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광준 (경기방송 편성제작팀장, 농화학 88)
* 이 이야기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과 과학은 실재하며, 특히 8년간의 법정공방 끝에 확증된 사실관계들에 충실하였습니다.
지난 이야기 : 말에서 떨어져 식물인간이 된 슈퍼맨 크리스토퍼 리브는 절망을 딛고 난치병 치유를 위한 과학연구 지원에 나선다. “제가 50세가 되는 생일날 반드시 일어서 걷겠습니다.” 누가 그 간절한 희망을 도울 수 있을까?
1.
그 해 겨울 한국, 오랜만에 흰 눈이 소복이 쌓이는 화이트 크리스마스가 찾아왔다. 새벽 한 시. 서울대 농대 캠퍼스가 있는 수원시 서둔동의 한 가정집에서는 신태영 박사가 곤히 잠든 아이들의 머리맡에 살금살금 크리스마스 선물을 놓아주고 있었다. 그 때 전화벨이 울렸다. 따르르릉, 따르르릉, 따르르……. 이 시간에 무슨 전화일까. 그런데 전화를 받는 신 박사의 표정은 익숙해 보인다.
“예, 선생님.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예.”
행여 식구들이 깰까봐 전화기를 손으로 가린 채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하는 신 박사는 다른 손으로 메모지를 찾아 적는다.
“이천의 에벤에셀 목장이요? 예, 알고 있습니다. 예, 항생제와 검사 키트, 바로 출발하겠습니다. 예, 선생님.”
‘예, 선생님’ 할 때마다 고개가 절로 숙여진다. 오랜 실험실 생활로 몸에 밴 습관. 그런데 누가 보면 참 우스꽝스럽다. 어두컴컴한 현관문 앞에서 낮은 목소리로 웅얼거리며 고개를 숙였다 폈다, 꼭 승려가 웅얼웅얼 염불 외는 모양새다. 한두 번이 아니었나보다. 안방에서 가족들이 한마디씩 한다.
“엄마, 아빠 또 기도 드리나봐.”
“여보, 염불 그만 외고 어여 자요!”
하지만 대답 대신 쿵, 하며 문이 닫힌다. 신 박사는 재빨리 승용차를 몰고 나간다. 실험실에 들러 약품과 장비를 싣고 빠른 속도로 차를 몰았다. 고속도로에서 국도, 국도에서 다시 농로. 마침내 목장에 도착하니 새벽 두시 반. 눈발이 날리고 있었다.
2.
이천의 에벤에셀 농장. 사십 대 중반의 교수와 세 명의 젊은 연구원들이 땀을 뻘뻘 흘리면서 밧줄을 당기고 있었다,
“나온다, 나온다, 댕겨! 아다다다다…….”
마치 줄다리기를 하듯 줄을 당기는 사람들. 송아지를 받아내고 있는 중이었다. 줄은 어미 소의 몸속을 빠져나오는 송아지의 발굽에 매여져있었고, 교수 일행이 힘껏 줄을 당길 때마다 송아지는 발부터 다리, 몸통 순으로 어미 몸속에서 빠져나오고 있었다. 마침내 송아지의 어깨가 빠져나오며 머리까지 쑤욱 나온다. 철퍼덕. 송아지의 몸이 부드러운 볏짚위로 떨어진다. 바닥에 엎어져있던 송아지는 이내 몸을 곧추세워 네 발로 일어서고, 어미 소가 다가가 긴 혀를 날름거리며 송아지 몸통에 칭칭 감겨있던 핏덩이를 핥아 벗겨낸다.
“탯줄을 제거해주는 거네.”
“신기하네요. 어미도 무척 아플 텐데.”
“저게 생명이야. 자신보다도 갓 태어난 새끼를 먼저 챙겨주는…….”
거친 숨을 고르며 연구원들을 다독여주는 교수에게 막 달려온 신태영 박사가 다가선다.
“선생님, 고생하셨습니다.”
“하, 신 박사, 미안하네. 이 녀석이 예정보다 일찍 진통을 시작하는 통에.”
“아닙니다. 선생님이야말로 잠 한숨 못 주무시고.”
“나야 뭐 애들이 초등학교는 졸업했으니까. 그 집 애들 아직 어린데 애들 엄마한테 늘 면목이 없네. 오밤중에 아빠를 뺏어가서.”
“아유, 괜찮습니다. 세상모르게 자는데요, 뭐.”
“나도 그런 줄 알았는데……. 아니더라구. 아빠 나가는 거 다 알더라구.”
“그런가요?”
머쓱해하는 신 박사를 향해 미안하다는 표정을 짓던 교수는,
“송아지 상태가 건강해 보이니 세포 샘플 채취만 부탁하네. 내일 내가 한 교수팀에 DNA 분석 의뢰할 테니.”
“예, 선생님.”
신 박사가 준비해간 실험 장비를 열어 송아지의 체세포를 떼어내 아이스박스에 집어넣는 사이, 축산농민이 교수 옆으로 다가와 말을 건넨다,
“교수님, 이번엔 어떤 소예유?”
“아, 이 소는 할구분할 복제소예요.”
교수는 전혀 귀찮아하는 기색 없이 농민의 거듭되는 질문에 답한다.
“할구분할 복제소? 그게 뭔데유?”
“한마디로 쌍둥이예요.”
“쌍둥이!”
“우리나라에서 제일 비싸게 받는 우량 한우의 수정란을 저희 실험실에서 두 조각내서 키우면 두 쌍둥이가 되고 네 조각내면 네쌍둥이가 되는 거죠. 그런 식으로 요 녀석하고 같은 소들이 여럿 나오는 겁니다. 그 가능성을 이번에 확인한 거죠.”
“허허.”
농민은 그제야 알겠다는 표정으로,
“야가 황금 소네, 농민 부자 맹글어 줄…….”
그렇게 송아지를 쓰다듬는 농민의 모습을 보며 교수의 입가에 흐뭇한 미소가 흐른다. 지난날의 기억들도 파노라마처럼 흐른다.
3.
24년 전 겨울, 1971년 대전고등학교 교무실에서는 뺨 때리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짜악”
“뭐야, 뭐야!”
모든 이들의 눈길이 한군데로 모였다. 3학년 7반 담임선생님 책상 앞. 방금 뺨을 맞은 까까머리 고3은 고개를 푹 숙이고 있고, 뺨을 때린 담임선생님은 화를 이기지 못한 채 소리를 질렀다.
“야 이눔아! 홀어머니에, 찢어지게 가난한 놈이, 서울대 의대만 가면 부잣집 규수들이 줄을 설 텐데, 뭔 놈의 수의과여 수의과가, 앙!”
샘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다른 샘들도 이해할 수 없다는 듯 수군거린다.
“별일도 다 있대, 남들은 못가서 안달인 서울대 의대 갈 성적 맞아놓고 수의과 가겠다는 화상이 어딨대?”
“저 놈아 별명이 확신범이래요.”
“확신범?”
“전교 300등 아래로 들어왔는데, 지 꿈은 서울대 수의과 가서 ‘소 박사’되는 거라고 1학년 때부터 죽어라 공부해서 전교권으로 올라왔대요.”
“독한 놈…….”
수군거림을 뒤로 한 채 담임선생님은 까까머리의 마음을 돌려놓기로 작정한 듯 계속 돌직구를 날렸다.
“니가 아직 세상을 몰라서 그러는디, 너 수의과가면 뭐 되는 줄 알어? 소 똥구녁에 침 한방 놓고 몇 푼 받아가는 쇠침장이 되는 겨, 쇠침장이…….”
그러나 까까머리는 꿈쩍도 안한다. 그러더니,
“선생님, 제가 엄니하고 약속한 게 있습니더.”
“뭔 약속을 해, 어린 놈의 시끼가.”
“지가 커서 나중에 소 박사 되면, 새끼 많이 낳는 소 연구해서 울 엄니처럼 남의 소 대신 키워주는 농민들도 부자 만들어드리겠다고.”
“…….”
소 박사가 꿈이라는 그 간절한 눈빛에 선생님은 아무 말도 못했다. 그 순간 까까머리의 눈에 엄마의 얼굴이 아른거렸다. 땡볕에 논에서 김을 매다가도 아들이 탄 버스 오는 소리에 거머리에 물려 다리에서 피가 철철 나는 줄도 모르고 활짝 웃으며 달려나오던 엄마의 검게 탄 얼굴, 그 속에 비친 미소가.
“우리 강아지 왔는겨. 공부하느라 힘들지.”
“아녀. 그나저나 엄니, 나 이번에 대학교 원서 쓸 땐데…….”
“엄니가 뭘 알어. 선상님 말씀 듣고 니가 원하는 대로 쓰는 거지.”
“엄니 그럼 나 수의과 쓸겨.”
“수의과?”
“이 담에 소 박사 되서 새끼 많이 낳는 부자 소 많이 만들어드리게.”
“아이고, 말만 들어도 엄마는 배부르네.”
그런 엄마 생각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힌 고3 까까머리의 가슴에는 ‘3학년 7반 강한우’라는 명찰이 달려있었고, 24년이 지난 지금 그의 실험복에는 ‘서울대학교 수의산과교실 교수 강한우’라는 글씨가 새겨져있다.
4.
“교수님?”
한우에게 대학원생이 넌지시 물었다.
“앞으로 생명공학이 어디까지 갈 것 같으세요?”
그러자 한우는 소 똥 묻은 장화를 닦으며 답한다.
“글쎄, 결국 인간을 향하지 않을까?”
“인간, 이요?”
“응, 영국에서 세계 최초의 시험관 아기가 태어날 때도 우리같이 소나 돼지와 씨름하던 생물학자들이 베이스를 다 닦은 거잖아.”
그 말에 다른 연구원들도 일제히 고개를 끄덕인다.
“앞으로의 시대는 우리 같은 개, 돼지, 소 연구자들이 난치병 치유에 일익을 담당하는 생명공학의 시대가 될 걸세.”
한우의 말에 모두의 눈빛이 빛난다. 어느새 새벽 세시가 넘어가고 있었다.
5.
7년 후인 2002년 9월 12일 밤, 미국 로스앤젤레스의 CNN 스튜디오에서는 최고 시청률을 기록하는 프로그램 ‘래리킹 라이브’가 시작되고 있었다. 사회자 래리킹이 말을 시작했다.
“오늘 밤의 주인공은 7년 전에 이런 말을 했습니다. 제가 50세 생일을 맞을 7년 뒤에 저는 벌떡 일어나 걷겠습니다. 그 후 7년이 지났고 며칠 뒤면 그의 50번째 생일입니다. 여러분, 영원한 슈퍼맨, 크리스토퍼 리브입니다.”
커다란 박수소리와 함께 대형 모니터 화면에 슈퍼맨이 모습을 드러냈다. 뉴욕의 자택에서 훨체어에 앉은 채 래리킹과 화상 인터뷰를 하는 슈퍼맨은 카메라를 보며 활짝 웃었다.
“크리스, 이틀 뒤면 생일이죠. 미리 축하드립니다.”
“고마워요, 래리. 고마워요.”
래리킹이 그동안 어떻게 지냈냐고 묻자, 슈퍼맨은 이렇게 답했다.
“직접 보여드릴까요?”
슈퍼맨은 래리킹에게 신호를 달라고 주문했다.
“좋아요. 자, 그럼 이제부터 내가 감독입니다.”
카메라는 슈퍼맨의 손을 비춘다.
“움직여.”
래리킹의 말에 슈퍼맨의 왼손 검지가 위로 움직인다.
“멈춰.”
소리에 맞춰 그의 손가락이 멈춘다. 오, 하는 탄성과 함께 청중들은 일제히 일어서서 기립박수를 보냈다.
“5년만의 일입니다.”
슈퍼맨은 그동안의 노력을 말해줬다. 재활기구 위에서 페달을 돌리려 안간힘을 다하던 그. 수영장 물속에서 그의 온몸을 부축하던 가족들. 물속에서 팔 다리를 움직이려 안간힘을 쓰는 그의 모습이 담긴 영상이 함께 흘러나왔다. 래리킹이 물었다.
“운동의 힘……·. 그럼 이제 줄기세포는 필요 없나요?”
그러자 슈퍼맨은 단호히 말한다.
“아니요, 아닙니다. 불행히도 부시 행정부는 줄기세포 연구를 규제하고 있지만, 최근 캘리포니아 주정부가 대단한 결단을 내렸죠. 모든 방식의 줄기세포 연구를 지원한다는.”
슈퍼맨은 웃고 있었지만 그의 눈빛에는 간절함이 묻어있었다. 그리고 그는 생소한 과학용어 한 가지를 입에 올렸다.
“특히 저는……, 치료 목적의 복제줄기세포에 주목하고 있습니다.”
“복제줄기세포?”
“예. 만들 수만 있다면 아마 3년 안에 치료에 적용할 수 있을 겁니다.”
래리킹을 비롯해 많은 사람들이 궁금해 했다. 복제줄기세포? 그게 뭐지?
(다음 회에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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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광준_ 별명 ‘노진구’. 도라에몽에게 늘 민폐만 끼쳐 만화사상 최악의 캐릭터로 손꼽힐 만큼 띨띨하고 존재감 없던 어린 시절을 보낸 뒤, 우연히 라디오 피디가 되어 드라마 ‘도깨비’의 지은탁 양과 동종업계에서 일하고 있음. FM 99.9MHz 경기방송 편성제작팀장. 언젠가 농촌에 살고픈 닉네임 ‘시골피디’.(pdnkj@naver.com)
Last modified: 2023-03-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