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ritten by 6:09 오후 114호(2018.10)

마을을 꿈꾸다
사람과 마을을 변화시키는 공동육아   

국승용(한국농촌경제연구원 연구위원, 농경제 87)

공동육아란?

우리나라에서 공동육아라는 명칭을 사용한 기관의 효시는 1994년 설립된 ‘신촌 공동육아 협동조합’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그보다 훨씬 오래 전인 1970년대 말 서울의 빈민 탁아 운동을 공동육아의 효시로 본다. 공동육아는 말 그대로 지역 사회가 아이들을 함께 키운다는 것이다. 공동육아 활동이 도시빈민 탁아 운동과 연관된 것은 시민운동가들이 부모의 돌봄을 제대로 받기 어려운 아이들의 보육에 관심을 가졌기 때문이다. 그런데 1994년부터 본격화된 공동육아는 초기 빈민탁아 운동과는 차이가 있다.

새로운 공동육아는 우리 사회의 격동기인 1980년대와 밀접하게 연계되어 있다. 80년 광주항쟁과 87년 6월 항쟁을 거치면서 시민사회 운동이 대중 참여 운동으로 발전하였다. 많은 시민이 사회 변화를 위한 활동에 직간접적으로 참여하였으며, 이들 세대가 가정을 꾸리면서 비슷한 시기에 ‘육아’에 대한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1990년대는 국공립 유치원이나 보육시설이 매우 부족했고, 지금처럼 상업적인 육아 시설이 충분하지도 않았다. 80년대 사회 변혁을 위해 헌신했던 이들이 생활에서 느끼는 필요인 ‘육아’를 해결하기 위해 공동체적 모색을 하는 과정에서 1990년대 중반부터 공동육아 활동이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또 1980년대와 90년대는 친환경농산물 구매를 중심으로 도시에서 생활협동조합이 결성되고 시민운동이 전개되던 시기였다.

지금도 그렇지만 그 당시 공동육아는 생태․친환경․공동체 등을 주요 가치로 내세웠다. 실내에서 하는 보육이 아니라 들로 산으로 나들이 다니고, 아이들에게 친환경 농산물을 먹이고, 부모들이 참여해서 운영하는 보육기관(어린이집)을 설립․운영하기 시작하였다. 그 노력이 결실을 맺어 전국에 60개가 넘는 공동육아 협동조합이 결성되었고, 그들의 연대 조직인 ‘공동육아와 공동체교육’이라는 사단법인이 만들어졌다. 대도시, 중소도시를 가리지 않고 전국적으로 공동육아 협동조합이 운영되고 있는 것을 보면 공동육아 활동이 광범위한 관심을 받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공동육아는 주로 어린이집을 일컫지만, 공동육아 어린이집을 졸업한 부모들을 중심으로 초등학교 방과 후 공동육아를 하는 경우도 있고, 초등 대안학교를 운영하는 경우도 있다. 나아가 중등 대안학교, 고등 대안학교를 운영하는 사례도 있다.

공동육아 어린이집은 몇 가지 특징이 있다. 시설은 부모들의 출자금으로 마련된다. 오래된 조합들은 서울지역 부동산 값이 급등하기 전에 설립되어 비교적 낮은 비용으로 시설을 구입한 곳이 많다. 반면 최근에 설립된 조합들은 출자금으로 시설을 구입하기 어려워 임차 시설을 활용하는 경우도 있다. 신입 교사들은 부모 대표와 교사 대표가 함께 선발하며, ‘(사)공동육아와 공동체교육’에서 실시하는 교사 연수를 받아야 한다. 조합마다 강도의 차이는 있으나 한글이나 수학·영어 같은 교육은 실시하지 않는 것이 원칙이고 나들이와 같은 생태 활동을 강조한다. 급식은 친환경 농산물을 주원료로 하고 가능한 규모에서 텃밭을 가꾼다.

가장 독특하고 공동체성이 나타나는 활동이 ‘아마 활동’이다. ‘아마’는 ‘아빠, 엄마’에서 한 글자 씩 따서 만든 용어로, 부모 참여 활동을 말한다. 선생님들 휴가가 있을 때 교육아마로 보육에 참여하고, 선생님들이 퇴근한 6시 이후에는 하원아마가 아이들을 돌본다. 때때로 시설을 개보수할 경우에는 시설아마를 하기도 하고, 아이들이 먼 곳으로 나들이하는 경우에는 차량으로 아이들을 데려다 주고 데려오는 나들이 아마를 한다.

나는 어떻게 공동육아에 참여하게 되었나?

여느 바쁜 직장 남성들과 마찬가지로 나도 아이를 키우는 것은 주로 아내의 일이라고 생각했다. 맞벌이임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첫째가 초등학교에 진학할 무렵 아내는 아이를 서울 아차산 자락의 한 방과 후 프로그램(이하 방과후)에 보내고 싶다고 했다. 학교를 마치고 또래들이 모여서 함께 지내고, 틈틈이 서울 지역 곳곳을 나들이 다니는 곳으로 프로그램이 참 좋다고 했다. 그러자고 했고, 당시 경기도 남양주에 살던 우리 집은 공동육아 방과후에 아이를 보내기 위해 아차산 자락으로 이사했다. 그리고 둘째는 근처 공동육아 어린이집에 보내게 되었다. 그 때가 2010년경이고, 아차산 자락에 공동육아가 태동한 것이 1996년이니 상당한 경험이 축적된 곳이었다. 나도 공동육아에 문을 두드리는 다른 많은 부모들과 마찬가지로 선생님들을 믿을 수 있고, 친환경 농산물을 먹일 수 있고, 프로그램이 좋다는 이유로 공동육아 조합원이 되었다.

그런데 이 공동육아라는 것이 사람을 가만 놔두지 않는다. 교육도 시시때때 받아야 하고, 여러 시간 지속되는 회의에도 참여해야 하고, 때때로 시설 청소도 해야 하고, 선생님의 빈자리를 채우는 아마 활동도 해야 하고……. 공동육아의 공동체성이 가장 잘 드러내는 것이 하원 아마와 마실이다. 6시 선생님들 퇴근 이후에 한두 명의 아마가 아이들을 돌보며 부모들이 오기를 기다린다. 보통 저녁 7시까지 기다리는데, 가끔(개개인에게는 가끔이지만 거의 매일) 그 시각까지 오지 못하는 부모들이 있다. 이때는 하원 아마 또는 맨 마지막에 아이를 데려간 아마가 남은 아이들을 자기 집으로 데려가는 것이 원칙이다. 이것을 ‘마실’ 간다고 한다.

하원아마는 직장을 다니지 않거나 저녁 시간을 낼 수 있는 부모들이 주로 맡는다. 어차피 아이 데리러 가야 하니 조금 먼저 나와서 조금 뒤까지 아이를 돌봐 주는 것이라며 소수의 아마들이 돌아가면서 하원 아마를 맡아 주는데 참 고마운 일이다. 다른 집에 자기 아이를 맡기는 것을 부담스러워 하는 것이 도시의 인심이지만 공동육아 마실은 그렇지 않다. 자기 아이 먹이는 저녁 같이 먹이고, 아이들끼리 놀게 두면 된다. 나도 몇 번 해봤는데 내 딸하고만 노는 것보다 친구들이 마실 와서 아이들끼리 놀게 하고 내 일을 할 수 있으니 어떤 면에서는 더 편하다. 이런 일이 쌓여 서로 친해지면 주말에는 아빠들이 아이들을 모아 산이나 놀이터로 놀러 다니고 엄마들에게 꿀 같은 휴식을 주기도 한다.

공동육아가 무엇인지, 협동조합이 무엇인지, 마을 만들기가 무엇인지, 부모들이 수시로 교육을 받긴 하지만 교육만으로 그것을 이해하기는 어렵다. 교육 아마로 선생님을 대신해서 아이들과 하루 부대껴 보거나, 마실 받아서 아이들에게 밥도 챙겨주고 노는 모습도 보고 해야 공동육아가 무엇인지 어렴풋이 느낀다. 내게 공동육아는 엄마 아빠가 함께 아이를 키우는 것이자, 이웃들이 함께 아이를 키우는 것이다.

공동육아가 마을을 어떻게 변화시키는가?

내가 아차산 자락으로 이사할 때 그 동네에는 2개의 공동육아 어린이집, 1개의 초등학교 1~4학년 방과후가 운영되고 있었다. 어린이집에 참여하는 가구는 약 1백 가구, 방과후에 참여하는 가구는 약 50가구. 아마 활동을 하고 나들이를 보내려면 멀리 떨어져 살 수 없기 때문에, 공동육아를 하는 1백 가구 이상이 걸어서 갈만한 거리에 모여 살았다. 몇 년 후에는 초등 고학년 방과후와 마을 도서관이 생겼다.

여느 서울 동네와 다른 것은 이웃이 있다는 것이었다. 물론 공동육아 조합에 소속된 특수한 상황에 있는 사람들만으로 이웃이 형성된 것이지만, 수년 동안 같은 문을 쓰고 살아도 인사 한번 제대로 하지 않고 지내는 사람들이 수두룩한 서울에서 이웃이 있다는 것 자체가 대단히 특별했다. 주말 저녁 술집에 가면 약속이 없어도 항상 술동무가 있고, 이웃을 통해 또 다른 이웃을 사귀게 된다. 주말에 나들이를 함께 가기도 하고, 조금 먼 여행을 함께 떠나기도 하고. 해마다 단오에는 공동육아 조합들이 공동 주최하여 동네 주민과 인근 시민사회 단체를 초청하는 축제를 벌였다. 대학시절 배웠던 풍물 실력을 되살려서 길놀이도 하고, 밴드 공연도 하고, 아이들은 배운 태껸 실력을 뽐내기도 하고.

그렇게 몇 년을 지내면서 문득 의문이 일었다. 매년 십 여 가구, 많을 때는 이삼십 가구가 공동육아 어린이집이나 방과후를 졸업한다. 아차산 자락에서 공동육아를 일군지 스무 해 정도면 졸업 조합원이 수백 가구가 근처에 모여 살 텐데 그들은 아차산 자락을 떠나 어디론가 가고 없었다. 왜 그럴까?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으나 가장 큰 이유는 중학교 때문이었다. 공동육아 조합원들이 주로 모여 살던 동네에는 중학교가 없었다. 산중턱을 돌아 걸어서 30분은 가야 중학교가 있었다. 그렇다 보니 초등학교 4학년 방과후를 졸업하고는 중학교를 염두에 두고 마을을 떠났던 것이다. 아마도 공부를 잘해야 출세한다는 인식이 조선시대 이래로 우리나라 사람들의 유전인자에 박혀있는 모양이다. 아이가 어렸을 때에는 이웃과 더불어 아이를 키우자던 수많은 공동육아의 선구자들이 아이가 초등학교 고학년이 되면 학습 환경을 찾아 마을을 떠난다. 그래서 초등학교 방과후가 4학년까지밖에 운영될 수 없었던 것이다.

열이 채 못 되는 가구가 모였다. 초등학교 고학년 방과후를 만들자는 것이 주제였다. 5학년이 되었으니 간식 챙겨주고, 함께 나들이를 다니고, 싸우지 않도록 하는 ‘돌봄’이 방과후의 목적일 수는 없었다. 그래서 프로그램 단위 공동 활동이라는 방식을 생각해 냈다. 독서토론, 연극, 요리 실습, 악기 배우기, 태껸, 숲 탐방, 주말에 아빠와 함께 자전거 타기 등 동네 이러저러한 자원과 재능을 엮어서 아이들의 배움을 넓히고자 했다. 그렇게 2년의 고학년 방과후 실험은 절반의 실패, 또는 절반의 성공이었다. 더 이상 고학년 방과후가 운영되고 있지 않으니 실패라는 표현이 어색하지 않다. 하지만 남는 것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었다. 아니 적지 않은 것이 남았다. 아이들끼리 매우 가까워졌고, 악기도 배우고, 연극 공연도 하고, 한 달에 한두 권 책도 같이 읽고 토론하는 경험도 쌓았다. 잘 드러나지 않아도 어린 시절의 이런 경험이 어딘가에 남아 있을 것이다.

아이들이 초등 5학년 쯤 되니 아이들 못지않게 부모들도 변했다. 나이가 들어 하는 일에서 조금은 여유가 생기기도 했고, 아이들이 커서 부모의 손길이 그다지 필요하지 않았다. 시간과 마음의 여유가 생겼다는 것이다. 술자리건 공식적인 모임이건 논의의 주제가 아이에서 자신으로 옮겨 가기 시작했다. 경우에 따라서는 오랜 논의를 거치기도 하고, 때론 충동적인 한두 명에 의해 마을에 이러저러한 모임이 만들어졌다. 공동육아를 하면서 서로를 깊게 알고 지내던 사람들이 마을에서 이러저러한 모임을 만들기 시작한 것이다. 대표적인 것이 마을 밴드, 마을 연극반, 마을 독서회. 서로 잘 알고 있고, 사회연결망 서비스를 활용해 쉽게 연결이 될 수 있으니 모임을 만드는 일도 그다지 어렵지 않았다.

그 가운데 마을 밴드를 만든 일이 기억에 남는다. 스무 가구 정도가 새해를 맞아 1박 2일의 모꼬지를 떠났던 어느 저녁, ‘이 자리를 빌어 이야기하는데 밤마다 드럼 배우러 다닌 지 두,세 달 쯤 됐다. 우리 마을도 밴드 한번 만들어 보자’는 충동적인 제안에 의해 마을 밴드가 결성되었다. 밴드 멤버를 모집한다고 마을 게시판에 공지하자, 십 수 명의 사람들이 뜨겁게 호응했다. 학창 시절 밴드 경험이 있던 이들, 한번 해보고 싶었는데 기회가 없었던 이들, 노래는 정말 못하지만 학원 등록해서 배워가면서라도 해보고 싶다는 이들. 이렇게 연초에 결성된 밴드는 실력은 별 볼일 없지만 독특한 구성에 힘입어 이곳저곳 초청연주도 하고 정기 공연도 하고 있다. 한 번은 마을 밴드라는 특징 때문에 실력 있는 밴드들이 공연하는 서울시 주최의 행사에 초청된 적도 있다. 밴드 결성에 즈음하여 비슷한 방식으로 연극반도 생겼고, 독서 모임도 생겼다. 고학년 방과후가 사라지면서 공동육아를 주제로 한 모임은 더 이상 운영되지 않고 중학생이 되면서 아이들은 뿔뿔이 흩어졌지만, 공동육아를 통해 연을 맺은 사람들의 다양한 활동이 마을에서 이루어졌다.

나는 직장이 나주로 이전하면서 2014년 아차산 자락을 떠나 나주에 둥지를 틀었다. 하지만 가끔 서울에 가면 공동육아로 인연을 맺었던 아차산 마을의 이웃들을 만난다. 그리고 사회연결망 서비스를 통해서 밴드나 독서모임 이야기를 들으며 이웃과 더불어 즐거웠던 시절을 회상하곤 한다. 온통 회색으로 각박하다는 서울에서도 마을이 형성될 수 있고, 서로가 서로에게 이웃이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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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승용 _ 학부를 졸업하고 수년간 농산물 유통 분야에서 경험을 쌓고, 느낀 바가 있어 농경제사회학부에서 농산물유통을 연구해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지금은 한국농촌경제연구원의 연구위원으로 농업정책에 대한 연구를 수행하고 있다. 직장이 전남 나주 혁신도시로 이전하면서 가족들과 함께 나주로 이사해 지역에 뿌리내리고자 노력하고 있다. (gouksy@daum.net)

Last modified: 2023-05-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