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애란 (후원회원, 전 평택여고 교사)
조선시대에는 사람의 등급이 ‘사농공상’ 순서로 매겨졌다. 현대사회로 넘어오면서 그것이 학벌로 바뀌었다. 현재 ‘유전무죄 무전유죄’를 유감없이 보여주고 있는 법조계 인사들의 학벌은 화려하기만 하다. 사람들이 왜 똑똑한 사람을 좋아할까? 사회를 위해서 큰일을 해낼 거라는 믿음 때문이다. 자신의 전문지식을 국민을 기만하는 데 쓴다면 그 법조인은 국민들에게 치명적인 상처를 입히고 있는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제도권 학교를 못 다녔다는 것은 결정적인 열등의식으로 작용하기 마련이다. 나도 간절히 바라던 선생님이 되었으니 야학출신이라는 것을 당당히 밝힌 것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아마도 평생 꽁꽁 숨겨놓고 살았을 것이다.
평택여고 근무시절 입학철이었다. 어느 날 야학 후배가 교무실로 나를 찾아왔다. 몇 십 년 만에 만나는 후배가 반가우면서도 ‘왜지?’ 하고 의아해했다. 잠시 후 그녀가 말했다.
“언니, 우리 딸이 올해 이 학교에 입학했거든. 근데 우리 딸에게 내가 서둔야학 출신이라는 것을 절대로 말하면 안 돼. 언니, 부탁해!”
그녀의 눈빛은 간절했다. 평택여고는 경기 남부의 명문으로 오산, 안성, 성환, 둔포 등 인근지역 우수 학생들이 모이는 학교이다. 아마도 그녀의 딸도 공부를 꽤나 잘했을 것이다. 평택여고는 한 학년이 12반이나 되는 큰 학교이다. 한 해 입학생만 해도 몇 백 명이나 된다. 내가 그 애들을 모두 호구조사를 하는 것도 아니고, 일부러 와서 부탁 할 필요가 전혀 없었으나 후배는 혹시나 해서 찾아온 것이었다. 그녀는 똑똑하고도 예쁜 여성이었으나 그 핸디캡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이었다. 씁쓸했지만 이것이 대한민국의 현실이다.
혜옥이는 초등학교 3학년 때부터 나를 괴롭혔다. 3학년 때 내 그림이 교실 뒤 학습란에 전시되자 그녀는 입을 삐쭉대며 말했다.
“그림을 잘 그렸나? 크레파스가 좋은 거지.”
표독스런 그 애가 무서웠던 나는 전시된 내 그림이 자랑스러워서 자꾸만 보고 싶어도 그 애 눈이 없을 때만 몰래몰래 보았다. 그렇게 예쁜 애가 마음은 왜 그렇게 삐뚤어졌는지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았다.
한번쯤 그 애에게 물어보고 싶었다.
“혜옥아, 너는 왜 그렇게 나를 미워했니?”
신분 세탁이 안 되는 ‘고아원 애’인 혜옥이는 여태까지 단 한 번도 동창회에 그림자도 비치지 않았다. 남자애들은 엄청 보고 싶어 하는 데도 말이다.
신분 세탁계에서 전설적인 ‘갑’이 있다.
“Don’t cry for me argentina”라는 노래는 에비타가 아르헨티나 국민들에게 전하는 메시지로 유명한 노래이다. 이 노래의 주인공인 아리따운 에바 페론은 아르헨티나 페론 대통령의 둘째 부인으로 34세에 병으로 사망하였다. 그녀는 천신만고 끝에 남편인 페론이 대통령이 되자 자신의 과거를 알고 있는 지인들을 차례로 잡아 죽였다.
사생아로 태어나서 어린 나이에 콜걸생활까지 했던 과거가 밝혀지면 자신의 명성에 치명타가 되기에 그런 것이다.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지, 그런다고 진실이 없어지나. 출세욕에 눈먼 악녀의 헛된 야망 때문에 지은 죄도 없이 죽어간 사람들은 얼마나 억울했을까!
지금은 서둔야학이 내 삶에서 ‘걸림돌이 아니라 디딤돌’ 역할을 충실히 해주고 있다. 오늘날 내게 가장 재미있는 일이 글쓰기인데, 글을 쓰게 된 동기가 서둔야학 얘기이기 때문이다.
“행복한 사람의 일기장은 비어있다.”
안네 프랑크가 한 말이다. 삶에서 산전수전 공중전 지하전까지 다 겪은 내 일기장은 차고 넘친다.
“문학의 밥은 고통이다.”
지나고나니 평탄치 않은 내 삶이 가장 큰 무기가 되었다. 내 삶의 콘텐츠가 이만저만 견고한 게 아니다. 내 삶의 우물은 퍼내고 또 퍼내도 계속 물이 고여 있다. 쓰고 싶은 게 하도 많아서 언제 글쓰기가 멈춰질지 모르겠다.
서울대 유안진 교수님은 말했다. ‘문학을 위해서라면 얼마든지 고통스러워져도 좋다’고. 책에서 이 구절을 본 내가 그녀에게 묻고 싶었다. ‘당신이 정말 인생의 쓴맛을 알고서 하는 얘기냐’고. ‘너무 고통스러워서 죽으려고 마음먹은 적이 있었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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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애란 _ 선생은 서둔야학 시절 야학생과 교사로서 맺은 인연을 누구보다도 소중히 여기며 본회에 각별한 애정을 가지고 있다. 평택에서 어릴 적 꿈이었던 교사로 학생들을 가르치다 은퇴하였다.
Last modified: 2023-05-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