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은경 선구자 편집주간
지난 10월, 김상진기념사업회 페이스북에 고경아 경기도 따복공동체지원센터 공동체육성팀장이 오랜만에 소식을 전해왔다. 마을만들기전국네트워크 대화모임이 수원 옛 농대캠퍼스에서 열리니 김기사 회원들을 초대한다는 내용이었다. 10월 대화모임에서는 특히 지난 2015년 10월에 돌아가신 이근호 전 따복공동체지원센터 센터장(농화학 86)의 기일을 맞아 ‘이근호상’ 시상식이 함께 열린다고 했다.
이근호 전 센터장의 부인인 고경아 팀장은 2015년 12월에 발간된 『선구자』 103호에 기고문을 보내, 이 전 센터장의 장례에 달려와 준 김상진기념사업회 회원들에게 감사 인사를 전해온 바 있다. 이 전 센터장의 배우자이자 평생의 동지였다는 고 팀장은 여전히 의연하게 그 길을 가고 있구나, 싶었다. 새해를 맞아 고 팀장께 만남을 청했고, 지난 1월 2일 수원시 장안구 파장동에 위치한 경기도 따복공동체지원센터에서 그를 만났다.
2015년에 설립된 경기도 따복공동체지원센터는 이근호 전 센터장이 초대 센터장을 맡았던 곳이다. 고경아 팀장은 이 전 센터장이 돌아가신 후 2016년 4월부터 2018년 4월까지 이곳에서 경영기획본부장을 맡았고, 현재는 공동체육성팀장으로 일하고 있다. 예산은 경기도가 대지만 법인에서 위탁 운영하는 기관으로, 고 팀장은 경기도 31개 시군에서 마을공동체 활동을 하는 조직들의 연대를 돕는 일을 하고 있다. “지자체는 예산이 있고, 공동체는 활동 예산이 필요하니까 그 둘을 연결해주는 일이 저희가 하는 일”이라고 그는 설명했다. 다른 말로는 ‘중간지원조직’이라고 한단다.
전북 진안 출신인 고 팀장은 전주에서 고등학교를 나와 전북대 화학과에 86학번으로 입학했다. 한국기독학생회총연맹(KSCF) 전국 활동을 하는 과정에서 이근호 전 센터장을 만났다고 한다. 학교를 졸업하고 함께 수원으로 와서 청년운동(수원 KYC)을 시작으로 지금까지 계속 수원에서 시민단체 일을 해왔다.
“남편과는 스물세 살에 만났는데 처음부터 서로가 어떤 관계가 될 지에 대해 이야기를 많이 했어요. 에리히 프롬의 ‘사랑의 기술’ 같은 책을 읽고 함께 얘기하고. 그러면서 내가 생각하는 것과 그 사람의 지향점이 서로 다르지 않다는 것을 느꼈어요. 얘기를 해보니 아주 수용적인 사람이었고, 남녀의 역할에 대해 편견이 없었어요. 이 사람과는 연애도 결혼도 할 만하다는 생각이 들었죠.”
부부 관계는 사는 동안 내내 늘 새로웠다. 누구의 아내, 누구의 엄마가 아니라 고경아는 고경아, 이근호는 이근호, 각자 서로의 삶을 잘 살 수 있도록 존중해 주는 관계였다. 두 사람은 서로에게 존대말을 썼다. 고 팀장은 남편을 회상하며 “그를 통해 치유되고 성장하고 충족되는 느낌을 받았다”고 말했다. 자신의 부모나 형제, 자매에게서도 느껴보지 못한 감정이었다.
“남편을 통해 성장하고 충족되는 삶을 살았다”
“그런데 그것은 서로 계속 훈련과 연습을 해야 하는 거예요. 내가 존중해야 상대방도 나를 존중하는 거니까요. 그의 생전에는 저도 속상할 때는 그 사람 욕도 하고 흉도 봤을 텐데, 가고 나니까 이런 점들이 더 생각나네요. 지금 가장 아쉬운 것은 이런 대화를 나눌 사람이 없다는 거예요. 남편의 빈자리보다는 동료를 잃은 상실감이라고 할까요. 서로의 생각과 철학을 포함해 무슨 이야기든 나눌 수 있는 인생의 친구를 잃은 상실감이 가장 커요.”
2015년 『선구자』 103호를 편집할 당시 이 전 센터장 관련 자료를 정리하다가 ‘마을사람 이근호’라는 표현을 본 적이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의 삶은 마을만들기 활동과 떼려야 뗄 수가 없었다. 그는 마을만들기전국네트워크의 초기 멤버이고, 매달 열리는 마을만들기전국네트워크 대화모임의 운영위원을 맡아 모임에 한 번도 빠지지 않고 참석했다. 2016년 4월에 창립한 이근호기념사업회의 구성원도 전국에 있는 마을활동가들이다.
“이근호기념사업회에서는 매년 10월에 이근호상을 시상하고 있어요. 마을활동가들 중에 정말 귀감이 될 만한 분들을 매년 세 명 선정해서 상금 100만원을 수여하지요. 마을 활동이란 것이 정말 힘들고 외로운 일에요. 사람들의 의견을 조율하는 일이기 때문에 늘 갈등의 중심에 설 때가 많지요. 그런데 이분들이 이걸 다 안 받고 다시 후원하세요. 이 상이 생각보다 무겁게 느껴지신대요.”
이근호 전 센터장과 같은 길을 걸어온 고경아 팀장은 남편의 땀과 눈물이 밴 마을만들기 운동을 계속 이어가고 있다. 지난해부터는 마을만들기전국네트워크 공동운영위원장을 맡아 매달 대화모임에 참석하고 있다. 이 부부가 ‘마을만들기’라는 것을 평생의 주제로 삼게 된 계기는 무엇일까.
“이근호 씨가 2001년부터 수원 KYC(한국청년연합회 수원지부) 사무국장으로 일했는데, 이때 광교산 농산물 직거래 운동이라는 것을 했어요. 광교산 골짜기 안에 논농사, 밭농사를 짓는 농가가 꽤 있거든요. 그런데 수원시에서 ‘이곳이 상수원 보호구역 안이고 광교산 반딧불이를 보호해야 하니까 농약을 치지 말라’고 해서 수원시와 그곳 농부들 간에 토론회가 열렸어요. 광교산 농가들이 자기들의 생존권도 중요하다고 맞섰거든요. 수원 KYC도 그 토론회에 참여했죠.”
고 팀장은 그때 ‘환경보호’를 중시하는 일반의 상식과 달리, 그 지역 농가들에게는 삶의 문제가 우선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렇다면 농민들의 생존권과 환경이라는 가치가 어떻게 공존할 수 있을까. 수원 KYC는 이 문제를 고민하면서 광교산 농가들과 지속적인 관계를 맺게 되었다. KYC 회원들이 광교의 절임배추나 상추 등을 공동 구매하고, 유기농업단지 조성 운동을 시작해 유기농 쌀 인증도 받았다. 이 당시의 경험은 이후 공동체나 마을만들기에 대한 고민과 생각을 이어가게 된 최초의 계기가 되었다.
매년 10월 ‘이근호’상, 마을활동가에게 백만 원씩 수여
“2002년에는 수원 KYC가 화성 길라잡이 활동을 시작했어요. 수원시가 2005년에서 2009년까지 화성 관광안내소 운영을 KYC 같은 민간에 맡긴 적이 있었거든요. 관광객들을 인솔해 세 시간 코스로 팔달문 일대를 돌면서 문화유산 해설과 안내를 했죠. 요즘에는 어느 곳이나 문화유산 동반 안내가 일반화되었는데, 수원이 이걸 훨씬 먼저 시작한 거죠. 그중에서도 수원 KYC의 화성 길라잡이 활동이 현재 관광안내소의 문화를 바꾸는 데 큰 역할을 했어요.”
고 팀장은 2003년에 KYC 자원봉사 4기로 들어가서 KYC 활동을 시작했다. 한 달에 한번 화성에 가서 안내 해설사를 맡았는데, 일이 적성에 맞았던지 정말 재미있게 했다고 한다. 차츰 관광안내소가 있는 행궁동의 주민 중에도 길라잡이로 참여하는 분들이 생겼다. 그런데 정작 주민자치위를 통해 만난 주민들은 화성에 대한 분노가 대단했다. 화성을 복원하겠다며 일대를 수용하고, 사람은 살지 않는 기와집을 짓기 위해 정작 주민들은 내쫓기는 형국이 되었기 때문이다.
“수원시는 화성만 관심 갖고 가꾸려고 했지 동네에 있는 사람들은 관심이 없었어요. 그래서 이 성이 세계문화유산이 될 수 있는 것은 성 안에 사람이 살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 화성도 세계문화유산이지만 그 안에 살고 있는 주민들도 세계문화유산이라는 것을 시에 알리려고 노력했죠. 광교의 유기농업단지 조성과 마을만들기가 행궁동의 마을만들기로 확장된 계기가 바로 이것이었어요.”
고 팀장은 2006년부터 2011년까지 수원 KYC 공동대표를 맡아 매일 아침 행궁동으로 출근했다. 보호관찰 청소년에 대한 멘토링을 하거나 동네 주민들과 함께 문화재 지킴이 활동 등을 벌였다. 2012년부터는 나혜석기념사업회 사무국에서 일하면서 ‘나혜석 생가거리 미술제’ 실무 일을 했다. 백퍼센트 주민으로 힘으로 여는 민간 행사였다. 동네 주민을 수십 명에서 백 명 가까이 모아 위원회를 조직해서 행사를 치렀다.
“2013년에는 화성 장안문 안쪽 신풍동과 장안동에서 ‘자동차 없이 한 달 생활하기’를 실천하는 ‘생태교통 수원 2013’ 마을사무소의 마을국장 일을 했어요. 주민 약 4천 3백 명이 살고 있는 이 동네에서 한 달 동안 자동차를 완전히 밖으로 뺐어요. 여기서는 누구나 걷거나 자전거만 타고 다녔고, 실제로 성공을 거두었어요.”
그 한 달 동안 동네가 그렇게 조용할 수가 없었다. ‘차 와요, 피해요’ 하는 말이 사라지고, 동네 사람들의 표정도 달라졌다. 모두 다 웃고, 만나면 먼저 인사했다. 사람들은 도로 위를 자유롭게 걸어다니면서 행복해했다. 도로가 비니까 시야도 확 트여서 동네에서도 화성의 건물들이 한눈에 들어왔다. 동네 전체가 넉넉하고 여유로워진 느낌이었다.
“생태교통은 2011년에 독일의 콘라드 오토 짐머만이 처음 창안한 개념인데, 그것을 실제 사람 사는 동네에서 한번 구현해본 거예요. 세계 최초로 실제 현실공간에서 석유가 떨어졌다는 전제 하에 자동차 없이 살아보는 실험에 행궁동 주민들이 참여한 거죠. 그때 주민들과 함께 했던 경험, 자동차가 사라진 도로 위에 선 사람들의 표정과 모습은 정말로 잊을 수가 없어요.”
‘마을만들기’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사람’
당시 행궁동 마을만들기 활동가들이 함께 했던 ‘행궁동 마을 레지던시’라는 건물이 현 화성행궁 광장 옆에 있었다. 이근호 전 센터장이 초대 센터장을 했던 마을르네상스 센터가 자리한 건물이기도 했다. 2005년에 광장을 만들면서 일대를 전부 수용해서 지금은 없어진 건물이다. 2015년에 그 자리에 이 전 센터장을 기념하는 ‘줄탁동시 마을정원’이 조성되었다.
“줄탁동시(啐啄同時)란 병아리가 알에서 나오기 위해서는 새끼와 어미닭이 안팎에서 서로 쪼아야 한다는 뜻이에요. 마을만들기는 주민들이 스스로 쪼아서 나오려는 준비가 되어있을 때 지원을 해주어야지 행정에서 일방적으로 지원하는 것으로는 성공하지 못한다는 의미죠. 이근호 씨가 늘 가지고 다니던 PPT 자료의 맨 앞부분에 나오는 사자성어에요.”
마을만들기 운동은 2007년에 마을만들기 전국대회가 시작되면서 전국 네트워크로 발전했다. 한 달에 한 번 열리는 마을만들기 전국네트워크 대화모임은 70회가 넘은 지금까지 쉬지 않고 열리고 있다. 이근호 전 센터장은 이 대화모임의 운영위원을 맡아 마지막까지 한 번도 안 빠지고 참석했다.
“대화모임은 1박 2일 일정으로 열리는데, 한 가지 원칙이 있어요. 처음 만났을 때 모두가 자기소개를 해야 하고, 1박 2일이 다 끝나면 다시 한 번 자기소개를 해요. 처음에는 다 어색해서 머뭇거리는데, 끝날 무렵에는 다들 하고 싶은 얘기가 얼마나 많은지 몰라요. 거기 참여한 사람들이 술도 안 마시고 밤새도록 마을 활동 이야기를 하는 걸 보고 처음에는 너무 신기했어요.”
마을만들기 활동 얘기는 또 자연스레 이근호 전 센터장 이야기로 흘러갔다. 수원 KYC와 수원의제21, 마을르네상스 센터에서는 사무국장, 따복공동체지원센터는 초대 센터장, 마을만들기전국네트워크 대화모임은 초대 운영위원장을 맡았던 그의 삶은 늘 뭔가 새로운 것을 개척하는 것이었다고 고 팀장은 회상했다. 정치적 성향이 다른 쪽에서 시장이 당선되면 실무적인 도움이 다 끊겨서 고생한 적도 있었다.
“그렇게 고생고생해서 일이 자리 잡히면, 거기에 안주하지 않고 다른 사람에게 넘겨주고 자기는 또 다른 것을 개척하고 나섰어요. 저는 그 일이 체계를 잡고 알맹이를 채우는 일을 주로 해왔던 것 같아요. 그가 수원의제21 사무국장을 맡았을 때, 제가 공동대표를 맡고 있던 수원 KYC에서 일을 많이 도왔던 것처럼요. 그런데 다른 사람들은 저도 똑같이 일을 벌이는 사람으로 보더라고요.(웃음)”
‘마을사람’ 이근호, 그와 함께 한 고경아
지난 2015년 가을, 이 센터장의 빈소는 정말 많은 사람들로 넘쳐났다. 너무 갑작스런 일을 당해 제대로 된 이별도 못한 고 팀장이 장례 기간, 그리고 그 후로 일 년이 넘도록 온전히 슬퍼할 수 있도록 배려해준 것도 바로 그 사람들이었다. “공동체라는 것이 손에 잡히는 것도 아니고 구체적인 이익과 관계없는 것이지만, 내가 어려움을 겪을 때 이렇게 마음을 같이 해주는 것이 공동체라는 것을 새삼 느꼈다”고 고 팀장은 말했다.
“서울대 농화학과에서도 십시일반으로 천만 원 가까운 돈을 모아 우리 애들 학비를 대주고 계세요. 아빠가 돌아가셨을 때 스물 둘, 열 아홉이었던 두 아이는 올해 각각 스물 여섯, 스물 셋이 되었어요. 자기 친구가 죽었다고 누가 그 가족들을 위해 이렇게 마음을 모아줄 수가 있겠어요. 이런 것이 제가 회복하는 힘이 됐어요. 김상진기념사업회에서도 많은 분들이 와주셨고, 감사하다는 말씀을 전하고 싶어요.”
고 팀장의 페이스북에는 ‘사는 동안 당신이 보여준 세상을 만나게 하는 일이 나의 소명’이라는 글귀가 쓰여져 있다. 이 글귀에 대해 물었더니 그는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같이 사는 동안 다른 사람을 비난하는 얘기를 들어본 적이 없어요. 어떤 사람이 가진 장점을 하나라도 찾아내서 그것이 그 사람이라고 인식하라고, 늘 그 말을 해줬어요. 그를 통해 알게 된 모든 분들이 제겐 선물이에요. 페이스북에 쓴 것은 그가 살아오면서 가르쳐준 것들을 내가 잘 받아서 이어가겠다는 뜻이에요. 저에게는 동지이자 스승 같은, 이근호라는 사람을 통해서 배웠던 가치를 다른 사람들에게도 잘 전해주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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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은경 _ 대학 졸업 후 인터넷 신문 ‘민중의소리’ 기자로 일했다. 남보다 조금 더 잘하고 가장 즐겁게 하는 일이 글쓰기여서, 아무래도 이것이 평생의 업이 되지 싶다. 저마다 다양한 사연을 안고 다양한 모습으로 살아가는 인간들의 이야기에 깊은 관심이 있다 . 김상진기념사업회에서는 선구자 편집주간을 맡고있다.(atree12fly@daum.net)
Last modified: 2023-03-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