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ritten by 6:47 오후 131호(2023.01)

선구자 인터뷰
김상진 열사의 뜻이 일상에서의 민주주의로 되살아 나기를
독립 다큐멘터리 영화 <1975.김상진> 장영철 연출감독

임세진(선구자 편집위원)

장영철 연출감독

독립 다큐멘터리 영화 <1975.김상진>가 3년간의 제작과정을 거쳐 드디어 시사회로 관객에게 선을 보였다. 영화 시사회 일정이 정해진 12월 말, 인터뷰를 위해 장영철 연출감독(이하 장 감독)에게 연락을 시도했을 때 일본 출장으로 연락이 닿지 않았다. 며칠 후 귀국한 장 감독은 다음날 다시 베트남으로 출장을 떠난다고 하였다. 우여곡절 끝에 1월 9일, 인터뷰를 진행할 수 있었다. 그리고 14일 시사회를 마친 장 감독은 “저희는 늘 이런 시사를 할 때마다 느끼는 거는 숙제 검사 받은 느낌이예요. 보시는 분들이 어떻게 생각하셨을지가 늘 궁금한 거고…. 그래도 일단은 현재 상황에서 제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기 때문에 부족함이 있더라도 너그러이 어여삐 봐주십사 하는 그런 마음입니다.”라고 소감을 밝혔다. 3년간의 제작을 마친 장 감독의 소감을 인터뷰를 통해 들어봤다.


먼저 영화에 참여하게 된 계기를 물었다.
“제가 김포에 살고 있는데요. 김포에 예전부터 알고 지냈던 분의 소개로 연결이 되었습니다. 그분이 김상진기념사업회 회원이시더라고요. 김규태 센터장님이요.(농교육 80, 식량닷컴 푸드플랜연구소 부소장, 전(前)김포시학교급식지원센터에서 센터장). 김상진 열사 영화 제작 프로젝트가 있는데 함께 해보지 않겠냐라고 했을 때 처음 든 생각은 ‘김상진 열사가 누구일까?’라는 궁금증이 먼저 생겼어요. 저도 고등학교 때부터 나름 최루탄 냄새를 맡으면서 살아온 편이고 94학번으로 대학에서도 나름대로 열심히 산다고 살아왔었는데, 역사책에서도 못 봤고 현대사에서도 못 본, 이름이 너무 생소했던 분이라 좀 당황했죠. 김상진 열사 이야기를 듣고 이런 마음을 가진 분이 계시다는 것이 놀라웠고, 과연 어떤 분일까라는 궁금함도 좀 있었죠. 안병권 소장님과 처음 만나 이야기할 때 김상진 열사의 역할이나 그 영향에 비해서 너무 안 알려져 있어서 일단 1차적으로 좀 알리는 것이 또 필요하다라는 말씀을 하시더라고요. 그 부분이 많이 공감이 됐죠. ‘나도 몰랐는데…. 좀 많은 분이 알고 계시면 좋겠다’라는 생각이 들었으니까요.”

낯선 제작환경, 계속 드는 궁금증
“다른 다큐멘터리 만들 때 하고는 좀 느낌이 다르긴 했어요. 제작 과정부터 달랐죠. 방송 다큐멘터리는 방영 날짜가 정해져 있기 때문에 방향성과 구체적인 기획을 정해놓고 끼워 맞추듯이 작업을 하죠. 사실 방송국은 거의 영상을 찍어내는 공장이거든요. 정해진 일정 안에 어떤 식으로든 만들기 위해서 최적화되는 훈련을 많이 해온 사람들이 있는 곳이 방송국이죠. 그래서 좋은 말로 하면 효율적이고 나쁜 말로 하면 중간에 변수를 그렇게 많이 허락하지는 않아요. 변수가 너무 많이 생겨버리면 또다시 추가 촬영에 들어가야 되고, 시간이 늘어지고 비용이 발생되기 때문이죠. 하지만 이런 독립 프로젝트 같은 경우에는 그렇게 미리 다 갖춰서 할 필요가 전혀 없는 상황이기 때문에 보다 많은 이야기, 또 다양한 이야기들을 자유롭게 만들 수 있다는 장점이 있죠. 반면 데드라인이 안 정해져 있다 보니까 중간에 뭐 좋은 게 생기면 또 추가되고 방향이 달라지고 그런 부분에 대해서 어떤 부분은 새로운 것이 들어와서 새로운 이야기가 되기 때문에 더 좋기도 하지만 어떤 면에서는 이러다가도 무한정 밀리는 건 아닐까 그런 우려가 제작 과정에서 첫 번째 드는 생각이 있었고요.

또 하나는 촬영을 하면 할수록 왜 그동안 안 알려졌을까라는 궁금증이 또다시 들었어요. 촬영을 하다 보니 김상진기념사업회가 그렇게 작은 조직이 아니더라고요. 그리고 우리나라에서 서울대가 갖는 위상도 사실 무시 못하는 것도 있는데 학생 운동에서는 선구자적인, 그러니까 죽음으로 산 그런 분들 중에 선구자자적인 분인데 왜 이렇게 안 알려졌을까라는 궁금증도 계속 들었어요. 그래서 제작 과정에서의 약간 낯선 그런 경험과 내용에 대해서 계속 왜? 왜?라는 그 두 개가 계속 같이 공존했던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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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궁금증은 좀 풀렸냐는 질문에 장 감독은 그렇지는 않다며 웃음 짓는다. 다만 시대의 흐름이 그랬고, 영화를 계기로 앞으로 더 많이 알려지는 기회가 되길 바란다고 답한다.
“그냥 시대의 흐름이 그런 것 같고, 지금이라도 김상진이라는 이름이 한 명에게라도 더 알려진다면, 그래서 호기심을 갖게 된다면 의미를 갖게 되겠죠. 전태일 열사도 마찬가지였다고 생각해요. 한 명 한 명 이름을 알게 되면서부터 호기심을 갖기 시작하고 노동 운동에 대해서 관심을 갖기 시작하게 된 거니까요. 한 명 한 명 김상진 열사의 이름을 좀 더 많이 알아간다면, 지금은 수원의 그 장소에 작은 표지석도 있고 안내판도 있긴 하지만 더 많은 사람들이 더 많은 의미를 생각할 수 있게 되겠죠.”


내가 하는 프로젝트로 누군가에게 큰 의미가 전달되기를

코로나19 팬더믹으로 인해 길어진 제작 기간과 적은 비용 등 어려움이 많았을 거라는 짐작에 힘든 점은 없었는지 묻자 의미있는 작업은 돈과 별개로 진행한다고 답한다.
“돈 문제는 솔직히 별로 생각을 안 한 거라….(웃음) 연출비를 넣어주시기로 하셨거든요. 근데 그 금액이 기억이 안 나요.(웃음) 제가 돈을 받고 하는 일 같은 경우에는 대놓고 돈을 많이 달라고 해요. TV 다큐멘터리 같은 경우에는 100만 원이라도 더 달라고 하기 때문에 그런 작업은 돈을 기억하는데 이렇게 돈을 생각하지 않고 하는 프로젝트 같은 경우에는 그냥 뭔가 내가 마음에 남는 게 있으면 좋겠다라는, 그것만 있어도 저는 만족을 하거든요. 내가 하는 프로젝트로 누군가에게 큰 의미가 전달되는 것이 중요한 거죠. 그게 내가 의도했던 의미대로 전달이 되기도 하고, 보는 사람이 또 다르게 해석을 하는 의미가 되기도 하는데, 어떤 형태로든 의미있는 작업이 된다는 것에 만족하기 때문에 돈은 전혀 문제가 안됐죠.
다행히 제가 촬영을 할 수 있는 능력이 있고 촬영할 수 있는 장비가 있기 때문에 무리없이 진행된 부분도 있죠. 만약에 제가 촬영을 할 수 있는 장비라든지 그런 기술 능력이 없었다면 촬영할 때마다 비용을 지불하고 카메라 감독을 불러야 되는 거라 그러면 아마 서로한테 부담이 됐을 것 같은데 제가 할 수 있는 부분이 있어서…. 그리고 저 웬만한 카메라 감독보다 잘 찍거든요.(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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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양한 방송 경험들
“방송일을 한지 이제 22, 23년 정도 되는데요. 저는 고등학교 때부터 진로를 방송 피디로 정하고 신방과로 진학을 했어요. 고등학교 때 영화 ‘볼륨을 높여라’를 보고 우리가 하고 싶은 이야기들을 우리가 좀 할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었죠. 대학 입학 후 TV PD로 진로를 정하고 과 학생회장을 하면서 학생회에서 진행한 특강에 오신 EBS PD의 추천으로 프로덕션에 취직하게 됐죠. 그래서 EBS 외주부터 시작을 했어요. 기업 홍보 영상도 많이 했고 온미디어에서도 2~3년 있다가 imbc, SBS, WEG(CJ미디어), 온게임넷 등에서 일했어요. SBS는 프리랜서로 들어갔다가 3년 지나서는 정직원이 되면서 나름 꿈을 이뤄봤죠. 처음 서울에 올라왔을 때 메이저 방송사들이 모여 있는 때 여의도에서 일하는 것이 꿈이었는데, SBS에서 정직원으로 일하게 되었으니까요.(웃음) SBS를 그만둔 후 종편에서 스카우트 제의가 있었지만 거절했어요. 정직원이면 아무래도 사측의 이익을 대변할 뭔가를 해줘야 되는데 그러기 싫더라고요. 그래서 한 5~6년 정도는 외주 제작으로 종편 다큐멘터리만 계속했죠.”


“방송 일을 하면서 시사 교양 쪽에서는 뉴스부터 교양 정보 프로그램 등 다양하게 하다가 한 10년 넘으면 1,20분짜리 보다 1시간 짜리를 만들게 되고 연차가 쌓이면 다큐멘터리(이하 다큐)를 주로 만들게 되죠. 다큐가 상대적으로 제작기간도 제작비도 여유가 있죠. 방송사들마다 다큐를 많이 해요. 다큐가 협찬으로 수익이 많이 나거든요. SBS 같은 경우에도 대표적인 다큐가 두 개 있어요. SBS 스페셜하고 일요특선이죠. SBS 스페셜은 교양피디들이 만드는 반면 일요특선은 협찬이에요. 협찬프로를 통해 생기는 수익으로 내부 다큐를 제작하기도 하죠. 그런데 대부분 종편들은 다큐를 오로지 수익을 위해서 해요. 협찬이 없으면 안 하죠. 종편은 협찬비도 적고 제작비가 몇 천만 원 안 돼요. 그러다 보니 만들 수 있는 한계가 있죠. 그런 경험이 있기 때문에 이번에 프로젝트를 진행할 때 좀 낫지 않았나 싶어요. 만약에 제가 메이저 방송사 다큐를 계속했다면, 6개월 또는 1년에 한 편만 하는 그런 제작만 했다면 지금 이런 방식의 제작은 못했을 수도 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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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진영의 목소리를 세련되게 냈으면 하는 마음
“언론 매체라는 것은 크게 두 가지 역할을 한다고 봐요. 하나는 여론 형성 또 하나는 마케팅이거든요. 조중동 같은 경우에는 지들이 살아남기 위해서 기회주의적으로 해왔던 그런 것들이 스킬로 남아가지고 어떤 것들이 사람에게 먹히는 이야기인지, 기술을 아는 거잖아요. 그걸 어떻게 사용하는지에 대한 부분에 대해서는 도덕적 잣대를 적용할 수 있지만 그런 스킬 자체에 대해서는 배울 걸 배워야 된다는 생각을 하거든요.

SBS 뉴스도 한 7년 만들어 봤지만 언론이 해야 될 역할이 과연 무엇일까를 많이 생각했었죠. 언론도 결국은 돈이거든요. 언론사를 운영하고, 직원들, 기자들도 결국 직장인이다 보니 금전적으로 자유롭지 못한 거죠. 결국은 5,60대 이상의 구미에 맞는 이야기들만 계속하는데 문제는 5,60대 이상이라고 전부 다 이기적인 건 아니거든요. 그런 부분에 대해서 민주당도 그렇고 나름 진보적인 생각을 가진 분들이 목소리를 좀 세련되게 냈으면 좋겠는데 자꾸 도덕적인 관점만 갖고 이야기를 하다 보니 비판이 아니라 비난이 되는 경우도 많죠. 그런 부분에 대해서는 저는 김상진 열사의 뜻에 대해서 좀 많이 생각을 해줬으면 하는 생각이 좀 들긴 해요.”

“저는 웬만하면 선거 운동을 안 하는 편이었는데 지난 지방선거 때는 친구가 도와달라고 한 것도 있고, 마음이 답답하기도 하고 해서 한 후보의 사무장으로 선거참여를 하게 됐어요. 사무장이 그런 역할을 하는지 몰랐네, 나는.(웃음) 어쨌든 그 친구는 지금 시의원으로 활동하고 있는데요. 선거운동을 하면서 너무 힘들었던 게 저 빨간 당(국민의힘)은 어쨌든 선거 때 딱 뭉친 게 보여요. 뭐가 됐든 간에 선거 승리라는 목표를 딱 잡고 뭉치는 게 옆에서 봐도 보이는데 와…. 이놈의 파란 당(민주당)은 뭘 하자는 건지…. 내부에서 제일 많이 나왔던 게 ‘지금 뭐 하자는 거지?’라는 말이었어요. 국민의힘 같은 경우는 그냥 깔끔하게 ‘예산 얼마. 전문가이니 알아서 해주세요. 우리가 서포트해줄 부분만 알려주시고 나머지 이 부분은 다 해가지고 한번 중간에 기획 보고해 주시고 내용 결과 보고해 주세요.’ 이렇게 진행이 돼요. 근데 민주당은 일을 진행할 때 이건 이렇게 하면 안 된다, 예산 깎였다, 내용 추가해달라, 내용 다시 검수받아라 등등 진행이 안되죠. 일이 끝난 후에 예산 집행도 훨씬 늦어요. 그러다 보니 주위에서 다들 민주당과는 일 안 한다고 해요. 그런 걸 보면 참 안타깝죠.”

정치에 대한 민주화를 넘어 일상에서의 민주주의 회복하기
“75년 당시에 유신헌법과 긴급 조치는 상식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도덕적인 가치를 너무 많이 벗어난 거니까 그런 부분에 대해서 다시 사람들과 공감하고 같이 생활할 수 있고 같이 웃으면서 갈 수 있는 도덕적 가치를 목숨 걸고 말하셨던 분이 바로 김상진 열사라고 생각을 해요. 그 도덕적인 가치는 내가 뭔가 얻기 위해서 남의 것을 빼앗고 억누르지 말고 같이 살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하자는 것이 김상진 열사가 고민했던 가장 기본이라고 생각을 하거든요. 사람이 사람답게 같이 살아가야지 왜 너는 니 권력을 계속 갖기 위해서 너랑 반대의 의견을 가진 사람을 폭력을 써서 나쁘게만 하려고 하느냐, 그런 부분에 대해서 충분히 질책을 하셨던 그런 뜻, 그게 그 당시에 이야기했던 도덕적인 가치, 지향점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의미, 뜻이 있다는 것을 이해하고 그것을 각자의 생활에서 녹여낼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가정, 학교, 직장, 사회의 모든 조직에 그런 뜻, 도덕적인 가치, 의미가 전달되면 좋겠다는 생각입니다.”


“중앙대 김누리 교수가 말씀하셨던 것 중에서 참 많이 공감하는 것 중에 하나가 ‘가장 민주적이라고 이야기하는 사람의 생활을 보면 가장 비민주적인 모습이 많다’는 거죠. 주말 저녁에 시청광장에 모여서 촛불 집회를 하지만 막상 집으로 돌아가서는 가부장적인 모습이라든지 직장에 가서는 권위를 내세우며 아랫사람을 억누른다든지 하는 모습이 많다는 거죠. 솔직히 우리가 살아온 생활이나 관습이 하루아침에 바뀌기 힘들겠지만 일상에서의 민주주의를 회복할 수 있는 그러한 것들이 바로 열사가 남겼던 정신 중에서 핵심은 아닐까라는 생각을 해봐요. 유신헌법 철폐와 군부 독재 청산에 담긴 뜻은 단순히 정치에 대한 민주화뿐만 아니라 일상생활에서의 민주주의 실현을 같이 말씀하셨던 것이 아닐까 저는 그렇게 생각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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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리된 인터뷰이들을 보며 드는 아쉬움

기억에 남는 촬영을 물으니 오둘둘 선배들과의 관악 촬영을 꼽는다. 더불어 인터뷰에 응해주신 분들의 말솜씨에 깜짝 놀랐다고 이야기한다.

“글쎄요. 다 조금씩 조금씩 기억이 나는데 아무래도 오둘둘 선배님들이 관악에 모여서 함께 촬영을 했던 것이 의미가 있었고요. 인터뷰를 진행하면서 느낀 거는 ‘서울대가 다르긴 다르구나’(웃음)라는 생각을 했죠. 다들 말씀을 되게 조리 있게 잘 하세요. 제가 15년 정도 SBS뉴스를 만들면서부터 참 많은 사람들을 인터뷰했거든요. 연예 뉴스 하면서는 우리나라의 탑스타들도 다 인터뷰를 해봤고 경제 프로그램 하면서는 그 당시에 전 현직 장관 10명과 매일 한 명씩 한 시간씩 대담 토크도 해봤고 기업 총수들도 거의 다 인터뷰를 해봤는데 말을 잘하는 사람 있고 못하는 사람들이 있거든요.
그런데 전체적으로 봤을 때 이번에 인터뷰에 참가해 주신 분들은 그 어떤 인터뷰이들에 비해 손색이 없을 정도로 너무나 말을 조리게 잘하셨어요. 김상진열사 할복이 충격적인 사건이기 때문에 각인되어 있기는 하겠지만 그래도 45년 전의 이야기를 이렇게 조리 있게 말씀하시는 분들은 드물거든요. 사실은 굉장히 놀랐어요. 장관도 말 그렇게 못하는 사람 많아요. ‘저래가지고 부서회의는 주제 할 수 있겠나’라는 생각이 드는 경우도 많거든요.(웃음)

그래서 처음에 드는 생각은 ‘서울대가 좀 다르네’ 이런 생각이 먼저 들었고, 그다음엔 그게 꼭 각인이 되어 있기 때문에 45년이 지나도 조리 있게 말을 할 수 있는 것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좀 복합적인 생각이 들더라구요. 한편으로는 ‘그동안의 삶의 철학이나 생각들이 다 이렇게 정리가 된 삶을 살아오셨겠구나’라는 생각도 들었구요.

그래서 사전 기획이 좀 더 치밀했으면 어땠을까라는 아쉬움이 좀 들긴 했었죠. 초기에는 기록을 우선으로 하다 보니까 그 당시에 어땠는지에 대한 질문부터, 또 그 당시 상황 이야기부터 하기 시작했는데 사전 기획을 좀 더 꼼꼼하게 해서 좀 더 다양한 걸 여쭤봤으면 어땠을까라는 그런 아쉬움이 조금은 있었죠.”

가슴속에 남아있는 독립영화, 새로운 환경 속에 고민하는 <1975.김상진> 배급

시사 교양부터 뉴스, 게임 방송까지 다양한 방송을 해 온 정 감독에게 <1975.김상진> 작업 외에 그동안 했던 작업들 중에 제일 기억에 남는 것은 어떤 것이 있냐는 물음에 장 감독은 방송이 아닌 독립영화 제작 경험을 이야기한다. 그리고 그 끝은 <1975.김상진>으로 이어진다.

“아무래도 4~5년 전에 제 돈 들여서 만든 독립영화가 기억에 많이 남아있죠. 빚을 많이 졌거든요.(웃음) 2015년에 김포 마을배움공동체 ‘콩나물마을학교’에서 청소년들이 뮤지컬을 만들었어요. 그냥 커버(cover)만 한 것이 아니라 아이들이 창작을 했고 창작 과정에서 넘버(Number) 작사, 작곡도 같이 참여를 하게 만들었죠. 결과물도 좋았고 반응도 좋았어요. 이재정 경기도 교육감이 그 모델을 그대로 경기도로 확장시킨 게 꿈의 학교예요. 뮤지컬 ‘아재꽃집’이 결과적으로 꿈의 학교에서 했던 첫 번째 프로젝트가 됐죠. 내용이 워낙 좋아서 웹드라마로 만들면 어떨까 하다가 일이 커져서 독립영화로 제작하게 됐죠. 넘버(Number)도 추가하고 뮤지컬 배우들을 섭외해 제작을 진행했죠. 배우들도, 스태프들도 고생 많이 했어요. 해외 영화제에서 상도 여러 개 받았어요. 그런데 국내 배급사를 잡지 못해서 극장에 걸지 못했고 여러 가지 사정으로 IPTV 쪽에도 굳이 애써서 넣지 않았는데, 이번 <1975.김상진>을 촬영하면서 그때 생각도 솔직히 좀 많이 났죠. 좀 복합적인 생각들이 드는 게, 2018년도에 우리나라 영화의 배급 현실을 한번 겪어봤고, 또 바뀐 현실은 코로나19 팬더믹으로 사람들이 극장을 많이 안 가는 추세가 되다 보니까 IPTV 등으로 편하게 접근할 수 있는 방법을 통해 많이 볼 수 있는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다 등등 다양한 생각을 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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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시장에서 시작하게 된 재미있는 작업

앞으로의 계획을 묻자 당장 2월 초에 조금 멀리, 브라질로 날아가게 되었다며 새로운 작업을 시작하게 되었다고 이야기한다.
“e스포츠 쪽으로 복귀를 했어요. 예전에 온 미디어 있을 때도 온게임넷이라는 게임 전문 채널에서 일을 했었고 WEG(CJ 미디어)에서 e스포츠 관계된 방송을 5년 정도 했었거든요. 지금 e스포츠 시장은 예전에 제가 있을 때에 비해서 규모도 많이 커지고 분위도 많이 달라졌더라고요. 진짜 완전 스포츠 시장처럼 각 구단에서 하는 역할도 훨씬 커졌고 경기 관람도 유료관람이 일반화될 정도로 게임이, e스포츠 시장이 되었어요. 게임단, 게임 회사에서 선수들을 매니지먼트하고, 다양한 영상들을 만들고 있더라고요. 어떻게 보면 또 새로운 시장을 저도 본 것 같아요. 저는 대회 때는 같이 가서 한 개 대회로 한 시간짜리 다큐를 만드는 작업을 하게 됐어요. 선수 옆에서 같이 붙어서 스토리를 계속 같이 만들어 봐야죠. 재미있는 작업이 될 거 같아요. 일단 당장 2월 초에 조금 멀리 브라질로 날아가서 조금 있다가 오게 됐어요.(웃음)”

끝으로 영화를 보게 될 김상진기념사업회 회원들과 일반 관객들에게 하고 싶은 말을 전한다.

“이렇게 인연이 된 것도 저는 감사하게 생각을 하고요 하시는 일도 다 잘 되시고….(웃음) 김상진기념사업회 회원분들은 워낙 열심히 잘 살아오고 계시고 지금 잘하고 계시는 제 인생 선배님들이신데 제가 감히 말씀을 드린다는 게 송구스럽긴 한데요. 그냥 이 영화를 보시는 모든 분들이 한 번 정도는 더 김상진 열사가 ‘저 때 왜 그렇게 했을까, 어떤 마음이었을까’에 대해서 조금 마음의 문을 열어놓고 생각을 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예요. 유신철폐 군부독재 타도라는 구호에 국한되어 열사의 뜻을 좁게 생각하기보다는 좀 더 마음의 문을 열고, 일상에서의 민주주의를 같이 고민해 볼 수 있는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3년이 넘는 긴 시간동안 불평 없이, 중단 없이 다큐영화 <1975.김상진> 제작을 이어오고, 개인장비로 촬영을 진행하고, 편집까지 감독해 준 장영철 연출영감독에게 무한한 감사를 전하며 앞으로 의미 있는 작업들을 계속 이어갈 행보에 기대를 걸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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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세진_ 숭의여전 문창과에 입학, 문예창작보다 학보사 기사를 더 열심히 쓰고, 졸업 후 전국연합 기관지 ‘민’, 건강사회를 위한 치과의사회 신문 ‘건치신문’ 만드는 일을 하였다. 이후 성공회대 사회학과에서 공부하고 KOICA 봉사단을 다녀온 후 다양한 사람들의 인생을 인터뷰하고있다. (sejin3025@hanmail.net)

Last modified: 2023-02-09