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ritten by 10:58 오전 114호(2018.10)

임은경이 만난 사람
“농사와 서예와 대금, 신선놀음이 따로 없죠”
[인터뷰] 소재선 前 서울은행 차장 (농교육 75)

임은경 선구자 편집주간, 농학 95

익산으로 내려가는 길은 상쾌했다. 청명한 가을. 길가에 핀 코스모스 뒤로 펼쳐진 논마다 누렇게 익은 벼가 추수를 기다리고 있었다. 익산시 금마면에 있는 미륵사지 앞에서 늦은 오후에 그를 만났다. 오늘 하루 종일 마늘을 심었다는 그의 얼굴엔 노동 뒤의 뿌듯함이 어려 있었다. 미륵사지에서 차를 타고 5분여를 들어가면 그가 태어나서 자란 집이다. 오래된 대나무 숲이 아름다운 이 동네는 유서 깊은 구룡마을. 가지런히 심어진 대나무숲길이 방문객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마당으로 들어가니 구순이 넘으신 어머니가 우리를 맞았다. 그는 이 집에서 어머니와 함께 살면서 농사를 짓는 틈틈이 붓글씨를 쓰고 대금을 불고 전각 작품을 만든다. 앞마당에 푸른 잔디가 깔려 아담한 전원주택 같은 분위기다. 그 연세에도 머리가 완전히 세지 않은 어머니는 지팡이를 짚고 다니시지만 말씀하시는 것이 또렷하고 매우 정정하셨다. 필자 일행을 반가이 맞으며 안방을 내어주신다.

“여기 걸린 것은 뭔가요?”

집의 외벽에 초록빛으로 칠이 된 나무 판자가 걸려 있다.

“내가 직접 만든 전각 작품이에요. 내가 쓴 글씨를 나무에 새겨 칠을 한 거죠.”

안방에도 비슷한 작품이 걸려있었다. 세심하게 다듬어진 전각 작품은 돈을 받고 팔아도 손색이 없을 만큼 예뻤다. 그도 그럴 것이 세상이 알아주는 서예 실력을 갖춘 그이기 때문이다.

그는 올해 치러진 제27회 농업인 서예대전에서 대상을 수상했다. 농민신문사가 주최하고 농협중앙회가 후원하는 농업인 서예대전은 국내 서예인이라면 누구나 아는 큰 대회다. 이번 10월에는 익산시서예가연합회가 주최한 제12회 대한민국마한서예문인화대전에서도 대상을 받았다. IMF 외환위기 때 직장을 그만두고 나서 취미삼아 서예를 시작한 지 20여 년 째. 그와 반평생을 함께 한 붓글씨는 이제 세상이 알아주는 경지에 이르렀다.

올해 농업인 서예대전 대상 수상작인 소재선 회원의 ‘독좌'(서거정 詩)

“대학 졸업 후 서울은행(2002년에 하나은행에 합병)에 입사해서 차장까지 근무하다가 IMF 때 명예퇴직했어요. 그 후에 평소 하고 싶던 것을 찾아서 대금과 서예를 배웠죠. 서울에서는 다른 일들을 하느라 서예를 계속 하지는 못했는데, 8년 전에 이곳에 내려온 후에는 다시 꾸준히 붓을 잡고 있어요.”

그는 자신이 여름내 지냈던 원두막을 보여주겠다며 집 뒤쪽으로 필자를 안내했다. 뒤란으로 돌아가니 예전에 대문이었던 자리에 자연스레 자라난 담쟁이덩굴이 뒤덮여 운치를 더했다. 대문을 빠져나가자 제법 너른 밭이 나왔다.

“여기가 오늘 내가 마늘을 심은 곳이에요. 동네 아주머니들을 모셔다가 함께 했죠.”

촘촘히 구멍이 뚫린 검은 비닐이 밭 전체에 단정하게 씌워져 있었다. 하얀 가루 비료가 뿌려진 그 옆 자리에는 양파를 심을 예정이다. 건너편에는 수십 그루의 복숭아나무가 나란히 심어져 있었다. 주 소득원은 복숭아 농사이고, 철에 따라 그때그때 채소를 재배해서 로컬푸드 매장에 납품한다고 했다. 농사 규모는 총 3천여 평.

20년 서예의 내공, 농업인 서예대전 대상 수상

농업인서예대전 시상식. 좌측부터 박재민 심사위원장, 백낙진 금마농협 조합장, 김병원 농협중앙회장, 소재선 회원.

“저 안쪽에는 감나무와 여러 가지 나무들을 조금씩 심어 놨어요. 사람들이 오면 함께 나눌 먹을거리를 마련하고 싶어서요. 몇 년 후에 우리집에 오면 과일은 많을 거예요.(웃음) 여기 보면 바닥에 풀이 깔려 있죠? 예초기로 풀을 베서 바닥에 까는 생초재배를 해요. 농약도 내가 만든 농약을 써요. 자담(자연을 닮은 사람들) 유황, 자담 오일 등 유기농 농약이죠. 유기농 농약이 잘 안 듣는 노린재 같은 벌레에만 일반 농약을 조금 쓰고요.”

밭을 다 올라간 끝머리, 산 아래에 작은 원두막이 하나 서 있었다. 그의 아버지가 지어놓으신 원두막이라고 했다. 올 여름 복숭아 따는 내내 이곳에서 살다시피 했단다. 아버지는 3년 전에 돌아가셨는데 역시 구순을 넘겨 사셨다. 원두막 위에 올라 그가 직접 만든 나무 의자를 필자에게 권했다. 국민학교 때 쓰던 걸상 느낌이 나는 의자였다.

“내가 나무에 못질해서 뚝딱뚝딱 만든 의자에요. 시골살이는 이렇게 그냥 대충 살아요. 가끔 지인들이 놀러오면 이 원두막으로 데려와서 함께 얘기 나누며 놀죠. 며칠 후에도 친구들이 놀러오기로 했어요.”

원두막에는 원래 귀소정(歸蘇亭)이라는 나무 현판이 걸려 있었다. 그가 직접 써서 건 것이다. 돌아올 귀(歸)에 소생할 소(蘇). 돌아와서 다시 태어난다는 뜻이다. 근처에 사는 지인 중에 원광대 교수가 있는데, 여기 와서 우연히 그 현판을 보고 감명을 받아 학교에 가서 학생들에게 그 내용으로 강의를 했다고 한다. 그가 쓴 것인 줄 모르고서. 나중에 태풍이 불어서 그 현판이 떨어지자 그 교수가 그걸 맘에 들어 하며 가져갔단다.

원두막에 올라앉으니 눈앞엔 푸른 밭이 펼쳐지고, 뒤로는 미륵산과 용화산이 병풍처럼 둘러쳐져 아늑했다. 신선놀음이 따로 없었다. 미륵산 쪽으로는 관광객들에게 유명한 사자암이 한눈에 들어왔다. 삼국유사의 백제 무왕과 선화공주 설화에 나오는 절이다. 무왕이 이곳에서 고승을 만나 절을 세우라는 이야기를 듣고 미륵사를 창건했다고 한다. 무왕 때에 세워져 조선시대까지 유지된 미륵사는 지금은 없어졌지만, 백제시대에는 당대 최고 규모를 자랑하는 절이었다. 639년에 건립된 미륵사지 석탑은 현존하는 가장 크고 가장 오래된 석탑으로 남아 국보 11호로 지정되어 있다.

“좋은 곳에서 태어나셨다”고 했더니, “옛날에는 여기가 아주 ‘숭악한’ 시골이었다”고 그는 말했다. 진한 전라도 사투리가 귀에 익숙했다. 필자의 고향도 익산 바로 옆 전주이기 때문이다.

“이 동네가 유적이 많은 데에요. 우리집에서 언덕 하나만 넘으면 미륵사지 석탑이에요. 걸어서 10분 거리라, 어린 시절에는 늘 산을 넘어서 놀러가곤 했어요. 또 전주에서 금마 쪽으로 들어오는 길목에 왕궁리 유적지가 있어요. ‘서동요’ 설화에서는 백제 무왕이 거기에 왕궁을 세웠다고 해요. 이곳 금마가 무왕의 외가여서 여기서 나서 자랐다는군요.”

무왕이 어린 시절에 이곳 산에서 마를 캐며 자라서 서동(薯童)이라고 불리었다는 것이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서동 설화이다. 미륵산과 용화산, 왕궁탑과 미륵사지 탑으로 둘러싸인 구룡마을이 옛날에는 근방에서 제일 컸다고 한다. 구룡마을의 대나무 숲은 우리나라 최대 규모로 드라마 촬영지로도 유명하다. 익산시는 지난 2015년 미륵사지와 왕궁리 유적 등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자, 금마지역 일대를 고도(古都) 보존육성 지구로 지정했다.

귀소정(歸蘇亭)에 올라앉으니 이곳이 무릉도원

“김상진기념사업회라고 하면 다른 사람들보다 더 마음이 가요. 뭐라도 더 해주고 싶고, 밥이라도 한 끼 더 사주고 싶어요. 『선구자』에서 인터뷰를 온다고 해서 반가웠어요.”

저녁 해가 뉘엿뉘엿 지는 산마루에서 시원한 바람이 불어왔다. 이런 곳에 앉아있으면 시간 가는 줄을 모르겠다 싶은 생각이 들었다.

“김상진기념사업회 창립멤버시라고 들었습니다. 그 당시 은행에 근무하셔서 회비 수납을 하는 안종건 전 회장님을 도와 지로 용지도 만드셨고요. 사업회 창립 당시에 어떤 일들이 있었는지 기억나는 것이 또 있으신가요?”

“김상진기념사업회가 창립할 당시에 내가 감사를 맡았어요. 대학을 졸업하고 은행에 취직해서 일하고 있었거든요. 초대 회장을 안종건 선배가 맡으셨는데 그때 안 회장님하고 역삼동 은행에 같이 가서 안 회장님 이름으로 통장을 개설했죠. 그걸 사업회 초기에 회비 통장으로 썼어요.”

1988년 10월, 김상진기념사업회 창립과 거의 동시에 『선구자』를 창간해 회원들에게 발송하기 시작했다. 초기 『선구자』 안에는 지로용지가 끼워져 있었다. 조직을 운영하기 위해 필요한 회비를 그때는 지로용지로 수납하는 경우가 많았다. 선구자 안에 끼워져 있던 회비 지로용지는 당시 은행에 근무하던 소재선 회원이 직접 만든 것이다.

“농대 캠퍼스 안에 김상진 기념비를 세울 때, 거기에 적을 문구를 놓고 선배 세대와 후배 세대 사이에 논쟁이 있었던 것도 기억나요. 80년대 학번 후배들은 좀 더 강하고 센 문구를 쓰고 싶어 했고, 선배들은 온건한 문구로 하자는 주장이었죠. 논쟁 끝에 결국 온건한 문구로 하자는 선배들의 의견이 받아들여져서 지금의 문구 ‘사랑하는 조국의 민주를 위하여’가 기념비에 새겨지게 됐어요. 지금 생각해도 그렇게 하길 잘 한 것 같아요. 긴 시간을 놓고 보면 온건하고 부드러운 말이 훨씬 더 좋잖아요. 안 회장님을 비롯한 선배들이 안목이 있었던 거죠.”

“사업회 창립 초기에는 우리 애들이 네다섯 살쯤으로 어렸는데, 아이들을 데리고 사업회 모임에 나가곤 했어요. 결혼한 사람들은 아이들을 데려오고, 미혼 후배들은 처음에는 그냥 왔다가 가정을 꾸리면 가족과 함께 오고, 차차 다함께 가족 같은 분위기로 만났지요. 나는 초기에 맡았던 감사 일 말고는 사업회 일에 계속 관여하지는 못했어요. 그런데 우연히도 내 직장이 이병호(농교육 75, 본회 前 이사장)의 사무실과 가까워서 자주 만나고, 정혁기(농생물 75)가 내 친한 친구인데 걔가 김상진 평전 작업 등에 적극 관여해서 나도 지금껏 김상진기념사업회와 인연이 이어진 것 같아요.”

2011년 6월 수원캠퍼스에서 열린 김상진기념사업회 가족한마당에서. 왼쪽 첫번째는 이병호 전 이사장, 두번째가 소재선 회원.

은행에서 퇴직한 것이 40대 후반이었다. 그때부터 그동안 하고 싶었지만 미뤄두었던 일들을 시작했다. 월요일에서 금요일까지, 아침부터 저녁까지 서실에 나가서 글씨를 썼다. 어린 시절 붓글씨를 잘 쓴다는 소리를 듣곤 해서, 언젠가 해보고 싶은 생각을 계속 갖고 있었던 것이다. 대금도 배우고 싶어서 근처의 학원을 찾아갔는데, 대금은 처음부터 소리를 내기가 어려워 단소부터 시작했다. 나중에 친구인 정혁기 前 『디지털 말』 사장이 불던 대금을 물려받아 지금까지 꾸준히 하고 있다.

“정혁기가 사장으로 있던 『디지털 말』에서 몇 년 일하다가, 우리 형이 하던 사업이 어려워져서 형 회사에 가서도 일을 도왔어요. 그러다 8년 전에 드디어 결심을 하고 고향에 내려왔어요. 부모님 나이도 너무 많이 드시고, 농대를 나왔기 때문에 농업을 해야 한다는 부채감 같은 것도 항상 있었거든요. 대학을 졸업할 당시에 농업에도 뜻이 있었지만 집에서 강하게 반대하셨죠. 시골 부모님은 농사 안 짓게 만들려고 대학에 보냈는데 다시 내려와서 농사짓는다 하면 좋아하시겠어요. 그런데 이제는 나도 부모님도 나이가 들고, 더 이상 말릴 이유도 없으시니까요.”

사업회 초기에 감사 맡아 회비 수납일 도와

그렇게 내려온 고향에서의 삶이 그는 너무 좋다고 했다. 시골 농사일은 할 일이 많아서 늘 바쁘다. 그래도 하고 싶은 일을 하니까 힘들지가 않단다. 그 얘기를 하는 그의 얼굴이 밝았다. “행복해 보이신다”고 했더니 “그런 것 같다”며 환하게 웃었다.

“지금 생각해도 선택을 잘 한 것 같아요. 여기 와서 아버지 돌아가시는 것도 내가 봤고, 어머니도 모시고 살고. 옛날에 대학 때 배웠던 것들을 이제야 실전에 써먹으면서 농사도 짓고, 지역에서 좋은 선생님을 만나서 붓을 다시 잡은 데다 올해처럼 생각지 않던 큰 상을 받는 행운도 찾아왔으니 더 바랄 게 없어요.”

그는 “올해 내가 상복이 따르는 것 같다”고 말했다. 꾸준한 노력과 실력의 결과인 상 앞에서도 그는 겸손했다. 이전에도 다른 대회에서 특선이나 우수상은 받은 적이 있지만 대상은 처음이라고 했다. 평생 전업으로 서예를 해온 사람도 대상은 좀처럼 받기 어렵다고 한다. 농업인 서예대전은 지난 8월에 서울에서 시상식을 가졌고, 마한서예문인화대전 시상식은 10월 13일 익산 예술의전당에서 열렸다.

농업인 서예대전에서 대상을 받고 나자 중앙과 지역 언론에 기사가 실렸다. 지역 신문들에서 취재를 와서 인터뷰도 했고, 전북농협 본부장이 화분을 보내오기도 했다. 금마농협에서는 지역 여러 곳에 ‘소재선 조합원님의 대상 수상을 축하드린다’는 현수막을 제작해 내걸었다. “평생 받을 축하를 다 받고 영광을 누린 기분이었다”고 그는 당시의 소감을 말했다.

대상 수상작은 동문선(同文選)과 필원잡기(筆苑雜記)의 저자인 조선의 문인 서거정(徐居正)의 시 독좌(獨坐).

‘獨坐無來客(독좌무래객) 혼자 앉아 찾아오는 손님도 없이

空庭雨氣昏(공정우기혼) 빈 뜰엔 비 기운만 어둑하구나’로 시작하는 여덟 줄짜리 한시(漢詩)이다. 호젓하게 시골 생활을 하는 그의 모습이 고즈넉한 시상과 어울린다.

시화 전시회에서 어린시절 친구들과 함께. 가운데가 소재선 회원.

“서예를 하다보면 마음이 차분해지고 잡념이 사라져요. 또 좋은 시와 글을 많이 쓰다보면 자연히 많은 공부가 됩니다. 옛날에는 다 붓으로 글을 썼잖아요. 생활의 일부였던 붓글씨를 예술화시킨 것이 서예죠. 요즘 캘리그래피라는 것도 많이 하지만, 서예를 한 사람과 안 한 사람은 쓰는 글씨가 달라요. 내공이라고 할까요. 6,70년대만 해도 시집갈 때 혼수품으로 가져갈 정도로 집에 서예 작품 하나쯤 가지고 있는 것이 일반적이었죠.”

지금은 아내와 두 아들을 일산 집에 두고 혼자만 내려왔기 때문에, 앞으로 아들들이 결혼하고 나면 아내가 내려와 시골생활을 함께하는 것이 그의 바람이다. 삼십 대 초반인 아들들은 둘 다 미혼이다. “언젠가 아들들이 배불뚝이 약혼자의 손을 잡고 오는 것이 나의 꿈”이라고 그는 말했다. “며느리와 손자가 세트로 같이 오는 것”이라는 농담에 함께 웃었다.

인터뷰를 마치고 근처 식당으로 이동해 황태찜으로 저녁식사를 했다. 들기름으로 맛을 낸 황태찜이며 직접 만든 반찬 하나하나에서 시골 손맛이 느껴졌다. 멀리서 찾아온 후배를 대접해주시는 마음 씀씀이가 고마웠다. 언젠가 나도 이런 시골살이를 하리라. ‘먼 젊음의 뒤안길에서 이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 선’ 그의 모습이 퍽 행복해 보였기 때문이다..

.

.

임은경 _ 대학 졸업 후 인터넷 신문 ‘민중의소리’ 기자로 일했다. 남보다 조금 더 잘하고 가장 즐겁게 하는 일이 글쓰기여서, 아무래도 이것이 평생의 업이 되지 싶다. 저마다 다양한 사연을 안고 다양한 모습으로 살아가는 인간들의 이야기에 깊은 관심이 있다 . 김상진기념사업회에서는 선구자 편집주간을 맡고있다 . (atree12fly@daum.net)

Last modified: 2023-05-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