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ritten by 2:23 오후 134호(2023.10)

[추모글 모음]
일농(一農)의 길

[故 김준기 선생님을 추모하며]

서덕석(열린교회 목사, 시인)

논밭에서 구슬 땀 흘리는 농민들만이

겨레를 살릴 수 있다고 여겨

농학 일념의 길을 선택하면서부터

일평생을 농부의 길을 걸었다.

청년이 배움으로써 깨달으면(知)

가슴이 뜨거워져 씨알을 품게 되고(德)

씨알의 힘으로 땀 흘려 흙을 경작함으로서(勞)

건강하고 풍성한 농민의 삶이 된다는(體)

4H 정신은 그가 평생 지켰던 신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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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민들의 순박함이

우왁스러운 천민자본주의의 제물로

전락하는 것을 막기 위해 연구하고

스스로 권익을 지킬 수 있는

자주적 농민조직을 건설하는데 집중하였다.

농민들의 집회에는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

낫 들고 뛰어가는 천생 농투산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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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농민운동가를 배필로 맞아

서울 상계동과 성남 복정동에서

새벽이슬을 헤치며 직접 농사를 지었다.

농민들의 생산품을 도시 소비자에게 판매하는

협동조합과 탁아운동, 생활개선 운동에 매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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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주일만 살다보면 정나미가 떨어진다는

달동네 별동네로 소문난 성남을

살기 좋은 곳으로 만들려는 지역사회연구소는

목마른 실천가들이 영감을 얻기 위해서

찾아가는 우물물이었다.

학교 강의만으로 부족하다고 여겨서

거리와 소모임에서 농업경제론을 보따리를 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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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루과이 라운드와 FTA 체결로

그렇지 않아도 기반이 허약한 우리 농업이

벼랑 끝으로 내몰리는 것을 목도하면서

정치가 변화되지 않고서는

무너져가는 농업을 되살릴 길이 없었으므로

생소한 선거판에 뛰기를 마다하지 않았다.

농민과 민중이 주인되는 세상을 위해

정치판을 갈아엎자고 부르짖으며

실천하는 지식인의 진면목을 보여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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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 키 못지않게 품도 넓어서

성남은 물론 전국의 민주화운동과

민중생존권 투쟁에

그가 없으면 앞니가 빠진 듯 했으니

‘일농이 있는 곳에 이농(너), 삼농(나)도 간다’고 하였다.

집회와 토론회서 생산된 문건이나 전단을

하나도 버리지 않고 소중한 자료로 모아들여

그의 연구소에는 없는 것 빼고 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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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나이로 남로당 활동을 하던 아버지를

따라 다니며 심부름을 하던 추억을 떠올리며

미 제국주의의 폭압에 굴하지 않는

자유인으로 살기 위해서

자신을 담금질하기를 쉬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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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없는 탐구와 현장 실천만이 유일한 무기였으므로

배움에 정진하며 젊은이들과 어울리기를

마다하지 않는 만년 청년이었고,

아스팔트 바닥을 떠나지 않는 투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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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세에 의존하지 않고

우리 스스로 민족의 운명을 결정하자는

자주적 평화통일은 그의 길에서 나부낀 깃발이다.

효순미선 두 여중생이 장갑차에 깔린 것을

항의하며 몸싸움 중 이마가 깨어진 것은

자랑스럽게 쓰다듬던 훈장이다.

점령군 미군이 떠나고 한반도가 하나되는 날

그는 농민들과 함께 해방 세상이 되었노라

마침내 통일 세상을 보는구나 하고

기쁜 눈물 흘리며 날 뛰며 춤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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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농(一農)의 길은 여기서 잠깐 멈추지만

내일부터 일농을 뒤따른 우리들이

새롭게 힘찬 발걸음을 내디뎌야 하리라.

일농 선생님이시여,

고된 몸과 영혼 부디 평안히 쉬소서.

Last modified: 2023-11-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