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ritten by 6:16 오후 114호(2018.10)

실화소설 ‘과학자’
슈퍼맨의 약속

노광준 (경기방송 편성제작팀장, 농화학 88)

*** 이 이야기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과 과학은 실재하며, 특히 8년간의 법정공방 끝에 확증된 사실관계들에 충실하였다.

0.

취재경쟁을 벌이던 기자들이 몸싸움을 벌인다. 수십 대의 카메라 플래시가 사방에서 동시에 터지고, 그의 눈앞이 하얘진다. 등 뒤에선 연구원들의 흐느끼는 소리가 들린다,

“선생님, 가지마세요…….”

“선생님이 그러신 거 아니잖아요!”

“가지마세요, 교수님.”

그는 복받쳐 오르는 눈물을 꾹 참고 심호흡을 한 뒤, 한마디를 토해냈다.

“환자맞춤형 줄기세포는 우리 대한민국의 기술임을, 반드시, 확인하게 되실 겁니다.”

“아. 흐흑흑…….” 연구원들 울음소리가 더 커질 무렵, 양 옆에서 두 사람이 그의 팔을 잡고 어디론가 끌고 간다. 차에 태워진다. 그리고 컴컴한 취조실. 후우, 검찰청 마크가 새겨진 노트북을 덮고 젊은 검사는 한숨을 쉰다.

“아 시팔 답답도 하시네! 진짜!”

들으라는 듯 혼잣말을 하던 검사는 문 옆에 선 수사관을 보며 고개를 까딱인다. 그러자 수사관은 취조실 문을 반쯤 열었다. 삐꺽, 소리와 함께 옆방에서 한 여인이 통곡하는 소리가 들려온다.

“으엉엉엉엉…….”

어디서 들어보던 소리. 그의 얼굴이 굳어진다. 이내 눈물이 고인다. 그의 여동생이었다.

“우리 오빠 그런 사람 아녜요.”

“그럼 계좌에 찍힌 이 돈은 뭐?”

“빌려준 돈이라니까요, 책 인세수입.”

“인세 같은 소리 하고 있네, 정부 연구비 삥땅치신 거잖아.”

“그런 사람 아니라고 몇 번 말해요. 우리 오빠, 남의 돈 십 원 한 장 탐내지 않고 자기 땅 팔아서 연구해온 사람이에요. 왜 내 말을 안 믿냐구…….”

그는 검사를 향해 소리쳐본다. 꼭 이렇게까지 해야 하냐고. 그러나 입이 얼어붙은 건지 소리가 나오지 않는다. 아무리 외쳐도 소리는 나오지 않는다. 대신 젊은 검사가 논문을 흔들며 호통치는 소리만 들려온다.

“조작된 논문을 이용한 사기, 횡령!”, “특정경제가중처벌법상 사기 및 횡령!”, “사기 및 횡령!”, “사기 및 횡령!”

툭, 하악하악. 꿈이다. 또 같은 꿈. 벌써 13년째. 새벽녘이면 ‘사기, 횡령’ 소리에 몸서리를 치며 선잠을 깨는 그의 이름은 강한우. 올해 나이 67세.

휘이이잉. 텐트 바깥으로 북극의 세찬 바람이 몰아치고 있다. 마치 텐트를 찢어 놓을 듯.

씻지도 못한 채 곤히 잠든 동료들에게 자신의 침낭을 덮어주는 한우는 손전등을 밝혀 지도를 뚫어지게 본다. 서서히 날이 밝는다. 다시 행군이 시작된다. 강한우와 함께 한국에서 온 동료들과 길잡이에 나선 러시아인들은 저마다 무거운 배낭을 짊어지고 앞으로 걸어간다. 그들 앞으로 광막한 모래산맥이 펼쳐져있다. 세계에서 가장 추운 동토의 땅, 시베리아에서도 최북단에 위치한 북극해 연안. 마치 인간의 발길이 전혀 닿지 않은 이름 모를 행성을 걷는 듯 무언가를 찾고 있는 그들은 왜 이곳에 왔으며 대체 무얼 찾고 있는 걸까.

1.

20년 전인 1995년 5월, 미국. 버지니아 주 컬페퍼 승마장. 키 195센티미터의 잘생긴 중년 남자가 말을 끌고 걸어 나오자, 그의 얼굴을 알아본 아이들 몇이 달려온다.

“슈퍼맨이다! 사인 좀…….”

기자도 그의 곁에 다가와 인터뷰를 한다,

“다음 영화는 프랜시스 코풀라 감독의 영화라구요?”

“예, 닷새 뒤 아일랜드에서 시작하죠.”

“미국에서 마지막 주말을 승마대회로 보내는데 입상을 자신하나요?”

“글쎄요, 벅(Buck)이 알고 있겠죠.”

자신의 애마 벅을 쓰다듬으며 말에 오르는 남자, 크리스토퍼 리브. 당시 나이 44세.

오후 3시 5분경 슈퍼맨의 순서가 됐다. 우레와 같은 박수소리. 크로스컨트리 3단계 중 1단계 점프 성공, 2단계 점프 성공. 이제 마지막 3단계다. OX 장애물을 넘어서려고 전속력으로 돌진하는 슈퍼맨은 돌연 말의 고삐를 움켜쥔다. 말은 뭔가를 보고 놀란 듯 갑자기 장애물 앞에서 멈춰 선다. 휙, 꽈당. 전속력으로 달려오던 키 195, 몸무게 95kg의 슈퍼맨이 곧바로 튕겨나갔다. 그리고 장애물 더미에 머리부터 거꾸로 처박혔다.

.

“헉, 숨을 쉴 수 없어.”

눈앞이 흐려졌다. 아내 다나의 울부짖는 소리가 어렴풋이 들려온다. 진행요원들이 다급히 의료진을 부른다.

“숨을 쉬지 못합니다.”

“다친 곳은?”

“목이요.”

“맙소사.”

헬기소리가 들려온다. 의사의 목소리.

“여기선 힘듭니다. 종합병원으로 지금 빨리…….”

다시 시끄러운 헬기소리. 어느 순간 그 소리가 점점 줄어든다. 대신 파도소리가 들려온다. 끼룩끼룩 갈매기 소리도. 주변을 둘러보니, 슈퍼맨은 요트를 타고 있었다. 눈부신 햇살과 시원한 바람이 살갗에 느껴진다. 그는 요트에 기대어 혼잣말을 한다.

“꿈이었어. 보라고, 아무 일도 없잖아. 내 팔도, 두 다리도 멀쩡하다고.”

슈퍼맨은 몸을 한껏 내밀고 코를 열어 시원한 바다 내음을 만끽한다. 그 때, 앞에서 거대한 파도가 몰려오고 있다. 슈웅, 철썩. 요트는 크게 흔들렸고 온 몸이 물에 젖는다. 슈퍼맨은 젖은 머리의 물기를 털어내려고 고개를 이리저리 돌리려 했지만……, 목이 돌아가지 않았다. 아무리 힘을 줘 봐도 목이 돌아가지 않는다. 꼼짝달싹할 수 없었다. 그 때 한 여인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아직도 머리가 젖어있네요?”

간호사가 웃고 있었다. 그녀는 전날 밤 물수건으로 감겨준 슈퍼맨의 머리가 아침까지도 촉촉한 게 무척 신기하다는 듯 아침 인사를 건넨다.

“좋은 아침입니다.”

그러나 인공호흡기를 끼고 병상에 누워있는 슈퍼맨은 아무 말도 건넬 수 없었다. 그에게 아침은 지옥이었다. 잔인한 현실을 확인시켜주는……. 목구멍에 튜브를 꽂고 인공호흡기로 숨을 쉬며, 팔다리는 전혀 움직일 수 없고, 심전도와 맥박, 산소포화도 등 갖은 생명 수치를 점검하는 숱한 장치들을 온 몸에 걸친 채 누워있는 자신의 모습.

“심전도 정상, 맥박 정상, 혈압 약간 낮네요.”

의사들이 수치를 점검하는 동안 그의 눈은 병실을 가득 메운 수십만 통의 편지 더미를 보고 있다. 클린턴 대통령의 편지와 더스틴 호프만이 들고 온 물건, 친구 로빈 윌리암스가 의사 분장을 하고 병실에 찾아와 웃으며 찍은 사진도. 그러나 그의 눈은 슬퍼보였다. 참혹한 현실 앞에 다 부질없는 짓이라는 듯.

두 달 뒤 캐슬러 재활센터. 슈퍼맨은 휠체어에 앉아 휠체어를 탄 사람들을 보고 있었다. 휠체어를 밀어주는 재활보조원이 조그맣게 속삭인다.

“저 아이는 형하고 레슬링을 하다 머리를 바닥에 부딪쳤어요. 이제 겨우 열 네 살인데…….”

“저 분의 나이는 60세에요. 방송국 조명감독이었죠.”

“저 친구는 아마 비슷한 연배일걸요. 서핑을 하다가 파도에 휩쓸려 모래사장에 처박혔죠.”

.

병실 바닥에서 장난감을 갖고 놀던 아들 윌이 엄마에게 묻는다.

“아빠는 이제 팔을 못 움직이지?”

엄마는 무심한 표정으로,

“응, 이제 아빠는 팔을 움직이지 못하셔.”

“아빠는 이제 아무데도 못가지?”

“응, 아무데도…….”

윌의 표정은 점점 시무룩해진다.

“아빠는 이제 말도 할 수 없지?”

“하지만 시간이 좀 지나면 할 수 있을 거야.”

그러자 윌은 뭔가를 생각한 뒤 방긋 웃으며 말한다,

“그렇지만 아빠는 아직 웃을 수 있어, 그치?”

이 말에 엄마도 슈퍼맨도 웃기 시작한다. 아내는 슈퍼맨에게 속삭인다.

“당신은 여전히 당신이야. 그리고 난 누구보다 당신을 사랑하고.”

웃고 있는 아내 다나의 눈가에는 눈물이 고여 있었다.

그 해 11월 뉴욕의 자선행사장. 휠체어를 탄 슈퍼맨이 단상에 올라오자 폴 뉴먼을 비롯해 연미복을 입은 신사숙녀들이 일제히 기립박수를 보낸다. 슈퍼맨의 머리 위로 현수막이 보인다.

‘난치병 연구를 위한 자선행사’

슈퍼맨은 감격어린 표정으로 연설을 시작했다.

“저의 병실에 포스터가 한 장 붙어있습니다. 까만 밤을 배경으로 막 발사되는 우주왕복선의 사진입니다. 현재 훈련 중인 미 항공우주국 우주비행사들이 보내준 것이죠. 그런데 사진 맨 위에 이렇게 쓰여 있더군요. 불가능은 없다는 것을 우리는 알았다고. 여러분, 이제 의학 분야에서도 비슷한 도전을 제기해야 할 때가 온 것 같습니다. 지금 우리의 사명은 ‘인체의 내부’라는 우주 공간, 즉 우리 두뇌와 중추신경계를 정복하는 일입니다. 전력을 다한다면 반드시 괄목할만한 성과를 거두리란 걸 추호도 의심치 않습니다. 저는 달이 아닌 인간의 표면을 탐구하는 일이 시급하다는 것을 다시 한 번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커다란 박수가 터져 나왔다. 슈퍼맨은 아직 할 말이 남아있다는 듯 미소를 지으며 박수소리가 잦아들기만을 기다린 뒤,

“여러분, 약속 한 가지 할까요? 제가 50세가 되는 생일날, 반드시 일어서서 걸을 것입니다. 그것은 이제 불과 7년 밖에 남지 않은 미래의 일입니다. 감사합니다.”

모두가 기립해 박수를 쳤고, 이번의 박수소리는 도무지 끝날 줄 몰랐다.

2.

그 무렵 한국. 경기도 이천의 젖소농장에서는…….

(다음 회에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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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광준_ 별명 ‘노진구’. 도라에몽에게 늘 민폐만 끼쳐 만화사상 최악의 캐릭터로 손꼽힐 만큼 띨띨하고 존재감없던 어린 시절을 보낸 뒤, 우연히 라디오 피디가 되어 드라마 ‘도깨비’의 지은탁 양과 동종업계에서 일하고 있음. FM 99.9MHz 경기방송 편성제작팀장. 언젠가 농촌에 살고픈 닉네임 ‘시골피디’.(pdnkj@naver.com)

Last modified: 2023-05-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