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세진 선구자 편집위원
가을이 성큼 다가온 10월 초, 고 김준기 선생의 장남 김창인 씨를 만났다. 장례식(8월 11일)과 삼우제, 추모비 제막식(9월 9일)이 끝나고 어느정도 마음을 추스르는 시간을 지나 추석연휴에 인터뷰를 요청했다. 3주 정도의 시간이 마음을 추스르는 시간이 되었을 거라는 짐작은 착각이었던 걸까? 추석 연휴 내내 온 가족이 몸살로 힘들었다고 한다. 고 김준기 선생의 장남 김창인 씨는 고등학교 때 아버지가 바쁘실 때면 (실태조사 차) 새벽 인력시장에 나가 조사하는 일을 대신할 정도로 아버지의 연구 활동을 도왔던 든든한 아들이었다. 아들이 본, 가정에서의 김준기 선생의 삶은 어떠했는지 짧게나마 돌아보는 시간을 가졌다. <편집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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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가족에게 보이는 김준기 선생의 모습은 어떠하셨는지요? 어떠한 아버지로 기억하시나요?
글쎄요 그냥 가족으로서 그냥 사는 거죠. 뭐 추억을 어떻게 딱히 얘기하기가 좀 어렵네요.(웃음) 아버지께서 저희한테는 참 다정하고 따뜻한 모습을 많이 보여주셨죠.
상계동은 제가 기억하기로 큰 도로를 사이에 두고 한쪽에 마을이 있었고 건너편은 한강까지 쭉 논이었어요. 밤이면 불빛 하나 없이 깜깜했죠. 그 중간에 농장이 있었어요. 거기 비닐하우스로 지은 집이 두채 있었죠. 저희 집과 옆집이요. 딸기밭에서 덜 익은 딸기 따먹으면서 놀던 기억이 나고요. 성남 복정동에 있을 때는 아버지가 대학에 나가시고 계셨는데 집 옆에다가 꽃 농사를 지으셨어요. 제자들 데리고 와서 교육도 하면서, 80년대에 처음으로 수경 농법으로 방울 토마토도 재배하셨거든요. 당시에 신기하다는 평을 받았었는데, 겨울이 되면 연탄값, 기름값 걱정을 하시는 걸 늘 들었었죠. 당시 어린 저로서는 잘 팔리지도 않는 농사를 왜 지으시는지 그 뜻을 잘 이해를 못 했죠.
저희는 4남매랑 아버지, 엄마가 있으면 항상 즐거웠죠. 어렸을 때 기억나는 건 아버지 고향이 포항 바닷가거든요. 고향에 할머니가 계신데, 여름방학이나 겨울방학은 거의 거기서 지냈던 것 같아요. 집에 여러 사람이 찾아오고 술도 먹고 얘기도 하는 자리가 그렇게 좋았어요. 술을 먹으면서 나누는 이야기들이 너무 재밌는 거예요. 아버지가 항상 하는 얘기나 이런 것들이 서사가 있잖아요. 어떨 땐 웃기기도 하고 어떨 땐 진지하기도 하고 뭔가 시대를 고민하기도 하고 이런 얘기를 곁에서 들으면서 술자리는 그런 것이라고 생각했죠. 그런데 대학 가서 술자리 하면 그냥 부어라 마셔라 술만 먹는 것 같고 맨 신변 잡기 얘기만 하니까 재미도 없고 실망이 컸죠.
제 아이들을 보면서 어린 시절의 저를 많이 생각하게 되고 그러면서 아버지를 조금이나마 이해하게 돼요. 또 아버지께서 예전에 농사 일 하시느라 여기저기 많이 아파하시고 맨날 주물러 달라고 하시면 손으로 주물러드리고 발로 밟아드리고 했는데요. 어떻게 하다 보니까 물리치료사를 하고 있는데 그것도 사실은 아버지가 권유하신 일이었어요. 서울대병원에 근무하면서 의료봉사 활동을 가거든요. 농촌 어르신들이 근육통을 호소하시는 걸 보면서 농민들의 어려움을 간접적으로 느끼죠. 농사를 지으며 주변 사람들을 챙기셨던 어머니, 아버지를 생각하면서 주변에 도움줄 방법을 생각하게 되고 자연스럽게 관심을 갖게 되더라고요.
평소에 강조하셨던 가훈, 일종의 가풍이 있었다면?
아버지가 저희한테 특별히 강조하거나 ‘넌 이렇게 살아라’는 식으로 틀을 지어주지는 않으셨어요. 아버지나 어머니가 살아온 모습들을 보면서 자연스럽게 스스로 깨우쳐가는 거죠. 일탈은 생각할 수도 없었고요. 제가 하는 일 속에서 다른 사람을 위해 어떤 일을 해야 되나 생각하고 노력하게 되었죠. 개인주의적으로 낭만적 삶이라거나 나의 가족을 위한 삶보다 주위에 어려운 사람의 입장을 조금이나마 해결해 주고, 개선해 주고, 제도적으로 바꿔 나가려고 하는 그런 삶의 자세가 부모님의 영향인 것 같아요.
아버지는 그냥 저희가 잘하는 대로, 아니면 하고 싶은 바 대로 그냥 두셨던 것 같아요. 다만 어렸을 때부터 지행합일(知行合一)을 항상 강조하셨어요. 초등학교 때 가훈이 뭐냐 그러면 항상 지행합일(知行合一)을 써서 냈죠.
농대 후배들에게는 항상 꼿꼿한 모습의 선배님 기억이 많이 남아있는데, 김준기 선생은 이 시대의 부모님으로서 어떤 가정을 이끌어 가셨나요?
꼿꼿한 모습…. 가족 입장에서 생각하면 조금, 좀 많이 외로우셨을 것 같아요. 아버지에 대해 대체적으로 올곧다, 꼿꼿하다는 얘기를 많이 하시는데 어떻게 보면 쓴소리를 많이 하는 편이죠. 나의 편이든 남의 편이든 따지지 않고 잘못하면 항상 지적을 하시니까 그게 좋은 표현으로는 올곧다고 얘기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상대에게 비판이나 비난을 받는, 그러면서 약간 외로우신 부분이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입니다. 저도 단체 활동을 하는데, 바른말을 하기가 쉽지가 안잖아요. 쉽지가 않은데 아버지는 같이 일하시는 분들, 활동하시는 분들에게도 항상 그러셨던 것 같아요. 어떻게 보면 눈감아줄 수도 있고 어떻게 보면 그냥 모른 체 할 수도 있는데 항상 객관적인 입장에서 바른말을 하시니까…. 좀 어려울 수 있을 것 같아요. 아버지께서는 그런 어려움을 당하면서 어떻게 그렇게 활동을 하셨을까 하는 생각이 들죠. 사회생활이라는 게 어떤 일을 할 때 주위에서 응원만 해주는 게 아니라 비난도 하기도 하고 어제까지 잘했다고 하던 것도 오늘은 잘못한 점만 지적하기도 하는 걸 겪으면서 하나의 단체 활동도 마음이 불편할 때가 있는데 아버지께서 여러 단체에서 활동하시면서 어떻게 보면 외로움이 있었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더라구요.
아버지 역할이 꼿꼿함이시라면 돌아가신 어머니(김영자, 서울대 농가정학과 63, 가톨릭농촌여성회 초대회장)의 역할은 포용이셨어요. 아버지의 꼿꼿함을 주변에서 뭐라 그러면 어머니가 포용하고 다독거리면서 같이 한 뜻으로 추진하셨던 기억들이 많이 남습니다. 심지어 어머니는 지적을 하러 온 공무원들까지 잘 설득해 가지고 처음엔 지적하러 온 공무원이 엄마에게 ‘파이팅 하시라’고 하며 돌아간 적도 많았죠. 그래서 성남에 계신 분들도 어머니를 잃었을 때 ‘아버지 날개가 하나 꺾였다’고 말씀하시며 걱정이 많았었죠. 아버지 혼자 앞으로 어떻게 보면 어려운 일을, 외로운 일일 수도 있는 그런 일을 잘해 나갈까 걱정이 많았는데 아버지는 아버지 나름대로 그냥 꿋꿋하게 지적은 지적대로 하시고 그랬던 것 같아요.(웃음)
어머니도 그렇고 아버지도 그렇고 활동하는 것 자체가 감시를 받는 위치에 있었기 때문에 사적인 모임을 많이 못하셨죠. 어머니는 동창회나 모임을 아예 못 가셨어요. 그 친구들한테 피해가 갈까 봐요. 어머니가 돌아가실 무렵쯤에야 ‘만나고 싶었는데 이러이러한 사유로 내가 못 만났다’고 얘기하실 정도로 주변에 피해가 가지 않게 조심스럽게 사셨죠.
아버지 때 연좌제도 굉장히 심했더라고요. 저희도 집에서 그런 얘기를 많이 들으니까 위축되는 마음이랄까 그런 게 항상 있었던 것 같아요. 그래서인지 아버지가 가시는 길을 너희도 따라와라 이런 말씀은 전혀 없으셨고…. 없으셨으나 제가 서울대병원에 근무하면서 노동조합 활동을 안 할 수도 없고, 또 안 좋은 걸 보게 돼도 남들처럼 쉽게 탈퇴를 할 수도 없고, 그러면서 노동조합 뿐만 아니라 제가 일하는 지역 단체에서 작은 부분에서라도 활동하게 되더라고요. 그냥 흘려 넘기지 못하고 어머니, 아버지를 자꾸 생각하면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생각하게 돼요. 아버지랑 어머니 발끝도 못 쫓아가는 것 같아서 맨날 자괴감이 드는데…. 쉬운 일은 아니에요.(웃음)
가족과 함께 보낸 특별한 순간이 있다면?
아버지가 안양교도소에 계셨을 때 제가 매일 면회를 갔어요. 그때 제가 재수할 때인데 노량진에서 학원 새벽반이 끝나면 사당을 거쳐서 안양으로 가서 첫 면회를 했어요. 원래 면회시간이 5~10분인데 아침이라서 그런지 30분 정도를 할 수 있게 해 주더라구요. 아버지랑 이런저런 얘기를 많이 했는데 주로 제 하소연을 들어주셨죠. 면회할 때 항상 기록하는 사람이 있으니까 다른 얘기는 많이 못하고…. 아버지께서 저한테 항상 미안해하셨죠. 미안한 거 없이 미안해하시는 거죠. 고3 때 아버지가 뉴스에도 나오면서 국가보안법으로 감옥에 가게 되니까 아무래도 충격이 되죠. 그 일로 외할머니가 쓰러지셔서 거의 뇌사 상태로 5~6년을 강남 성모병원에 계셨어요. 어머니가 아버지 뒷바라지하면서 외할머니 간병도 같이 하셨죠. 가족 입장에서는 ‘드디어 우려하던 일이 터졌다’는 생각이었지만 아무래도 마음은 불안하기 마련이죠. 불안하고 당시에 대학도 떨어지고 하니까 여러 가지 이런저런 얘기들을 많이 했던 것 같아요. 나약한 모습도 보여드릴 수밖에 없었고 아버지께서 용기도 주시고…. 대부분 비슷한 이야기를 하는데도 매일 찾아갔던 것 같아요.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매일 아침 일찍 제일 먼저 찾아가서 30여분 동안 이런저런 얘기하고 안양에서 성남까지 먼 거리를 돌아오면 점심 무렵이 되곤 했죠. 몇 개월 후에 아버지가 강릉교도소로 가시면서 면회를 가지 못하고 편지를 주고받았죠. 그때 기억이 가장 많이 남아요.
아버지는 항상 어려울 때 의지할 수 있는 분이셨어요. 대학원 진학할 때도 고민을 얘기할 데가 아버지밖에 없죠. 잘 들어주시고, 아버지가 직접적으로는 못 도와주셨어도 간접적으로라도 많이 도와주셨어요. 대출이 필요하면 보증인을 소개시켜주시고….(웃음) 어렵게 지내는 와중에 그래도 아버지가 늘 곁에 그림자처럼 계셨던 것 같아요.
어머니(고 김영자 선생)에게는 어떤 분이셨는지요?
우리 어머니한테요? 아버지는 어머니를 사랑하시는 분이죠.(웃음) 어렸을 때 제가 봐도 우리 아버지랑 어머니는 진짜 잘 만나셨다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궁합이 잘 맞으셨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가 볼 때는 좀 고생을 너무 많이 시켰다는 생각이 들죠. 어머니께 옛날에는 잘 나가는 사람들 혼처 자리도 많이 들어왔는데 우리 아버지 만나 갖고 고생을 많이 하셨죠.(웃음) 60년대 당시에 대학을 나오셨으면서 농사를 짓는다는 게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잖아요. 저도 기억나는 데 그때 상계동에 밤이면 깜깜했거든요. 근처에 불빛 하나 없고 집도 움막 같은 데서 10년을 생활하셨으니까요. 근데 아버지의 뜻에 따라서 어머니가 그런 생활을 하신 게 아니라, 어머니가 그런 생각을 오히려 더 가지셨던 것 같아요. 그래서 복정동에 와서도 그때 일을 자꾸 상기하면서 아버지가 가는 곳을 오히려 더 가도록 독려도 하시고 항상, 땅을 주변 소작농이나 이런 사람들에게 같이 나누거나 같이 하거나 이런 생각을 어머니께서 더 하신 것 같아요. 그런 삶은 누가 강요한다고 할 수 있는 게 아니잖아요. 자신이 싫으면 몇 개월이면 도망가죠.(웃음) 아버지가 ‘그때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며 안타까워하시는 부분이 있어요. 아버지가 어머니랑 농장 이름도 지으시고 해서 약속을 하신 게 있으신 것 같은데…. 어머니는 항상 그런 걸 강조하셨던 것 같아요.
평소에 좋아하셨던 음식과 추천하셨던 책은?
아버지는 회를 좋아하셨어요. 명절 때 고향에 가면 주변에서 배 갖고 계신 분들이 고기를 가져와서 늘 회를 많이 드셨죠. 또 나이 드시면서 소화가 안 되니까 회를 자주 드셨죠.
책 같은 경우는 아버지가 생각을 강요하거나 주입하려고 하는 경우가 거의 없었어요. 그래서 책을 권하신 경우도 없죠. 거의 없는데, 몇 년 전에 영화 <박열>이라고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이자 아나키스트였던 박열(朴烈) 이야기가 영화로 나왔을 때 아버지가 국내에서 그런 단체들과도 모임을 가지셨던 것 같아요. 여러 사람들이 주제 발표도 하고 책 얘기도 하고 뭐 이런 단체더라고요. 거기에서 나온 아나키트 관련된 책을 몇 권 추천해 주셨어요. 그 책을 보면서 아버지가 결혼을 안 했다면 그런 삶을 꿈꾸셨던 건 아닌가, 말 그대로 ‘청년 혁명가’를 꿈꾸셨을 수도 있었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아버님을 보내시고 난 후 가슴에 남아있는 이야기가 있다면?
저도 단체활동을 하고 있는데 여러 사람의 뜻을 모아서 어떤 일을 한다는 게 쉬운 일이 아니더라구요. 활동을 하다 보면 상처도 많이 받고 외로움도 동반이 되고 그러다 보면 ‘내가 이 사람들을 굳이 도와줄 필요가 있나’하는 나약한 마음이 들 때가 있죠. 그럴 때 아버지랑 얘기를 하면 항상 저를 꾸짖으셨어요. “너는 아직 젊은데, 아버지는 70대의 나이에도 항상 꿈이 있고 뭔가 이렇게 추진하면 될 것 같은 자신감이 있는데, 왜 3,40대에 벌써 그런 생각을 하느냐”고 말씀하셨죠. 그런 대화를 나누다 보면 저 스스로 방향을 깨닫는 거죠. 그런 면에서 아버지를 대단하다고 느꼈었던 적이 많았어요.
지행합일(知行合一)이 쉬운 일이 아니잖아요. 그런데 아버지께서 살아온 삶을 큰 틀에서 보면 돌아가시기 전까지 본인이 하고 싶었던 생각이나 활동을 꾸준히 해오셨지 않았나 싶어요. 생각해 보면 이게 참 어려운 것 같아요. 그 시대마다 어떤 일이 있을 때 그 일에 대해서 가장 빠르게 반응하시고 항상 중심에 서셨죠. 정년이 없으신 것 같아요. 아버지 출소하시고 나서 생활하기가 어려우니까 여기저기 시간 강의를 다니셨어요. 한경대, 경북대, 계명대, 상주산업대…. 서울에서 왔다 갔다 하면 오전, 오후 강의를 한다 해도 그게 너무 힘들잖아요. 버스 타고 그 먼 거리를, 차를 안 가지고 다니셨거든요. 강의하고 돌아오면 그게 사실 얼마 안 돼요. 거의 차비로 나가고 그런데도 꼭 가시고…. 수입이 없으신데도 활동을 계속하셨죠. 노후 걱정 그런 거 없이 여러 가지 활동을 하셨죠.
아버지께선 처음에 농민이었고 그다음에 노동자였고 또 빈민이었고…. 농촌과 도시에서 항상 주변에 관심을 갖고 개선을 위해 노력하셨죠. 어떻게 그렇게 활동을 하셨나…, 저는 잘 모르겠어요. 저도 서울대병원에서 노동조합 활동을 하지만 광화문 집회에 나가기가 쉽지는 않거든요. 근데 저 멀리 성남에 사시면서 광화문집회에 꼬박꼬박 참여하셔서 집회에서 만나는 경우가 꽤 많았죠. 집회에 가면 항상 아버지가 계셨으니까요. 촛불시위 할 때도 저녁 늦게까지 같이 다니시고 했었죠.
지금 하고 있는 일, 어떤 단체에서 어떤 활동하고 계신지요?
서울대학병원에서 물리치료사로 일하면서 병원노동조합이랑 대한물리치료사협회에서 권익위원장을 맡고 있어요. 예산은 안 주고 고충들 이런 것들만….(웃음) 자세히 보면 이 단체도 어려운 점이 꽤 많아요.
다른 나라는 물리치료사가 직접 개업하고 자유롭게 활동할 수 있는데 우리나라는 의사 밑에 고용되어서만 일하게 되어있어요. 의사들이 고용을 안 하면 실업자가 되는 거예요. 그리고 병원들이 담합을 해요. 35세 아니면 40세 이상 되면 급여를 제한하는 담합을 해요. 급여를 적게 받으며 계속 일하던지, 아니면 실업자가 되는 거 거든요. 40대면 아이가 크고 점점 돈을 더 벌어야 될 나이인데 급여가 오르지 않으니까 다른 직종으로 가게 되죠. 그러다 보니까 나이 많은 경력 있는 사람들이 거의 없어요. 환자 입장에서는 유능한 사람들의 치료를 받을 기회가 없어지는 사회 구조적인 문제가 있죠. 이런 점을 개선하려고 오랫동안 노력하고 있는데 어려워요. 결국 법안이 바뀌어야 되는데 국회에서 본회의 통과가 안 돼요. 의사들이 사회적으로 기득권을 잡고 있는 상황에서 의사회에 불이익을 주는 법안은 통과가 거의 안 되잖아요. 헌법재판소에 제소도 해봤는데 국회에서 입법을 통해서 해결하라는 답이 나왔죠.
외국은 물리치료사들만으로 물리치료를 하고, 아니면 약국처럼 시내에서 처방만 하면 그 처방을 가지고 동네에 와서 물리치료를 받으면 돼요. 우리나라도 그렇게라도 해야 되는 건데, 그런 것을 만들기가 되게 어렵더라고요. 저희가 매번 노력을 하는데도….
또 5인 미만 작업장은 아직 노동권이 보장이 안 되잖아요. 병의원이 5인 미만인 경우가 많고 가짜로 5인 이하로 속여서 신고하는 경우도 많아서 노동권도 제대로 보장 못 받는 경우도 많죠.
물리치료를 하면서 10여년 동안 농촌 의료봉사활동을 진행하고 있어요. 농촌에 가보면 보건소에 장비들이 다 있어요. 근데 보건소에 공중보건의만 있고 물리치료를 모르니까 그냥 진통제나 약만 주고 기존에 있는 시설을 이용을 못하고 있어요. 그 시설을 이용해서 농촌 어르신들이 가까운 데서 물리치료를 받으면 좋을 텐데 시내까지 나가야 물리치료를 받을 수 있는 거죠. 그래서 공중보건의들은 저희가 의료봉사 가는 걸 싫어하더라고. 그도 그럴 것이 봉사활동이 끝난 후에 공중보건의에게 물리치료를 해달라는 요청이 들어오니까요. [농어촌 등 보건의료를 위한 특별조치법]에 농촌에서는 예외적으로 의사가 할 수 있는 몇 가지 일들을 간호사가 할 수 있게끔 되어있어요. 그런 것처럼 물리치료사가 농촌에서 독자적으로 어느 정도 할 수 있는 일이 주어진다면 농민들이 혜택을 볼 수 있거든요. 그런데 그것도 법안이 안되고 있죠.
선생님이 남긴 생전의 자료는 어떠한 것들이 있고, 그 자료들의 보관과 기념사업에 대한 가족의 의견은?
아버지 자료가 많이 소실됐어요. 예전에 복정동에서 나올 때 자료를 1톤 트럭에 가득 정리를 해가지고 복정동 인력노조 사무실 두었어요. 그런데 개발하면서 누가 불을 질렀나 봐요. 그 자료들이 다 소실이 됐어요. 박스가 좋은 것은 웬만하면 안 탔을 텐데 불이 난 다음 날 아침에 쓰레기 하시는 분이 다 가져갔어요. 그래서 아버지가 그걸 찾으러 쓰레기 매립장까지 가봤는데 찾을 수가 없었죠. 이후 남겨진 자료는 막내가 정리하고 있습니다.
지금 과제는 추모사업을 잘해야 하는 건데요. 어머니 사례를 보니까 결국 가족들이 해야 되는 부분인 것 같아요. 그렇게 하지 않으면 어렵더라고요. 아버지랑 어머니 이름을 따서 준비위원회를 발족할텐데 아직 모르겠어요. 지금 떠오르는 생각은 그때 아버지 사무실을 같이 썼던 단체들이나 사람들에게 사무실을 공유하는 것도 적게나마 성남 지역의 소규모 단체들한테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하는 소박한 생각을 하고 있고요. 김상진기념사업회를 비롯해서 아버지가 평소에 즐겨 찾고 애착이 있으셨던 단체에 조금이나마 기부금을 드리려고 준비하고 있어요. 그 이외에 무엇을 해야 될지는 더 고민하고 있습니다. 블로그나 홈페이지에 자료를 올리는 것도 필요하고…. 그러자면 평소에 하지 않았던 아버지, 어머니에 대한 연구를 해야 되는 거잖아요. 그동안은 그냥 삶 속에서 아버지 얘기나 비하인드 스토리를 듣는 거였다면 이제는 남겨진 자료를 통해서 아버지 생각을 되새겨 봐야 되는, 문헌 연구를 해야 되는 상황이 되었다는 게 안타깝죠.
김준기 선생은 슬하에 4명의 자녀를 두었다. 4남매는 각자의 자리에서 아버지, 어머니의 삶을 이어가고 있다.
누나인 첫째 김시연 씨는 대학시절 학생회장으로 전대협 활동을 했고, 이후 아버지의 활동을 보좌했었다. 여동생 김하정 씨는 고려대 정치외교학과를 나와 상담심리사를 하고 있다. 대학 졸업후 “10년간 정책 연구소에서 여러 정책을 제안하는 일을 했다. ‘그렇지만 정책 결정자가 실제로 입안하지 않으면 아무리 열심히 해도 의미가 없다는 점에서 약간의 한계에 부딪혔죠.’ 그러던 중 작지만 내 선에서 할 수 있는 것이 많은 상담 심리사에 눈을 돌렸고, 서강대 심리학 대학원에 진학했다. 어렸을 때부터 늘 ‘사람’에게 관심이 많았으며 공동체를 위한 무언가를 하고 싶었다고. 그는 ‘어떻게 하면 여러 사람과 어울려 잘 살 수 있을까?’라는 물음을 좇다 보니 여기까지 왔다고 한다.”
막내 김승택 씨는 공동주택 ‘빈집’을 시작으로 <공유주거협동조합> ‘빈고’라는 공동체 활동을 하고 있다. 공동체에 관심이 많으셨던 아버지의 뜻과 삶의 행적들이 자식들의 삶에 다양한 방식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