겠습니다

아버지께서 일제시대에 민족항일투쟁을 했습니다. 아버지가 대구농림을 나오셔서 소학교 교사생활을 하면서 일제 강점기 교육방침을 강요하는 일인(日人) 교장을 복도에 내동댕이 쳐서, 벽지로 전근을 가기도 하셨고요. 학생들에게 민족의식을 고취시키고, 2차대전 시기에 선생들과 학생들을 모아서 해방을 준비하는 운동을 계속했던 것을 기억하고 있고요. 해방을 맞이하고 인민위원회가 결성되면서 면단위 인민위원회 위원장을 하시고, 학교를 그만두시고 남로당입당, 이후에 군당정치위원장을 하셨죠. 46년에 10‧1사태, 대구 인민항쟁 때 포항, 우리 면에서 폭동을 일으켜서 구속되었다가 나오신 후 바로 북으로 정치학교 교육을 가신 것이 기억나고요. 김일성대학과 원산에 있던 군사학교도 마친 것 같아요. 결국 고향에 가야 한다, 내가 가서 싸워야 한다 하는 사명을 가지고 고향으로 오셔서 그때부터 빨치 투쟁을 하셨어요. 48년에 산사람(빨치산)들이 우리 면을 습격하면서 가족은 피난을 가게 됐죠. 울산 방어진에서 피난 생활을 하는데 어느 날 그 동네 먼 친척 할머니가 부르시길래 불쌍하다고 밥 먹이는 줄 알고 따라갔는데 골방에 들어가 보라하는 거예요. 무슨 일인지 모르고 골방에 들어가니까 깜깜한데 아버지가 계시더라고. 거기에서 아버지를 마지막으로 만난 거죠. 그때 11살인데 아버지가 ‘너는 장래에 뭐 할래?’ 그러기에 ‘나는 아버지 뒤를 따르겠습니다’ 그랬어요. 그러니까 아버지가 ‘아버지가 뭘 하는 사람이라고 생각 하느냐’고 물으시길래 대답했죠. ‘아버지가 말씀하셨지 않냐, 돈 없고 가난해서 학교 못 가는 사람들 누구나 다 공부할 수 있는 세상을 만드는 거다, 그게 아버지 생각 아닙니까’ ‘옳다’ 그러면서 손을 잡으시더라고. ‘너는 그럼 장래에 어떤 사람, 어떤 일을 할래?’ 그러니까 ‘저는 농민이 되겠습니다’ 그랬거든. 아버지가 ‘이제 헤어지면 나는 죽는다, 그러니까 너는 살아야 한다’ 그러면서 ‘이름을 김준기라고 하지 말고 박일수라고 해서 부산으로 피난 가서 살아라, 살아야 된다’는 얘기를 하셨죠. 아버지가 그때 나를 피난 보내놓고 열흘 만에 돌아가셨어요. 돌아가셨다는 얘기를 피난지 부산에서 들었죠.

피난 생활 후 어려움을 극복하고 아버지가 원하던 서울대 농대에 가다

아버지를 만나고 배를 타고 부산으로 피난을 갔어요. 부산 피난 생활 중에 6‧25를 겪었으니까요. 신문팔이, 담배팔이, 구두닦이 이런 것들을 했죠. 6‧25 생활을 끝내고도 고향에 못 가고 피신했던 마을에 가서 살게 됐는데, 그 마을에서 머리 아깝다고 국민학교 편입을 시켜줬죠. 5학년 말기에 하도 멀리서 다니니까 담임선생님의 배려로 국가고시를 보고 청하중학교, 지금 해아중학교에 들어가게 된 거죠. 중학교 졸업하고 집에서 농사지으면서 계몽주의에 빠져서 야학을 하고 있었어요. 부산에서 신문팔이, 구두닦이 하면서 학교 가고 싶은 욕심은 이루 말할 수 없었거든. 그 생각에 고향으로 와서 야학을 하게 되고 계몽주의에 빠지게 된 거죠. 그러던 중 청하중학교에 고등학교 인가가 났으니까 입학시험 치러 오라고, 1등 하면 특별생으로 장학금 준다는 꼬심에 농고에 들어갔죠. 신설학교지, 별명 그대로 똥통 학교인데, 농사짓고 계몽주의에 빠져서 제대로 공부도 안 했죠. 학교가 없어지느냐 마느냐 하는 상황이었는데 교장 선생님이 나에게 용기를 준거죠. 서울대 농대에 가면 4년 동안 장학금 주겠다고 그러시길래 고등학교 2학년에 말, 겨울방학부터 공부를 하기 시작했어요. 악착같이 공부를 한 이유가 아버지 때문이었어요. 내가 우리 아버지 살아계실 때는 아버지가 심은 토마토 따먹으면서 밭일을 하면 아버지가 ‘넌 희망이 뭐냐’ 그러면 ‘난 농민이 되겠다, 농사꾼 되겠다’고…. 그때 아버님하고 약조한 꿈이었거든. 그런데 우리 할아버지 얘기가 너희 아버지가 너가 크면 ‘저놈 서울대 농대 보낸다, 보낸다’ 소리를 자주 하셨다는 얘기를 하셨거든. 그러니까 ‘수원 농대, 아버지가 원하던 학교, 아버지가 나를 보내려던 학교다, 그러니까 꼭 가야 되겠다’하는 생각을 가지고 공부를 한 거죠.

계몽주의를 넘어 농업문제 근본적 해결을 위해 만든 농사단

대학 입학하자마자 4H연구회에 가입을 한 이유는 중학교 때부터 동네에서 야학을 했어요. 그리고 고등학교 때 소설 ‘상록수’와 ‘흙’을 읽으면서 계몽주의에 빠지기 시작했죠. 문제는 4H가 인간교육에 있었다는 거죠. 농촌의 기아와 무지와 빈곤에서 해방시키는 거는 농민교육이었거든. 그리고 그 중심이 청소년교육이었단 말이야. 그러니까 농촌 계몽주의 차원에서 4H를 접근하게 됐다 이렇게 보면 되구요.

군대 제대하고 61년에 복학, 62년도에 전국 농과대학연합회를 만들었어요. 매 학기마다 농업문제 심포지움을 개최했죠. 5‧16이 나면서 계몽주의를 가지고는 농업 문제, 농민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자각을 하면서 공부를 하기 시작했어요. 농촌 계몽주의가 아니고 농업 문제에 본질적으로 접근해서 근본적으로 해결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인식을 하는 친구들이 모여서 농대 안에 지하 써클을 만든 것이 ‘농사단’ 약칭으로 ‘NSD’입니다.

졸업 후 농촌지도소에 입사, 공무원이 되다.

농과대학을 졸업하면 정규 코스처럼 농촌지도소에 많이 들어갔죠. 서울시 농촌지도소에서 대학출신을 4급을 4명 뽑았는데 경쟁이 대단히 심했어요. 64년 한일회담 반대 때 들어갔는데 연좌제 때문에 3개월 동안 발령이 안 났어요. 그 당시에 서울시 부시장 김영준 씨 매형을 내가 잘 알았어요. 그분이 신원보증을 해줘서 공무원 된 거죠. 68년도에 결혼을 하고 바로 농사지으러 상계동 들어가면서 사표를 냈는데 농촌지도소에서 사표를 안 받아줬어요. 그래서 상계동에 농사지으면서 주재 지도사처럼 되어 버렸죠. 상계동에서 농사지으면서도 월급은 계속 받고…. 상계동 농사가 망해가지고 다시 복직했죠. 사무실에 나와서 근무해 달라 그래가지고, 근무한 게 두 달 하면서 신구대학에 강의 나가고….

결혼을 하고 농민운동을 위해 상계동 농촌으로

복학을 하고 난 이듬해 3학년 때 우리 집사람이 농과대학에 입학을 했어요. 학교 4년 후배 되죠. 집사람은 대전사범을 나왔어요. 사범학교 나와서 처음 발령지가 농촌, 벽지였는데, 농촌에 가서 농촌 운동을 하려면 농업을 알아야 되겠다 그래서 농대를 왔다는 거예요. 그래서 내가 대학 2년 동안 다닐 때 써클 활동도 같이 하고 야학도 같이 하고 그랬죠. 집사람은 대학 졸업하고 정읍 농고에서 교사를 한 2년 했죠. 나는 서울서 생활하고 있을 땐데, 같이 써클활동 했던 집사람 여자동기가 여자를 소개 한다더니 집사람을 데려왔어요. 그렇게 다시 만나서 결혼을 했죠. 정읍농고 그만두고 결혼하면서 나하고 얘기를 하다 보니까 우리는 농촌운동, 농민운동을 해야 한다, 우리는 농민과 함께 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우리 농사지으러 가자, 그래서 상계동으로 농사지으러 간 거죠.

서울시 농촌지도소에 있으면서 야학을 했어요. 서울에 유수한 여러 고등학교 학생들을 중심으로 농촌진흥회를 하고 대학 사직연구연합회를 지도하면서 학생 조직을 계속해나갔는데 60년대 귀농을 했던 많은 동지들이 다들 서울로 다시 올라왔어요. 학생들이 귀농을 해서 농촌농업 문제 해결에 본질적으로 접근하지 못했던 거죠. 농민들에게 신뢰도 얻지 못하고 고립이 되니까 서울로 다 몰려 올라왔어요. 그래서 안 되겠다, 내가 귀농을 해야 되겠다, 그러면 현장에 가야겠다. 그래서 상계동에 발길을 들여놓게 된 것이죠. 그러면서 가톨릭 농촌청년회 중심으로 농민교육을 하고 그것이 확대되면서 가톨릭농민회로 발전적 전환을 하죠. 농촌운동이 아니라 농민운동으로 바꾸어야 겠다는 생각이었죠. 그래서 가톨릭농민회 창립준비위원를 내가 했습니다. 그때 상계동 농사지으면서 신분은 공무원이었죠.

농민운동의 자주화, 공과는 농민에게 돌려줘야

의식화 교육이라는 건 농민이 농민의 정체성을 올바르게 성립하는 거죠. 왜 농민이 못 사느냐, 농업문제를 해결하려면은 어떻게 해야 하느냐 농민이 주체가 되어야 한다. 내가 가톨릭 농민회 교육 할 때는 반드시 교육이 끝나면 현장에서 무엇을 할 것인가 실전 계획을 발표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러고 난 다음에 현장에 가서 활동하는 걸 지켜보았죠.

농민들 대상으로 농민문제, 농업문제 교육을 했죠. 틈만 나면 했어요. 시간만 있으면 막…. 주로 교육한 장소가 구미, 왜관에 남자 수도원에서 장기 합숙 학습을 했습니다. 당시 교육은 핀란드, 독일 원조단체 프로젝트로 진행됐어요. 교회 단위에서 지원은 거의 없었구요. 그래서 내가 농민운동은 농민 스스로 해야 한다, 농민 운동의 자주화를 내걸기 시작했습니다. 우리가 우리 잘살기 위해서 공부하러 왔고, 학습하러 왔다면 우리가 돈을 대자, 그렇게 해서 기금을 모았죠. 예를 들면 교육 오면 농민에게 지급되는 왕복 여비 중에 하나는 내놔라, 가톨릭농민회 농민회 실무자들도 교육비, 참가비 내라, 이렇게 농민 내부에 철저한 자주화를 내 걸었죠. 그래서 모은 기금으로 함평고구마사건, 오원춘사건을 이끌었죠.

2004년 인터뷰 모습

74년도에 가톨릭농민회 내에서 내 입지가 어려운 점이 있습니다. 임차관계 조사보고서를 만들 때 나는 가톨릭농민회 사업이고 실제 조사자는 농민회 회원이기 때문에 모든 연구 보고서의 공과는 농민에게 돌려줘야 한다는 거지. 보고서를 가톨릭농민회 이름으로 내자고 했는데 반발이 있었습니다. “우리가 농민운동을 할 때 일은 우리가 하고 공과는 농민에게 돌려주는 게 우리들의 자세 아닙니까. 그러면 선생님이 설사 연구를 했다 하더라도 실제 가톨릭농민회 회원들이 다 조사하고 참여했으니까 공과는 무조건 돌립시다”라고 주장했는데 연구자들 입장에서는 받아들이기 힘들었던 거 같아요.

농촌 탁아소 운동으로서의 어린이집 운영, 가톨릭여성농민회 결성의 초석이 되다

상계동에서 농사를 지으면서 가톨릭농민회를 조직하고 전국적으로 교육하러 다니던 중 가톨릭여성농민회 교육을 계획하는데 교육을 해달라고 연락이 왔어요. 여주에서 여성 농민회에서 농촌 여성문제를 집중적으로 다루는 교육을 했죠. 당시 우리 집사람도 상계에서 농사지으면서 원터 어린이집을 했었어요. 상계동이라는 원터라는 마을 어린이집이요. 옛날에 유명했어요. 상계동 하면 어린이집이라고 그랬죠. 가톨릭 농민회 여성회를 만들자, 그러면서 우리 집사람이 수원교구 안에 가톨릭여성회라는 걸 만들었죠. 이후 발전적 논의를 통해 가톨릭여성농민회로 이름을 바꾼 거죠. 가톨릭여성농민회를 만드니 농민회에도 여성부가 만들어졌어요. 둘을 통합한 것이 바로 여성농민회입니다. 지금 말하면 전여농의 전신이죠.

여성 농민회 교육하려니 ‘애기 딸리고 집에 살림 살아야지 언제 가서 뭐 하냐, 남편만 농민운동 해라, 우리는 안 한다’ 이런 반응이 컸어요. 농민들도 보수적이죠. 남성 우월주의. 남존여비 그것이 꽉 차 있었죠. 가톨릭 여성농민회가 만들어지면서 여성 농민회 교육장에 가면 반드시 옆에 어린이 놀이터 따로 만들어 놓잖아요. 집사람이 여성 농민회 하면 반드시 교육장 옆엔 어린이 놀이터를 두고 원터 어린이집 교사들이 가서 애들 지도를 해 주었어요. 그러니 그게 사람이 많이 들었죠. 그때 그 교사들이 여성 농민회 중심 학생 실무자, 간사로 활동했죠. 가톨릭여성농민회의 인적 자원은 대학 4H출신으로 농촌문제에 계속 관심을 갖고 원터 어린이집을 만든 것이 여성운동의 시발입니다. 그것이 지역사회 탁아소 운동의 최초고요. 상계동서 농사를 지어 보니까 일하러 오는 사람들, 농업 노동자죠. 그 사람들이 애들이 딸려있으면 일을 안 시켜주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나는 농장 안에다 어린이 놀이터를 만들어 놓고 젖먹이는 애기 엄마까지도 쉬는 시간에 애기 젖먹이고 일을 하게 했죠. 애들을 돌보는 인력은 대학 4H 출신들로 구성됐죠. 그것이 시작이 돼서 상설하자, 그래서 상계동에 어린이집을 만든 거예요. 성남에 와서 성남의 은행골 어린이집, 별나라촌 어린이집, 어린이집을 몇 개 만들었어요. 탁아소들 교사들 교육을 하다 지역사회탁아연합회를 만든 거죠.

나는 옛날부터 지금까지 어떤 운동이고 ‘철저한 자주화’, ‘철저한 민주화’, ‘철저한 협동화’입니다. 이게 내가 운동의 기본 원칙으로 지키는 겁니다. 원터 어린이집 운영 같은 경우, 애기를 맡기는 엄마들이 초기에는 돈을 낼 형편이 못 되죠. 상계동 난민들이니까. 그래서 수익 사업, 참기름 장사를 했어요. 어린이집 교사하는 대학 졸업한 여학생들이 네다섯 명이 원터 어린이집에서 같이 공동체 생활을 하면서 너희들 첫째 자립해라, 자주적으로 독립해라, 그리고 철저하게 이것은 공동체다, 이렇게 원칙을 강조하는 거죠. 자립하는 방안을 찾다 보니까 참기름 장사를 하자 그렇게 됐죠.

사람 농사를 시작한 신구전문대학 강의

상계동 농사를 짓고 있을 때 대학생들이 견학하고 실습을 많이 왔어요. 실습을 하고 간 애들이 자꾸 좋다고 말을 하니까 학생들이 자꾸 늘어나. 학교에서 버스를 대절해서 학생들이 견학을 오는 거예요. 그게 연이 돼서 강사로 가게 됐어요. 한편으로 농장에서 각 대학에 앞으로 농사지을 애들, 대학 4H출신 졸업반 애들, 농민들을 대상으로 소위 ‘위티 트레이닝’ ‘우리라는 공동체식 훈련’을 많이 했어요. 열명 오면 10일, 열두 명 오면 12일, 이런 식으로. 낮에는 실습하고 놀고 싶으면 놀고, 일하고 싶으면 일하고 밤에는 같이 공동체 훈련을 하죠. 이 훈련을 오래 했어요. 대학생들도 실습 오면 그걸 함께했죠. 그래서 얘들이 눈을 뜨기 시작하다 보니까 학교에서 나를 알고 전임하자는 제안이 왔어요. ‘나 안 한다, 나 농사짓는 사람이지 안 한다’고 거절을 했죠. 교수가 상계동까지 와서 삼고초려를 하는데 계속 거절했더니 ‘내 입장이 곤란하니까 이사장을 만나달라’ 그러더라구요. 그래서 이사장을 만났어요. 그 이사장이 나보고 딱 첫말이 ‘아, 여보 채소 농사 그만 하고 사람 농사 지읍시다’ 그럽디다. 그 말에 내가 취해서 ‘아, 그렇다 가장 중요한 건 내가 원래 교육하는 사람이지, 사람 농사 지어야지’하고 전임으로 가게 됐죠. 그런데 문교부에서 발령을 안 내주는 겁니다. 그러니까 나를 찾아왔던 교수가 매일 문교부 가서 살다시피 했어요. 그래가지고 6개월 만에 문교부 발령을 받았죠. 신원 조회가 해결된 거죠.

신구대학에서 학생들 조직하고 탈춤반, 농악반 만들고, 야학 연구반 만들고, 지역사회 문제에 관심을 갖게 가톨릭 학생회 만들고….

80년대에는 학교에서 학자 생활하고, 성남 지역운동을 계속했죠. YMCA 만들었지, 대학생회 만들어서 성남청년회 만들었지, 또 아까 말한 연합회 만들었지, 야학운동하지, 그 다음에 우리나라 노동운동 최초의 민주교사회(전교조 전신) 성남에 만들었지, 막 노동꾼 건설노동조합 만들었지. 거의 전부가 조직 활동을 하게 된 거죠.

80년대 농촌 관련 조직활동기독교농민회와 YMCA, 한국지역사회탁아소연합회

상계동에서 농사짓고 가톨릭농민회 조직운동을 한참하고 있을 때였어요. 79년에 완주군 기독교 농촌개발원 원장 한규채 목사가 전라북도 농촌지역 목회자들 교육프로그램을 계속했어요. 그 교육을 거의 내가 다 했죠. 그러면서 서서히 기독교농민회가 만들어지기 시작했죠.

왜 YMCA를 만들었냐 하면, 내가 성남에서 제일 먼저 한 것이 넝마주이입니다. 넝마주이를 중심으로 청년들을 조직하기 시작했죠. 성남에 딱 들어가니까 공순이, 공돌이들이 생활이 엉망 아닙니까. 이 사람들을 야학을 했어요. 그야말로 노동야학이죠. 문자교육에서부터 의식화교육으로 바뀐 게 70년대 후반기거든요. 병원, 성당지하실에서 야학을 하다 안되겠다 공식적 조직을 통해서 할 수밖에 없겠다, 그래가지고 성남 YMCA를 창립을 하면서 노동야학을 하게 되고 노동의식화교육을 하기 시작한 거죠. YMCA 창립을 하고 야학을 하다 보니까 자연히 농촌지역에 YMCA에 관심을 갖게 되잖아요. 그래서 해남Y 농민교육을 하게 만들어서 해남Y농민회를 만들었어요.

80년대 중반에 한국지역사회탁아소연합회도 만들었는데…. 성남에 77년에 이사를 왔거든요. 오고 나니까 우리 학교 주변이 전부 난민촌이란 말이지. 달나라촌, 별나라촌 이런 촌 아닙니까. 그래서 Y에 야학을 했는 반면에 그 난민촌에 어린이집을 만들어야 되겠다 그래 가지고 처음에 우리 학생들을 데리고 골목 유치원을 했어요. 그러다 서서히 은행골 어린이집 만들고, 그러면서 어린이집을 자꾸 만들게 되면서 다수의 교사들을 교육을 하게 되죠. 교육일정이나 프로그램을 철저하게 학생 중심으로 짜게 만들고 교육내용도 공동체 프로그램을 만들어서 운영하게 했어요. 상계동에서 연구하고 경험한 것을 바탕으로 성남 교사들에게 교육하고 확대가 돼서 서울에서도 교육을 했죠. 성당 수녀들까지도 교육을 한 적이 있는데 이 사람들이 패러다임 자체가 바뀌니까 깜짝 놀래요. 탁아소 교사회 가지고는 안되겠다 그래서 지역사회 탁아소회를 만든 거죠. 지역 연합회를….

80년대 성남 지역활동성남시 노점상총연합회, 철거민연합회, 복정동 일용노조, 지역사회연구소

성남에 노점상들이 곳곳에 있었어요. 모란시장, 태평동 시청 앞, 또 구종점 등등. 그 당시에 성남에서 노점상 탄압이 굉장히 심했습니다. 그러니까 노란 헬멧 쓰고 한 사람이 딱 오면 도망 다니고 막 깨부수고 할 땐데 그것을 보니까 도저히 내가 마음이 용서가 안 되잖아요. 그래서 각 지역별로 노점상모임을 만드는 거죠. 그래서 성남시 몇 개 노점상이 연합이 돼서 성남시 노점상총연합회를 만드는 거죠. 그걸 이제 지도위원을 하면서….

철거민연합회가 만들어지게 된 최초는 감옥 들어가기 전에 성남에 무허가 철거가 막 진행될 때 그들과 함께 대책위원회도 하고 투쟁을 하면서였어요. 감옥에서 나오니까 성남 노점상총연합회가 해산돼버리고 없어요. 그리고 만들어진 게 철거민연합회가 만들어졌기 때문에 성남 노점상 운동은 일단 중단이 됐고, 그러나 노점상운동을 하다보니까 서울지역 노점상하고 연대가 되어있었죠. 교류가 돼 있었는데 지금 말하는 빈민연합은 두 가지 입니다. 노점상 연합회와 철거민 연합회 이 두단체가 합해서 빈민연합회입니다.

복정동 일용노조는…, 복정동이 서울 경계거든요. 77년도에 거기에 가면 아침마다 소위 말하는 노동시장, 사람시장이 열립니다. 일터로 팔려가는 거죠. 성남에서 일거리가 없으니까. 매일 아침마다 가보면 연령층이 참 다양한데 주로 노인들이 많아. 처음에 이삼백 명이더니 칠백 명, 팔백 명, 천명으로 늘어났어요. 매일 아침마다 전차 타고 가서 오늘은 몇 명 정도 팔려 가는지 파악하고 내가 못 가면 그때 고등학교 다니던 큰 아들을 보내서 인원을 파악했죠. 그러다가 거기에서 핵심 인사들을 몇 사람들을 봤죠. 봐 가지고 만든 것이 처음에는 노동상담소였어요. 그리고 복정동 일용노조를 만든 거죠. 창립식에서 내가 얘기했지. “내가 여기 늘 다니면 ‘사람 사러 왔냐’라는 얘기를 늘 들었다, ‘사람 사러 왔냐’는 얘길 듣고 서글퍼서 눈물 흘렸소.” 그러면서 “‘사람 사러 왔느냐’는 말하지 말아라, ‘일자리 있느냐’고 하던지 ‘일꾼 사러 왔냐’든지 그래라. 그리고 여기는 사람시장이 아니라 노동시장이다” 그 이름을 완전히 바꾸어 놓은 것이죠. 그러면서 얘길 하는 과정에 “사람이 가장 살아가는데 서러운 게 몇 가지가 있는데, 가난한 서러움, 못 배운 서러움, 힘없는 서러움, 집 없는 서러움 이게 우리들의 서러움인데 가장 큰 서러움은 내 노동능력이 있는데도 일터가 없는 것, 일자리가 없는 서러움이 더 크더라” 이러면서 얘기를 했거든. 그때 막노동꾼 사기(士氣) 많이 보탰습니다. 그래서 그걸 만들어서 계속 지도했죠. 그 후에 이것이 인제 발전이 돼 가지고 성남에 이런 노조가 지금 서너 개가 됩니다. 이것이 총연합이 돼서 일용노조가 아니고 건설산업 노조연맹으로 만들면서 경기도 본부까지 맡게 됐죠.

자치제, 지방자치화 그 이전에 준 자치제도를 정착시키고 실질적 민주화를 실행하기 위해서 성남 지역문제를 집중적으로 다각적으로 연구를 하고, 정책 개발뿐만 아니라 성남 지역사회에 사는 사람들 삶의 질도 높이고 행복감을 주는 성남을 만들어야 한다는 시각으로 지역사회 개발, 소위 총체적 삶의 질을 높이는 질적 전환을 위해서 지역사회연구 활동하고, 지역사회연구소를 운영을 하면서 다양한 지역운동을 관여를 하게 되었죠.

사실상 나는 농민운동만 한 게 아니죠. 전체사회변혁운동이라는 운동차원 속에 그때그때 상황에서 때가 돼서 내가 해야 될 역할이 있으면 해온 거죠. 그러니까 우리는 총체적 모순에 어느 한 곳에도 간과할 수 없는 그런 상황이 아닙니까.

어떤 면에서 한 가지 일에만 집중했으면 좋은데, 그저 일거리 있다고 그러면 그게 내 일이라고 생각하고 나갔으니까. 내 운동 수단이거든요. 어디를 가서든 “아, 교수님. 졸업하고 무얼 합니까, 어디를 가야 하죠?”하고 물으면 “야, 이놈들아 너희들이 가는 곳이 너희들이 설 자리고, 그 지역의 사회적 문제가 바로 너희들이 해야 될 일이다” 했듯이 나는 몸소 그렇게 살다 보니까 이렇게 ….

80년대 민중의당 활동

80년대 들어오면서 농민정치세력화를 주장했습니다. 87년 6월항쟁 이후에 진보 정당이 출현해야 한다 하는 게 내 생각이었고, 마산 농민회가 중심이 돼서 민중의당을 결성하게 됩니다. 서울에서 민중의당의 후보를 나갔죠. 그리고 전국에 우리 후보자들 지원 연설 다니고 응원하러 다녔죠. 선거에서 실패를 하고 자동으로 민중의당이 해체가 돼버렸죠. 민중의당을 통해서 우리나라에, 남반부에 진보정당이 싹이 튼다는 게 대단히 어렵다는 판단이 주어지면서, 독일 정당의 정당 명부제식이나 이런 것이 아니면 안 되고 더욱더 대중의 정신의식이 높아져야 된다. 그 생각을 가지고 그때부터 민중교육 쪽으로 방향을 분명히 했죠.

학생들을 공부하게끔 하는 강의, 학생운동 배후조종자가 되다

지역운동 하고 그 다음에 이제 학교 학생운동도 터지고 하니까, 학원에 자주 민주화가 우리 애들 다하지. 내가 완전히 배후 조종자야. 85년, 86년 그래서 87년까지 내가 강의를 못 했습니다. 88년에 복학을 하고 강의를 다 했죠. 89년도 그 이듬해 6월달에 내가 감옥에 들어갔으니까. 나는 수업할 때 문을 닫고 이 강의실 안에서는 자유다, 나는 그냥 가르치는 사람이 아니고 너희들 공부하도록 하게끔 하는 사람이라고 하는 게 기본이다. 그냥 배우는 게 아니고 너희들하고 나하고 함께 공부하는 거다 그런 스타일이죠. 강의 두 시간 중에 내 강의는 하나도 없고 저희들 토론하고 나는 멘트만 하는 정도니까. 계속 그런 식으로 공부해 가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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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4-H 리더십교육 원고.
교수와 선생은 가르치는 사람이 아니라 “학생 스스로 더 잘 하도록 변화 촉진자”라는 내용이 인상적이다.

진보정당 영역을 넓히고 국민들 의식화 교육을 위해 선택한 경기도지사 후보 출마

경기도지사의 후보로 출마하게 된 것은 내 개인의 정치적인 입지나 이런 측면이 아니고 우리가 전체적인 사회분열과정에서 한 시대에 해야 될 역할이 나에게 주어졌기 때문에 참여한 겁니다. 여러 번 고민을 했죠. 사양도 하고 거부도 해오다가 결국 지방자치선거 공간을 이용해서 진보정당 민주노동당의 영역을 넓히고 일반 국민들에게 소위 의식화 교육을 하는 기회를 가져겠다는 측면에서 수락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선거과정만이라도 범진보진영이 하나의 대오를 만들어 달라, 이것이 주안점이었습니다. 경기도의 전 진보세력이 이걸 통해서 더욱더 연대를 굳히고 대중 속에 우리 힘을 한번 보여주자고 결심한 거죠. ‘미군주둔 없는 경기도 만들기’, ‘자주민주통일’의 구체적인 내용을 구호로 내세웠습니다. 정말 놀라운 것은 농촌지역이 도시지역보다 지지율이 높았다는 거지요. 농촌지역이 12∼15%까지 지지율이 높았고 또 다른 광역단체장 후보와는 다르게 정당 지지율과 후보지지율이 같았습니다. 0.1% 차이였거든요. 공개 TV토론회에 날 항상 배제시켰기 때문에 참여를 못했는데도 놀라운 결과가 나온 거죠. 타당 후보와는 다른 정치적 철학, 복지, 삶의 질을 높이려는 공약이 호응을 얻은 거죠. 농촌 지역에는 거의 못갔는데도 농촌지역에서 전화 오고, 4H운동이나 학생들, 농촌운동 등을 통해서 관계했던 많은 사람들이 보이지 않게 적극적으로 지역단위 운동을 해준 게 아닌가 생각합니다.

그리고 투표날 여중생사건이 발생했습니다. 6월 13일 날. 그때부터 바로 효순이, 미선이에 대한 경기북부지역 대책위원회를 만들고 싸우기 시작을 한 거죠. 그것이 이제 발전이 돼서 여중생범대위가 만들어지고 제가 공동대표로 참여를 하게 되는데 촛불시위를 이끌고 범대위를 이끈 실무진들이 내 측근에 있던 선거운동원들이었어요. 선거 끝나자마자 바로 그쪽으로 집중을 한 거죠. 민주주의 경기도를 만들자고 선거운동을 했던 그 팀들이 선거 이후 바로 여중생범대위에, 소파개정문제 촛불시위 쪽으로 참여하게 된 거죠. 그런 의미에서 나는 선거출마가 결코 헛되지 않았다고 보고 있습니다.

다양한 욕구를 한 단계 높여나가며 농업 문제, 정치적 의식 수준을 높여내는 운동 방식

지금까지 내가 운동해오고 있는 방법은 다양한 욕구를 한 단계 높여나가는 식의 운동을 해왔습니다. 농민들 의식 수준이 다양하게 차이가 있는데 사회 과학적 인식을 전제로 의식화시키려 하거나 주입시키려는 수준이 아니고, 각 단체의 성향과 수준에서 한 단계 높은 수준으로 걸어 나가게 하는 것입니다. 기술을 요구한 사람들에게는 기술을, 경영을 요구한 사람들에게 경영을, 유통이나 농산물가격에 관심을 가진 사람에게는 그것을 기초로 농업 문제, 건설적 인식을 시켜내고, 정치적 의식 수준을 높여내면서 의식화시켜 나가는, 그러한 운동접근방식을 썼거든요.

내가 상계동에서 농사를 짓게 된 것도 농촌에 들어갔던 친구들이 빠져나오는데 실패한 이유가 뭐냐, 그것을 내가 극복해야겠다는 것이고, 그러려면 나도 농촌에 들어가자는 거요. 내가 직접 농사를 짓지 않으면 농민들하고 동질의식이라든지, 소위 공동체 의식이 형성되지 않고, 일체감이 형성되지 않죠. 그래서 내가 농사로, 농민이 되어야겠다. 둘째는 내가 농사를 지으면서 농업 기술 경영 유통부분에서 앞서야 되지 않습니까? 문제 해결이라고 응답을 줄 수 있어야 될 테니까 그러려면 실제로 자급자족농업단지에서보다 서울근교농업이 상품생산적 농업으로 좀 더 발전해 있었거든요. 그러니까 내가 들어가서 근교농업을 체득하고, 그것을 기초로 근교농촌을 개발시켜 내는, 이것이 일반 농촌지역과는 다른 선험적 경영이랄 수 있기 때문에 근교농업을 시작한 거죠. 처음엔 남의 땅을 빌려서, 그다음엔 빚 얻어가지고, 그다음에 난민촌에 이농해 오는 농민들의 취업부터 노동자 중심으로 협의농장 실험을 한 거죠. 그러니까 기술, 경영, 유통뿐만이 아니고, 농업구조 개선, 농업생산조직을 가지고 함께 연구해 간 거죠. 그러기 때문에 상계동에서 농사를 지을 때 내 기술 수준이 높았기 때문에 전국의 기술농민농업대학의 기술강의, 경영강의를 내가 다 하게 된거죠. 현장경험을 바탕으로 했고 그것이 기초가 돼서 경영대에서도 강의하고, 농산물 유통구조개선 할 적에 내가 제일 먼저 주장을 했고, 가톨릭 농산 시장을 만들 때도 자문위원으로 참여를 하게 된 거죠. 내가 농사를 지으면서 학문적 연구를 했기 때문에 된 거죠.

그러니까 근교농업을 하면서 내가 먼저 앞서서 공부하고 그걸 기초로 농민교육하고 의식화를 조직하고 그러면서 농업본질적 문제를 접근해 나가는 농민운동을 전개해 나갔던 거죠. 성남에 있으면서 청년운동, 노동운동, 야학운동, 소비자협동조합운동 한 것도 전체 사회변혁운동 일환으로 해왔었고, 정당활동하는 거나 정치활동하는 것도 다 그런 차원에서 앞서 실험해 온 거죠.

내 교육철학은 지행합일(知行合一)주의

나의 농민운동이나 사회변혁운동은 이미 중고등학교 때 다져져 있었어요. 대학 이전에 그런 의식을 갖게 된 것은 결정적으로 아버지의 영향입니다. 나의 생활방식이나 나의 가치관, 삶의 철학이 아버지로부터 10살, 11살 이전에 이미 내게 주어져 있었고 그 이후에 그것을 실현하기 위한 꾸준하게 공부하고 연구하고 실천해 온 거지요. 내 교육철학,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게 지행합일(知行合一)주의입니다. 이론과 현장과 접목, 실천을 통해서 구체적으로 창조해 내자는 거지요. 그것이 형성된 것은 바로 내가 어릴 때부터 야학운동을 했고, 대학 4H활동을 하면서, 청년교육운동을 하면서, 교육적 철학이 그때 정립됐다고 보면 되지요.

나는 문제의 현장에, 문제의 삶을 풀어내가기 위해서, 실천해 나가는 필요한 정보를 그때그때 공부를 한 거예요. 그러니까 공부하는 방식이 이론적, 체계적으로 공부하고 난 다음에 행동한 것이 아니고, 내 운동, 내 삶을 보다 창조적으로 끌어가기 위해서 문제 될 때마다 거기에 관계되는 책을 보고 공부한 거죠.

저는 사회를 총체적으로 보고, 그 속에 부분이 눈에 보이지 않습니까? 총체적인 측면에서 봤을 때 농업을 했을뿐이고…. 현실적 삶의 조건 속에서 주어진 일이라면, 그 사람들과 같이 생활하면서 그 문제를 풀려고 하다 보니까….

미완의 사회운동이 나의 삶이었기에 완결시키지 못하더라도 건강이 허락되는 한 싸울 겁니다.

끝으로 저는 내가 어떤 운동을 했느냐 무엇을 했느냐 하는 과거가 중요한 게 아니라 앞으로 과연 남은 인생, 무슨 일을 어떻게 할 것인가가 더 중요할 것이라고 보고 그것에 대한 고민을 지금 하고 있습니다. 제 학문적 관심은 통일된 이후 그리고 남한에서의 신자유주의 세계화 이후 민족자주자립농업을 어떻게 구축해 낼 것인가에 대한 학문적 연구는 계속 공부해야 될 과제고, 아직도 어느 부분이든 이 역사와 사회 발전운동에 내게 기회가 주어지고 해야 될 일이라면 어디든지 제가 갖고 살아온 삶의 역정 속에 축적된 노하우를 가지고 경영과 협력단체 일을 해야 된다는 생각을 갖고 있습니다. 실제적으로 지금까지 사월혁명회가 자주민주통일을 내걸었지만 사월혁명을 미완성의 경영이라고 하듯 저도 아직까지는 하나도 이뤄낸 게 없습니다. 미완의 사회운동이 나의 삶이었기 때문에 앞으로 내 삶을 완결시키는, 완결시키지 못한다면 다음 세대로 넘기는 한이 있더라도, 넘기더라도, 아마 넘겨지겠지만, 내가 힘이 있는 한, 건강이 허락되는 한 제가 싸울 겁니다. 그런 각오로 갖고 살아갈 생각입니다.

Last modified: 2023-11-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